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3:33:43

양호(삼국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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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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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
서진의 정치가
거평성후(鉅平成侯)
羊祜 | 양호
'''
파일:external/a.hiphotos.baidu.com/8601a18b87d6277fb659e94328381f30e924fc06.jpg
출생 221년[1]
조위(曹魏)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남성현(南城縣)
(現 산둥성 린이시 웨이좡향 샤투차오촌)
사망 278년 12월 27일[2] (향년 57세)
시호 (成)
작호 거평후(鉅平侯)
성씨 (羊)[3]
호(祜)
숙자(叔子)
가족 부친:양신
모친:채정희
1. 개요2. 가족 관계3. 정사 삼국지
3.1. 조위 시대3.2. 서진 건국 이후3.3. 사후3.4. 타루비
4. 삼국지연의5. 평가6. 말말말7. 기타8.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삼국시대 조위서진의 정치가 겸 장군이며 자는 숙자(叔子).

사마준(司馬駿), 두예(杜預), 마륭(馬隆), 왕준(王濬) 등과 더불어 서진의 명장, 그리고 형북 일대에서 진정으로 우러른 덕장.

2. 가족 관계

  • 친가: 양호의 친가는 양호에 이르기까지 9대가 2천석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며 청렴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 친아버지: 양신: 관직은 상당태수를 역임했고, 양호가 12살 때 죽었다.
    • 숙부: 양탐: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양호가 양탐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 숙모: 신헌영: 양호와 신헌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헌영 문서 참조.
  • 외가: 어머니 채정희후한의 대학자 채옹의 딸이기 때문에 양호는 채옹의 외손자다.
    • 친어머니: 채정희: 하후패가 촉에 투항한 후에 죽었다.
    • 이모: 채염
    • 외할아버지: 채옹
  • 처가: 하후패의 동생 하후위가 태산에 부임했을 때 양호의 기량에 반해 하후패를 설득해 조카 만세향군을 양호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하후패가 에 투항했을 때 많은 사돈들이 하후패와 절연을 선언했으나, 양호는 더욱 아내를 아낄 뿐이었다.
    • 아내: 만세향군: 양호가 죽은지 2년 후 사마염에 의해서 만세향군에 봉해진다.
    • 장인어른: 하후패
  • 형제자매
    • 이복형: 양발(羊發): 어머니 채정희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
    • 동복형: 양승(羊承): 어릴적 병으로 죽었다.
    • 동복누나: 양휘유: 사마사의 후처가 되어서 경헌황후로 추존되었다.

3. 정사 삼국지

3.1. 조위 시대

12세 때 아버지 양신을 잃은 뒤 숙부 양탐을 아버지처럼 공손하게 모셨다. 아직 아이일 무렵 문수가에서 놀고 있을 때 지나가던 어떤 노인이 그를 보면서 처사는 관상이 훌륭하니 노력하면서 60세가 안되어 천하에 큰 공을 세울 것이라 예언하고 사라졌다. 장성하면서 총명 박학하고 키가 7척 3촌에 용모가 아름다워 눈썹과 수염의 풍모가 특히 돋보였다고 한다.

조상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왕침이 양호를 눈여겨보고 관직에 추천하려 했으나 그는 '목숨을 다해 사람을 받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 말하며 거절했다. 훗날 사마의가 주도한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몰락하자 왕침은 그의 생각이 옳았다고 했는데, 이 때도 일이 미처 그리될 줄은 몰랐다고 대답해 선견지명을 지녔음을 보여 주었다.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었을 때 비로소 관직에 나갔는데 임용되기도 전에 중서시랑을 맡았으며, 이어 급사중과 황문랑을 역임했다. 당시 황제였던 조모가 시문을 좋아해 많은 신하들이 시문을 지어 바치다 혹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른다 해서 배척당하기도 했는데, 양호도 이런 경우를 겪었으나 품행에 흔들림이 없어 식자들의 칭찬을 받았다.

조환이 제위에 오르자 관내후에 봉해졌다가, 외직을 구해 거평의 6백호를 받아 관의 비서감이 되었다. 종회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시기해 매번 헐뜯을 구실을 찾았다고 하며, 이 눈치를 안 양호도 종회와 맞닿는 것을 피했다. 종회가 성도에서 난을 일으키려다 피살당하자 중앙으로 복귀해, 상국종사중랑이 되어 순욱과 함께 기밀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본 뒤 중령군으로 승진해 금군을 통솔했다.

