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8 07:34:11

범녕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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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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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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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800080><colcolor=#fff> 양수향후(陽遂鄕侯)
范寧 | 범녕
시호 불명
작위 양수향후(陽遂鄉侯)
(范)
(寧)
무자(武子)
생몰 불명
출신 남양군(南陽郡) 순양현(順陽縣)
부친 범왕(范汪)
자녀 범태(范泰)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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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서연2주자사를 지냈던 범왕의 아들. 《후한서》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범엽의 할아버지다.

2. 생애

어릴 적부터 학문을 충실히 수양해 여러 책을 두루 섭렵했다. 당시 보정을 맡고 있던 녹상서육조사 회계왕 사마욱은 범왕과 친밀한 사이였기에 그 아들인 범녕을 징소하고자 했으나, 범왕을 미워하던 권신 환온이 완곡하게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환온이 범씨 집안을 미워하는 것이 이와 같아, 범녕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환온이 사망하기 전까지 아무도 임관하지 못했다. 입신양명의 뜻이 꺾인 범녕은 들뜨고 허황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시를 짓거나, 당시 동진에서 유행하던 청담사상을 비판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영강 원년(373년) 7월, 대사마 환온이 마침내 사망하자, 범녕은 30대 중반이라는 매우 늦은 나이에 임관해 여항(餘杭)의 현령으로 부임했다. 그는 현에 학교를 세워 생도들을 양성하고, 스스로도 솔선수범하여 몸을 깨끗이 하며 예를 수양하니,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렇게 현을 다스린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지역은 크게 교화되었고 풍속은 깔끔해졌다. 범녕은 6년 간 여항현령으로 재직하다가 임회태수로 승진했고, 양수향후(陽遂鄉侯)에 봉해졌다.

얼마 뒤, 도성 건강(建康)으로 다시 돌아와 중서시랑에 임명되었다. 범녕은 중앙에 들어가서도 황제를 받들어 나라의 이익이 되는 일을 권하고, 해가 되는 일은 멀리 하도록 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효무제 사마요는 그런 범녕을 가까이 두고 신임했으며, 범녕도 황제의 총애에 힘입어 조정 내 간사한 무리에 대한 지적을 꺼리낌 없이 하였다. 범녕은 자신의 생질인 왕국보가 효무제의 동생인 회계왕 사마도자에게 빌붙어 아첨하는 것을 보자, 효무제를 알현해 왕국보를 조정에서 쫓아낼 것을 권했다. 이를 알게 된 왕국보가 사마도자와 함께 범녕을 헐뜯고 모함하자, 범녕은 효무제에게 상주해 예장태수에 부임하길 자청했다. 효무제 물었다.
"예장(豫章)은 태수를 지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그대는 무엇이 그리 급해서 사지에 몸을 던지려 하는가?"
범녕은 효무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재차 예장에 부임하길 청했다. 효무제는 여러 번 범녕의 뜻을 꺾으려 했으나 끝내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그의 바람대로 예장태수에 임명해주었다. 범녕은 출발하기 직전에 상소해,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고 토단(土斷)을 시행하여 제대로 호구조사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니, 효무제가 그대로 시행하였다.

태원 14년(389년) 11월, 예장군에 부임한 범녕은 교주(交州)로 사람을 파견해 단단한 돌을 채굴해 오게 한 뒤, 그것으로 학교를 크게 짓고, 군의 4성(四姓)의 자제들을 모아 오경(五經)을 가르쳤다. 또, 낡은 제도를 뜯어고쳐 백성들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에 더이상 얽메이지 않게 하고, 15명의 의조(議曹)를 보내 각 성의 풍속과 정치를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강주자사 왕응지(王凝之)는 범녕이 권력을 남용한다며 탄핵했다. 조정에서도 조서를 내려 범녕을 추궁하고 장차 처벌하려 하자, 범녕의 아들인 천문태수 범태가 관직을 버리고 조정에 아버지의 무죄를 하소연했다. 효무제 또한 범녕이 지역 교육 발전에 공헌한 일을 고려해 판결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사면령을 내리고 면직시키는 데에 그쳤다.

관직에서 쫓겨난 범녕은 단양(丹陽)으로 이주해, 경서를 연구하며 평화로이 남은 생을 보냈다. 이때 춘추삼전 중 하나인 《춘추곡량전(春秋榖梁傳)》 해석에 수 년간 매달리면서 주석을 달아, 최초로 곡량전의 집해(集解)를 편찬하는 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63세가 되던 해에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1] 아들 범태가 그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1] 대략 400년 ~ 402년 사이로 추정되나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