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21:14:15

곽묵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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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서진 시절2.2. 이구 휘하2.3. 동진의 장군2.4. 반란 및 최후

1. 개요

郭默
(? ~ 330)

서진동진의 장수로 자는 현웅(玄雄). 전투에서 승리한 적은 많이 없으나 생전에 나름 용장으로 인정받았다.

2. 생애

2.1. 서진 시절

사주 하내군 회현 출신으로 젊을 적 지위가 비천했으나 용감하고 씩씩한 기개가 있어 하내태수 배정(裴整)이 그를 독장으로 삼았다.

310년 7월, 유연(劉淵)이 건국한 한나라의 초왕 유총, 시안왕 유요, 안북대장군 조국(趙國)이 회현을 포위하고 하내태수 배정을 공격했다. 진나라의 정로장군 송추(宋抽)가 구원하러 갔으나 진동대장군 석륵과 평북대장군 왕상(王桑)에게 요격당해 전사하였다. 하내군 사람들은 자포자기하여 배정을 잡아다 한나라에 항복했고, 유연은 배정을 상서좌승으로 삼았다. 곽묵은 남겨진 배정의 무리를 통솔해 스스로 회현의 오주(塢主)가 되어, 어선을 몰아 나그네들을 약탈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이에 난으로 인해 떠돌던 유민들이 귀순하러 오니, 곽묵은 이들 중 힘이 좋은 장사를 선발해 기르고 자신의 재물을 나눠 환심을 샀다.

곽묵의 처남 육가(陸嘉)가 하내군 관아에서 쌀 몇 석을 빼돌려 여동생에게 주었는데, 곽묵은 육가가 법을 위반했다며 죽이려 들었다. 육가는 공포에 질려 석륵에게 투항해버리니, 곽묵은 손수 아내 육씨를 죽여 자신에게는 사심이 없음을 주변에 밝혔다. 이후 병주자사 유곤에게 사신을 보내 알현하자, 유곤은 그를 하내태수로 임명했다.

313년, 한나라의 중산왕 유요가 석량오에서 하남윤 위준을 포위했다. 곽묵과 진나라의 연주자사 유연(劉演)은 위준을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지만 유요가 보낸 별동대에 의해 각개격파당했다. 구원병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위준은 석량오를 버리고 야반도주하다가 유요에게 잡혀 죽었다.

314년 6월, 한나라의 유요와 우장군 유침(劉沈)이 회현을 다시 습격했다. 유요가 3중으로 포위망을 펼쳐 곽묵을 아사시키려 하자, 이내 식량이 떨어진 곽묵은 처자식을 유요에게 인질로 보내 식량을 팔아달라 청했다. 유요로부터 곡식을 사간 후 다시 성문을 닫고 저항하니, 유요는 노하여 곽묵의 처자식을 황하에 수장시키고 성을 쳐부술 기세로 공격해왔다. 곽묵은 동생 곽지(郭芝)를 유곤에게 보내 구원을 청했으나, 유곤은 곽묵의 교활함을 미워하여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구원을 미뤘다.

곽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다급하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마침 곽지가 성에서 나와 말을 씻기고 있었는데, 이를 발견한 곽묵의 사신이 곽지를 억지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곽묵은 이번에도 동생 곽지를 석륵에게 인질로 보냈지만, 석륵은 이미 전과가 있는 곽묵을 믿어주지 않고 그 서신을 봉한 채 유요에게 보냈다. 인질 작전이 실패한 것을 눈치챈 곽묵은 사람을 보내 석륵이 보낸 서신을 탈취한 뒤, 성을 버리고 형양태수 이구(李矩)에게 의탁했다. 이구는 조카 곽송(郭誦)을 보내 곽묵을 영접하였고, 이후로 둘은 힘을 합쳐 석륵과 유요에게 저항하였다.

