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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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辛謐(? ~ 350)
오호십육국시대의 인물. 자는 숙중(叔重). 옹주(雍州) 농서군(隴西郡) 적도현(狄道縣) 출신. 서진의 유주자사 신이(辛怡)의 아들로, 나름 지체높은 집안 출신이었다.
2. 생애
신밀은 어릴 때부터 고상한 마음과 기개가 있었고, 널리 배워 아는 것이 많았으며, 서예를 좋아하여 당대 유행하던 서체인 초서체와 예서체로 문장 짓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또, 성품이 평온하고 잠잠하여 남들과 함부로 교제하지 않았다. 서진 조정에서 그를 태자사인으로 불렀고, 서진의 여러 제후왕들도 누차 그를 문학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신밀은 요청을 전부 거절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영가 말년에 마침내 조정의 부름에 응해 산기상시를 겸하고, 관중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이후 장안이 함락되자 신밀 또한 유총에게 붙잡혔고, 유총으로부터 태중대부 관직을 제안받았지만 굳게 사양하였다. 유총 사후 한나라가 전조와 후조로 갈라지자, 이번엔 후조의 석륵과 석호도 신밀을 등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밀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영예와 이득을 경시하며 은거를 선택하였다.
영흥 원년(350년) 정월, 후조의 대장군 염민이 국호를 바꾸고 황제에 올랐다. 염민이 예를 갖추어 신밀을 태상에 삼으려 하니, 신밀은 서신으로 요임금과 백이의 고사를 인용하여 함부로 칭제한 염민의 행동에 대해 경고하고 임관을 거절하였다. 이후 신밀은 단식을 하였고, 얼마 안 가 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