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9 17:30:23

한백(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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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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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韓伯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강백(康伯). 예주 영천군(潁川郡) 장사현(長社縣) 출신. 아들로는 한회(韓璯)가 있으며 관직은 형양태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2. 생애

한백의 어머니 은씨(殷氏)는 고명하고 덕망이 높았다.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한백이 10살도 안 되었을 무렵 지독한 한혹기가 찾아오자, 그제서야 은씨는 아들에게 저고리를 입혀주기 위해 한백에게 다리미를 잡게 하고는 말하길,
"일단 저고리부터 입고 있어라. 바지는 나중에 만들어주겠다."
라 하였다. 한백이 필요없다 대답하니, 은씨가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한백은
"다리미 속에 불을 넣으면 다리미 손잡이도 뜨거워지듯이, 저고리를 입으면 마땅히 아랫도리도 따뜻하게 해야 하는 법입니다."
라 답했다. 어린 아들의 대답을 들은 은씨는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한 한백은 문학과 예술에 재능을 보이면서 왕탄지와 외삼촌 은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유량의 아들 유화와 함께 당대 젊은 명사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수재로 천거되어 좌저작랑(佐著作郎)에 임명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당시 어린 목황제 사마담을 보정하던 회계왕 사마욱은 명사를 좋아해 빈객을 널리 모집했는데, 이때 한백은 사마욱의 빈객으로 들어갔다가 사도좌서속(司徒左西屬)으로 임관했다. 그 후로도 관직 생활을 이어나가, 무군연(撫軍掾), 중서랑, 산기상시, 예장태수, 시중, 단양윤, 이부상서, 영군장군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여러 관직을 전전하던 중 병에 걸려 드러누웠다. 점쟁이가 지금 지내고 있는 그 관직은 한백과 맞지 않다 경고하니, 조정에서 그를 태상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한백은 사양했고, 얼마 안 지나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태상으로 추증되었다.

3. 기타

  • 왕탄지가 〈공겸론(公謙論)〉을 지어 원굉과 토론을 벌이자, 평소 학문에 관심이 많던 한백은 그들의 주장에서 옳고 그른 것을 솎아내고, 두 사람의 주장을 절충시킨 〈변겸(辯謙)〉이라는 글을 지어 논쟁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