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3:03:32

유의(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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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남평군공(南平郡公)
劉毅 | 유의
시호 없음
작위 남평군공(南平郡公)
(劉)
(毅)
희락(希樂)
생몰 ? ~ 412년 11월
출신 팽성군(彭城郡) 패현(沛縣)
부모 불명
자녀 유숙민(劉肅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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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희락(希樂). 서주 팽성군(彭城郡) 패현(沛縣) 출신. 형으로는 유매가 있다.

2. 생애

어려서부터 웅대한 포부가 있어 가문의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서주종사로 임관하였다가, 환홍의 눈에 들어 중병참군속(中兵參軍屬)을 지냈다.

원흥 2년(403년) 12월, 환현이 안제 사마덕종으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초나라(楚)의 황제로 즉위했다. 유의는 경구(京口)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똑같이 경구에 거주하던 하무기와 자연스럽게 만나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환현 토벌을 위해 사람을 모으고 있던 하무기가 넌지시 유의에게 물었다.
"환씨 가문이 강성한데, 도모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이에 유의가 답했다.
"천하는 그 강약(彊弱)을 스스로 정하기 마련이라오. 천하가 근심을 바로잡기 위해 주인을 새로 구하려 한다면 제아무리 강성하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약소해질 수 있는 법이오."
하무기 말했다.
"천하의 초택(草澤)에 영웅이 없는 것은 아니라네."
그러자 유의가 말했다.
"내가 본 바로는 오직 유하비(劉下邳) 뿐이었소."
하무기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이후 하무기가 유유에게 돌아가 유의와 나누었던 대화를 전하니, 유유는 유의도 환현 토벌에 동참시키고 계획에서 환홍 살해와 광릉(廣陵) 점거라는 핵심 역할을 맡겼다. 그리하여 유의는 유유, 하무기, 위영지 등 12명의 인물들과 더불어 기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흥 3년(404년) 2월, 주부 맹창(孟昶)이 새벽에 청주자사 환홍을 깨워 사냥에 나갈 것을 권했다. 환홍은 먼저 수행원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사냥 준비를 하도록 지시한 뒤, 자신도 나갈 준비를 마치고 죽을 먹고 있었는데, 그때 맹창이 성문을 열어 미리 밖에서 수십 명의 병사들과 대기하던 유의, 유도규를 성 안으로 들였다. 유의와 유도규는 곧장 쳐들어가 한가로이 죽을 먹고 있던 환홍을 즉시 참수하고 광릉을 장악했다. 하무기와 유유도 경구 장악에 성공했지만, 건강성 장악을 맡은 유의의 형 유매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환현에게 전부 자백해버렸다. 결국 환현에 의해 유매를 비롯한 신호(辛扈), 왕원덕(王元德), 동후지(童厚之) 등이 주살당하면서 건강성 장악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유유는 유의 등과 합류하고 곧바로 건강을 향해 진격했다.

원흥 3년(404년) 3월, 유유, 유의 등의 의군이 죽리(竹里)에 이르렀을 때, 환현은 장수 오보지(吳甫之), 황보부(皇甫敷)를 보내 의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유유의 맹활약으로 오보지는 강승(江乘)에서 패해 참수당하고, 황보부도 나락교(羅落橋)에서 격파당해 목이 베였다. 의군이 승승장구하며 복주산(覆舟山) 동쪽에 주둔하자, 환현은 환겸, 변범지, 하담지 등을 보내 20,000 군사로 맞섰다. 유유가 유의와 부대를 여러 개로 나누어 일제히 환겸의 군영을 습격했고, 때마침 부는 북동풍을 이용해 환겸의 진영에 불까지 놓으니, 화염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으면서 환겸의 초군은 혼란에 빠져 일시에 무너졌다. 환겸의 패전 소식을 접한 환현은 즉시 건강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덕분에 유유 등은 별다른 저항 없이 건강성에 입성해 동부(東府)를 장악했다. 수도를 성공적으로 장악한 유유는 유의를 관군장군, 청주자사로 삼고, 낭야내사 하무기, 의창태수 유도규와 함께 환현의 뒤를 쫓게 했다.

