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17 12:41:13

제2차 국공합작


1. 개요2. 배경
2.1. 제1차 국공합작의 붕괴와 대장정2.2. 일본 제국의 침략과 시안 사건
3. 전개
3.1.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과 항전의 수행3.2. 공산당의 확장과 소련의 지원3.3. 유명무실해진 합작과 국공내전

1. 개요

제2차 국공합작(第二次國共合作)은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그동안의 반목과 내전을 멈추고 힘을 합한 사건이다.

2. 배경

2.1. 제1차 국공합작의 붕괴와 대장정

제2차 국공합작의 시작을 이해하려면 먼저 제1차 국공합작의 붕괴와 그 후의 공산당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1924년부터 시작된 제1차 국공합작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고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북벌을 수행하며 군벌들을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려 했던 시도였다. 그러나 1927년 4월,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공산당 세력을 무력 토벌한 이른바 4.12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위기를 맞았고, 7월 왕징웨이우한 국민정부마저 분공을 선언하며 최종적으로 국공합작은 붕괴하고, 양당은 다시 적대적 관계로 돌아섰다.

이후 공산당은 도시 봉기 전략을 고수하며 난창 폭동,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 등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이러한 연이은 패배 속에서 공산당 지도부는 교체되었고, 마오쩌둥주더와 함께 농촌으로 중심지를 옮겨 유격전 중심의 농촌혁명 전략을 추진하게 된다. 정강산과 장시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한 활동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지만, 국민당의 반복적인 초공작전(圍剿作戰) 속에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제5차 초공작전의 성공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붕괴되었고, 공산당은 대장정의 길에 오른다.

대장정으로 공산당은 중국을 반 바퀴 돌아 간신히 산시(섬서)성의 옌안 지역에 정착했으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당시 홍군 병력은 3만 명 수준으로 줄어 있었고, 장제스는 여전히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을 계속했다. 옌안 인근 4개 현에 불과한 공산당의 통제 지역은 언제든지 국민당군에 의해 제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공산당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대중 선전과 여론 조작을 통한 정치적 압박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전략을 세운다. 공산당은 지방 언론과 유인물 등을 통해 장제스가 일본의 침략에는 소극적이면서 오히려 내전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는 ‘항일보다 내전’이라는 비판을 유도하여 국민당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을 형성하려는 의도였다.

2.2. 일본 제국의 침략과 시안 사건

이 시기에 일본의 침략은 점점 노골화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국제 여론과 군사력의 한계로 인해 <부저항주의>, <일면저항, 일면교섭> 등의 정책을 중심으로 소극적인 대응을 취했고, 이러한 태도는 국내적으로 많은 불만을 낳았다.

장제스는 여전히 ‘공산당 토벌이 우선’이라는 <선안내 후양외>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위협은 점점 더 현실이 되었다. 특히 1935년 화북지역에서 일본이 ‘화북 자치운동’을 통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지식인과 민중은 점점 더 항일 통일전선을 요구하게 되었다. 국민당 역시 일본에 대비하기 위해 1935년부터 소련과 접촉하였고, 1936년 여름~가을에 와서는 공산당과도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소련마저 국민당이 통치하는 중국에서 공산당이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예상하고 공산당 입장에서는 치명적이고 굴욕적인 합의안에도 동의를 표하며 국민당은 최종적으로 공산당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기회가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시안 사건(西安事變)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봉천군벌의 수령이었던 장쉐량만주사변 이후 모든 세력을 잃고 장제스에 의해 섬서성에 보내져 옌안 공산당에 대한 초공작전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전직 군벌 출신의 지방 잡군이었던 동북군은 이미 수 차례 국민당의 초공작전을 버텨오며 유격전에 있어서는 이미 베테랑이 된 홍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장쉐량은 연전연패하며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공산군을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알게 된 장쉐량은 공산당과 적당히 싸우는 척을 하며 일정 수준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미 장제스가 소련, 공산당과의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장쉐량은 이대로라면 자신의 군대가 명맥도 없이 소멸할 것이라 여겨 공산당의 항일 주장에 동조하며, 더 이상 내전이 아니라 일본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장쉐량은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 전역을 시찰하기 위해 시안에 방문한 틈을 타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 사건을 일으킨다. 그는 장제스에게 공산당과의 합작 및 항일전선 형성을 요구했고, 처음에 장제스는 이런 장제스의 하극상과 갑작스러운 요구에 완강히 거부했으나, 공산당 측 저우언라이와 난징에서 날아온 아내 쑹메이링과의 협상을 통해 장제스는 이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진행 중이던 소련, 공산당과의 합의 과정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기존 항복과 다름없는 합의에 내몰렸던 공산당은 기사회생하여 산간닝 변구라는 공식 영토를 인정받게 된 것은 물론 기존의 협상을 뒤엎을 수 있었고, 장제스는 공산당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다.

3. 전개

3.1.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과 항전의 수행

시안 사건 이후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협력에 동의하면서, 국공 양당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앞둔 1937년 7월의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 공동 항일 전선 형성에 합의하게 된다. 이로써 10년간의 적대 관계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시작되었다.

공산당은 명목상 국민당 정부의 지휘를 받기로 하였으며, 홍군(紅軍)을 해체하고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으로 재편하여 국민혁명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 확장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다. 국민당 또한 공산당의 충성 서약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당면한 대일 항전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일단 협력하는 형식을 취했다.

