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9:51:03

우한 국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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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국민정부
武漢國民政府 | Wuhan Nationalist Government
파일:중화민국 국민정부 국기.svg 파일:중국국민당 휘장.svg
국기 국장[1]
1927년 1월 1일 ~ 1927년 9월 21일
천도 이전 영한합작 이후
광저우 국민정부 난징 국민정부
위치 중국 대륙
수도 우한
국가원수 국민정부 주석(왕징웨이)
주요 사건 1926년 12월 13일 우한 임시연석회의 수립
1927년 1월 1일 우한 국민정부 중앙업무 개시
1927년 4월 1일 왕징웨이 귀국
1927년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
1927년 7월 15일 국공결렬
1927년 9월 21일 난징 국민정부와 통합
1. 개요2. 역사
2.1. 우한 국민정부의 성립과 피어나는 좌우익의 대립2.2. 국민정부의 분열과 난징 정부와의 경쟁2.3. 우한의 위기2.4. 북벌의 재개2.5. 토지혁명과 끊이지 않는 반란2.6. 국공결렬난징 정부와의 통합
3. 군사4. 참고 문헌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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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7년, 우한에서 연설 중인 미하일 보로딘

우한 국민정부(武漢國民政府, Wuhan Nationalist Government)는 광저우 국민정부가 우한으로 천도하여 국민당 좌파와 중국공산당이 합작해 세운 정부이다. 이후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 우파를 결집해 난징 국민정부를 세우게 된다.

2. 역사

2.1. 우한 국민정부의 성립과 피어나는 좌우익의 대립

국민당의 1차 북벌우페이푸자오헝티를 몰아내고 양호 지역을 장악하면서 중국 내륙의 대도시 우한 삼진(우창, 한양, 한커우)이 국민당 손에 들어왔다. 본래 천도논쟁을 통해 국민정부는 광저우에 그대로 남기로 결의하였지만, 본래 천도 반대 입장을 견지하던 보로딘과 공산당이 천도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어 1926년 11월 26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에서는 국민당 정부를 우한으로의 천도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0일 재정부장과 사법부장 쉬첸, 교통부장 쑨커, 외교부장 천유런, 미하일 보로딘 등이 우한에 도착하여 13일 담화회를 가졌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중앙당부의 업무를 대행하기 위한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및 국민정부위원 임시연석회의>를 조직, 중앙정치회의가 우한에서 열리기 전까지는 임시연석회의가 최고직권을 행사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연석회의는 1927년 1월 1일부터 중앙업무를 정식으로 개시하였다.

이렇게 북벌은 일사천리였지만 우한으로 천도하기 이전인 광저우 국민정부 때부터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국민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천도논쟁은 물론이고, 영왕운동 등 수많은 측면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심해지고 있었고 이는 우한 천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보로딘이 이전의 천도 반대 입장을 버리고 우한으로의 천도를 추진한 것도 위상이 높아져만 가는 장제스를 견제하고 당권과 정권을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만 차지하게 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에 장제스는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으나, 이내 우한 임시연석회의가 자신의 권력에 발목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1927년 1월 3일 장정강, 탄옌카이가 난창을 지나가는 것을 계기로 임시중앙정치회의를 난창에서 소집하고 회의 참석자들에게 중앙당부와 정부를 일단 난창에 둔 뒤 3월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다시 천도문제를 논의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임시연석회의를 지지하는 우한과 보로딘, 기존의 중앙정치회의를 지지하는 난창과 장제스로 분화되었고 국민당 기관마저 둘로 나뉘어 선전부, 농민부, 공인부, 부녀부, 해외부는 우한을, 조직부, 청년부, 비서부는 난창을 지지하였고 1월 21일 장제스는 우한의 임시연석회의가 불법이라고 비난하며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에 2월 21일 우한은 임시연석회의를 종료하고 우창에서 중앙당부가 국민정부가 일을 시작한다고 선포하였고, 난창의 중앙정치회의와는 별도의 중앙정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날 난창 역시 이에 대항해 난창에 임시중앙정치회의에서 정부는 난창에서 정무를 보겠다고 곧바로 의결하는 것으로 맞섰다.
파일:국민당 제2차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jpg
우한에서 1927년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열린 국민당 제2계 제3차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2]