3.2. 서진 건국 이후

서진 건국 때 왕침, 순욱, 가충, 배수 등과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진이 세워진 뒤 중군 장군 산기상시가 되어 식읍 3천호와 함께 군공에 봉해졌지만 이를 사양해 후의 작위를 받았다. 태시 연간에 상서우복야 겸 위장군에 올랐다.

도독 형주 제군사에 임명되어 양양에 주둔하며 형주 북부를 지켰는데, 농지 8백여 경을 개간하여 10년치 군량을 마련하고 형북 일대의 민심을 수습하며 손오 포로 중 고국을 그리워하는 자가 있으면 기꺼이 보내주는 등 너그러운 정책으로 신망을 얻었으며 한편으로는 오의 석성 태수가 자주 양양을 침공하자 계책을 써서 그를 파면시키는 등 군략에서도 빈틈이 없었다. 오 지방 사람들은 감복해서 그를 양공(羊公)이라 칭하고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당초에는 몸가짐을 소탈하게 한 나머지 갑주도 걸치지 않은 채 호위를 단 10여명만 대동하고 낚시하기를 즐기며 정무를 잘 돌보지 않았는데, 어느날 밤에 또 그런 행색으로 장군부를 나서려 하자 서윤이 무기를 든 채 문을 막고 '만리 넓이의 땅을 감독하시는 장군께 나라의 안위가 달려 있는데 어찌 이처럼 가볍게 행동하십니까? 오늘 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절대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라고 간하자 웃으며 그만뒀고 그 후로는 나가 노닐기를 줄였다. 이후 진무제 사마염이 거기 장군에 봉하며 장군부와 그 아래 관료를 삼사의 제도에 따라 하도록 명하자 극구 사양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72년 손오의 서릉독 보천이 서릉을 바치며 투항했다. 뒤이어 육항이 보천을 급하게 추격하자 형주 자사 양조와 더불어 보천을 구원하고 강릉을 공격하려 했으나 육항의 계략에 속아 군량을 나르기 곤란해져 철수했고, 보천도 죽음을 당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벼슬이 평남 장군으로 깎였다.
파일:external/www.qulishi.com/2015351552568959018.jpg
육항에게 약을 전하는 양호

그 뒤로도 계속 육항과 대치하며 양양을 지켰는데, 육항과도 입장을 초월한 교분을 나누어, 서로 사자를 통해 술과 약을 거리낌없이 주고받는 등 대범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으로 주변을 감복시켰다.[4] 이 일화에 대해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양호의 부하들이 양호에게 와서는 "지금 오군은 군주가 포악하여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군사들도 오합지졸이라고 합니다. 이 때 오군을 쳐야 합니다."라고 간하자 양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육항을 가볍게 보고 있다. 지난날 육항이 서릉으로 군사를 이끌어 우리 군사를 무찌르고 보천을 죽였을 때 나는 내 부하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자 부하들이 그 말을 듣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번은 양호의 군사가 사냥을 나갔는데, 마침 그 때 육항의 부하들도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이에 양호는 부하들에게 "절대로 오군의 경계를 넘지 마라."라고 주의를 줬고, 부하들이 그에 따르자 육항은 "진군은 저렇게 질서가 서 있으니 쉽게 쳐부수지 못할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양측이 사냥이 끝나고 돌아와서 확인을 해 보니 오군의 화살을 먼저 맞고 진군에게 잡힌 짐승이 있자, 양호는 그러한 짐승들은 오군에게 돌려 주도록 했다. 오군이 사냥감을 돌려받고 기뻐하는데 육항이 심부름 온 군사에게 양호가 술을 좋아하냐고 묻자 부하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육항은 술 한 동이를 줘서 돌려보냈는데 부하들이 이유를 묻자 "적이 나를 덕으로 대하는데 똑같이 대하는 게 예의 아닌가?"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한편 술을 가지고 돌아온 부하가 상황을 설명하자 양호는 술을 마시려 했다. 부하들이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며 말리자 양호는 웃으면서 "육항은 그런 짓거릴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안심시키며 술을 다 먹었다. 이후 두 장군은 서로 부하를 보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한번은 육항의 부하가 와서 육항이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하자, 양호가 혀를 끌끌 차면서 "장군의 병은 나와 같은 병일 것이다. 이 약을 가져다 드려라."라고 했다. 이번에도 육항의 군사들이 "그건 위험한 약입니다"라고 말렸지만 육항은 개의치 않고 약을 먹었고, 병이 나았다. 병이 나은 육항에게 부하들이 축하하니, 육항이 그들에게 "양호가 이끄는 군대는 질서가 잡혀서 무너뜨리기 힘드니, 우리가 섣불리 들어가는 것은 손해다. 그 쪽에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5]

