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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망채충숙공(望蔡忠肅公) 謝琰 | 사염 | |
시호 | 충숙(忠肅) |
작위 | 망채현공(望蔡縣公) |
성 | 사(謝) |
휘 | 염(琰) |
자 | 원도(瑗度) |
생몰 | ? ~ 400년 |
출신 |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
부모 | 부친 - 사안(謝安) 모친 - 유씨(劉氏)[1]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차남 |
자녀 | 사조(謝肇), 사준(謝峻), 사혼(謝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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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 시대의 인물. 명문가인 진군 사씨 집안 출신으로 태보 사안의 아들이다. 사촌형인 거기장군 사현과 함께 장수로서 활약했다.2. 생애
사염이 20세가 되었을 때, 아름다운 풍채와 올곧은 지조를 가지고 있어 주변인들에게 칭찬받았다. 그는 사촌형인 호군 사담(謝淡)과 함께 살았음에도 서로 왕래하지 않고, 오직 사촌동생 사유(謝惟)를 통해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후 동진 조정에 출사해서 저작랑, 비서승, 산기상시, 시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전진의 선소제 부견이 100만 대군를 거느리고 동진을 침구하자, 사안은 자신의 아들인 사염에게 군국(軍國)의 재능이 있다 여겨 조정에 천거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염을 보국장군에 임명한 뒤, 사현, 환이와 함께 정예병 8,000을 이끌고 정로장군 사석의 휘하에서 전진의 군대와 맞서 싸우도록 했다. 사염은 사현, 환이와 함께 비수에서 부견의 군대를 대파하는 큰 공을 세우고 귀환하니,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망채공(望蔡公)에 봉했다.
태원 10년(385년), 아버지 사안이 세상을 떠나자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내려왔다가 복결하고 다시 관직에 올라 정로장군, 회계내사를 지냈다.
태원 16년(391년), 영태자첨사, 상서우복야로 옮겨지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얼마 뒤, 어머니 유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사염이 상을 치르기 위해 조정에 건의하자, 조정에서 사염이 거짓말 하는 것이라 의심하는 의견들이 나왔다. 이때 몇몇 대신들들이 간언했다.
"반악이 가충을 위해 지은 《의성선군뇌(宜城宣君誄)》에 이르기를, 『과거 무후가 있을 적, 상례(喪禮)와 인륜이 잘 지켜졌다. 부부는 한몸과 같았으며 조정의 의식과 규칙은 공정했다.』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고사에 따라 마땅히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평소 사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던 상서좌복야 왕순(王珣)이 반대했다. 왕순은 낭야 왕씨 집안 출신이라 동진에서 진군 사씨 집안 이상으로 발언권이 강했기에 사현의 건의는 묵살되었고, 사현은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 채 모친상을 치러야만 했다. 결국 사염이 손수 수레를 만들어 조촐하게 장례식을 치르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태원 21년(396년),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가 호군장군으로 옮겨지고 우장군이 더해졌다. 그 해 6월, 효무제가 피살되고 안제 사마덕종이 즉위했다. 사마덕종은 백치에 나이도 어려서 숙부인 회계왕 사마도자가 정권을 잡았다. 사마도자는 사염을 불러 자신의 사마(司馬)로 삼고 우장군 직책은 유지하게 했다.
융안 2년(398년) 7월, 연청이주자사(兗靑二州刺史) 왕공이 예주자사 유해, 형주자사 은중감, 광주자사 환현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사마도자는 근심과 두려움에 떨며 건강성 안팎으로 계엄령을 내린 뒤, 세자 사마원현을 정토도독으로 삼아 모든 일을 위임하고 자신은 매일 술에 빠져 살았다. 그 사이에 환현과 은중감, 양전기 등은 분구를 점령하고 도망치던 강주자사 왕유를 추격해 임천에서 그를 사로잡았다.
사마원현은 우장군 사염에게 가절을 내려 위장군 왕순과 함께 왕공을 토벌하게 하고, 초왕 사마상지에게도 명을 내려 유해를 치게 했다. 사마상지의 군대가 먼저 우저(牛渚)에서 유해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윽고 환현과 양전기의 반격을 받아 전멸해버렸다. 이에 사마원현은 계획을 수정해 자신은 석두성에 주둔하고, 왕순은 건강성 북교(北郊), 사염은 건강성 남문인 선양문(宣陽門)을 지키게 했다.
