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2:03:30

중원대전

반장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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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산회의 1928년 7월 6일~7월 12일 신중국의 질서 논의
동북역치 1928년 12월 29일 봉천군벌의 항복
편견회의 1929년 1월 1일~1929년 12월 15일 군대 감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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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장풍전쟁 1929년 5월 23일~7월 12일 펑위샹의 1차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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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장풍전쟁 1929년 10월 11일~1929년 11월 20일 펑위샹의 2차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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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대전 1930년 4월 5일~1930년 11월 4일 옌시산의 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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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대전
中原大戰
Central Plains War
파일:중원대전도.png
기간
1930년 5월 11일 ~ 1930년 11월 4일
장소
중국
원인
옌시산의 반란
결과
난징 국민정부의 승리
옌시산과 펑위샹의 실각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svg 난징 국민정부
파일:대만 국기.svg 동북군
파일:대만 국기.svg 상계군벌
파일:대만 국기.svg 전계군벌
지원국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바이마르 공화국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장쉐량
파일:대만 국기.svg 천밍수
파일:대만 국기.svg 한푸쥐
파일:대만 국기.svg 허잉친
파일:대만 국기.svg 옌시산
파일:대만 국기.svg 펑위샹
파일:대만 국기.svg 리쭝런
파일:대만 국기.svg 바이충시
파일:대만 국기.svg 장파쿠이
파일:대만 국기.svg 푸쭤이
파일:대만 국기.svg 류원후이
병력
60만명 70만명
피해
사망: 3만명
부상: 6만명
사상자: 15만명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옌시산의 장제스 하야 요구3.2. 중원대전의 발발3.3. 서북의 준동과 계계의 진압3.4. 베이핑 국민정부의 수립3.5. 장쉐량의 참전3.6. 옌시산과 펑위샹의 하야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6.2.1. 중원대전 이전6.2.2. 중원대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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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원대전의 전개 과정

1930년 4월 5일부터 11월 4일까지, 6개월에 걸쳐 옌시산의 염계, 펑위샹의 풍계, 리쭝런, 바이충시계계, 왕징웨이개조파, 쩌우루, 셰츠 등의 서산회의파가 합작하여 장제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초대형 반란으로, 반장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쟁이다. 하지만 장쉐량의 지원을 받은 장제스가 이번에도 승리하면서 패권을 확고히 했다. 장염풍대전이라고도 한다.

2. 배경

2차 장풍전쟁장당전쟁에서 장제스가 승리하면서 장제스의 패권은 확고해보였다. 하지만 근성넘치는 서산회의파는 펑위샹, 옌시산, 장쉐량의 반장 합작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낳았다. 난징 국민정부는 서산회의파의 지속적인 반정부 투쟁에 1929년 12월 12일 쉬충즈, 셰츠, 쥐정, 쩌우루 등의 당적을 박탈하고 지명수배를 결정했다. 하지만 12월 13일 서산회의파는 장제스의 즉시 하야와 출국을 요구하였고 리례쥔을 비롯한 국민당 원로들이 다수 이 전보에 연명하여 파장이 커졌다. 서산회의파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자 국민정부도 더욱 강경해져 국무회의 주재로 지명수배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국민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쩌우루는 1929년 말부터 1930년 초까지 펑위샹과 옌시산 진영을 오가며 반장 세력의 규합을 추구했다. 펑위샹은 2차 장풍전쟁에서 자신을 배신한 옌시산에 대해서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라고 악감정을 표출했지만 펑위샹이 반장을 하기 위해서는 옌시산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이에 펑위샹은 쩌우루를 통해 옌시산의 분명한 태도 표명을 요구했다. 현실적인 이유로 계속 중앙 옹호의 입장을 취했던 옌시산이었지만 편견과 정치분회 폐지를 통한 장제스의 중앙집권화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태도 변화를 보이며, 당과 국가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여 당국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옌시산이 반장 세력에 합류하겠다는 분명한 의사표시였다.

