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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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毛璩(? ~ 405년)
동진의 인물로 자는 숙련(叔璉)이다. 형양군(滎陽郡) 양무현(陽武縣) 출신.
2. 생애
약관의 나이에 우장군 환활이 참군으로 삼았다. 아버지 모목지의 상을 치른 뒤 사안의 참군이 되고 상서랑(尙書郞)으로 제수되었다가 사안의 요청으로 다시 사안의 참군이 되었고 사안의 아들 사염의 사마로 전임되었다. 비수대전에서 모거는 전차지(田次之)와 함께 부견을 중양(中陽)까지 추격했으나 그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뒤에 영삭장군(寧朔將軍), 회계태수로 진위되었다.뒤에 초왕 사마념의 사마가 되었다. 해릉현의 경계에 청포(靑蒲)라는 곳이 있었고 이곳의 사면이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곳에 유민들이 몰려들어 조정의 통치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모거는 이들의 토벌을 건의했다. 당시 큰 가뭄이 들었는데, 모거는 이곳에 불을 놓았고 궁벽해진 유민들은 모두 모거에게 자수하였으며, 조정에서는 모거를 칭찬하였다. 뒤에 용양장군, 초양2군 내사, 서중랑부 사마가 되었으며, 곽전(郭銓)을 대신하여 건위장군(建威將軍), 익주자사가 되었다.
안제가 즉위한 뒤 정로장군으로 진위되었다. 403년, 안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환현이 사자를 보내 모거에게 산기상시, 좌장군을 더했다. 그러나 모거는 환현의 사자를 붙잡아 구금하여 환현의 명을 받지 않았다. 이에 환현은 환희를 양주자사로 삼고, 왕이(王異)를 부성으로 파견하고, 곽법(郭法)을 탕거(宕渠)로 파견하고, 사적(師寂)을 파군(巴郡)으로 파견하고, 주도자(周道子)를 백제성(白帝城)으로 파견하여 모거의 움직임에 대비하였다. 모거는 주변 지역으로 격문을 퍼뜨려 환현의 죄상을 나열했고, 파동태수 유약지(柳約之), 건평태수 나술(羅述), 정로사마 견계지(甄季之)를 파견하여 환희 등을 물리치고 백제성으로 진군하였다.
모거의 동생인 영주자사 모번(毛璠)이 죽은 뒤 모거의 형 모구(毛球)의 손자 모우지(毛祐之)와 참군 비념(費恬)이 수백 명을 이끌고 강릉에서 모번의 장례를 지냈다. 한편 환현이 패배하여 양주(梁州)로 달아나려고 할 때 모거의 조카이자 환현의 둔기교위였던 모수지는 환현을 촉으로 유도했고, 모우지, 비념, 풍천(馮遷)과 함께 쟁영주에서 환현을 죽였다.
유약지 등은 환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강(枝江)까지 진군하여 다시 강릉을 공격했다. 유의 등이 심양으로 돌아갈 때 유약지도 철군하였다. 뒤에 견계지와 나술이 병으로 쓰러지자, 유약지는 환진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환진을 죽이려고 했지만 일이 탄로나서 환진에게 살해되었다. 유약지의 사마 시연조(時延祖)와 부릉태수 문처무(文處茂)는 잔병들을 이끌고 부성을 수비했으며, 환진이 환방지(桓放之)를 익주자사로 삼고 서릉(西陵)에 주둔시키자, 환방지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모거는 환진이 강릉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강릉을 구원하고자 출병했고 모근과 모원에게는 외강을 따라 출병하도록 명했으며, 참군인 초종에게는 파서와 재동의 군대를 이끌고 부수(涪水)로 출병하도록 명했다. 초종은 파군에서 모거와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촉의 인심은 여기에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초종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405년 2월 오성수구(五城水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초종은 부성을 습격하여 모근을 죽였고, 모근의 장사인 정순지(鄭純之)가 성도에서 재빨리 사람을 보내 모거에게 초종의 반란에 대해 알렸다. 당시 모거는 성도로부터 400리 떨어진 약성(略城)에 있었는데, 소식을 전해듣고 참군 왕경(王瓊)에게 군대를 이끌어 광한(廣漢)에서 초종과 대치하게 했다. 그런데 북도현령(僰道縣令) 하림(何林)이 초종과 내통하여 모거의 부하들을 끌어들였고, 결국 모거는 모원, 그리고 촉에 있는 자제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환진이 유회숙에게 토벌되고 안제가 복위한 뒤, 모거는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진위되고 산기상시, 도독익양진량영5주제군사, 의도영촉2군 태수가 더해졌다. 하지만 이때 이미 모거는 초종에게 죽었기 때문에 빛이 바랬다.
조정에서는 모거가 환현 토벌에 기여한 공을 생각하여 원래 제수했던 관직을 추증하였으며, 귀향공(歸鄕公)으로 추봉하고 식읍 1,500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