함녕 연간에 정남 대장군, 의동삼사로 임명된 뒤에는 육항이 죽고 오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익주 자사 왕준을 익주 제군사로 세운 뒤 선단을 건조하게 했다. 뒤이어 진 무제에게 상소해 오를 쳐야 한다고 했으나 가충, 풍담, 순욱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때 독발수기능이 서쪽에서 깽판을 치고 있던 때라서 서진의 국력으로도 버거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쯤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할 도독으로 임명된 가충을 보내지 말라고 상소했다.[6] 277년에 거평후에서 남성군후로 책봉되자 이를 사양했으며, 그 후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임종의 자리에서 사마염에게 두예를 천거하고 병사했다.

3.3. 사후

사후 태부 및 남성후에 추봉되었고[7] 사마염은 그의 장례에서 직접 소복하고 곡했다. 후에 오를 정복하자 사마염은 이 모두가 양호의 공이었다고 말하며 다시 눈물을 흘렸으며 소하의 선례를 본받아 그의 부인을 만세향군에 봉했다. 후사를 두지 못해[8] 그의 배다른 형 양발의 아들이 사마염의 명으로 대신 거평후 작위를 이어받았다.

또한 남주 사람들은 양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곡하면서 상복으로 휘장을 쳤고, 형주에서는 그의 이름 호(祜) 자 발음을 피휘해 문을 문(門)이라고만 하고 호(戶)로 부르지 않으며 호조(戶曹)를 사조(辭曹)라 칭했다.

진서에는 전술했듯 후손이 없었다고 적혀 있으나, 예문유취에는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 남아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려서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아 능히 말을 하던 나이에 부름을 받아 문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아홉 살에 시와 서를 배웠으나 고향 사람들로부터 잘한다는 칭찬이나 청렴하고 특별하다는 명성을 얻지 못했다. 오늘날의 직위는 잘못된 은혜가 더해진것으로 내 능력으로서는 능히 도달할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님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데 너희들 또한 나에 미치지 못한다. 크고 위대한 일에 있어 너희 형제가 능히 모두 잘 살펴서 일을 꾀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스스로 기이함에 장차 도달하기에는 살피건데 너희들의 분수가 맞지 않는 듯 하다.

공손함은 덕의 으뜸이요, 삼감은 행동의 근본이다. 원하건데 너희들은 말을 할 때 충실한 신의를 가지고 진실해야 하며, 행동은 즉 성실하고 공손해야 하며, 입으로는 재물로서 약속을 하지 말아야 하고, 경험하지 못한 말을 전하지 말며, 비방과 칭찬의 말은 듣지 말도록 해라. 명성이 높은 사람의 과실을 귀로는 듣되 입으로 이르러 베풀면 안되며 생각한 연후에 행동해라. 만약 말과 행동에 신의가 없다면 큰 비방을 듣게 되며 스스로 형벌에 관한 논의에 들어가면 어떻게 너희를 다시 애석하게 여기겠느냐? 부끄러움이 조상들에까지 미칠 것이니 아비의 말을 생각해 그 가르침을 모아 각자 그것을 기억하도록 해라.

3.4. 타루비

양호가 세상을 떠나자 양양 일대 백성들이 몹시 슬퍼하여 그가 도독으로 지내던 시절 즐겨 거닐던 현산[9]에 비석을 세워 고인을 기리기 시작했는데, 좀 더 구체적인 경위는 아래와 같다.
어느날 종사중랑 추담 등과 함께 현산에 올라 술과 시문을 즐기던 때 양호가 "이 산은 천지가 생긴 옛적부터 많은 현인재사들이 올랐고 그보다 더 무수히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올랐지만, 그들의 이름은 모두 역사에 묻힌지 오래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지만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뒤에라도 계속 이곳에 오르고 싶다네."라고 말하자 추담은 "공의 높은 덕은 모두가 아는 바이니 이 산과 더불어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라 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세설신어에도 실려있다.

이런 연유로 양호를 기리는 비석을 현산에 세웠으며, 그 비석에 적힌 내용을 읽고서 울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라 해 타루비(墮漏碑)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 당나라 때에 양양 출신인 맹호연이나 이백 등이 이 비를 소재로 시를 남기기도 했으며, 삼국지연의에도 아래에 서술된 호증의 시를 약간 변형해 양호의 죽음 뒤에 실어 놓았다.