옌시산은 반장 결심을 굳히기 위해 비서를 파견하여 장쉐량에게 합작 의사를 타진했다. 쩌우루는 장쉐량을 만나 "동북의 특수한 사정에서 동북군의 최우선 임무는 국토의 보호에 있는 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를 부탁"하며 중립 고수를 요청했다. 장쉐량은 쩌우루의 의견에 절대찬성을 표명했다. 옌시산과 펑위샹은 장쉐량의 태도가 자신들에 대한 옹호로 간주하고 장제스에 대한 봉기를 준비했다.

3. 전개

3.1. 옌시산의 장제스 하야 요구

1930년 2월 10일, 지금껏 중앙 옹호의 입장을 보이던 옌시산이 장제스에게 하야를 요구했다.
"당신과 함께 물러나서 쉬고 싶다. 나라를 위해 타인에게 길을 양보하는 것은 중화민국 고유의 정신이며 야(野)에 있으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오늘날 유일한 구국의 길이다.

이는 겉으로는 부드러운 말이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에게 하야를 요구하는 반중앙의 요구였고 산서군은 이미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장제스는 이에 대해 2월 12일 단호히 거부했다.
"현재와 같은 내우외환 때에 개인의 진퇴는 당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옌시산의 반장 태도에 왕징웨이, 천궁보개조파, 셰츠, 쩌우루 등 서산회의파가 평진 지역에 집결하여 옌시산에게 연일 반장을 부추겼다. 2월 20일, 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는 <동포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자를 토벌할 것이라는 결의를 내놓음으로 옌시산에 경고했다. 하지만 2월 21일, 리쭝런, 황샤오훙, 바이충시, 장파쿠이, 호종탁 등이 연명으로 장제스의 하야와 옌시산의 전국 육해공 총사령 취임을 요구했고 옌시산은 2월 23일 펑위샹, 리쭝런 등을 규합하여 45명의 연명으로 국군의 재편견을 요구함으로 장제스에 대한 반기를 분명히 했다. 이로써 주요 반장세력이 모두 하나로 규합된 것이다. 3월 1일 장쉐량이 장제스와 옌시산 모두에게 분쟁 중지를 통전했다. 장쉐량의 화평 요구에 장제스는 화평통일을 원한다고 답전했으나 장제스는 3월 2일 장쉐량에게 보내는 답전에서 반동분자들이 당국을 배반한 일에 대해서는 부득이하게 무력으로 제재해야 하며 3월 1일 전체회의에서 위원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옌시산이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가 화평의 조건으로 내건 7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 1. 체포한 당원의 자유를 회복시켜 직권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라.
  • 2. 임의로 동원하여 타성을 범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 3. 산동, 하남 각 부대는 일정 기간에 철퇴하라.
  • 4. 중화민국군 명의의 임명은 취소하라.
  • 5. 진포선교통 및 경기지방 각 기관은 회복하라.
  • 6. 반동분자 왕파친(왕법근), 쩌우루 등은 추방하라.
  • 7. 옌시산은 개인은 성의를 가지고 의지를 표명하라.

3월 2일 옌시산도 장쉐량에게 통전하여 평화통일을 원한다고 답변했으나 말 뿐이었다. 장제스는 전쟁의 시작에 앞서 잠시 고민했다.
비록 현재의 상황에서 한 종류 혹은 다른 종류의 결합과 분열을 통한 몇몇 새로운 발전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전략을 수립하기란 어렵다. 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 사람과 동맹을 맺는 일, 또는 이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저 사람과 동맹을 맺는 일은 적절한 접근을 하기 위한 옳은 방법이 아니다.
1930년 3월 5일, 장제스의 일기.

하지만 곧 장제스는 3월 8일, 옌시산을 토벌할 뜻을 다짐했다.
이미 반역한 자로서 귀순하지 않는 자, 반복이 무상한 자에 대해서는 주저할 것이 없다. 이런 무리는 이른바 신의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상대가 갑이든 을이든 그 한쪽과 손을 잡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끼리 싸우게 두는 편이 낫다. 나는 단지 내부를 정리하여 병력의 보충을 꾀하거나 갑을 모두 귀순, 복명시켜 반항하지 않도록 할 따름이다.
1930년 3월 8일, 장제스의 일기.