따라서 우한은 장제스를 막을 다음 카드로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를 꺼냈다. 3월 1일 우한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는 2계 3중전회를 열도록 하고 난창의 위원들도 우한으로 와 전체회의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3월 3일 난창의 중앙정치회의에서 탄옌카이, 천궁보, 허잉친 등이 우한의 2계 3중전회 요청에 호응하자 장제스는 자신이 난창에 두었던 당부와 정부를 우한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며 사실상 우한 정부에 합류했다. 그러나 쉬첸의 연석회의의 역사에 대한 보고로 시작된 이 전체회의는 보로딘과 국민당 좌파가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의결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연석회의는 혁명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직이며 정부의 권위를 대표했다.[3]
  2.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는 당무, 정치, 군사에 대하여 최종의결권을 행사하며 주석제를 채택하고 9명의 상무위원을 둔다.
  3. 정치회의는 정치위원회로 복귀시키고[4] 중앙집행위원회 하부에 두며 그 구성원은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전체위원, 중앙집행위원회가 선출한 6명의 중앙집행위원과 후보중앙집행위원으로 하며 그 중 7명으로 주석단을 조직하되 주석은 두지 않는다.
  4. 정치위원회는 중앙집행위원회 밑의 최고정치지도기관이며 정치문제에 대한 의결 후 교부하여 중앙집행위원회가 국민정부를 지도하여 의결한다.[5]
  5. 군사위원회의 위원 중 일부는 군인이 아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에서 선출하며 군인이 아닌 위원 3명 이상이 참석해야 회의가 성립할 수 있다.
  6. 군장 이상의 지휘관은 중앙집행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서 임명한다.
  7. 총정치부는 중앙집행위원회의 명령에 따른다.

이것은 군을 당에 복속시켜서 국민당 우파에 속하는 장제스의 지위와 권한을 격하시키고 당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회의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을 대거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했고 아직 유럽에 있는 왕징웨이를 국민정부 주석, 조직부장 등 여러 직책으로 피선했다. 정치위원회 주석단 역시 왕징웨이, 탄옌카이, 쑨커, 구멍위, 쉬첸, 쑹쯔원, 담평산으로 좌파가 장악하였으며 우한 주변에는 친공, 친소 포스터가 걸리게 되었다. 또한 2중전회에서 본래 공산당은 부장직을 맡지 못한다는 규정이 사라짐으로써 공산당 출신인 담평산, 소조징이 각각 농민부장으로, 노동부장으로 선출되었다.[6]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위원, 국민정부 위원 및 왕징웨이, 탄옌카이, 쉬첸, 천궁보, 쑨커, 구멍위, 오옥장, 담평산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본래 장제스의 자리였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 군사위원회 주석, 중앙조직부장직을 뺏기는 것은 물론 정치위원회 주석단에는 빠졌으며,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도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정부위원 28인 중 장런제, 천궈푸 등 장제스의 측근들은 모두 배제되어 국민당 우파의 세력은 축소되었다. 이전부터 좌파와 공산당의 독주를 못마땅하게 여긴 국민당 우파는 결국 불만이 극에 달해 공산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국공합작을 끝낼 것을 주장했고 장제스도 몰래 쿠데타를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 코민테른은 영왕운동을 통해 왕징웨이를 옹립하여 국민당 우파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2.2. 국민정부의 분열과 난징 정부와의 경쟁

파일:우한 국민정부의 지도자들.png
우한 국민정부의 지도자들.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미하일 보로딘, 왕징웨이, 쑹쯔원, 유진 첸이다.

국민당의 대립이 심화되자 좌파와 우파는 서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 당내외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던 왕징웨이를 주목했다. 당시 왕징웨이는 중산함 사건으로 외유를 떠난 상태였는데, 좌파와 장제스는 서로 왕징웨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점차 왕징웨이는 국민당의 내분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로 관심이 모아졌다.

