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2:41:51

저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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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도향원목후(都鄉元穆侯)
褚裒 | 저부
시호 원목(元穆)
작위 도향정후(都鄉亭侯)
(褚)
(裒)
계야(季野)
생몰 303년 ~ 350년 1월 1일
출신 하남군(河南郡) 양적현(陽翟縣)
부친 저흡(褚洽)
순씨(荀氏)변씨(卞氏) → 사진석(謝真石)[1]
자녀 아들 - 저흠(褚歆)
딸 - 저산자(褚蒜子)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외척. 무제 사마염 시기 안동장군 저략(褚䂮)의 손자. 무창태수 저흡의 아들. 강헌황후 저산자의 아버지.

2. 생애

젊었을 적에 간결하고 고귀한 풍모를 지녀 경조군 출신의 명사 두예와 더불어 강동에서 이름을 날렸다. 초국 출신의 명사 환이는 저부를 보고 말하길
"계야(季野)는 피부 속에 《춘추(春秋)》를 품고 있다."
라 평하였다. 이 환이의 평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피리춘추(皮裏春秋)로,[2] 겉으로는 옮고 그름을 따지지 않아도 속으로는 칭찬이나 흉을 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군 사씨 가문의 명사 사안 역시 저부에 대해 항상
"저부는 비록 말이 없어도 내면에 사시(四時)의 기운을 갖추고 있다."
라 평하며 환이와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초기에 서양왕 사마양의 연(掾)으로 임관하였다가 오왕문학으로 옮겨졌다. 이후 역양내사 소준이 모반을 준비하자, 이를 눈치챈 거기장군 치감은 저부를 참군으로 삼았다. 소준의 반란이 평정된 뒤에는 공을 인정받아 도향정후에 봉해졌고, 승진하여 사도 종사중랑, 급사황문시랑을 역임하였다. 조정에서 낭야왕 사마악의 왕비를 물색할 때, 저부의 딸 저산자가 최종적으로 선발되어 사마악에게 시집갔다. 그 덕에 저부는 예장태수에 임명될 수 있었다.

함강 8년(342년) 6월, 성제 사마연이 붕어하고, 그 유언의 따라 성제의 친동생인 낭야왕 사마악이 황제로 즉위하였다.[3] 황위에 오른 강제 사마악은 왕비였던 저산자를 황후로 올리고, 예장태수로 나가있던 저부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 시중으로 삼았다가 상서로 승진시켰다.

함강 8년(342년) 12월, 저부가 스스로 조정에 있기를 꺼려 외직을 자청하니, 강제는 그를 건위장군, 강주자사로 삼고 반주(半洲)에 주둔케 하였다. 저부는 부임지에서도 청렴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방백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병사들을 함부로 부리지 않고 항상 사동(私童)으로 하여금 벌채를 하게 하였다.

건원 원년(343년) 8월, 거기장군 유빙(庾冰)이 거듭 외직을 구하자, 강제는 유빙을 영 강주자사에 임명해 무창(武昌)을 진수하게 하고, 저부를 중앙으로 불러들여 위장군, 영 중서령에 임명하였다.

건원 2년(344년) 8월, 강제는 저부에게 중서령으로서 인재 선발의 업무를 맡으라 명하였지만, 저부는 외척이 그런 업무를 맡는 것은 적합한 인사가 아니라며 굳게 사양하였다. 결국 저부의 고집을 꺾는 데 실패한 강제는 그를 좌장군, 연주자사, 도독연주서주지낭야제군사(都督兗州徐州之瑯邪諸軍事), 가절로 삼아 금성(金城)을 진수하게 하고, 낭야내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건원 2년(344년) 9월, 강제의 병이 위독해지자, 강주자사 유빙과 형주자사 유익(庾翼)이 입조하여 강제의 숙부인 회계왕 사마욱을 후사로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중서감 하충이 이에 반대하면서 강제의 아들인 사마담 황태자로 삼을 것을 추천하니, 강제가 하충의 의견에 따랐다. 강제는 사마담을 황태자로 세우고 이틀 뒤에 바로 붕어하였고, 강헌황태후 저산자가 아직 2살 밖에 되지 않은 목제 사마담을 위해 섭정하였다.

섭정을 맡은 저산자는 하충의 상소에 따라 아버지 저부에게 신하의 예를 면제토록 하고, 시중, 녹상서사, 지절이 더했으며, 도독과 자사는 전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외척이라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공격 받을 것을 두려워 하던 저부는 조정에 상소를 올려 변방의 직책을 굳게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어 도독서연청양주지진릉오국제군사(都督徐兗青揚州之晉陵吳國諸軍事), 위장군, 서연2주자사(徐兗二州刺史), 가절로 고쳐 임명하고, 경구(京口)에 주둔케 하였다.

영화 원년(345년) 정월, 강헌황태후 저산자가 저부를 중앙으로 불러 양주자사(揚州刺史), 녹상서사로 삼고자 하였다. 이부상서 유하(劉遐)가 이를 알고 저부를 찾아가 말했다.
"회계왕의 영덕(令德)은 나라의 주공(周公)과 같습니다. 족하께서는 마땅히 그 분께 국정을 넘기셔야 합니다."
저부의 장사 왕호지도 여기에 맞장구 치자, 저부는 조정에 계속 변방에 머물 것이라는 입장을 굳게 밝히고 직위를 양보한 채 다시 경구로 돌아갔다. 저부의 결정에 조야에서 모두 아쉬워하였고, 조정에서는 저부를 정북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승진시켜 주었으나, 저부는 개부를 굳게 사양하였다.