3.2. 중원대전의 발발

중국의 인민은 너무나도 심한 가난과 곤경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여전히 반란을 꾸미고 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중국 사람의 씨가 마르게 되어서야 멈출 것인가? 아아, 만약 하늘이 돌보신다면, 중국이 그런 혼란의 지속으로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기적이고 편하적이며, 그래서 당과 나라와 인민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한다면, 하늘은 즉각 내게 죽음에 이르는 파멸을 안길 것이다. 나의 인민들에게 최악의 재난이 닥치지 않게 할 따름이다!
1930년 4월 11일, 장제스의 일기.

1930년 3월 15일, 펑위샹의 부하 녹종린 등 57명의 장령이 옌시산을 육해공 총사령관으로, 펑위샹과 리쭝런, 장쉐량을 부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장제스가 불법적으로 3전대회를 열어 당을 사영화하고 독재하고 있다면서 6가지 죄상을 밝히고 하야할 것을 욕구했다. 이에 대해 장쉐량은 "동북4성은 대일(일본 외교), 대아(소련 외교) 외교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난징정부와 연락을 단절할 수 없다."라며 부사령관 취임 거부의 뜻을 밝히며 장제스에게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타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옌시산에게 화북의 치안을 유지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3월 21일 옌시산과 펑위샹이 연합하여 장제스 타도를 통전, 여기에 우페이푸, 쑨촨팡, 치셰위안같은 몰락한 북양군벌의 잔당들까지[1] 호응하는 등 전국 각지의 반장 군벌들이 속속 합류했고 4월 1일 옌시산이 타이위안에서 중화민국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취임했고 같은날 리쭝런과 펑위샹도 부사령관에 취임했으며 스좌장에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나머지 반장 세력은 장제스에 대해 무력봉기를 감행하였고 산서군이 베이핑으로 진주하여 군사, 정치기관을 장악했다.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의 병력은 합쳐 60만에 달했고 곳곳에 20만에 달하는 반장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어 이들까지 고려하면 80만에 달했다. 이에 장제스는 4월 5일 옌시산 체포령을 하달했으며 5월 1일에는 전군에 대한 토벌령이 내려졌다. 이른바 중원대전의 개막이었다. 장제스는 5월 28일 전 직로연군 장령 서원천을 통해 장쉐량에게 출병할 것을 요청했지만 5월 30일 장쉐량은 동북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밝히며 국가대국에 이익되는 바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반드시 진력하겠다고 답했다.

4월, 옌시산은 타이위안에서 개조파 대표 천궁보, 왕법근 및 서산회의파 셰츠, 쩌우루 등과 차례로 만나 서로가 갖고 있는 주장을 버리고 왕징웨이와 공동으로 당무를 책임지겠다고 합의했으며 중앙당부 위원회를 성립시키고 하고 이전에 개최된 중국 국민당 전체대표대회에 참여한 중앙위원 등 반장인물들을 포섭하여 장제스의 당무 장악에 대항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개조파와 서산파의 거국적 합작이 이루어졌으며 반장세력이 장제스에 대항하기 위한 또 다른 정통정부를 수립하자는 구상이 이루어졌다.

3.2.1.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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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서북의 준동과 계계의 진압