결국 1927년 4월 1일, 국민당 좌파의 수장 격인 왕징웨이가 상하이로 귀국하였다.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쑹쯔원, 우징헝 등이 마중나왔다. 왕징웨이는 바로 우한으로 가는 대신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공산당에 대한 경계심, 민중운동에 대한 지지, 쑨원의 유지인 연소용공 정책은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잠시 우한과 장제스 사이에서 간을 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공산당은 최초의 정책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당을 이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산당의 계급혁명과 프롤레타리아 전제에는 찬성할 수 없다. 내가 본 바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원만히 해 나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분간은 협력관계를 유지시키고 싶다. 책임을 지고 양당의 조화를 꾀하도록 할 생각이다."
"나는 노농의 편에 서 있다. 누구든 노농을 무참히 살해하면 바로 나의 적이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에게 국공합작을 끝내어 보로딘의 추방과 분공이 이뤄진다면 자신은 군사 업무에만 전념하며 정무와 당무는 왕징웨이에게 맡기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왕징웨이는 우한의 처사가 심했다고 장제스를 동정해 주었으나[7] 국공합작의 지속을 원하며 양측의 대립을 조정하고 싶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장제스의 제안에 확답을 주지 않았다.[8] 하지만 이후 4월 5일 왕징웨이는 천두슈와 함께 <왕천연합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영구적인 협력을 선언하며 사실상 장제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 발표에 우익 간부들은 격분했으며 이전 4월 2일 국민당 간부회의에서 왕징웨이에게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무릎까지 꿇었던 우징헝은 "왕징웨이가 멋대로 국민당 대표를 사칭하여 중국을 공산당과 함께 통치할 것을 승인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6일, 왕징웨이는 장제스, 장징장, 리스쩡에게 자신은 제1차 국공합작을 희생시킬 수 없고, 당이 존재하는 한 자신은 당의 기율을 지킬 수밖에 없으며 당내분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우한으로 간다고 서신을 남겼고, 그날 밤 우쑹에서 기선을 타고 우한으로 떠났다.

10일 우한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다음 날 중앙집행위원회 정치위원회 제11차 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귀국과정과 상하이에서의 활동, 그곳에서 장제스와 합의했던 2계 4중전회의 난징 개최를 발표하며 장제스와 우한의 갈등을 봉합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파일:1927년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 수립 기념식.jpg
1927년 4월 18일 열린 난징 국민정부 수립 기념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4.12 상하이 쿠데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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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우한행을 두고 볼 마음이 없었다. 장제스는 준비하던 쿠데타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고 마침내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우한의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쿠데타를 보고 격분했으며 4월 17일 장제스에게 출당 조치를 내린 다음에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키고 체포령을 내렸다. 난징 국민정부의 성립 당일인 4월 18일, 우한에서 왕징웨이는 장제스에 대해 "마치 미친듯이 스스로 당과 절교하고 민중과 절연하였으므로 기율상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맹비난했고 난징 정부는 우한 정부를 "공산당에게 장악당한 가짜 정부"로 규정하며 받아쳤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분열되는 영한결렬(또는 영한분열)이 일어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왕징웨이는 황급히 내부결속을 다지려 4.12 쿠데타 직후 중앙집행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우한 정부의 당면문제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의 합작방법"을 제시했고, 그 해결책으로 그동안 명목상으로만 남아있었던 <국공양당연석회의>의 개최를 결정했다. 국공양당연석회의는 본래 장제스가 공산당의 통제를 위해 1926년 5월 2계 2중전회에서 <연석회의조직대강안>을 통해 설치되었지만 활동이 없었는데, 이번 제의로 4월 16일 왕징웨이가 첫 회의를 소집함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는 우한 정부의 현안과 용공정책이 논의되었고, 덕분에 국공합작이 강화됨과 동시에 국민당은 공산당이 주도하던 민중운동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2.3. 우한의 위기

장제스의 쿠데타로 난징 정부가 설립되자 안그래도 내부 혼란이 심했던 우한 정부는 크게 동요했다. 본래 우한 정부는 강남과 주장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4월 7일 중앙당부를 난징으로 이전하기로 미리 결의한 상태였는데, 이게 무산된 것은 물론 우한 정부가 겪고 있던 심각한 재정 문제도 심화되었다. 장제스가 난징에서 장강 통로를 막아 버리자 우한으로 통하는 교통은 마비되어 생필품 부족 사태가 일어났고, 경제활동의 마비로 세수도 감소된데다 뒤이은 4.15 광저우 쿠데타로 광둥이 세금을 보내지 않아 우한의 재원은 후베이성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우한 정부의 세입은 200만 위안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출은 1,700만 위안에 달하는 등 엄청난 적자 상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를 대량 발행했으나 인플레이션만 악화될 뿐이었다. 4월 15일 북벌 자금을 모으려는 요량으로 왕징웨이·탄옌카이·쑨커·쑹쯔원·쑤자오정으로 구성된 전시경제위원회를 설립하여 현금집중정책을 결정했는데, 오히려 상하이 금융계의 반발을 받아 한커우 이외의 모든 은행에서 거래가 중단(...)되는 등 오히려 우한 정부의 경제가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보다못한 보로딘이 "전략적 퇴각론"에 기초한 새로운 외교, 경제정책을 제안했다. 그는 경제봉쇄와 외교단절로 인한 물가폭등과 대량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외교, 정치 측면에서 양보가 필요하다며 구체적으론 다음 등의 5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1. 정부와 공회 대표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규찰대와 무장세력의 권한을 도절하고 노동자 운동의 각종 협상 중재를 맡긴다.
2. 재판소를 설치하여 혁명기율에 따라 노동자 운동을 통제한다.
3. 정부는 물가안정을 위해 가능한 빨리 동원[9]과 생활필수품의 최고가격을 정한다.
4. 실업자 구제를 위한 실업국과 실업자 식당을 운영한다.

