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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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영릉충백(零陵忠伯) 劉超 | 유초 | |
시호 | 충(忠) |
작위 | 원향정후(原鄉亭侯) → 영릉백(零陵伯) |
성 | 유(劉) |
휘 | 초(超) |
자 | 세유(世瑜) |
생몰 | ? ~ 329년 1월 |
출신 | 낭야군(琅邪郡) 단양현(臨沂縣) |
부모 | 부친 - 유화(劉和) |
자녀 | 유눌(劉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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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劉超(? ~ 329)
동진의 인물로 자는 세유(世瑜). 서주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출신으로, 전한의 성양경왕 유장의 8세손이다.[1] 문집 2권 정도 저술하며 문인으로 활동한 기록도 보이나 모두 전란으로 소실되어 현존하지는 않는다.
2. 생애
젊을 적부터 포부가 있어 현의 하급 관리로 시작해서 낭야국 기실(記室) 속관까지 승진했다. 이때 낭야왕 사마예는 유초가 충성스럽고 근면한 인물이라 여기고, 그를 발탁해 항상 자신의 곁에서 시중들게 했다.영가 원년(307년) 9월, 낭야왕 사마예가 안동장군에 임명되고, 참모인 왕도의 권유에 따라 건업(建業)으로 가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유초도 사마예를 따라 건업으로 갔고, 안동부의 사인(舍人)에 임명되어 오로지 격문을 쓰는 일만 담당했다.
건흥 원년(313년) 5월, 장안에서 즉위한 민제 사마업이 낭야왕 사마예를 좌승상, 대도독, 독섬동제군사로 삼았다. 사마예는 조서를 받고 승상부를 세우고, 유초를 또 승상부의 사인으로 임명했다. 당시 양주(揚州)에서는 사마예에게 반항하는 세력이 많아 반란이 자주 일어났기에, 국가 기밀을 다루던 유초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여 다른 이들과 서신을 주고 받거나 손님을 들이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필체도 낭야왕 사마예의 것과 비슷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악용하거나 혼동을 일으킬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으니, 사마예는 더더욱 유초를 신뢰하고 친근하게 대했다. 그는 사마예의 좌우에서 힘써 보좌한 공을 인정받아 원향정후(原鄉亭侯)에 봉해져 식읍이 700호에 달했고, 행참군으로 옮겨졌다.
건무 원년(317년) 3월,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오르고 마침내 동진 정권을 세우자, 유초를 중서사인, 기도위, 봉조청으로 삼았다. 당시 대각(臺閣)이 막 세워진 건국 초라 여러 공적과 문서가 정리되지 않아 난잡하니, 항상 글 쓰는 업무를 맡았던 유초가 나서서 신중하고 정밀하게 이것들을 정리해나갔다. 유초는 매우 청렴결백하여 비단옷을 덧대어 입지 않았으며, 집에 비축해둔 재산이라고는 1 ~ 2섬의 쌀 뿐으로, 그 처신이 관리들의 모범이 되었다. 사마예는 매번 그런 유초에게 상을 하사하려 했지만 유초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평범하고 누추한 소신은 함부로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저 덕 없이 봉록을 받다가 화를 자초하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사마예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 뜻을 존중해주었다.중앙에서 나와 구용현령으로 옮겨진 유초는 부임하여 성의를 다해 백성을 품었다. 당시 현령들은 세금을 거둘 때, 각 마을에 관리를 파견해 강압적으로 재산을 조사하게 했는데, 유초는 각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재산을 조사하고, 그 문서를 함에 넣어 현부(縣府)로 돌려보내게 했다. 백성들은 유초의 신뢰에 보답하여 속임없이 재산을 보고했고, 덕분에 세금은 유초가 부임하기 이전보다 훨씬 많이 걷혔다. 얼마 뒤,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앙으로 가 중서통사랑이 되었으나, 이후 아버지가 사망하여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다.
영창 원년(322년) 3월,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갈 무렵,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난을 일으키자 동진 조정은 그를 서둘러 복직시키고 안동상장군에 임명했다. 비록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지는 않았으나 유초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복귀했다. 하지만 원제 사마예의 6군은 석두성에서 왕돈에게 대패해 흩어졌고, 유초만이 남은 병사들을 인솔해 황제 곁을 호위했다. 원제 사마예는 감동하여 유초를 다시 돌려보내고 아버지의 장례를 마저 치르도록 했다.
태녕 2년(324년) 7월, 왕돈이 다시 거병하고 형 왕함을 보내 수도 건강성을 공격했으나, 왕함이 명제 사마소에게 대패하고 왕돈도 이내 병사했다. 대장이 사망했음에도 그 심복이었던 전봉, 심충 등은 잔당을 이끌고 계속해서 동진 조정에 저항했다. 이에 유초는 의병을 일으켜 명제 사마소의 명령을 받을고, 선성내사 종아와 힘을 합쳐 심충과 전봉을 토벌했다. 왕돈의 잔당이 모두 평정된 후, 명제 사마소는 유초의 공을 인정해 그의 작위를 영릉백(零陵伯)으로 진봉시켰다.