옌시산은 펑위샹에게 80만 원의 군비와 대량의 신식 무기를 제공하여 3개 군단을 편성하게 했고 녹종린을 전선 총지휘관에, 손양성, 유욱분, 쑹저위안을 각각 1,2,3군단장에 임명하여 섬서성을 공격하게 했다. 3월 17일 이들은 섬서성 동관을 함락시켰고 농해철로를 따라 하남성에 침입, 카이펑과 귀덕 등 여러 요충지를 점령하고 쉬저우로 육박했다. 이에 중앙군은 5월 12일에 2군단 3사단을 선봉으로 하여 쉬저우에 농해철로를 따라 진군하며 반격에 들어갔다. 5월 18일. 중앙군은 귀덕을 점령하고 있던 적을 섬멸, 무장해제시키고 6월 1일 카이펑 인근의 난봉까지 적을 밀어붙혔다. 하지만 옌시산이 서둘러 전선의 병력을 증강했으며 펑위샹과 옌시산의 기병대가 출격하여 중앙군의 후방을 공격함에 따라 전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2군단이 카이펑으로 향하는 동안 중앙군 3군단도 반격을 시작, 언성 일대에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허창과 임영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6월 6일 중앙군 공군의 가세로 허창에 있던 번종수가 전사하자 반장연합군의 기세가 꺾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6월 7일 중앙군은 허창을 점령했으나 2군단처럼 곧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 장제스는 장쉐량과 친분이 두터운 리스쩡을 봉천에 보내 출병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어 하성준도 보내 6월 14일부터 7월 초까지 장쉐량에게 참전을 촉구했지만 장쉐량은 전국이 빨리 끝나는 것을 원하지만 동북에 아무런 영향이 없고 만주의 원로에게 누가 되지 않는 경우에만 국가와 장제스를 위해 헌신하고 출병할 수 있다고 거절했다. 만주 구파는 7월 말까지도 참전 반대를 분명히 했다.

한편 옌시산과 펑위샹이 북방에서 진군하는 동안 남방에서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리쭝런, 장파쿠이의 연합군 4만명이 궐기하여 북상을 시작했다. 광서에서 일어난 반장군은 5월 27일 형양, 6월 3일 장사, 6월 8일 악주를 점령함으로 호남성을 장악했으며 우한을 위협했다. 하지만 반장군은 호남성 주석 자리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고 우한행영 주임 허잉친이 8로군과 4로군을 지휘하여 호남 북부와 광동 북부에서 협공하여 반장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6월 15일 허잉친은 악주를 탈환했으며 6월 17일 감사대와 해군의 협조를 얻어 장사를 탈환함으로 남방의 반장군의 기세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이어 천지탕이 이끄는 광동군에게 형양이 함락되면서 북진이 불가능해지자 리쭝런은 호북공격을 단념하고 병력을 호남으로 물렸다. 하지만 서북군의 기세는 여전히 왕성하였다. 7월 15일 장제스는 크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 순간 단지 조용히 참고 있고, 군의 신뢰를 유지하려 애쓰며, 상황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극복할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만약 최악의 사태가 닥친다면 당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버릴 수 있을 따름이다.

3.4. 베이핑 국민정부의 수립

혼란 와중에 옌시산은 베이핑을 점령하고 푸쭤이를 앞세워 대군을 인솔하여 6월 24일 황하를 건너 산동반도로 남하했다. 중앙군 1군단이 진포철로를 따라 북상해 맞섰으나 한푸쥐 군대가 붕괴하여 칭다오로 패주함에 따라 산동반도의 성도 제남이 함락되었고 7월 12일 곡부성도 함락되었다. 이러한 전황에 고무된 옌시산은 왕징웨이의 개조파, 서산회의파 등과 연락하여 7월 13일 베이핑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하자고 요구했고 8월 7일 베이핑에서 1차 확대회의를 개최, 장제스가 당치의 이름을 빌어 독재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새로운 국민정부 조직을 준비했다. 왕징웨이, 왕법근 등 7명이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추대되었고 중국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 국민회의 소집 준비, 약법제정을 준비했다. 왕징웨이는 장쉐량에게 확대회의에 대한 지지의사를 요청했지만 장쉐량은 거절했다. 8월 8일, 왕징웨이는 확대회의 선언을 발표하여 정치개혁 7대 주장을 내세워 장제스가 3전대회을 통해 결정한 훈정의 결함을 지적하고 국민회의 소집과 훈정시기약법 제정을 주장했다. 쩌우루 역시 장제스의 훈정을 비판하며 약법 제정을 주장했다.