이 정책은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외국 상인의 경제활동 보장, 외교문제 처리의 중앙정부 귀속을 도모하는 정책으로, 원래 반제, 반군벌과 민중운동의 발전을 꾀했던 우한 정부의 본래 정책과 거리가 있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보로딘의 제안에 찬성했고 왕징웨이 역시 "우리가 중국 내에서 제국주의 시장을 파괴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이지만 경우에 따라 퇴각도 필요하다"며 동의했다.[10] 정책의 실현으로 공인부장 천궁보, 노공부장 쑤자오정, 외교부장 유진 첸, 재정부장 장조원(張肇元) 등이 중심이 되었고 왕징웨이는 국공양당연석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3가지 당면과제를 설정했다.
1. 정치 문제는 북벌과 동남의 반혁명파 제거를 위해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2. 상업과 교통 문제는 재정문제와 직결되므로 외교부와 재정부의 재정전문가들로 '청산위원회'를 구성하여 방법을 모색한다.
3. 노동자 문제는 현재 30만 명에 달하는 실업문제가 가장 심각하므로 공인부와 노공부가 책임지고 해결한다.

이 "전략적 퇴각론" 정책은 우한의 중심 전략으로 추진되었으나 외국 상인의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이 정책은 결국 민중계급과 충돌하고 만다. 정책의 실시 이후 지방당부의 상황보고에 따르면, 새 정책이 지역현실에 부적합해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토지정책은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고 한다. 거기에 민중운동은 이미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전략적 퇴각론" 정책은 민중운동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동안 사이좋았던 공산당과 국민당이었지만 야심찬 정책을 대차게 말아먹자 둘의 우정에도 금이 갔고 국민당 좌파는 공산당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한다. 좌파는 민중운동의 과격화가 우한 경제의 가장 큰 장애물이며 그 책임은 공산당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왕징웨이도 공산당을 직접 비난하진 않았지만 지방의 대중조직이 멋대로 범인을 체포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2.4. 북벌의 재개

장제스의 쿠데타 이후, 충격받은 우한 정부에서도 탕성즈를 중심으로 장제스를 토벌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코민테른과 보로딘이 반대하며 차라리 북벌을 재개하여 허난성을 점령한 다음 펑위샹과 힘을 합하고 산둥성장쭝창과 손을 잡아 장제스를 삼방향에서 치자고 하였다. 여기에 공산당 지도부 천두슈, 덩옌다가 보로딘의 의견에 동조했고 난징의 분열로 정치, 외교적으로 고립된 우한 정부도 코민테른과의 협력을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이에 동의, 북벌이 재개되어 장제스의 토벌은 이뤄지지 않게 된다.[11] 우한 정부군의 전체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총사령관 탕성즈
    • 제1방면군 총사령관 : 탕성즈
      • 제8군(리핀샨李品仙)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제35군(허젠何鍵)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제36군(리우씽劉興)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 직할부대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제4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7사단, 후베이 제1사단, 후베이 제2사단
    • 제2방면군 총사령관 : 장파쿠이
      • 제4군(황치시앙黃琪翔) : 제12사단, 제25사단, 제26사단, 교도 제1사단, 교도 제2사단
      • 제11군(주허이리朱暉日) : 제10사단, 제24사단
      • 제20군(허룽賀龍) :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탕성즈가 지휘하는 4개군(제4군, 제11군, 제35군, 제36군) 약 8만의 군대는 1927년 5월 13일 허난성을 목표로 자체적인 북벌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봉천군벌의 지휘관 장쉐량은 제3, 4방면군 10만 명을 이용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탕성즈와 펑위샹의 협공에 무너진다. 5월 15일 탕성즈는 허난성 남부 시핑에서 격전 끝에 봉천군 7개 연대를 전멸시키고 20일 뤄허를 점령하였다.