영화 2년(346년) 3월, 인재 보는 눈이 있던 저부는 고화은호를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에 고화는 상서령이 되고, 은호는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영화 5년(349년) 6월, 후조에서 황제 석호가 사망하고 대규모 내전이 벌어졌다는 보고를 들은 형주자사 환온은 군대를 이끌고 안륙(安陸)으로 나아가 장수들을 파견해 은근슬쩍 북벌의 뜻을 드러냈다. 때마침 후조의 양주자사 왕협(王俠)이 수춘(壽春)을 들고 동진에 투항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러한 국내 분위기에 맞춰서 저부는 조정에 북벌을 상표하고, 곧바로 군대를 일으켜 사구(泗口)로 향하였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저부에게 임무의 책임이 막중하므로 깊이 들어가지 말고 먼저 별동대부터 파견해 정세를 살피라 경고하였다. 하지만 저부는 이에 대해 다시 상소를 올려, 과거 전봉독호 왕이지(王頤之) 등이 팽성(彭城)까지 통하는 지름길을 만들었고, 독호 미억(麋嶷)의 군대가 이미 하비(下邳)에서 적을 무찌르고 성을 점거하였으니, 속히 군대를 발동해야 한다며 반박하였다. 조정은 저부의 주장을 꺾지 못 하고 저부에게 정토대도독, 청양서연예5주제군사(青揚徐兗豫五州諸軍事)를 더하여 주었다. 저부가 30,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팽성을 향해 진군하니, 매일 1,000명에 가까운 북방의 병사와 백성들이 저부의 군으로 항복하거나 귀부해왔다. 저부는 귀부해오는 자들을 어루만져줌으로써 이들의 환심을 샀다.

앞서 가던 독호 서감(徐龕)이 패(沛)를 공격해 후조의 상(相) 지중(支重)을 사로잡으니, 패군에서 2,000여 명의 사람들이 투항하였다. 또, 노군(魯郡)의 산 속에 살던 500여 호의 백성들도 동진군이 왔다는 소식에 거병하여 저부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저부는 부장 왕감(王龕), 이매(李邁)에게 따로 정예병 3,000명을 주어 그들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감과 이매는 저부의 명령을 어기고 대피(代陂)에 주둔하였고, 후조의 남토대도독 이농이 20,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습격하자 대패하여 절반 이상의 병력이 전사하였다. 이농에게 사로잡힌 왕감 등은 절개를 지키며 적에게 굴복하지 않아,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영화 5년(349년) 8월, 왕감의 패배로 더이상 진군할 수 없다 판단한 저부는 물러나 광릉(廣陵)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저부의 북벌이 실패했다는 소식에 수춘을 접수했던 서중랑장 진규(陳逵)는 성에 비축해둔 물자를 전부 불태우고, 성곽을 부순 다음 후조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철수하였다. 저부는 북벌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조정에 상소하여 강등을 구했지만, 목제 사마담은 조서를 내려 패전의 책임은 왕감에게 있고, 지금 같은 시기에 변방을 지키는 임무는 위중하다는 이유로 불허하였다. 저부는 정토대도독에서 해직되고 본래의 주둔지인 경구로 돌아갔다. 이때 후조의 혼란으로 발생한 화북 지방의 유민 20만 명이 황하를 건너 동진에 귀부하고자 구원을 청하였는데, 이미 저부의 군대는 돌아갔고 동진의 위세도 한풀 꺾이면서 여기에 부응하지 못 하였다. 결국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유민 무리들은 모용황부건 등의 공격을 받고 약탈당하면서 전부 사망하였다.

영화 5년(349년) 12월, 저부는 패전 이후 수치심과 분노로 인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저부의 군대가 경구로 돌아왔을 때,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매우 많았다. 이에 저부가 물었다.
"어찌하여 곡소리가 이리도 많은가?"
그러자 좌우에서
"대피에서 전사한 자들의 유족이 내는 소리입니다."
라 답하니, 저부는 심히 부끄럽고 원통하게 여겼다. 그리고 12월 7일[4]에 저부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7세. 저부는 생전에 인망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였고, 휘하의 관리들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리워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시중, 태부로 추증하고, 본래의 관직을 그대로 하였다. 시호는 '원목(元穆)'.

아들 저흠[5]은 학업으로 명성을 얻어, 조정에 임관해 산기상시, 비서감을 역임하였다.

3. 기타

  • 과거 저부는 총각이던 시절에 유량(庾亮)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유량은 함께 있던 곽박에게 저부의 점을 보게 하였다. 점을 본 곽박이 깜짝 놀라자, 유량이 물었다.
    "불길한 점괘라도 나왔습니까?"

    곽박이 답했다.
    "이것은 신하의 점괘가 아닌데, 어찌하여 저 젊은이에게서 이토록 상서로운 점괘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20년 뒤에 내 말이 증명될 것입니다."

    과연 그로부터 29년 뒤에 저산자가 황태후가 되었고, 저부는 황태후의 아버지로서 사석에서는 황제 앞이라도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1] 진군 사씨 가문 명사 사곤의 딸.[2] 피리양추(皮裏陽秋)라고도 한다.[3] 성제의 아들 사마혁은 당시 나이가 1살이었고, 권신인 유빙, 유익 형제가 사마악을 차기 황제로 강력히 지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4] 양력으로 계산할 시, 350년 1월 1일.[5] 자는 유안(幼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