유초에게는 적지 않은 식읍이 있었으나 재산에 관심이 없어 재물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여 처자식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모습을 본 명제 사마소는 친히 조서를 내려 그의 청렴함을 기리고, 물고기와 쌀을 하사했으나 유초가 전부 사양했다. 이후 유초는 의흥태수, 중서시랑을 역임했다.
함화 원년(325년) 8월, 명제 사마소가 재위 4년만에 요절하고 성제 사마연이 황위에 올랐으나, 사마연의 나이가 너무 어려 명목황후 유문군이 섭정했다. 유초는 사성교위로 옮겨졌지만 당시 휘하에 병사가 하나도 없었다. 이때 많은 의흥의 백성들이 자진하여 유초를 따르고자 그의 휘하로 입대하니, 유초는 이들로 부대를 편성하고 "군자영(君子營)"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어머니가 사망하여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다. 유초는 상복을 입고 몸이 상하도록 밤낮으로 통곡했으며, 매월 삭일과 망일마다 어머니의 무덤까지 걸어갔는데, 그의 정성은 행인들조차 감동시켰다.
함화 3년(327년) 12월, 역양내사 소준이 역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장수 한황을 보내 고숙(姑孰)을 점령했다. 명목황후의 오빠로 정권을 잡고있던 중서령 유량은 유초를 다시 불러 좌위장군으로 삼았다. 유량의 판단 미스로 소준의 군대가 소단양을 통해 건강 인근까지 진격하자, 조정의 대신들 대부분이 자신의 가족들을 동쪽으로 피신시켰다. 의흥군의 관리들도 유초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처자식을 영접하고자 했으나, 유초가 듣지 않고 자신의 처자식을 궁 안으로 이동시켰다.
함화 4년(328년) 2월, 관군이 소준에게 대패해 전멸하고 수도 건강성이 반란군에게 함락당했다. 사도 왕도는 유초를 우위장군으로 삼고 시중 종아, 저삽과 함께 성제 사마연의 곁을 지키게 했다. 그 해 5월에 도간 등이 소준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키니, 소준은 이를 진압하고자 석두성으로 이동하면서 성제 사마연도 강제로 끌고 갔다. 유초와 종아는 성제 사마연을 따라 걸어서 이동했는데, 하필 폭우가 쏟아져 도로가 함몰되어도 성제 사마연의 수레 곁에서 최선을 다해 시중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소준이 말을 내어주었지만 유초와 종아가 이를 거절했다. 소준은 불쾌히 여겼으나 감히 죽일 수는 없어, 심복 허방 등을 사마독(司馬督), 전중감(殿中監)으로 삼아 그 둘을 경계하게 했다.
석두성에 도착한 소준은 성제 사마연을 창고에 유폐시켰는데, 유초와 종아는 황제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당시 기근으로 쌀과 곡식이 귀했기에 소준은 유초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쌀을 하사했지만, 유초는 그것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유폐된 그 상황에서도 성제에게 《효경》과 《논어》를 강연했다.
함화 5년(329년) 정월, 소준이 전사하고 그 동생 소일이 뒤를 이었으나, 소일의 군재는 형 소준만 못해 그 세력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소준의 명령을 받고 건강성을 지키던 광술이 성을 들어 의병에게 투항하면서 반란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유초와 종아는 이 틈을 타고 건강현령 관패 등과 황제를 모시고 석두성을 빠져나갈 계획을 모의했는데, 이내 누설되어 소일의 장수 임양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임양이 유초와 종아를 체포하고 떠나려 하니, 성제 사마연은 임양에게 매달려 울면서 애원했다.
"나의 시중과 우위를 돌려다오!"
임양은 성제의 말을 무시하고 유초와 종아를 그대로 끌고 가서 처형했다.함화 5년(329년) 2월, 도간의 의병이 승리하여 석두성을 탈환하고, 소준에게 호응했던 서양왕 사마양, 팽성왕 사마웅 등의 일족을 붙잡아 멸족시켰다. 임양도 석두성을 빠져나가지 못해 의병에게 붙잡혔으나, 도간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임양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아 성제에게 사면을 요청했다. 그러자 성제 사마연이 답했다.
"임양은 나의 시중과 우위를 죽인 자이므로 용서할 수 없소."
결국 임양도 다른 소준의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주살되었다. 성제 사마연은 유초의 장례식날 친히 참석하여 비통해 했으며, 유초의 묘를 높고 잘 보이는 건강 인근 지대에 짓게 했다. 이로써 성제는 지나다닐 때마다 유초의 묘를 볼 수 있었다. 사후 위위(衛尉)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忠). 아들 유눌(劉訥)이 후사를 이었다.[1] 유초의 아버지이자 유장의 7세손인 낭야국 상군장군 유화가 자향후(慈鄉侯)에 봉해진 뒤로 유장의 후손들은 모두 임기현에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