장쉐량은 병력을 급히 증원하고 7만 명의 주력부대를 쉬창 남쪽의 린잉에 집결시켜 공격에 대비하였지만 북벌군을 막을 수 없었고, 17군이 전멸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정저우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북벌군도 약 14,00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29일 쉬창을 점령하고 정저우로 진격하였다. 장쉐량은 정저우만큼은 죽음으로 사수하기로 마음먹었으나 펑위샹이 뤄양과 정저우를 향해 남하하고 쑨렌중이 봉천군을 격파해 뤄양을 점령하자 하는 수 없이 북으로 후퇴를 결정한다. 덕분에 5월 30일 펑위샹의 부대는 정저우와 카이펑에 무혈 입성하게 된다. 같은 날 탕성즈의 부대도 정저우에 당도함에 따라 양군은 합류하게 된다.

2.5. 토지혁명과 끊이지 않는 반란

한편 4월 27일부터 5월 9일까지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공산당은 여기서 우한 정부의 위기상황을 논의함과 동시에 천두슈의 노선을 우익기회주의라고 비판, 국공합작의 강화, 토지혁명의 실현을 촉구했다.[12] 특히 덩옌다는 에서 비옥한 토지는 50무(약 1만 평), 척박한 토지는 100무(2만 평) 이상의 토지를 가진 자는 대지주로 분류하여 몰수한다는 내용의 토지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그동안 공산당은 토지 개혁과 재분배를 외치면서도 지주들의 강력한 반발을 우려하여 25감조(현재의 소작료에서 25%를 경감한다는 내용)와 같은 비교적 온건한 소작료 인하 운동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경자유전[13]과 평균지권[14]에 따른 유상몰수를 채택했고, 그것마저 미래에나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덩옌다의 급진적인 토지 개혁안은 왕징웨이를 비롯한 국민당 지도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보류되었다. 하지만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후난성 국민당부는 중앙의 지시에 불복하여 간부들을 현장에 보내어 토지 몰수에 나섰다. 국민당과 북벌군 내부에서는 소련의 고압적인 태도와 급진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졌고 무엇보다도 북벌에 나선 군대는 주로 탕성즈상계군벌계로, 군인들은 대부분 중소지주 출신이었다. 공산당의 토지몰수 실시가 이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안겨주게 되자 특히 북벌군 내부에서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된다.

결국 5월 9일에는 사천군벌이자 국민혁명군 제20군 군장 양썬이 반란을 일으키고 후베이성 서부를 공격하여 교통 요충지이자 곡창지대인 이창을 점령한 후 현지의 농민 조합을 해산시키고 저항하는 농민들을 마구 살육하는 일이 생겼다. 마침 이창에 주둔 중이었던 제14사단장 샤더우인도 반란을 일으켜 양썬과 연합하였다. 반란은 이후 예팅의 24사단에게 진압당하였으나 당시 탕성즈의 주력 부대가 북벌로 인해 나가 있는 상태였고, 한때 반란군은 우창 남쪽의 즈팡까지 진격하여 우한 정부에게는 큰 위기였다.

5월 21일에는 창사에서 제35군 33연대장 쉬커샹, 교도연대 등 창사에 주둔한 여러 부대가 국민당 후난성 당부와 후난성 총공회, 농민협회 등을 공격하여 노동자, 농민들의 무기가 몰수되고 백여명의 공산당원들이 처형되는 마일사변 이라는 충돌로 이어지고 만다. 5월 29일에는 주페이더가 들고 일어나 장시성에서 공산당원들과 국민당 좌파를 추방하고 난창에 계엄령에 내렸다.

또 6월 28일에는 35군 군장 허젠과 리핀샨군이 각각 우한과 한커우에서 반공을 선언하고 쿠데타에 나섰다. 공산당은 반란 하루 전인 27일 이를 예감하고 무장규찰대 해산, 7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확대회의에서 국민당의 주도권을 인정, 공산당원의 역할을 제한하는 결의를 발표하는 동시에 민중운동과 농공규찰대의 독자적인 행동 금지 등 양보를 이어갔으나 허젠은 여전히 분공을 요구하는 등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왕징웨이는 샤더우인의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에 대해서는 이들이 가진 민중운동에 대한 반감이 원인이라며 처벌하지 않았고, 마일사변에 대해서도 군대와 농회(농민협회) 모두의 잘못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탕성즈도 마일사변의 주동자 쉬커샹에게 가벼운 경고를 내리고 관련자 몇 명을 파면하는 선에서 그쳤다.