양당의 연합은 기본적으로 군사 협력과 영토 통제권의 재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공산당은 산시, 허베이, 산둥 등 북중국의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의 배후를 교란했으며, 이는 국민당 정규군의 주요 전선 전투와 병행되었다. 공산당은 명분상 국민정부 휘하에 편입되었지만, 실제로는 독립된 군사 조직과 정치 체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한편, 국민당은 주로 대도시와 주요 교통 요충지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정규 전투를 벌였으며, 특히 상하이 전투(1937), 우한 전투(1938), 창사 전투 등을 통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당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수도 난징은 함락(1937년 12월)되어 난징대학살이라는 참극이 발생했다.

3.2. 공산당의 확장과 소련의 지원

국공합작은 국민당에게도 외교적 성과를 안겨주었다. 특히 중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서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이는 직접적인 군사 및 경제 원조로 이어졌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은 국민당 정부에 항공기 985대(전투기 572기, 폭격기 322기 포함), 전차 82대, 차량 1,550대, 포병 장비 1,317문, 소총 5만 정, 대전차포 50문, 탄약 1억 6,450만 발, 항공유 및 포탄 190만 발 등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 조종사 및 군사 고문단도 중국 전선에 참전하여 국민당군의 항공 작전을 돕고 전술 훈련을 제공했다. 이와 함께 2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차관이 제공되며 중국의 대일 저항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공산당은 농촌 지역에서의 유격 활동과 정치 선전 활동을 통해 빠르게 지지 기반을 확장했다. 팔로군신사군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구실로 ‘항일 근거지’(抗日根據地)를 다수 건설하며 실질적인 행정 통치를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을 대상으로 토지 정책, 간소한 세금 제도, 교육 확대 등을 실시하여 주민의 호응을 얻었다.

옌안에 자리한 공산당 중앙은 이를 기반으로 ‘통일전선 아래의 독립 활동’이라는 전략을 고수했고, 이를 통해 국민당 정부의 견제를 피해 사실상 독자적인 정권 기반을 다져 나갔다. 특히, 일본군의 공격이 국민당 중심의 대도시에 집중되는 사이 공산당은 전략적 후방에서 안정적으로 조직과 군대를 재편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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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타통작전 직후의 전역. 점령되지 않은 중국 영토 내 가장 큰 빗금친 붉은 영역이 중국공산당의 산간닝 변구, 일본군 점령지 내의 크고 작은 빗금친 영역이 모두 공산당 근거지이다.

3.3. 유명무실해진 합작과 국공내전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양당 간의 갈등은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공산당이 전쟁을 빌미로 군사력과 정치 기반을 확장하고 있는 데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1939년 4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산당의 산간닝 변구를 봉쇄하는 등 이는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갈등은 1941년 1월, 중국 안후이성에서 벌어진 환남사변(新四軍事件)을 계기로 폭발하게 된다. 당시 공산당 계열의 신사군이 국민당군의 명령 없이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국민당군에 의해 포위·습격당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이 사망하거나 생포되었고, 지휘부는 괴멸하였다.[1] 국민당은 이 사건을 빌미로 신사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해체를 명령했으며, 공산당은 이를 일방적 배신으로 규정하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 이전에도 이미 국공합작은 겉으로만 유지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합작을 이루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공산당은 전쟁 초기에는 백단대전 등 전투를 수행하기도 했으나 곧 일본군과의 전투는 회피하고 세력 확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사실 환남사변 이전의 신사군 또한 수시로 국민혁명군을 공격하는 등 들쑤시고 다녀 국민당이 골머리를 썩히던 상황이었는데, 이 역시 마오쩌둥이 신사군은 세력 확장을 안하고 있다며 질책한 결과였다. 결국 국공양당은 겉으로는 항일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전 직전의 정치·군사적 대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물론 공산당의 주요 목표였던 세력 확장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 점령지 내에서 유격전 등을 수행하여 일본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교란하는 등의 성과는 있긴 했다. 이후에도 공산당과 국민당은 각자의 통제 지역에서 별개의 정부 기능을 운영하며 갈등의 골을 깊게 해나갔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항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중국은 다시 내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돌입한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국민당 정부는 국제적으로 중화민국의 정통 정부로 인정받았고, 유엔 상임이사국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공산당이 이미 광범위한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각지의 해방구에서 군사적, 정치적 기반을 탄탄히 구축해 둔 반면, 국민당은 중국의 공식 정부로써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서남부의 먼 충칭에 정부가 있어 지리적으로도 불리했다. 미국의 중재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1945년 8월 충칭 회담을 통해 국공내전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미국의 어설픈 중재와 간섭, 중국 상황에 대한 몰이해는 오히려 중국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듬해부터 전면적인 제2차 국공내전(第二次國共內戰)이 재개되었고, 내전 초반에는 국민당이 압도적인 군대 수를 바탕으로 우위를 점했지만, 공산당은 근거지 옌안에서 가까운데다 일본군이 건설해놓은 자원이 풍부한 만주로 돌격해 세력을 얻었고, 기존 유격전을 통해 만들어놓은 기반 및 국민당의 인플레이션과 부패 등의 요인 덕에 점차 전세를 역전시켰다.

[1] 여담으로 신사군 지휘부는 본래 마오쩌둥과는 관련이 적어 통제를 덜 받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마오쩌둥은 덩샤오핑, 류사오치 등을 급파해 신사군 지휘부를 장악하여 자신의 휘하로 복속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