7월 21일, 장제스는 장췬을 봉천에 파견하여 장쉐량에게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할 것을 제안했지만 장쉐량은 동북의 사정상 어렵다고 거절했다. 이는 장쭤샹, 만푸린, 탕위린 등 만주 구파들이 모두 장쉐량의 보경안민을 주장하며 장쉐량의 육해공군 부사령관 취임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장쉐량은 7월 30일 심홍렬에게 지시하여 산동의 봉천군에게 요충지를 지키는 한편 어떤 군대와도 싸우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 와중에 장제스는 독자적으로 반격을 감행했다. 장제스가 장갑열차를 타고 전선에 나서서 독전하는 가운데 7월 21일, 중앙군이 격전지인 박주성을 함락시켰고 8월 2일 산동성 태안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함락시켰다. 8월 3일, 펑위샹 부대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포탄을 하루에 1만발 씩 쏟아부어가며 반격했지만 포격만 맹렬했지 보병부대들은 사기가 떨어져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8월 15일, 장광정의 11군이 제남을 탈환했고 극소수의 반장군만이 맨몸으로 달아났으며 대부분은 불어난 황하에 익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중앙군은 산동 전역에서 소총 3만정, 대포 200여문을 노획했다. 농해철로 지역에서도 영릉에서 쑹저위안과 쑨뎬잉 부대가 격파되었고 쑨뎬잉은 아예 국민정부에 투항했다. 황하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정비한 중앙군은 서북 진군을 시작했다. 장제스는 다소 안도하는 일기를 남겼다.
이제부터 우리의 후방은 안전하다. 전투부대를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다. 종종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터럭 한 가닥의 차이일 뿐이다. 위험이 안전을 이끌 수도 있다.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1930년 7월 22일, 장제스의 일기.

9월 1일, 베이핑의 반장 지도자들은 국민정부 조직대강을 공포하고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주석에 옌시산, 정부위원에 옌시산, 펑위샹, 왕징웨이, 리쭝런, 탕사오이, 셰츠, 장쉐량 7인을 선출했고 9월 9일 옌시산이 베이핑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공평내정, 균선외교를 선언했다. 신승하 교수는 이들이 국민정부를 수립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장개석을 타도하려면 충분한 군사력 이외에 정치, 경제적으로도 힘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힘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합법적인 중국 국민당 중앙과 국민정부가 있어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먼저 합법적인 당정조직을 하여야 장개석을 당 중앙에서 제외시킬 수 있으며 반장전쟁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려면 국내외 각 방면과 연락되어야 하기 때문에 입법의 형식을 갖고 여러 중요 문제를 결정하여야 되며 정부 기구가 없으면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32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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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에 중국의 새 지도자로 소개된 옌시산

이에 류원후이를 비롯한 사천군벌들의 지지통전이 있었는데 솔직히 큰 도움은 안되었다. 반면 류원후이의 경쟁자인 류샹은 중앙옹호의 통전을 보냈다.

3.5. 장쉐량의 참전

장쉐량이 자꾸 참전을 거절하자 장제스는 봉천군을 분열시켜 일부만이라도 참전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성준이 마정복 등 봉천군의 여단장들에게 군비 300만원을 지급하여 중앙군에 투항하도록 획책하려 했지만 우학충에게 발각되어 마정복 등은 모두 체포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산해관에 시찰을 나갔던 장쉐량은 8월에 이르러 반장군이 대거 붕괴되고 후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이에 장쉐량은 철로 문제 때문에 봉천으로 돌아가는 일정이 늦어졌다고 알린 다음에 산해관에 주둔한 동북군의 상태를 검열하였다. 8월 27일, 장쉐량은 대공보 기자와의 간담에서 3월의 화평통전 의사가 그대로라고 했지만 부사령관 취임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8월 30일 봉천으로 돌아온 장쉐량은 장쭤샹, 장징후이, 만푸린, 탕위린 등에게 남방관계에 대한 일을 상의할 것을 요청했다.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장쉐량은 만주 구파들과 회동, 만주 구파에게 길림, 흑룡강, 열하의 기반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관내 진출에 대한 동의를 얻게 되었다. 9월 5일,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자신은 베이핑 국민정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고 옌시산에게도 베이핑 국민정부에 참여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9월 17일 장쉐량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난징 정부 아래 있지만 모든 것이 부합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중앙에서 난징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자신이 중립성향임을 강조하다가 바로 다음날인 9월 18일, 중앙옹호와 화평통전을 보내고 관내로 동북군을 진출시켰다. 동북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관내로 진주했고 너무나도 손쉬운 진주에 옌시산과 장쉐량이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장쉐량은 동북군이 무력조정에 나선 것은 인민의 재난을 구재하고 진정한 화평을 이룩하는데 있을 뿐이라고 이러한 의혹을 일축했다. 그리고 베이핑 확대회의의 정치개혁 7개항에 대해서 긍정적이지만 일시에 실현될 수 없는 것이므로 당장의 내란을 방지하고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자신이 완전히 장제스의 편이 아님을 드러냈다.