환현과 양전기의 군대가 석두성에 이르고 은중감의 군대는 무호(蕪湖)에 이르렀다. 연이은 승리로 반군이 기세가 드높아 관군에게 상당히 불리한 형세였지만, 사마원현이 왕공의 장수 유뢰지를 회유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유뢰지는 왕공을 쳐 그의 군대를 격파했고, 왕공은 환현에게 도망가려 하다가 장당호(長塘湖)에서 동진군에게 잡혀 예당(倪塘)에서 아들, 동생들과 힘께 참살당했다. 주모자인 왕공이 허무하게 죽고, 유뢰지의 정예병이 다가오니 환현과 양전기는 놀라 채주(蔡洲)로 군대를 물렸다. 사마도자는 대사면령으로 환현 등의 일당들을 모두 사면하고 관직으로 높여주면서 반란을 잠재웠다. 왕공의 난이 진압된 후 사염은 위장군, 서주자사로 옮겨졌다.
융안 3년(399년) 10월, 두자공(杜子恭)이라는 도사로부터 요술을 전수받았다는 손은이라는 자가 자신의 신도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손은의 무리가 강동의 8군(郡)을 함락시키니 건강성은 크게 진동해 도성 인근 여러 현에서 봉기가 일어나 손은에게 호응했다. 심지어 손은은 건강성 내부에 자신의 신도들을 심어놓아 도성 내의 백성들도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사마도자는 사마원현을 영중군장군으로 삼아 반란 토벌을 일임하고, 사염에게도 독오흥의흥2군군사(督吳興義興二郡軍事)를 더해 손은을 토벌하게 했다.
사염은 토벌군을 거느리고 의흥(義興)에 이르러 그곳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간부인 허윤지(許允之)를 참살한 뒤, 반란군을 피해 피신했던 의흥태수 위언(魏鄢)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해 오흥(吳興)에 이르러서 손은의 또다른 간부인 구왕(丘尪)도 격파했다. 사염과 보국장군 유뢰지의 토벌군이 두 갈래로 강동 누비며 가는 곳마다 손은의 반란군을 전멸시키니, 손은은 대패하여 해도(海島)로 달아났다. 동진 조정은 손은이 다시 나타날 것을 염려해 사염을 회계내사, 도독오군군사(都督五郡軍事)로 삼고 해안 지역을 경계하게 했다.
융안 4년(400년) 5월, 사염은 손은을 경계하라는 임무를 받았음에도 손은을 깔보고 방비를 하지 않았다. 사염 휘하 제장들이 모두 입을 모아 간언했다.
"강적(強賊)이 바다에 머물고 있으니, 정찰을 보내 적의 형세를 살피고 지역을 잘 다스려 어진 기풍을 진작시켜야 합니다."
이에 사염이 말했다."나는 회남(淮南)에서 부견의 백만 대군도 패사시킨 적이 있다. 한데 피를 흘리면서 바다로 도망친 손은이 어찌 감히 다시 나올 수 있을 쏘냐! 하늘은 국적(國賊)을 보살피지 않으니, 설령 돌아온다 하더라도 바로 붙잡아 처형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는 제장들의 간언을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결국 부하들의 우려대로 손은의 무리는 해도에서 나와 협구(浹口)를 침략하고 여요(餘姚)로 들어갔으며, 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상우(上虞)를 격파하고 회계군 인근 형포(邢浦)에 주둔했다. 사염은 참군 유선지(劉宣之)를 파견해 손은을 격파하고 그 무리를 형포에서 쫓아냈지만, 손은은 다시 무리를 수습해 동진의 상당태수 장건석(張虔碩)을 격파하고 다시 형포에 주둔했다. 사염의 장수들은 남호(南湖)에 수군을 배치하고 길목에 복병을 심어두어 방비를 굳건히 해야한다 주장했으나 사염은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7월 7일, 손은의 무리가 회계에 도착하자 사염은 출격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마땅히 먼저 도적을 멸한 후에 밥을 먹을 것이다!"
그러고는 광무장군 환보(桓寶)를 선봉으로 삼고 병사들을 굶긴 상태로 적진으로 돌격했다. 사염의 군대는 적 진영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수많은 적군을 사살했다. 승세를 탄 사염의 군대는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좁은 길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갔다. 사염이 천추정(千秋亭)에 이르렀을 때 미리 매복해있던 적군이 나타나 양쪽에서 화살을 퍼부었고 앞뒤로 길을 끊어버렸다. 사염은 도망치려 했으나 사염의 부하인 장하도독 장맹(張猛)이 배반해 사염이 타고있던 말을 베어 죽였고 낙마한 사염은 그대로 살해당했다. 이 전투에서 선봉에 섰던 환보는 물론이고 사염의 아들 사조(謝肇), 사준(謝峻)도 모두 반군에게 피살되었다.훗날 손은의 난을 진압한 유유는 장맹을 사로잡아 그를 사염의 막내아들인 사혼에게 보냈는데, 사혼은 아버지와 형들의 원수인 장맹을 죽이고 그의 간을 생식했다.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사염 부자의 사망을 위로하고, 사염을 시중, 사공으로 추증했다. 시호는 충숙(忠肅). 참고로 아들 사조는 산기상시, 사준은 산기시랑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