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8:13:39

치승시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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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郗僧施
(? ~ 412)

동진의 인물. 자는 혜탈(惠脫). 연주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鄉縣) 출신. 치검지(郗儉之)의 아들.

2. 생애

치초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치초의 사촌동생 치검지는 아들 치승시를 그의 양자로 보내 후사를 잇게 하였다. 이후 치음까지 사망하니, 치승시가 남창현공(南昌縣公) 작위를 습작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왕수, 환윤(桓胤)과 더불어 명성을 떨쳤다. 조정 내에서도 누차 승진하여 영 선성내사(領宣城內史), 단양윤을 역임하였다.

당시 조정은 유유를 따르는 자와 강릉의 군벌인 유의 따르는 자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비록 유유의 전공은 유의보다 훨씬 높았으나, 일개 병사 출신인 유유는 학식이 없다보니, 동진의 여러 사대부들은 나름 배경있는 집안 출신인 유의를 지지하였다. 치승시 역시 유의에게 지지하였기에, 유의는 조정에 청해 치승시를 남면교위, 가절로 삼아 강릉으로 부임하게 하였다.

의희 8년(412년) 9월, 유의가 병에 걸려 위독해졌다. 유의의 측근인 치승시를 비롯한 남군태수 모수지 등은 유의 사후 숙청당할 것이 두려워, 연주자사 유번(劉藩)을 불러 만에 하나 유의가 병사하면 그의 후임으로 유번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측근들의 설득에 넘어간 유의는 당시 태위를 지내던 유유에게 서신을 보내 유번을 자신의 부관으로 삼아줄 것을 청했다. 유유는 그의 청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유번이 입조하러 도성에 도착하자, 조서를 내려 유의의 죄상을 나열하고 유번과 중앙에서 유의와 내통하던 사혼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그리고 유의의 무리를 역적을 몰아세우고, 유의가 미처 병력을 모으기도 전에 강릉으로 순식간에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켜버렸다. 이때 유의가 도망치다 자결하니, 구심점을 잃은 유의의 무리는 무너져 유유에게 모두 사로잡혀 항복하거나 처형되었다. 치승시 또한 주살되고 봉국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