엔시산은 장쉐량의 중앙옹호 통전을 들은 9월 18일, 10일만에 주석에서 하야함을 타전하고 19일에 병력을 이끌고 산서성으로 철수했다. 왕징웨이 등 베이핑 국민정부와 확대회의도 타이위안으로 이동했다. 동북군은 신속하게 베이핑, 톈진으로 진주했다. 9월 22일 동북군이 베이핑과 톈진을 점령했고 25일에 바오딩에 이르렀다. 상황이 다소 진정되자 장제스는 10월 3일, 카이펑에서 국민정부에 전보를 보내 모든 정치범을 사면하고 관대한 정책을 실시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중집위에 전보를 보내 서둘러 4전대회를 소집하여 약법 제정을 위한 국민회의 소집을 의안으로 다룰 것을 제안했다. 10월 9일 장제스는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돌아갔다. 10월 15일 쑹저위안이 동북군에 투항되었고 이들이 29군으로 개편되었다. 스여우싼도 장쉐량에게 항복, 국민혁명군 13로군으로 편제되었다.

어쨌거나 옌시산은 장쉐량이 완전히 중앙의 편이 아니라고 표명한 것에 대해 희망을 품고 각군에게 황하 이북으로 퇴각하고 정전을 실행하며 화평해결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10월 5일 장쉐량의 화평 주장에 동의를 표하고 장쉐량의 후속 조치를 기대했다. 10월 9일 장쉐량은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고 10월 17일 왕수상을 하북성 주석에 임명하고 10월 21일, 그에게 전권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국민정부는 장쉐량이 하북성 주석에 왕수상을, 평진위수총사령관에 우학충을 임명하고 독단적으로 하북을 지배하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으나 10월 23일 장쉐량은 장제스가 자신에게 인사행정을 일임했다고 밝히며 자신의 행동이 중앙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0월 15일 장쉐량은 옌시산과 펑위샹에게 전보를 보내 이후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10월 24일, 장쉐량은 동삼성간부회의를 소집하여 향후 문제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10월 25일 옌시산과 펑위샹에게 10월 30일 이전에 봉천으로 대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등 여전히 호의적으로 옌시산과 펑위샹을 대했다. 그리고 한푸쥐, 스여우싼 등과도 접촉하는 등 중앙의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장쉐량이 장제스가 자신과 옌시산, 펑위샹이 싸우게 하여 적대관계로 만든 다음에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0월 24일, 장제스는 펑위샹과 접촉하며 화북지방에서의 세력균형 회복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를 경계한 장쉐량은 10월 27일 우학충을 통해 서북군에게 사후 처리를 할 때 무조건 대표를 봉천에 보내 자신과 직접 상의하라고 알렸다.

한편 중앙군도 쾌속추격을 계속하여 10월 3일 카이펑, 10월 6일 정저우를 함락시켰다. 서북군 2만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궁지에 몰린 서북군은 독가스까지 뿌리며 저항했지만 독가스를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풍향이 바뀌자 오히려 서북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중앙군은 10월 9일 뤄양을 점령하고 10월 25일 펑위샹의 사령부가 위치한 동관, 10월 29일 서안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뤄양이 함락되면서 손양성, 쑨롄중 등 서북군의 주요 장령과 15만에 달하는 서북군 주력부대가 포위되어 항복했다. 장제스는 10월 27일 장쉐량에게 중원대전의 처리를 조속히 처리할 것을 주문하고 10월 30일 장쉐량에게 통전하여 옌시산과 펑위샹을 국외추방하고 이들의 군사력을 재편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장쉐량은 10월 29일 "군사방면에 속한 모든 일은 일체 중앙명령을 준수하고, 행정방면에 속한 것은 지방관리가 임명되고 행정기관이 개혁되면 역시 중앙명령에 따라 처리한다."고 발표하면서 중앙에 대한 복종의사를 드러냈지만 장제스의 장단대로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장제스는 10월 28일 우톄청, 하성준을 시켜 우학충 회유에 나서는 등 동북군벌의 확대를 경계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3.6. 옌시산과 펑위샹의 하야