원흥 3년(404년) 4월, 강릉으로 도망쳤던 환현이 다시 어느정도 세력을 수습하고 20,000 군사를 일으켜 반격을 시도했다. 유의, 하무기, 유도규, 맹회옥 등도 환현을 막기 위해 심양(尋陽)에서 서북쪽으로 장강을 타고 올라가 쟁영주(崢嶸洲)에서 환현의 군대와 조우했다. 유의는 환현보다 병력이 작은 것에 겁을 먹고 후퇴하려 했으나, 유도규가 완연히 반대하며 부대를 이끌고 환현군을 향해 돌진하니, 유의 등도 하는 수 없이 유도규의 뒤를 따랐다. 유의는 마침 바람이 부는 것을 이용해 환현군의 함선에 불을 붙여 전부 태워버리고, 정예병을 앞세워 공격하자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환현군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환현은 밤까지 맞서 싸우다가 치중이 모두 불에 탄 것을 보고 혼자서 미리 준비해둔 빠른 배로 도망쳤고, 환현의 장수 곽전(郭銓), 유아(劉雅) 등은 싸울 의지를 잃어 유의에게 바로 항복했다. 환현의 잔당 유통(劉統)과 풍치(馮稚) 등이 400명의 무리를 모아 심양성을 습격해 함락시켰으나, 유의는 건위장군 유회숙을 보내 금새 토벌했다.

원흥 3년(404년) 5월, 힘을 완전히 잃고 촉으로 도망치던 환현이 모거의 조카 모우지 등에게 살해당했다. 모우지로부터 환현의 수급을 넘겨받은 유의는 그것을 다시 유유에게 보냈고, 유유는 건강성 대항(大桁)에 효수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했다. 형주별가 왕강산(王康産)과 남양태수 왕등지(王騰之)는 환현이 강릉성을 떠난 후, 성내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안제 사마덕종을 받들어 보위하는 동시에 유유에게 투항했다. 유의, 유도규 등은 마침내 환현의 세력이 멸절한 것으로 알고, 급히 강릉성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느긋하게 진군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강릉 변두리에 숨어있던 환겸, 환진이 잔당을 모아 강릉성을 급습해, 왕등지, 왕강산을 죽이고 강릉성을 점거해버렸다.

강릉성을 차지한 환진이 주색잡기에 몰두해있을 무렵, 유의의 군대는 파릉(巴陵)에 도착해 환현의 옛 장수 왕치휘(王致徽)를 주살했다. 하무기, 유도규 또한 마두(馬頭)에서 환겸을 격파하고, 나아가 다시 용천(龍泉)에서 환울(桓蔚)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기세가 한껏 오른 하무기는 유도규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릉으로의 진격을 재촉해 영계(靈溪)에서 환진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환진에게 대패하면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유의는 하는 수 없이 전군 퇴각 명령을 내리고 군을 거두어 심양(尋陽)으로 후퇴했다. 유유가 유의에게 늦은 진격으로 강릉성을 잃은 책임을 물어 청주자사에서 면직시키고 이전의 관직으로 되돌리니, 유의도 하무기에게 상관인 자신의 지시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한 점을 질책하며, 그를 낭야내사에서 면직시켰다. 이 일로 하무기는 유의가 자신만 책망한다며 불만을 품었다.

원흥 3년(404년) 12월, 유의는 하무기, 유도규와 함께 다시 심양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올라가 하구(夏口)에 이르렀다. 환진은 진동장군 풍해(馮該)를 파견해 장강 동쪽에 위치한 대안(大岸)을 지키게 하고, 양무장군 맹산도(孟山圖)를 파견해 하구 남쪽에 위치한 노성(魯城)에 주둔하게 했다. 또, 보국장군 환산객(桓山客)이 하구 서남쪽에 위치한 언월루(偃月壘)를 지키고 있으니, 이들 무리는 도합 10,000명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했다. 유의는 군대를 나누어 유회숙, 삭막(索邈)과 노성의 맹산도를 공격하고, 유도규는 언월루의 환산객을 치게 했다. 그리고 하무기와 단지에게 명해 풍해의 수군이 이들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장강 중류를 틀어막게 했다.

