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8:13:49

치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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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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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동안간백(東安間伯)
郗曇 |치담
시호 (間)
작위 동안현 개국백(東安縣開國伯)
(郗)
(曇)
중희(重熙)
생몰 320년 ~ 361년 2월
출신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鄉縣)
부친 치감(郗鑒)
자녀 1남 1녀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인물. 태위 치감의 차남. 전 중서시랑 치초의 동생. 딸 치도무(郗道茂)가 서성 왕희지의 아들인 왕헌지와 혼인하면서 왕헌지의 장인이 되었다.[1].

2. 생애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의 반란 진압에 아버지 치감이 공을 세워, 치담은 어려서부터 동안현 개국백(東安縣開國伯)에 봉해졌다. 이후 치담이 장성하자, 사도 왕도가 그를 불러 비서랑에 임명하였다. 당시 조정 내에서는 치담이 명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아 임관하였다는 여론이 많았다. 이 때문에 치담의 승진은 여러 번 가로막혀 3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승진하여 산기상시가 되었다가, 다시 승진하여 중서시랑에 제수받았다.

영화 원년(345년) 정월, 회계왕 사마욱이 무군대장군, 녹상서육조사에 올라 목제 사마담의 국정을 보좌하였다. 치담은 사마욱 밑에서 사마를 지내다가 또 승진하여 상서이부랑, 어사중승을 역임하였다.

승평 2년(358년) 8월, 북중랑장 순선이 병에 들자, 조정에서는 치담을 순선의 군사(軍司)로 삼고, 산기상시를 더하였다.

승평 3년(359년) 2월, 산치(山茌) 전투에서 전연군에게 패한 순선은 병이 더욱 깊어져 수도로 귀환하였다. 조정에서는 치담을 북중랑장, 도독서연청유양지진릉제군사(都督徐兗青幽揚州之晉陵諸軍事), 영 서연2주자사(領徐兗二州刺史), 가절로 삼아 순선을 대신케 하고, 하비(下邳)를 지키게 하였다.

승평 3년(359년) 2월, 조정에서 치담과 예주자사 사만에게 명을 내려 전연을 정벌하게 하였다. 치담은 진군하여 고평(高平)에 주둔하면서 전연군과 대치했지만, 이내 병이 걸려 팽성(彭城)으로 철수하였다. 사만은 치담이 전연군에게 패하여 도망치는 것으로 오인하고, 서둘러 군대를 퇴각시키다가 전연군에게 뒤를 내어주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동진의 병사들은 퇴각하는 이유를 몰라 우왕좌왕하였고, 결국 전연의 장수 부말파(傅末波) 등이 뒤를 덮치면서 순식간에 궤멸당하였다. 이로 인해 사만은 관직에서 삭탈되어 서인이 되었고, 치담 역시 건무장군으로 강등당하였다.

승평 5년(361년) 2월, 치담이 사망하고, 동양태수 범왕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향년 42세. 사후 북중랑장으로 추증되고, 시호는 '간(間)'이라 하였다. 아들 치회가 후사를 이어 작위를 습작하였다.


[1] 다만 치도무와 왕헌지는 얼마 뒤에 이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