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15:18:35

사마원현

<colbgcolor=#800080><colcolor=#fff> 동진의 종실
會稽忠世子 | 회계충세자
작위 회계왕세자(會稽王世子)
시호 충(忠)
봉지 회계군(會稽郡)
주군 효무제(孝武帝)
안제(安帝)
생몰 382년 ~ 4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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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사마(司馬)
원현(元顯)
낭군(朗君)
부모 부친 회계문효왕 사마도자
모친 회계왕부인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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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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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종실로 자는 낭군(朗君)이다. 동진 말기의 권신이었던 사마도자의 아들로 사례 하내군 온현 출신.

2. 생애

397년 왕공이 왕국보의 토벌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 사마원현은 동진의 시중이었다. 사마원현은 왕공을 싫어하여 사마도자에게 왕공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으며, 사마도자는 사마원현을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고 위장군부와 서주 자사부의 관료들을 모두 사마원현에게 보냈다.

398년, 왕공이 사마상지의 토벌을 명분으로 다시 거병했고 여기에 환현, 은중감, 유해가 호응했다. 사마원현은 이때 왕공의 거병을 토벌하는 데에 주력한 반면, 사마도자는 계속 술에 빠지며 사마원현에게 사무를 위임했다. 사마원현은 나이가 어렸으나 총명했고 과감하고 예민하여 사직의 안위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다. 또한 사마원현을 따른 이들은 사마원현에게서 진명제 사마소의 풍격이 묻어난다고 언급했다.

사마원현은 정토도독(征討都督), 가절(假節)이 되고 왕순(王珣), 사염, 환지재(桓之才), 모태(毛泰), 고소(高素) 등을 거느려 왕공을 진압했다. 그러나 양전기, 환현, 은중감 등이 석두(石頭)로 당도하자, 사마원현은 죽리(竹里)에서 수도인 건강으로 돌아와 환현의 진군을 방어한다. 내외의 상황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사마원현은 산기상시, 중서령이 더해지고 또한 중령군(中領軍)을 겸했다.

사마도자가 술에 빠지다가 병에 걸리자, 사마원현은 아버지가 이미 조정의 인망을 잃은 것을 알고 조정에 요청하여 사마도자를 사도, 양주 자사에서 해임시켰으며, 낭야왕 사마덕문에게 사도를 겸임하게 하고 자신은 양주 자사가 되었다. 사마도자는 술이 깬 뒤에 이 사실을 알았으나 별 다른 방도는 없었다. 또한 사마원현은 여강군 태수 장법순을 신임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으며, 붕당을 만들어 환겸 이하 권세가 있는 자제들과 교류했다.

사마원현은 관노였다가 문벌이 된 이들을 징발하여 악속(樂屬)으로 부르고 이들을 수도로 옮겨 병역으로 충당하다가 불만을 사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불만이 폭발하여 발생한 사건이 바로 손은의 난이었다. 사마원현은 중군장군이 되어 손은 토벌에 나섰고 녹상서사가 더해졌다. 당시 사마도자 부자가 녹상서사를 맡았기에 사마도자는 동록(東錄)으로 부르고 사마원현은 서록(西錄)으로 불렀는데, 사마도자는 계속 술에 빠져서 정무를 사마원현에게 모두 넘겼다. 그래서인지 사마원현의 서록은 사람들로 가득했으나, 사마도자의 동록은 방문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사마원현은 소인들을 가까이 했고 사마원현을 의지한 이들은 모두 사마원현을 한 시대의 영걸이나 풍류를 지닌 명사로 치켜세우며 아첨했으며, 사마원현은 날이 갈수록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졌다. 당시 잦은 전쟁으로 인해 동진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사마원현은 오히려 부를 축적했다.

손은이 다시 침공을 개시하여 사염이 살해되자, 사마원현은 서주 자사를 겸하고 시중, 후장군, 개부의동삼사, 도독16주제군사가 더해졌다가 혜성이 나타나자 사마원현은 녹상서사에서 해임되고 상서령이 되었다. 손은이 경구(京口)로 침입하자, 사마원현은 목책을 치고 손은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고, 결국 손은은 유유에 의해 격퇴되었다. 손은이 격퇴된 뒤에는 환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법순은 사마원현에게 군대를 일으켜 환현을 토벌하도록 조언했고 사마원현은 장법순을 경구로 보내고 유뢰지를 선봉으로 삼았으나, 유뢰지는 이를 주저했다. 장법순이 이 상황을 사마원현에게 알리며 유뢰지를 죽여야한다고 조언했으나 사마원현은 이를 거절했다.

사마원현은 시중,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개부(開府),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 18주제군사(十八州諸軍事), 의동삼사가 더해졌고 유뢰지를 전봉도독으로 삼았다. 장법순은 유뢰지로 하여금 환겸을 죽이도록 사마원현에게 건의했으나 사마원현은 유뢰지가 없다면 환현에게 맞설 수 없다며 거절했다. 유뢰지는 환현이 평정된 뒤 자신이 사마원현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고 사마원현을 제거한 뒤 환현도 제거하려고 하여 출병을 거부했다. 또한 자신이 사마원현을 만나려고 해도 사마원현이 술에 빠져 있는 통에 만나주지 않아서 결국 유뢰지는 환현에게 항복했다.

사마원현은 환현을 토벌하고자 출병할 때 환현의 사촌형인 장사 환석생이 사자를 보내 환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환현은 환석생의 보고를 접하고 심양을 따라 진군하여 수도에 격문을 뿌리며 사마원현의 죄상을 나열했다. 안제가 사마원현을 전별할 때 마침 환현이 신정(新亭)에 도착하자, 사마원현은 국자학당으로 물러났다. 이후 선양문 밖에 진을 쳤으나 환현의 군대가 이미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궁성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유뢰지의 참군인 장창지(張暢之)가 사마원현을 습격하여 사마원현의 군대가 무너졌다. 사마원현의 수하 관리들은 모두 흩어졌고 장법순만이 사마원현을 홀로 따랐으며, 사마원현은 아버지 사마도자에게 계책을 물었지만 사마도자는 그저 눈물만 흘렸다.

환현은 모태를 보내 사마원현을 붙잡아 신정으로 압송하고 사마원현의 죄상을 열거했으며, 이때 사마원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탄과 장법순이 나를 그르쳤구나.

사마원현은 정위로 압송되었고 자신의 아들 6명과 함께 모두 살해되었다. 환현이 몰락한 뒤,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평가

元顯以童丱之年 受棟樑之寄 專制朝廷 陵蔑君親 奮庸瑣之常材 抗奸凶之臣寇 喪師殄國.
사마원현은 어린 나이에 동량의 위임을 받았지만 조정을 전제하고 임금과 어버이를 능멸하며, 재능이 용렬한 인물을 마구 부리고 간흉한 신하의 침공을 막았으나 군대를 모조리 잃고 나라를 무너뜨렸다.
― 『진서』, 「(간문삼자전(簡文三子傳)」, 사신왈(史臣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