유의는 몸소 갑옷을 입고 싸워 반나절만에 노성을 함락시키고 맹산도를 사로잡았으며, 유도규 또한 비슷한 시간에 언월루를 무너뜨리고 환산객을 사로잡았다. 풍해는 하무기에게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두 보루가 무너졌음을 듣고 석성(石城)으로 도망쳤다. 유의의 군대는 진군해 파릉에서 나머지 잔당을 평정하고, 군령을 엄정히 하여 민가를 함부로 약탈하지 않으니,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안심하며 기뻐했다. 유유는 유의의 공을 인정해, 다시 사지절, 연주자사로 삼고 장군직은 전과 같이 하였다.

의희 원년(405년) 정월, 남양태수 노종지가 의병을 일으켜 양양(襄陽)을 습격하고, 환진이 임명한 옹주자사 환울을 격파해 강릉으로 쫓아냈다. 유의의 군대가 마두에 이르자, 환진은 안제 사마덕종을 끼고 강릉에서 나와 강진(江津)에 주둔하고, 유의에게 서신을 보내 강주와 형주의 통치권을 인정해주면 안제를 보내겠다 제안했지만 유의가 불허했다. 이후 유의는 강릉으로 계속 진격해 예장구(豫章口)에서 풍해를 격파하자, 환겸은 강릉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유의는 순조롭게 강릉성에 입성하고, 아직 성 안에 남아있던 변범지, 양승수(羊僧壽), 하후숭지(夏侯崇之), 환도공(桓道恭) 등 환현의 잔당을 모두 참수했다. 한편, 노종지와 싸우던 환진의 군대는 멀리서 강릉성이 불타는 것을 보고 무너졌으며, 환진은 패해 운천(溳川)으로 도망쳤다.

의희 원년(405년) 2월, 강릉을 장악한 유의는 안제 사마덕종을 영접했다. 유유는 조서를 내려 유의와 유도규를 하구에 주둔하도록 하고, 하무기로 하여금 안제를 받들어 도성 건강으로 모셔오게 했다.

의희 원년(405년) 3월, 2개월 전에 패주했던 환진이 다시 패잔병을 수습하고, 운성(鄖城)에서 나와 강릉성을 습격하니, 형주자사 사마휴지는 패해 강릉을 잃고 양양으로 도망쳤다. 환진은 형주자사를 자칭하며 다시 강릉을 근거로 할거할 뜻을 품었다. 강릉 재함락 소식을 들은 건위장군 유회숙은 운두(雲杜)에서 군대를 발동해 서쪽으로 달려가니, 환진도 군대를 이끌고 나와 유회숙을 요격했다. 두 군대가 사교(沙橋)에서 교전을 벌일 때, 유의는 광무장군 당흥(唐興)을 파견해 유회숙을 지원했다. 환진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환진이 직접 창을 들고 용력을 자랑하니, 나머지 병사들도 사기가 올라 필사적으로 싸웠다. 유의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제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당흥이 직접 활을 쏴 환진을 명중시켜 부상을 입히고 생포하자, 비로소 그의 군대가 붕괴되었다. 환진은 유회숙의 진영으로 끌려가 곧바로 그의 부하인 보국장군 환진(桓珍)과 함께 참수되었고, 강릉성은 다시 동진군에게 넘어갔다.

일찍이 유의는 잠시 유뢰지의 아들 영삭장군 유경선의 휘하에서 참군을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유의는 영웅호걸이라 칭찬받으며, 뭇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시기한 유경선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뒷담화를 깠다.
"무릇 비상한 재주라면 따로 배치해야 하는데 왜 유의를 호걸로 칭할 수 있소? 유의의 성품은 겉으로는 너그럽지만 속으로는 시기하며, 스스로 자만하여 거만하기 때문에 만약 하루아침에 기회를 얻으면 역시 윗사람을 능멸하여 재앙을 입을 것이오."
나중에 이 말을 전해들은 유의는 한스러워 하며, 그때부터 유경선을 몹시 미워했다. 그리고 의희 원년(405년) 4월, 유유가 유경선 강주자사로 삼자, 유의가 사람을 보내 유경선의 공이 작음을 논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경선은 두려워 스스로 강주자사 직책을 사양한다는 표문을 올렸고, 유유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선성내사에 임명했다.