2.2. 이구 휘하

317년 12월, 낙양의 하남태수 조고(趙固)와 함께 하동군을 침범해 당시 한나라의 수도인 평양(平陽) 인근에 이르렀다. 평양 서쪽에 거주하던 백성 3만여 명이 진나라군 군영을 향해 도망치자 한나라의 장수 유훈(劉勳)이 기병으로 그 뒤를 쫓아 1만여 명을 학살했다. 조고와 곽묵은 살아남은 백성만 간신히 거두고 군을 물려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

318년 3월, 조고가 한나라의 태자 유찬과 장수 유아생(劉雅生)에게 패해 낙양성을 다시 빼앗기고 양성(陽城)으로 도망쳤다. 이구는 곽송과 곽묵을 보내 조고를 구원하게 하니, 곽송은 낙예(洛汭)에 주둔하여 상황을 살피다가 장수 경치(耿稚)로 하여금 몰래 황하를 건너서 한나라군 진영을 기습하게 했다. 한나라의 구구왕 유익광(劉益光)이 정찰병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유찬에게 대비하라 했으나 유찬은 믿지 않았다. 이윽고 황하를 다 건넌 경치가 10갈래로 한나라군을 야습하자 한군은 순식간에 붕괴하였고 죽은 이가 반이 넘었다. 이때 경치가 노획한 병장기와 군수품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찬은 양향(陽鄉)으로 달아났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경치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패잔병들을 수습해 반격을 개시했다. 유총도 태위 범융(范隆)에게 기병을 주어 유찬을 돕게 하니, 경치는 한군과 혈전을 벌여가며 20일을 버텼다. 곽묵이 경치를 도와주려 했으나 한군이 이미 황하 건너편을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어 강을 건너 상륙할 수가 없었다. 결국, 경치는 한군의 압도적인 물량을 버티지 못해 노획한 물자들을 모두 불태우고 호뢰(虎牢)로 도망쳤다. 황제로 즉위한 동진의 원제 사마예는 이구를 사주자사, 도독하남3군제군사로 삼고, 곽묵을 영천태수에 임명했다.

320년 2월, 낙양에 주둔하던 전조의 장수 윤안(尹安), 송시(宋始), 송서(宋恕), 조신(趙愼)이 후조에 항복했다가, 석생(石生)이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자 두려워 진나라의 이구에게 항복했다. 이에 이구는 곽묵을 보내 낙양에 입성하게 했다. 하지만 석생이 먼저 당도해 송시를 격파하니, 나머지 3명의 장수와 낙양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이구에게 귀순하였다. 낙양은 텅 비어버렸고 곽묵은 다시 형양으로 돌아갔다.

324년 정월, 후조의 사주자사 석생이 전조의 하남태수 윤평(尹平)을 전사시키고 허(許)와 영(穎) 땅의 백성 1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진나라의 양군장군 곽송은 방심해있는 석생을 양적(陽翟)에서 기습하여 격파했고, 석생은 강성(康城)으로 도망쳐 그곳을 굳게 지켰다. 후조의 급군내사 석총이 석생을 구원하려 출격하자, 이구와 곽묵이 석총을 영격하려다 되려 대패했다.

325년, 석총에게 패한 후 이구와 곽묵은 세력이 쇠약해져 연속으로 후조에게 털렸고, 마침내 식량까지 다 떨어지니 곽묵은 깊이 우려하여 참군 은교(殷嶠)에게 인수를 쥐어주고 말했다.
나는 이사군(李使君)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소. 그럼에도 나는 그분을 버리고 떠나려 하니, 차마 사죄의 말을 전할 면목이 없구려. 부디 그대는 내가 도망치고 사흘이 지난 후에 그 사실을 전해주길 바라오.
그리고는 이 말을 끝으로 도망쳐버렸다. 이구가 이 사실을 알자 크게 노해 곽송을 파견해 곽묵을 잡아오게 하였다. 곽송이 양성(襄城)에서 곽묵을 따라잡으니, 곽묵은 이번에도 처자식을 곽송에게 전부 떠넘겨주고 단기로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도주했다. 명제 사마소는 그를 맞이해 정로장군으로 삼았다. [1]

2.3. 동진의 장군

326년 6월, 서주자사 유하(劉遐)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정로장군 곽묵을 북중랑장, 감회북제군사로 삼아 남겨진 유하의 부곡을 통솔하게 했다. 유하의 매부 전방(田方)과 장수 사질(史迭), 이용(李龍) 등은 곽묵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어 그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차라리 유하의 어린 아들 유조(劉操)를 따르겠다며 모반을 일으켰다. 곽묵과 우위장군 조윤(趙胤)은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격하려 했으나, 때마침 반란군의 병장기가 모두 불 타 없어져 임회태수 유교(劉嶠) 선에서 간단히 진압당했다.