11월 3일 쩌우루, 셰츠, 왕징웨이 등은 타이위안을 빠져나와 도주했고 11월 4일, 옌시산과 펑위샹은 베이핑 국민정부와 확대회의를 해산하고 석권귀전, 즉 권력을 포기하고 시골로 돌아간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신뢰하지 않고 11월 5일 "옌시산, 펑위샹이 완전히 하야할 의향이 없는 것이 확실한데, 만약 그들이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산서 및 서북을 철저히 해결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장쉐량에게 통고했다. 그리고 11월 6일 황하 이북 각 성의 군정전권을 장쉐량에게 위임할테니 서북 공격의 총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쯤되자 류원후이를 비롯해서 일시적으로 반장파를 편들었던 군벌들도 다시 장제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입장을 선회해버렸다.

장제스가 여전히 무력대응으로 나서자 당황한 옌시산은 긴급군사회의를 소집하여 펑위샹에게 섬서로 돌아가 방무를 철저히 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장쉐량에게는 정치적 해결을 촉구했다. 또한 옌시산은 대세에 순응하여 공직에서 하야하고 서북군의 군정대권을 펑위샹에게 위임한다는 뜻을 밝혔으며 펑위샹은 섬서, 산서의 방무를 점검하여 향후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우학충은 만약 전쟁이 재발하면 이는 난징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장제스를 압박했고 장제스는 자신과 펑위샹이 결탁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장쉐량이 무력대응에 완강히 반대하자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장제스는 11월 2일, 후한민 등을 파견하여 장쉐량에게 2천만원을 지급하고 동북의 요인을 국민정부의 요직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장쉐량은 향후 개최될 4전대회에 참가하여 동북의 이익을 확실히 쟁취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왕수상에게 이를 위한 계획서와 건의서를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우학충에게 고급 간부 10~20명을 선발해 타이위안 등 각 지역에 파견해 각지 주둔군 명칭, 병력, 장령의 태도를 조사하고 산서의 군대 규모, 경제, 정치 상황을 조사해 보고할 것도 지시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장제스와 직접 협상하려 했던 것이다. 11월 12일 난징에 도착한 장쉐량은 4전대회에 참여하여 장제스와 직접 회담했다. 장제스는 무력토벌을 주장했지만 장쉐량은 중앙군이 황하 이북으로 진주하면 안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황하 이북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했다. 장쉐량이 만약 무력토벌을 하고 싶다면 중앙군이 직접 해야 할 것이라고 밝히자 장제스는 큰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장쉐량의 태도가 완강하여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산서성 주석 등 지방장관 직의 추천을 맡기고 서북의 장쉐량의 관할범위로 귀속시키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쉐량은 인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각 성의 주석을 산서 장령 가운데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의가 길어졌지만 결국 북방의 군정이 장쉐량에게 위임되고 장쉐량은 중앙의 뜻을 받아들여 중앙을 확고히 옹호할 것을 밝혔다.

합의에 따라 펑위샹, 옌시산은 국외로 추방하고 동북변방군을 중앙국방군으로 개편하며 동북에 당부를 설치하게로 했다. 11월 18일 제도개선, 정치쇄신, 공산당 토벌을 선언한 후 4중전회가 폐막되자 11월 20일, 장제스와 장쉐량은 연명으로 중앙에서 옌시산의 추방을 결의했으며 하루빨리 외유할 것을 촉구했다. 장쉐량도 자신의 추방에 동의하고 부하들까지 나가야 한다고 하자 옌시산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12월 1일 하야할 것을 표명하고 변장한 후 톈진의 조계지를 거쳐 관동군이 지배하는 다롄으로 망명했다. 펑위샹도 산서성에서 도주하여 산동반도의 태산에 은거했다. 왕징웨이도 11월 중순 홍콩으로 도주했다. 왕징웨이는 12월 27일, 장제스에게 타격을 주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확보하고자 태원약법의 초안을 선포하였는데 베이핑 국민정부에서 기초한 태원약법은 8장 221개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단히 민주적이고 현대적인 법률이라 중국 헌정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장제스의 훈정에 인권보장의 법제적 기초가 결여되었다던 후스 등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비판을 계속 받고 있던 장제스가 국민회의 소집을 통한 약법 제정에 나서게 되는 한가지 기폭제로 작용, 후일 장호합작의 파국까지 이어졌다.[2]