의희 원년(405년) 5월, 환현, 환진이 모두 죽고 환겸이 요흥후진에게 도망치면서, 환씨 가문의 수장들이 지리멸렬 했음에도, 형주 각지에선 환량(桓亮), 부굉(苻宏) 등 환현의 잔당이 각자 군사를 거느리며 유유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유의는 장수 단지를 보내 부굉을 멸하고, 장수 곽미(郭彌)를 파견해 환량을 주살했다. 그리고 유의 자신은 환현의 잔당이 점거 중이던 천릉(遷陵)을 공격해 뽑아버리고, 임장(臨幛)에서 환현이 임명한 태수 유숙조(劉叔祖)까지 참수하면서 환현의 잔당을 깨끗이 토벌했다. 또, 상주에서 조예(刁預) 등이 난을 일으키자 장수를 파견해 제압했다. 그 공으로 유의는 무군장군으로 승진했다.

당초, 유의는 거사 당일 집안의 상을 치르던 중이라 검은 상복을 입고 유유의 기의에 참여하였다. 이제 환현의 초나라가 패망하고 정세도 점차 안정되자, 유유에게 상표해 경구로 돌아가 남은 상례를 마치고 싶다 전했지만 유유가 불허했다. 유유는 오히려 그를 도독예주양주지회남역양여강안풍당읍5군제군사(都督豫州揚州之淮南歷陽廬江安豐堂邑五郡諸軍事), 예주자사, 지절에 임명해 예주로 부임하게 했다. 유의는 하는 수 없이 조서를 받들어 자신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주로 떠났다.

의희 2년(406년) 10월, 상서부에서 의로운 공적을 논의해야 한다며 조정에 건의했다. 동진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유의를 남평군개국공(南平郡開國公)에 봉하고, 도독선성군사(都督宣城軍事)를 겸하게 하며, 1부의 고취를 하사했다. 위흥(魏興)에서 양주자사(梁州) 유치(劉稚)가 반란하니, 유의는 부장을 보내 토벌하고 유치를 생포했다.

의희 2년(406년) 12월, 동진의 눈을 피해 몰래 세력을 키우던 환진의 숙부 환석수가 거병해 호도산(胡桃山)을 점거하고 북쪽에서 역양(歷陽)을 위협했다. 이에 유의는 사마 유회숙을 보내 환석수 무리를 격파했고 환석수는 달아났다.

의희 4년(408년) 정월, 양주자사(揚州) 왕밀(王謐)이 죽고 한동안 양주자사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유의는 유유가 그 직책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사람을 보내 중령군 사혼을 양주자사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답이 오지 않자, 이번엔 상서우승 피침(皮沈)을 보내 조정에 다시 한번 논의하게 했다. 유의의 속셈을 눈치챈 기실녹사참군 유목지는 얼른 유유를 찾아가 양주자사 직책을 수여받으라 진언했고, 유유가 그의 말을 좇아 시중, 거기장군, 양주자사에 올랐다.

의희 4년(408년) 9월, 조명을 받들어 촉 땅의 군벌 초종을 토벌하러 떠난 유경선, 유도규 등이 험난한 지세에 고생만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 죄로 유유는 유경선의 봉지 3할을 삭봉하였고, 유도규도 건위장군으로 강등시켰다. 본디 유경선을 미워하던 유의는 이를 기회로 삼아 유경선을 엄중히 비난하며 무거운 형벌을 내리려 했으나, 유유가 서신으로 변호하고 하무기가 곁에서 만류하자 관두었다.

의희 5년(409년) 정월, 위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승진하였다.

의희 6년(410년) 3월, 강주자사 하무기가 심양에서 출진해, 장강을 타고 내려오는 노순의 반란군을 예장(豫章)에서 막았으나 노순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 숱한 전투를 거친 숙장 하무기가 전사하자, 건강 안팎으로 크게 놀라 떨었으며, 심지어 고숙(姑孰)에서 출병 준비를 하던 유의가 갑자기 병에 걸려 드러누우니, 조정 내에서는 안제 사마덕종을 받들어 지금 북벌 나가있는 유유의 군영으로 모시자는 논의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유유는 북벌을 중지하고, 정예병 이끌고 귀환했다.