327년 10월, 조정에서 역양내사 소준이 외지에서 병권을 쥐고 있는 것을 우려해 중앙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중서령 유량은 만일에 대비해 곽묵을 후장군, 영둔기교위로 삼고 모든 장수와 병사들에게 난에 대비하라 일렀다. 과연 소준은 소집에 반발하여 이내 난을 일으켜 건강으로 진격했다.

328년 2월, 소준은 장수 한황 등을 앞세워 환이, 사마류(司馬流) 등을 무찌르고 건강 인근 복주산(覆舟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도독대항동제군사 변곤(卞壼)은 곽묵, 조윤 등 6군을 지휘해 서릉(西陵)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여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변곤이 건강으로 물러나 청계(靑溪)에서 목책을 쌓아 궁성을 방어했지만 소준이 풍향을 이용해 화계를 썼고, 불은 매우 심하게 번져 목책은 물론, 도성의 중요한 관청까지 불 타 없어졌다. 변곤은 등창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변진(卞眕), 변우(卞盱)와 사력을 다해 밀려오는 적을 막다가 전사했다. 단양윤 양만(羊曼), 황문시랑 주도(周導), 여강태수 도첨(陶瞻)도 황궁 운룡문(雲龍門)에서 필사적으로 반군을 막다가 모두 전사했다. 유량은 황궁 선양문(宣陽門)을 지켜보려 했으나 병사들이 흩어지니, 곽묵, 조윤 등과 함께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심양(尋陽)으로 달아났다.

동년 6월, 곽묵과 서주자사 치감이 경구(京口)를 점거해, 경구 남쪽에 대업(大業), 곡아(曲阿), 능정(庱亭) 3곳에 군루를 쌓아 소준의 군사를 분산시키고자 했다. 이때 곽묵은 대업루를 지켰는데, 얼마 뒤 소준의 장수 장건(張健)과 한황이 포위해 물줄기를 끊었다. 식수가 끊긴 곽묵은 똥물을 마시며 버티다가 이내 두려워 대업루에 병사만 남기고 자신은 도망쳤다. 대업은 경구의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요지이기에, 장수인 곽묵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치감과 도간은 아연실색하여 무리해서라도 석두성을 쳐 대업의 포위를 풀어주려 했다. 이에 유량, 도간, 온교, 조윤이 석두성 인근 백석(白石)에서 소준을 도발하자 소준은 군사를 보내 이들을 격파했다. 관군이 달아나는 모습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소준이 자만하여 기병 몇 기만 거느리고 추격하다가, 정말 운이 좋게도 백목피(白木陂)에서 말이 넘어지니, 그 모습을 본 도간의 부장 팽세(彭世)와 이천(李千)이 창을 던져서 소준의 말을 죽이고 낙마한 소준을 참수했다. 소준의 잔당은 동생 소일(蘇逸)을 옹립했지만 금방 유량의 관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2.4. 반란 및 최후