신조협려에서도 타루비가 나온다.

덧붙여 우리나라에도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타루비(보물 제 1288호)가 남아 있는데, 바로 이 양호의 고사를 본받아 이순신 장군의 덕을 길이 추모하려는 뜻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뤄보면 조선 시대에도 양호는 여전히 덕장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삼국지연의

마지막 회인 120회에서 등장하며, 육항과 약을 주고 받은 부분을 살짝 더 부풀렸다.

양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염이 병문안을 와서는 "그대의 말을 듣고 오를 일찍 쳤어야 했다."라고 후회하자 양호는 목숨이 위중한 와중에도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두예를 총사령관으로 하면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염이 "왜 천거(추천)하는 글을 불사르고 이렇게 비밀스럽게 얘기하는가?"라고 묻자 "가끔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추천했던 사람에게 와서 사례를 표하는 일이 많습니다. 신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후 얼마 못 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마염은 통곡했다고 한다.

양호는 연의 마지막 회를 장식하는 인물 중 하나인데, 서릉 전투는 지나가는 말로 패했다 정도로 넘어가고 육항과의 우정 및 손오 정벌의 포석을 다진 인물로 주로 언급된다. 딱 한 회 나올 뿐이지만 존재감은 그 회의 등장인물 중 그나마 가장 높은 편.

5. 평가

삼국지 팬덤에서는 맞수였던 육항과 비교하면 국력이나 내부 정세 등 명백하게 열세인 상황에서 서릉 탈환에 성공한 육항보다 상대적으로 평가가 처지는 경우가 왕왕 있으나, 양호가 발휘한 진정한 능력은 왕창이 마련한 형주 안정의 기반을 덕치로 확고히 다져 천하 통일에 앞서 민심의 향배를 자연스럽게 서진 쪽으로 돌려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양호는 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시행한 군인으로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유명하며, 그 평가는 선정으로 이름 높았던 명재상 제갈량에 필적한다고 할 수 있다.

집안 인맥이며 개인 능력, 인격 어느 면에서도 당대 흠결이 없을 정도였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회, 가충, 순욱, 풍담, 왕융 등 수많은 이들에게 정적으로 간주되어 생애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시기와 견제를 당했고 스스로도 그런 입장이 난감했는지 육항 사후 오 정벌의 건의가 좌절되자 "천하의 일 중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열 중 일곱여덟이구나(天下不如意 恒十居七八)" 라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개인사적으로는 후사도 보지 못했으며, 서진 정권에서 워낙 이렇게 정적이 많았던지라 그가 장수했더라도 과연 서진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크다.

비록 자신의 뜻을 온전하게 펼칠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것은 그에게 불행이었으나, 그가 실행한 애민의 치적은 서진 시대의 몇 안되는 명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근거가 되었다.

6. 말말말

曉日登臨感晉臣(효일등림감진신) : 이른 아침 산에 올라 진나라 신하를 추억할 제
古碑零落峴山春(고비영락현산춘) : 옛 비석은 낡았건만 현산은 (다시) 봄이로구나.
松間殘露頻頻滴(송간잔로빈빈적) : 솔잎 사이 남은 이슬 방울져 떨어짐은
酷似當時墮淚人(혹사당시타루인) : 흡사 그 시절 사람들 눈물짓던 모습이런가.

- 만당대(晩唐代) 시인 호증의 영사시(詠史詩) 중 현산(峴山)
天下不如意 桓十居七八(천하불여의 환십거칠팔): 세상사 열에 일곱 여덟은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다.
- 진서 양호전

7. 기타

당나라 시기 학승인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10]이라는 책에 따르면 양호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일찍이 유모에게 일전에 가지고 놀던 반지를 가져달라 하였는데, 유모가 너한테는 반지가 없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양호는 예전에 가지고 놀다 떨어뜨렸다고 했는데 이 집이 예전집이 아니라 찾지 못하겠다고 했다. 곧 양호가 문밖에서 나가 놀다가 동쪽으로 가니 유모도 따라갔는데 양호는 이씨라는 사람의 집에 가더니 곧장 들어가 동쪽 담장의 나무 아래로 가 작은 반지를 찾아냈다. 이씨가 놀라고 슬퍼하며 내 아들이 7살 때 죽었는데 이 반지를 가지고 놀길 좋았는데 그 아이가 죽은 후에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네가 어찌 알고 찾았느냐고 했다. 양호가 반지를 가지고 가려하자 이씨는 곧장 이를 문초했는데 유모가 이전에 양호가 한 말을 이야기했더니 이씨는 슬프고도 기뻐하며 마침내 양호를 자신의 아들로 삼으려고 했다. 마을에서 이해시키고 나서야 이씨는 그만두었다.