그 무렵, 유의는 병세가 어느정도 호전되어, 다시 노순을 막기 위한 남정을 서둘렀다. 그때 유유가 유의에게 서신을 보내,
「나는 그 요사스런 도적과 여러 번 싸운 적이 있어, 그들의 변화무쌍한 진과 책략을 훤히 꿰고 있소. 지금 우리 부대의 함선을 수리 중인데, 장차 준비가 되면 곧바로 나아갈 예정이오. 그러니 준비를 마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준다면, 극평(剋平)의 날에 있을 상류의 중임은 전부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겠소.」
기다려달라 부탁하고 또, 유의의 사촌동생 유번(劉籓)도 보내 남정을 잠시 만류하게 했다. 이를 듣고 유의는 대노하여 유번을 향해 소리치기를,
"과거 우리는 한때의 공로를 세우기 위해 서로 유유를 추대하였을 뿐이거늘, 너는 내가 유유보다 못하다 생각하는 것이냐!"
그러고는 유유의 서신을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유의는 유유의 당부를 무시하고, 수군 20,000명을 발동해 남쪽으로 향했다. 유의가 온다는 전보를 받은 노순의 부하 서도복은 강릉으로 향하려던 노순에게 이를 알리면서 덧붙여 말하길,
"유의 휘하의 병력은 하나같이 정예병이라 한 번의 전투로 성패(成敗)가 갈릴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전투에 사력을 다해 싸워 반드시 이겨야만 합니다."
라 하였다. 이에 노순은 결전의 각오를 하고 서도복과 군사를 합쳐, 파릉(巴陵)에서 출병했다. 유의의 군대는 상락주(桑落洲)에서 노순군과 교전에 들어갔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유의의 병사들은 배와 치중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으며, 그마저도 끝까지 도망간 이들은 수백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노순에게 사로잡혔다. 그와중에 노순이 유의가 버리고 간 치중을 한 데 모아보니 산처럼 쌓일 정도로 무척 많았다. 병력과 식량을 모두 잃은 유의는 노순의 추격을 피해, 오랑캐의 영역에까지 들어가 굶주림과 싸워가며 도망다녔다. 도중에 위기도 여러 차례 맞았으나 참군 양수(羊邃)가 필사적으로 호위한 덕에 재난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유의가 다시 고숙으로 돌아오자, 유유는 서신을 보내 유의를 격려하고 위로해주었으며, 관직은 유지하도록 했다. 유의는 자신을 지켜준 양수를 자의참군으로 삼았다.

상락주 전투의 패전 소식이 금새 건강에 퍼지니, 분위기는 흉흉해졌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막 북벌에서 돌아온 장수와 병사들은 대부분 너무 지쳐있어 쓸 수 없었고, 당장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한 병력은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노순의 병력은 상락주 전투 이후 더욱 불어나, 그 수가 100,000여 명에 이르렀고, 유의로부터 빼앗은 전함과 치중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럼에도 유유는 주눅들지 않고 당장 쓸 수 있는 병력만 추려서 노순 토벌을 위해 출진했고, 유의에게는 안팎으로 지키고만 있으라 명했다. 유의는 상심에 빠져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해임을 요청했지만, 조정에서 불허하고 후장군으로 강등시키는 선에서 끝났다.

의희 7년(411년) 4월, 유유에게 연거푸 패배하던 노순이 남진(南津)에서 결사항전을 벌이다, 끝내 패망을 면치 못해 자신의 처자식을 짐독으로 독살하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익사했다. 이때 유의는 평소 원망하던 강주자사 유열을 모함해 면직되게 하고, 자신과 절친한 장수 조회(趙恢)에게 병사 1,000여 명을 주어 심양에 진수시켰다. 또, 강주자사부에 배속되어 있는 문무관원 3,000여 명을 후장군부로 배속시키고, 이들을 엄준히 다스렸다. 억울하게 쫓겨난 유열은 분노를 참지 못해, 유의에게 따지기 위해 예장(豫章)으로 향하던 중 등창으로 병사했다.

의희 8년(412년) 4월, 조정에서 다시 위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도독형영진옹4주지하동하남광평양주지의성4군제군사(都督荊寧秦雍四州之河東河南廣平揚州之義成四郡諸軍事), 지절, 형주자사를 더했다. 유의는 상표해 형주의 가구가 전란으로 인해 100,000호도 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광주(廣州)와 교주(交州)도 자신의 관할에 넣어달라 요구하니, 유유가 이를 허하였다.