또한 상하이 쿠데타 이후 우한 정부는 장제스와 같이 당에 충성하는 군사가 사라졌기 때문에 탕성즈 등의 군벌군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왕징웨이는 반란을 일으킨 주페이더가 자칫 난징에 붙을까 우려하여 처벌하지 않는 한편, 국민을 안심시키는 선전활동을 강화하여 이후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어지는 민중운동을 억제하고 계급갈등을 막기 위해 소부르주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계급이 연합하여 국민혁명을 진행하자는 '소부르주아연합'론을 제시하여 우한 정부의 핵심 정책으로 삼았다.

2.6. 국공결렬난징 정부와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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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양썬과 샤더우인의 반란은 실패했으나 군벌 허젠 등의 도움으로 샤더우인은 난징 정부에 붙을 수 있었고 양썬은 도로 사천으로 쫓겨났지만 무사했다. 우한 정부는 이로 인해 후베이성 일부와 후난성 대부분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잦은 반란과 여러 실패로 안그래도 행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우한 정부는 난징 정부와 타협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이렇듯 우한에서 혼란이 계속되자 6월 1일, 코민테른은 '5월 지시'를 중국공산당에게 하달했다.
1. 토지혁명 없이 승리는 없다. 농민협회를 통하여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되 국민당의 법령에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2. 농민의 과격한 행동을 제지하되 군대를 동원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농민협회를 통하라.

3. 국민당 일부 연로한 지도자들은 심적으로 동요하고 타협을 원하고 있다. 국민당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아래로부터 새로운 노동자, 농민 영도자들을 끌어들여 국민당에 가입시켜라. 또한 노동자, 농민 조직에서 수백만명을 모집하여 국민당 지방 조직을 확대하라.

4. 신뢰할 수 없는 장교를 제거하라. 2만 명의 공산당원과 후난, 후베이성의 노동자, 농민 5만 명으로 혁명 군대를 만들라.

5. 장제스와 연락하거나 인민을 살해하고 핍박하는 반혁명 장교들을 엄벌에 처하라.
스탈린의 5월 지시

이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장악하겠다는 통지와 다름없어 공산당원들도 충격을 받았고 천두슈는 중국의 현실과 맞지 않는데다 강제하기 힘들다는 전보를 쳤다. 보로딘까지 무리한 요구라고 평할 정도였지만 소련 공산당코민테른은 단호했고, 중국공산당에게 우한 정부와 관계를 끊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마헨드라나트 로이가 왕징웨이에게 지시의 내용을 보여주었고 왕징웨이는 스탈린의 5월 지시를 읽어본 후 마침내 분공을 결심하게 된다.[15]
파일:1927년 6월 8-10일 왕징웨이와 만난 펑위샹.jpg
파일:1927년 6월 19일 장제스와 만난 펑위샹.jpg
1927년 6월 10일 왕징웨이와 만난 펑위샹 1927년 6월 19일 장제스와 만난 펑위샹

왕징웨이는 난징 정부와 공산당에 모두 맞서기 위해 서북군벌펑위샹, 염계군벌옌시산과 접촉하려고 하였다. 왕징웨이는 1927년 6월 10일 공산당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정저우에서 펑위샹을 만나 허난성, 간쑤성, 섬서성 비롯한 17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의 지배권과 군사 지휘권, 장쭤린의 영토에 대한 통치권과 금전적 지원을 해달라는 요구를 모두 들어주며 펑위샹의 지지를 받아내었다.[16] 하지만 펑위샹은 바로 6월 19일, 쉬저우에서 장제스와 만나 장제스가 허난성의 지배와 매달 250만 위안의 지원금을 약속하자 우한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장제스에게 붙었고, 옌시산도 장제스가 즈리성(현 허베이성)을 주겠다는 장제스의 말에 넘어갔다. 또한 펑위샹은 장제스와의 회의 후 전보를 이용해 미하일 보로딘의 추방과 공산당원의 숙청, 북벌의 완수를 요구하여 우한 정부를 압박하였다.