4. 결과

이 중원대전에서만 쌍방을 합쳐 100만~160만 명 이상의 병력이 격돌했고[3] 사상자가 수십만에 달했다. 장제스는 중앙군의 전사자가 3만, 부상자가 6만이며 반장연합군의 피해는 15만 명 정도로 추론했다. 《장개석비록》은 중앙군 사상자 9만 5천, 반장연합군 사상자 20만을 기록하고 있고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장개석비록》과 비슷한 수치로 쌍방 합쳐 30만 명 정도가 사상했다고 기록한다. 전쟁 지역의 도시와 농촌의 피폐는 심각해졌고 펑위샹과 옌시산이 전쟁을 위해 닥치는대로 세금과 청년들을 징발한 탓에 기근이 퍼졌다.

리쭝런과 옌시산은 이후에 영지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아 지배권을 추인받았지만 펑위샹의 경우, 세력이 완전히 공중분해되어 사실상의 야인으로 전락했고 난징 국민정부의 직접 지배영역은 굉장히 넓어져 북위 35도선 지역까지를 실질지배했고 하남, 호북, 호남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장쉐량 역시 국민정부의 2인자로 인정받으며 관내 진출의 야망을 달성하여 장쭤린 시대의 영역을 회복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결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격렬한 무력충돌로 인해 군축을 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편견회의의 의도와는 달리 중국 대륙에는 전보다 더 많은 군대가 돌아다니게 되었으며 장쉐량과 장제스의 의견충돌로 인하여 장제스는 끝내 서북지역의 군벌들에 대한 완전한 토벌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장쉐량이라는 2인자를 인정하게 되면서 자신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해 일종의 타협을 해야 했다. 장쉐량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장쉐량과 장제스의 대립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었고 장쉐량은 봉천군벌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만주 구파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장제스 역시 태원약법을 비롯한 반대파의 정치적 공세로 인하여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요구를 받게 되었고 결국 약법 제정을 위한 국민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후한민과의 갈등이 너무 심각해져 장제스는 1931년 2월 후한민을 유폐하는 탕산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을 계기로 그동안 친장파에 속했던 광동파가 반발, 개조파, 서산파, 광서파와 연합하여 1차 양광사변을 일으키면서 중화민국의 내전은 끊이지 않았다.

이 혼란의 와중에도 일본 제국이 침략의 야욕을 불태운 것은 물론이었고 중국공산당은 각지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5. 참고문헌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삼천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동북군의 관내진출과 그 결과, 송한용, 중국 근현대사연구 6권, 중국 근현대사학회.
  • 국민당 3전대회 전후의 반장운동, 김영신, 중국학연구 30권, 중국학연구회.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42호,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6.2.1. 중원대전 이전

6.2.2. 중원대전 이후



[1] 안휘군벌직봉풍전쟁 이후 퇴갤했기 때문에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직예군벌들이다.[2] 이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화민국 전 국무총리 슝시링 등이 1차 헌정운동을 벌여 국민정부를 거세게 비난했다.[3] 《장개석비록》은 160만명 설,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는 140만명 설,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중국 근현대사》는 100만명설을 기재하고 있다. 신승하에 따르면, 전쟁 초기 섬서, 서북, 광서의 반장군대가 60만, 장제스의 병력이 70만이며 여기에 스여우싼을 비롯한 기타 반장군대가 20만이 있어 반장군대는 최대 80만이었고 장제스 측은 동북군의 가세와 일부 섬서군의 투항으로 100만까지 증가했었다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