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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束皙
(262 ~ 300)
1. 개요
서진의 인물로 자는 광미(廣微). 사례 양평군 원성현 출신의 문학가이며, 전한의 유학자 소광(疏廣)의 후손이다.[1] 할아버지 속혼(束混)은 농서태수, 아버지 속감(束龕)은 빙익태수를 지냈으며, 형으로는 속구(束璆)가 있다.2. 생애
어려서부터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하기로 유명해, 박사 조지로부터 "양평의 광미는 학문을 좋아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니,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무제 시기, 효렴으로 천거되어 저작랑, 박사, 상서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279년 또는 281년에 급군(汲郡)에서 위양왕의 묘가 농부 부준(不准)에 의해 도굴되었는데, 그곳에서 대나무 책이 수십 수레나 발견되었다. 부준과 급군의 관리들은 화려한 부장품과 보물만을 소중히 다루고 죽서들을 함부로 다뤄, 조정에서 보낸 관리들이 도착했을 때는 파손된 죽서가 많았고 배열도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한다. 무제는 죽서들을 한 데 모으고 명을 내려 자신이 알아볼 수 있게끔 해독하라 지시하면서, 중서감 순욱과 중서령 화교를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속석은 이들의 지시를 받으며 위항, 왕접 등 여러 학자들과 머리를 맞대어 왕묘에서 발굴된 《죽서기년》과 《목천자전》[2] 등의 고서들을 정리해 75권으로 이루어진 《급총서》를 편찬했다.
300년, 조왕 사마륜이 상국으로 삼아 기록실의 업무를 담당하게 했으나, 속석은 서둘러 사직을 청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한가로이 거처하며 문하생을 가르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니, 그 문하생들이 스승을 위해 묘에 비석을 세웠다. 그는 뛰어난 문학가로 여러 저서를 남겼지만 《삼위인사전(三魏人士傳)》, 《칠대통기(七代通紀)》 등은 혼란기에 소실되었으며, 《오경통론(五經通論)》, 《발몽기(拔蒙紀)》, 《박망지(朴亡詩)》를 비롯한 문집 수십 편만이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속석이 나름 고위관직을 누렸던 것에 비해 속석의 후손이나 친척들은 태수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속석의 형 속구가 석감의 조카딸과 결혼했다가 이후에 그녀를 배신하고 버렸기 때문이다. 대관료였던 석감은 이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다른 속씨들을 억압했고 결국 속씨들의 출세길은 전부 막혀 일반 백성처럼 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