양호는 장성했을 때 항상 두통을 앓았는데 의원이 이를 치료하려하자 양호가 말하기를 자신이 태어나고 3일 되던 때에 머리를 북쪽 문에 두었는데, 바람이 정수리에 부는 것을 느끼고 마음 속으로 이를 근심했지만, 다만 말을 할 수 없었을 뿐이었는데 병의 근원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치료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양호는 뒤에 형주도독이 되어 양양을 진수하는동안 무당사(武當寺), 수여정사(殊餘精舍)라는 절에 경서를 공급했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물었으나 양호는 잠잠히 있을 뿐이었다. 후에 양호는 참회할 때 인과를 차례로 이야기하며 말하기를 나는 전생에 여러 죄업들을 이어받았는데 이 절을 지은 것에 힘입은 덕분에 구제받았으니, 공양하는 마음은 정성스러우며, 치우치지 않고 은근한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8.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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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초(黃初) 2년생.[2] 음력 11월 26일이다.[3] 현대 중국에서는 흔한 성씨가 아니다.[4] 그러나 액면 그대로 이들이 정말로 호의를 베풀 생각으로 교분을 나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양호나 육항은 서로의 적국의 백성이나 병사, 장수에게도 관대함을 내비쳤는데, 이것은 자신의 도량이 넓음을 어필하기 위한 전략에 가까운 행동이다. 이 둘은 서릉에서 한 번 맞붙었을 뿐이었지만, 이후로도 고도의 심리전으로 계속 대결을 이어왔던 셈이다.[5] 사실 이 비슷한 이야기는 정적간인 송시열허목 사이에도 있다. 송시열이 병이 들었는데 약학에도 능한 허목에게 처방전을 받아오라고 아들에게 시켰다. 받아온 처방전을 보니 비상등 죄다 독물들만 있어서 다들 먹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그 재료로 약을 달여 먹은 다음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 아들이 사죄를 하러 허목에게 가서 어떻게 독물로 약을 만들었는데 병이 나았냐고 묻자 송시열의 병은 체내에 독이 쌓여서 된 것이라 이독제독의 원리로 그리 한것이라고 했다.[6] 가충과 양호는 사이가 절대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가충은 양호를 엄청 견제했고, 양호는 가충을 피해다녔다. 따라서 이 진언은 양호의 훌륭한 성품, 가충의 찌질함, 그리고 독발수기능의 난의 스케일을 종합해봤을 때 "가충 님은 수도에서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가 아니라 "가충 따위로는 반란 진압이 될리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라는 충언에 가까웠을 것이다. 웃기는건 이걸 두고 가충이 반란진압에 자신이 없었던지 양호더러 "처음부터 당신이 훌륭한 인물임을 알았다."라면서 아부를 떤다는 것이다.[7] 죽을 때까지 남성후에 임명되는 것을 사양했으며 고향에 묻히는 검소한 장례를 원했지만 사마염은 끝내 그의 관에 남성후의 도장을 넣었으며 낙양성 밖 황릉 근처의 장지를 골라 묘소로 하사했다.[8] 풍수지리에 능한 사람이 양호더러 선조의 무덤에 제왕의 기운이 있다고 말하자 양호가 무덤을 파헤쳐 옮겼는데, 지관이 '무덤을 옮겼으니 자손이 없겠으나 그래도 팔 부러진 삼공이 나온다' 는 얘기를 했고 후에 정말 한쪽 팔이 부러진 일이 있었지만 삼공의 지위에 달했고 자식이 없는 것이 맞아 떨어졌다고 한다.[9] 오늘날의 후베이성 샹판시 남쪽에 있는 현수산(峴首山)이다.[10] 100권. 불교의 여러 사항을 겁량편(劫量篇)·세계편(世界篇)·일월편(日月篇)·육도편(六道篇)·천불편(千佛篇) 등 100편으로 분류하고, 각 편에 다시 여러 항목을 설정하여 풀이하고 그 전거(典據)로서 여러 경론(經論)을 인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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