329년 12월, 소준의 난 이후 곽묵은 강주에 머물면서 변방의 장수 생활을 즐기고 있었는데, 강주자사, 평남장군 유윤이 중앙에 징소해 곽묵을 우장군으로 추천하였다. 중앙에서 이를 수락하니 곽묵은 건강에 가고 싶지 않아 유윤(劉胤)을 찾아가 말했다.
저는 오랑캐를 잘 막음에도 지금 그 재주가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장군은 금위병을 관할하는 직책이나, 국경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병력을 지급받을 수 없어 실질적으론 휘하에 장졸도 갖고 있지 않으니, 이는 저에 대한 은의나 신뢰가 아닙니다. 또, 제가 변방의 장수로서 전투에 임한다면 패하는 일이 적을 겁니다. 지금 같은 난세에는 적임의 재능을 가진 이가 적절한 관직에 올라야 합니다. 만약 군신이 스스로 관직을 택할 수 있다면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유윤이 답했다.
그대의 말이 전부 맞으나, 중앙에서 이미 승인한 이상 이 소인은 어찌할 방도가 없소.
곽묵은 하는 수 없이 수긍하고 자금을 요구했지만 유윤은 그것마저 거절하였다. 곽묵은 과거 유윤의 참좌 장만(張満)에게 무시당한 일도 있고 하여 유윤을 심히 원망하였다. 건강으로 출발하기 전, 곽묵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유윤이 찾아와 술과 돼지고기를 선물했다. 그러나 곽묵은 유윤의 면전에서 그것들을 냅다 물 속에 던져버렸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개순(蓋肫)이라는 자가 죽은 공위(孔煒)의 딸을 납치하여 처로 삼았는데, 이에 대한 민원을 받은 장만이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명했지만 개순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순은 곽묵을 찾아가 유윤과 그 일당을 제거할 것을 부추겼다. 결국 개순의 꾀임에 넘어간 곽묵은 다음 날 아침, 유윤의 집문이 열리자마자 부하들을 대동하고 쳐들어갔다. 유윤의 하인들이 막으려 했으나 곽묵은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어명을 받고 어떤 이를 죽이러 왔다! 움직이는 자는 삼족을 멸하리라!
그리고는 침실로 들어가서 아직 첩을 안고 잠에 취한 유윤을 침대에서 끌어내 목을 베었다. 이후 그의 수족인 장만, 순개(荀楷)도 잡아죽인 뒤, 유윤의 목을 수도로 보내고 조서를 위조해 내외에 보였다. 곽묵은 유윤의 딸과 처를 취했으며 금은보화를 배에 싣고, '건강으로 간다' 거짓으로 고하고는 자신의 옛 관청에 머물렀다. 그리고 왕건기(王愆期)와 환선(桓宣)을 초빙했으나 왕건기는 여산(廬山)으로 도망갔고 환선은 그의 연락을 무시한 채 무창에 그대로 머물렀다.

330년 정월, 유윤의 목이 건강에 도착했다. 사도 왕도는 곽묵이 어디로 튈 지 모른다 여겨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또, 유윤의 목을 효시하고 곽묵을 서중랑장, 강주자사에 임명했다. 무창태수 등악, 형주자사 도간에게 일의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도간은 경위를 알고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유윤의 모반은 틀림없이 거짓이구나! " 외쳤다.
도간은 당일 군사를 이끌고 곽묵을 정벌하러 떠나면서 그의 죄상을 중앙에 상소하였다. 애초에 왕도 또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곽묵을 천천히 도모하려던 것인데, 도간이 먼저 움직여버리자 하는 수 없이 유량으로 하여금 유윤의 목을 회수하게 하고 도간을 지원했다. 곽묵은 심양에서 남진하여 예장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도간이 먼저 성 아래까지 도착하는 바람에 심양에 머물러 굳게 지켰다. 예주자사 유량이 군사를 끌어모아 도간을 지원하면서 심양은 관군에 의해 여러 곂으로 포위되었다.

도간은 곽묵의 용맹을 아껴 구면인 곽송을 보내 곽문에게 투항을 권유하게 하니, 곽문은 투항을 바로 승낙했다. 그러나 곽문의 장수 장축(張丑)과 송후(宋侯)는 이렇게 되면 곽문은 살아도 자신들은 반란을 도운 혐의를 용서받을 수 없다 여겨 곽문에게 항복은 불가하다 설득했다. 결국, 곽문은 망설이다가 약속한 시간에 성에서 나오지 못했고 도간은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만을 노렸던 송후와 장축은 곽문을 포박해 도간에게 투항하였다. 도간은 끌려온 곽묵과 그 패거리 40여 명을 군문 앞에서 즉각 참수하고 그 수급을 건강에 보냈다.


[1] 이구는 곽묵에게 버려진 처자식에게 죄가 없다 하여 종전처럼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다만, 이구도 제장들의 배신과 후조의 공세로 인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신을 끝까지 믿고 따르는 백여 명을 인솔해 동진으로 향하던 중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