형주자사에 임명받고 강릉에 부임한 유의는 강주와 예주 서부의 지방관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채워넣고, 강주에서 병력 10,000을 떼어내 휘하로 배속시키며 노골적으로 반란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동년 9월, 유의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니, 유의의 심복인 남만교위 치승시, 남군태수 모수지 등은 유의가 죽은 후에 유유에게 숙청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유의의 무리는 연주자사 유번(劉藩)을 불러 만에 하나 유의가 잘못되면 유번을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유의를 설득해 그로 하여금 유유에게 유번을 부관으로 삼아줄 것을 청하게 했다. 유유는 그의 청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유번이 입조하러 도성에 도착하자 조서를 꾸며, 유의의 죄상을 나열하고 유번과 사혼을 붙잡아 처형했다.

의희 8년(412년) 10월, 유유는 진무장군 왕진악과 용양장군 괴은을 선봉으로 삼고, 먼저 강릉으로 나아가게 했다. 왕진악은 밤낮으로 지름길을 달리면서 병사들에게 누군가가 와서 유번의 행방을 물으면 후방에 있다고 답하라 명했다. 왕진왕의 군대가 강릉성까지 5 ~ 6리 밖에 남지 않았을 때, 유의의 참군 주현지(朱顯之)가 군영에 찾아와 유번이 어디 있느냐 물었다. 왕진악의 병사들은 뒤에 있다고 말했으나, 주현지가 직접 후방에 가보니 유번은 없고 병장기와 물자만 가득했다. 속임수임을 깨달은 주현지는 서둘러 군영을 빠져나와 강릉성에 들어가 문지기들에게 얼른 성문을 닫으라 지시했지만, 이를 눈치챈 왕진악이 말을 달려 성문이 미처 닫히기도 전에 동문(東門)으로 진입해버렸다. 괴은도 나머지 병력들을 거느리고 뒤따라 진입하니, 유의는 병사 8,000명을 동원해 이들과 혼전을 벌였으나, 유의가 자랑하던 용장 조채(趙蔡)가 참수당하고 대부분의 군사들이 항복했다. 대패한 유의 등은 외성을 포기하고 내성으로 들어갔다.[1]

왕진악은 강릉 외성의 남문과 동문을 불태우고, 내성으로 통하는 개구멍을 통해 유의에게 투항하라는 서신을 전달했다. 서신을 받은 유의는 노하여 읽어보지도 않고 불태운 뒤, 모수지, 치승시 등과 사졸들을 격려해 힘껏 싸우도록 명했다. 그러나 성내에서 유유가 친정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져, 병사들은 두려움에 싸울 생각을 잃었고, 그 날 밤이 되자마자 유의의 병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승산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유의도 도망치려 했는데, 왕진악은 유의를 유인하기 위해 내성을 포위하고 남쪽만 포위망을 열어두었다. 남쪽에 복병을 두었을 것이라 예상한 유의는 친위대 300명을 이끌고 북문으로 나와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유의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워 포위망을 뚫기는 했지만, 도중에 심복 사순을 포함해 군사를 모두 잃고 단기로 도주했다.

포위망에서 무사히 벗어난 유의는 강릉성 북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우목사(牛牧寺)의 문을 두드리며 잠시 머물고 싶다 청했다. 하지만 과거 유의는 환울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우목사의 승려 창(昌)을 살해한 적이 있었기에, 우목사의 승려들은 이 일을 계기로 더이상 죄인을 숨겨줄 수 없다 설명하며 거부했다.[2] 유의는 절망하여 크게 탄식을 내뱉고 스스로 목을 메 자살했다.

다음 날, 유의의 시신을 발견한 백성들이 관군에게 제보했다. 유의의 시신은 저자에서 참수되고, 아들 유숙민(劉肅民)과 조카들 역시 모두 주살당했다. 유의의 형 유모(劉模)는 관군을 피해 양양으로 들어갔지만, 옹주자사 노종지에게 잡혀 참수되고 그 수급은 유유에게 보내졌다.


[1] 북송 시기, 강릉 내성이 금성(金城)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기에, 《자치통감》 같은 일부 후대 역사서 중에서 금성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2] 여담으로 승려들은 밤이 너무 어두워 도망 온 사람이 유의인 줄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