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11:08:09

범왕(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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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무흥목후(武興穆侯)
范汪 | 범왕
시호 (穆)
작위 도향후(都鄉侯) → 도정후(都亭侯) → 무흥현후(武興縣侯)
(范)
(汪)
현평(玄平)
생몰 309년 ~ 373년
출신 남양군(南陽郡) 순양현(順陽縣)
부모 부친 - 범치(范稚)
모친 - 유씨(庾氏)
자녀 범강(范康), 범녕(范寧)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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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서진 시기 옹주자사를 지낸 범귀의 손자. 《후한서》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범엽이 바로 그의 증손자이다.

2. 생애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 범치(范稚)가 요절하니,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가난하고도 고독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범왕이 6세에 이르렀을 때, 범왕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주해 외가인 신야 유씨(庾氏) 가문에 의탁했다. 그때 형주자사 왕징(王澄)이 우연히 범왕을 보고는,
"범씨 가문을 일으킬 자는 필시 이 아이일 것이오."
라 평했다. 그리고 13세에 이르렀을 무렵, 그의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범왕은 어린 나이임에도 예를 다해 상을 치르니, 주변 이웃들이 애틋하게 생각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범왕은 직접 장작을 패면서 가난한 외가의 살림을 도왔다. 그는 학문을 좋아해 배를 곯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을 마친 뒤 남는 시간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이내 말솜씨가 늘고 명리(名理)를 깨닫게 되었다.

함화 4년(328년), 어느덧 약관의 나이에 이르게 된 범왕은 상경해 수도 건강(建康)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역양내사 소준의 반란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니, 범왕은 다시 서쪽으로 도주했다. 당시 유량과 온교는 소준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심양(尋陽)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반란군에 의해 교통이 끊겨 정보를 제대로 수집할 수 없었다. 유량이 곤란해 하며 섣불리 진군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방금 막 건강에서 도망쳐 온 범왕이 찾아와 소준이 포학하고 횡포하여 멸망의 징조가 있다 보고하자, 비로소 유량과 온교는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량은 범왕을 참호군사로 삼고 종군하게 했다.

함화 5년(329년) 2월, 소준이 평정된 후, 공을 인정받아 도향후(都鄉侯)에 봉해졌다. 평서장군 유량은 어린 성제 사마연을 놔두고 도주한 것이 부끄러워 외지로 부임하길 청하니, 조정에서 그를 예주자사, 선성내사로 삼아 무호(蕪湖)에 주둔하게 했다. 유량은 무호로 떠나면서 범왕을 자신의 참군으로 삼고 따라오게 했다.

함화 6년(330년) 5월, 강주(江州)에서 일어난 우장군 곽묵의 반란 진압 작전에 공을 세워 도정후(都亭侯)로 전봉되었다. 이후 사공 치감에게 징소되어 그의 휘하에서 속관으로 일하다가 완릉(宛陵)의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함화 9년(334년) 6월, 유량이 정서장군, 강예형3주자사에 임명되자, 유량은 다시 범왕을 불러 자신의 별가(別駕)에 삼았다. 범왕은 도합 10여 년 동안 유량을 보좌하면서 항상 그를 존중했고, 유량도 그를 후히 대접했다. 이후 옮겨져 응양장군, 안원호군, 무릉내사를 역임하던 중,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건강으로 돌아와 중서시랑을 지냈다.

건원 원년(343년) 7월,후조의 여남태수 대개(戴開)가 수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진에 항복해왔다. 유량의 뒤를 이어 형주자사로 부임한 유익은 본래 공명심이 강했기에, 이 참에 표문을 올려 북벌하자 건의하고, 군사를 일으켜 안륙(安陸)에 주둔했다. 강제 사마악은 사자를 보내 중지를 명했으나, 유익은 황제의 뜻을 무시하고 이번에는 양양(襄陽)으로 주둔지를 옮기겠다 청했다. 범왕은 조정에 상소해, 유익의 북벌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4가지 이유를 들어 북벌을 반드시 막을 것을 주청했다. 그럼에도 유익은 북벌을 고집했고, 당시 대권을 잡고 있던 유익의 형 거기장군 유빙까지 동생에게 찬동하니, 조정에서 유씨 형제의 북벌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유씨 형제가 출정하러 간 동안 하충이 양주자사(揚州)에 임명되어 보정을 맡았고, 범왕은 그의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

영화 원년(345년) 7월, 과연 범왕의 예상대로 유익의 북벌은 실패로 끝났고, 유빙, 유익 형제 또한 차례로 병사하면서 대권은 하충에게로 넘어갔다. 하충은 유익의 아들 대신 안서장군 환온을 형주자사로 삼고, 범왕을 그의 장사로 배속시켰다.

영화 2년(346년) 11월, 환온이 촉 땅을 평정하러 출정하고, 범왕을 형주 치소에 남겨 업무를 대행하게 했다. 이듬해, 환온이 촉의 성한 정권을 멸망시키자, 범왕은 형주를 지킨 공을 인정받아 무흥현후(武興縣侯)로 진봉되었다. 환온은 범왕을 계속 자신의 수하로 붙잡아두고 싶어해, 그에게 강주자사 직책을 겸하게 해줄 테니 장사로 있어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범왕은 환온의 간곡한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입조해 동양태수에 부임하길 자청하니, 환온이 그를 심히 미워하였다.

동양군(東陽)에 부임한 범왕은 거대한 학교를 세워 백성을 교화시키고, 널리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펼쳐 지역을 잘 다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도성에 귀환하여 중령군, 본주대중정에 임명되었다. 당시 보정을 맡고 있던 녹상서육조사 회계왕 사마욱은 범왕과 서로 교류하며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승평 5년(361년) 2월, 서연2주자사 치담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범왕을 도독서연청기4주양주지진릉제군사(都督徐兗青冀四州揚州之晉陵諸軍事), 안북장군, 서연2주자사, 가절로 삼아 치담을 대신케 하였다.

승평 5년(361년) 10월, 마침내 북벌을 결심한 정서대장군 환온은 범왕에게 명해 군대를 거느리고 예주 양국(梁國)으로 나아가게 했다. 하지만 범왕이 기일을 어기게 되자, 환온은 이를 빌미로 범왕의 면직을 주청했다. 조정은 환온을 꺼렸으나 그의 권세가 두려워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뜻 있는 자들은 그저 속으로 한탄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관직에서 쫓겨난 범왕은 오군(吳)에 자리를 잡고, 태연하게 학문을 강의하며 한가로이 살았다.

훗날 찬탈을 준비하면서 널리 인재를 모으던 환온은 일전에 자신이 면직시켰던 범왕이 생각나 그를 고숙(姑孰)으로 불렀다. 범왕이 뜻밖에도 환온의 요청에 응하니, 환온은 크게 기대했고 그의 부하인 원굉 또한,
"범공이 오면 그를 태상으로 삼는 것이 어떻습니까?"
라며 설레발을 쳤다. 이윽고 범왕이 고숙에 이르자, 환온은 얼른 자리를 마련하고 멀리서 온 것에 대한 감사부터 표한 뒤, 다시 그를 등용하고자 하는 속마음을 내비쳤다. 이에 범왕이 말했다.
"저는 그저 죽은 아이를 이곳에 묻어주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범왕의 답변에 크게 실망한 환온은 더이상 그를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이후 범왕은 다시 오군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고, 65세가 되던 해에 집에서 사망했다. 조정에서 그를 산기상시로 추증해주었다. 시호는 '목(穆)'. 장남 범강(范康)이 작위를 이었으나 얼마 못가 요절하고, 범강의 아들 범홍지가 습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