6월 20일, 펑위샹이 통수를 치자 공산당과 보로딘은 우한정부의 북벌이 실패했다고 판단, 장제스 공격만이 살길이라며 탕성즈와 왕징웨이를 설득해 동정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8일 상술한 허젠과 리핀샨군의 쿠데타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왕징웨이가 정치위원회 제35차 회의에서 동정 안건을 제의하고 우한정부의 모든 재정, 병력, 군수, 병기를 집중해 동정을 준비시킴으로써 다시 추진되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난징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준비만을 요구할 뿐, 며칠 후 민중단체의 장제스 토벌 청원을 금지시킴으로써 사실상 동정을 거부했고 동정 준비를 이용해 공산당과 민중운동을 억제하고 자신과 탕성즈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
파일:1927년 여름의 상황.jpg
1927년 여름의 상황

한편 중국공산당은 7월 12일,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미하일 보로딘은 소련으로 귀국, 천두슈 등으로 구성되었던 당 수뇌부를 저우언라이, 리리싼, 장궈타오, 장타이레이, 리웨이한의 젊은 당원으로 갈아치우고 다음날인 7월 13일, <대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우한 국민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며 탈퇴를 선언하였다. 왕징웨이는 이 결정에 "공산당이 반혁명을 일으켰다"고 비난하며 공산주의자들을 우한 정부에서 정지시켰다.

7월 15일, 왕징웨이는 중앙상무위원회 확대회의 석상에서 코민테른의 5월 지시를 폭로하며 사실상 분공을 정식으로 결정했다. 7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도 공산주의자들을 요직에서 축출하자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우한은 소련의 원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진 않았기 때문에 한 달 내에 4중전회를 열어 분공을 제의한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공산당원, 노동자, 농민의 자유와 보호도 함께 결의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인 "용공"은 포기할지라도 소련과의 연합인 "연소"는 유지하려 하였다.
"공산당의 국민당 가입코민테른 지시에 의한 것임은 알았지만 코민테른이 공산당에 내리는 훈령내용은 몰랐는데,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중략) 현재 공산당의 행동은 삼민주의와 건국대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코민테른의 훈령에 따른 것이다."
왕징웨이.

분공 이후 탕성즈는 왕징웨이를 부추겨 이번에야말로 진짜 장제스를 격파하고 난징 정부를 무력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동정군을 조직했다. 동정군은 제3군, 제4군, 제6군, 제11군, 제35군, 제36군 등 약 8만 명으로 이루어졌다. 7월 17일, 탕성즈는 장시성 주장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동정에 나섰다. 장제스는 탕성즈의 군대가 난징을 향해 진격 중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대치 중이던 쑨촨팡, 장쭝창 연합군을 향해 맹공을 지속했으나 쉬저우에서 쑨촨팡의 매복에 걸려 왕티엔페이의 제10군이 궤멸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17] 서쪽에서는 이미 안칭을 점령한 탕성즈의 군이 다가오고 있고, 북쪽에서는 쑨촨팡, 장쭝창 군이 공격해오는 상황에서 장제스의 난징 정부는 하루아침에 전세가 뒤집어졌다. 리쭝런은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고 장제스를 위로하면서도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며 하야를 권유했다. 결국 이로 인해 장제스는 하야를 결심하고 난징 정부도 우한 정부와의 통합을 시도하게 된다.[18]

8월 1일, 중국공산당은 우한 정부의 국공결렬에 대항하여 난창 폭동, 추수폭동을 일으켰고 이후 우한 국민정부는 8월 5일 공산당의 단속을, 8월 8일 공산당 간부 체포령을 하달했다. 한편 왕징웨이의 요구에 따라 장제스가 8월 13일 하야하였고 9월 21일, 우한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이전한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우한 정부를 종식시키고 영한합작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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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군사

우한 국민정부는 난징 국민정부와 별도의 군사를 운용했다. 난징 정부는 전체 12개군 32사단 약 15만의 군사 중 가용 병력은 2, 3만밖에 되지 않았고, 허잉친의 제1군과 리쭝런의 제7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북벌 중에 흡수한 항병 부대라 사기와 전투력이 낮았다. 그러나 우한 정부는 6개군 28사단 약 10만 명 정도로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북벌군의 정예 부대 8만 명이 포함되어 있어 질적으로 우세했다. 양 측의 군사력은 거의 비슷했으나 우한 정부는 동쪽으로는 장제스, 남쪽으로는 장제스와 동맹인 리지선, 북쪽은 장쭤린, 서쪽은 사천군벌에게 가로막혔고 나중에는 북쪽의 펑위샹과 옌시산마저 등을 돌리면서 사방이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4. 참고 문헌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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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화민국 국민정부 문서의 국장과는 조금 다른데, 1928년 12월 17일 전까지 국민정부는 중국국민당의 휘장을 사용하였다.[2] 2번째 줄 오른쪽에서 3번째에 마오쩌둥도 보인다.[3] 이전에 우한 연석회의가 정당하지 않다고 난창에서 길길히 날뛰던 장제스를 공격하고 아예 못을 박으려는 것이 의도였다.[4] 장제스는 1926년 7월 중앙정치위원회를 중앙정치회의로 바꾸며 권력을 약화시켰는데, 이를 다시 복귀시킨 것이다.[5] 이상의 3항은 중앙정치위원회는 중앙집행위원회 아래에 있으며 최종의결권 역시 중집위에 있다고 명확히 함으로써 중앙정치위원회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으로, 장제스가 난창에서 중앙정치회의를 멋대로 장악해 우한 중앙과 대립한 것에 따른 조치였다.[6] 다만 하술하듯이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에 공산당 출신 2인(오옥장, 담평산)이 선출되었으나 1926년의 2전대회의 3인보다 한 명이 적었고, 16인의 군사위원에서 공산당은 빠짐으로써 국민당의 고위 기관에서는 공산당의 영향력이 제한되었다.[7] 같은 날인 4월 1일, 우한 국민정부는 기습적으로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의 자리에서 면직한다고 발표하였고 훗날 4.15 광저우 쿠데타를 일으키는 리지선에 대해서도 중앙의 허가 없이 함부로 상하이로 가서 장제스를 만났다는 이유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상태였다.[8] 다만 4월 3일에는 용공원칙을 재확인, 공산당의 활동을 일시 제한하고 4월 15일 난징에서 2계 4중전회를 열어 당내분규를 해결하자고 합의하긴 했다.[9] 청나라 말기부터 통용된 보조화폐. 동원 100장이 은 1원에 해당했다.[10] 보로딘의 의견에 쉬첸이 법적 문제를 제기하긴 했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받아들여 재판소를 징계위원회로 고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11] 코민테른은 4.12 쿠데타 직후에도 국민당 좌파와 결속은 강화하되 장제스를 직접 적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공산당에게 내렸다. 여기에는 장제스를 이길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는 현실론과 장쭤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상술한 우한 정부의 심각한 경제난도 한몫했다.[12] 여기에는 소련의 압력도 있었다. 스탈린은 즉각적인 효과를 보고 싶어해 중국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토지몰수를 밀어붙였기 때문.[13] 耕者有田. 경작자가 밭을 소유함.[14] 平均地權. 민생주의 정책 중 하나로, 토지의 소유를 균등화하는 정책.[15] 보로딘은 지시의 공개를 거부했지만 로이는 굴하지 않고 왕징웨이는 틀림없이 받아들일 것이라며 공개했는데, 로이는 우한 국민정부가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말을 잘 듣는 단체로 생각한 듯 하다. 사실 이것은 로이뿐만 아니라 소련도 다르지 않았다. 소련에서도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지시에 충실이 따르는 하위 조직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하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고 있었으며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모스크바 코민테른의 지시만 기다리는 등 주체성이 부족하였다. 소련도 중국공산당의 '보모' 역할을 자처하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하술할 천두슈는 이때 코민테른의 지시를 반대하는 전보를 친 것이 화근이 되어 쫓겨나고 대신 코민테른의 지시를 잘 들을만한 '젊고 의욕이 넘치지만 경험은 없는' 인물들로 채워지게 된다. 단적인 예로 이때 당 간부로 뽑힌 저우언라이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16] 당시 우한 정부군의 총사령관 탕성즈장쭤린봉천군벌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우한의 방어 능력이 떨어졌고, 왕징웨이는 펑위샹의 국민군에게 침공받지 않도록 무리한 요구까지 모두 들어줘야 했다. 한편, 이 회의는 국민당 좌파, 펑위샹군, 코민테른 대표만으로 진행하여 중국공산당의 배제가 눈에 띄었다. 때문에 공산당은 비밀리에 장궈타오를 파견하여 회의 내용을 알아내야 했다.[17] 리쭝런은 탕성즈 동정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자칫하면 양쪽에서 공격받을 수 있으니 후퇴하자고 했지만 장제스는 "쉬저우를 점령하기 전까진 난징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장제스의 군대가 쉬저우 깊이 들어오자 쑨촨팡은 매복해두었던 군사를 이용해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장제스는 크게 패하여 쑨촨팡의 손실은 1만, 장제스는 3만의 피해를 입고 돌아온다. 장제스도 이것은 온전히 자신의 실책이라고 인정하였다.[18] 이후 장제스가 하야하자 본래 '장제스의 토벌'을 명분으로 진격하던 동정군도 멈추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