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행 난징 국민정부 4,5대 행정원 부원장 | ||
정체 | 陳銘樞 | |
정체 | 陈铭枢 | |
한국식 독음 | 진명추 | |
영문 | Chen Mingshu | |
자 | 진여(真如) | |
출생 | 1889년 10월 15일 청나라 광동성 합포현 | |
사망 | 1965년 5월 15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바오딩군관학교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행정원장 재임 기간 | 대행 1931년 12월 15일 ~ 1932년 1월 1일 | |
행정원 부원장 재임 기간 | 4대 1931년 12월 16일 ~ 1932년 1월 1일 5대 1932년 1월 1일 ~ 1932년 1월 29일 |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중국국민당의 광동파 정치인으로 장제스의 신임을 받으며 그와 밀접한 관계를 구축했지만 제1차 상하이 사변 이후로 결렬되어 반장파가 되었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한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89년, 현재는 광시 좡족 자치구 북해시에 속하는 광동성 합포현에서 태어났다. 인근의 소학에서 학문을 공부하다가 1906년 황포육군소학 2기로 입학했고 그곳에서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9년 난징육군 제4중학에 입학,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한커우의 혁명군에 참여했으며 중화민국 건국 이후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1기에 입학했다. 1913년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혁명군에 가담했으나 패하여 일본으로 도주했고 일본 망명 중 황싱이 설립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1915년에 중국에 귀국, 그해 12월에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호국군에 가담함으로 광동군벌의 군대인 월군에 들어갔다.1920년 제1사단 4단 단장이 되었으며 이때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를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1924년 월군 1사단 참모장 겸 1여단장에 임명되었고 1925년 7월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국민혁명군이 창설되자 리지선의 4군 휘하 10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천밍수는 장광나이를 10사단 부사단장에, 차이팅카이를 28단 단장으로 임명했다. 국민당의 1차 동정과 국민당의 2차 동정에 모두 참가, 천중밍 군대를 격퇴했다. 이때 월군 참모장 출신이며 국민혁명군 1군 사령관 겸 황포군관학교 교장인 장제스와 밀접한 사이가 된다.
2.2. 국민혁명과 반장전쟁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리지선의 4군도 출정에 나섰다. 천밍수는 호남, 호북 전선에서 우페이푸 군대와 교전하여 많은 공을 세워 철군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장제스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우한 함락 이후 난창 군무선후회의에서 여러 군의 확대개편이 결정됨에 따라 천밍수는 11군 군장 겸 우한 위수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장파쿠이의 4군, 주페이더의 3군과 함께 탕성즈가 지휘하는 서로군에 배속되어 난징, 상하이를 공략했다. 장제스는 탕성즈는 배척하는 한편 천밍수에게는 군비를 나누어주면서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천도논쟁으로 장제스와 쉬첸을 중심으로 한 우한 임시연석회의의 관계가 악화되자 탕성즈는 장제스와 친한 천밍수를 경계하여 그가 우한을 떠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천밍수는 우한을 떠나 난창으로 향하면서 장제스의 편임을 선언했다. 이로 인하여 장제스는 천밍수를 매우 신임하게 되었다. 1927년 11월, 장황사변과 광저우 폭동이 일어나자 리지선, 황샤오훙과 함께 이를 진압하였다.1929년 편견회의가 개최됨에 따라 11군은 1사단, 1독립여단으로 가축되었다. 이에 천밍수는 장광나이를 편견구 3사단장에, 차이팅카이를 독립여단장에 임명하였다. 이후 3사단은 61사단으로 개치되었고 독립여단은 60사단으로 확충되었다. 1929년 호남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는 광동성 정부주석 리지선이 리쭝런, 바이충시와 내통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감금하였고 천밍수를 신임 광동성 정부주석으로 임명하였는데 천밍수가 광동성의 군정대권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천지탕을 광동성 군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 둘을 견제하게 하였다. 1928년 8월 28일,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던 후한민이 귀국하자 천지탕과 함께 영국령 홍콩으로 가서 후한민을 영접했고 후한민에게 광저우 정치분회를 맡아줄 것을 청했지만 후한민은 거절했다.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반장전쟁 기간 동안 광동파를 영도하여 천지탕과 함께 계계군벌을 토벌하여 난징 국민정부의 남방을 수호하였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장파쿠이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60사단과 61사단은 19로군으로 편제되었으며 장광나이가 19로군 총지휘에, 차이팅카이가 19로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광동성을 장악하기 위해 보안대를 양성하여 천지탕을 견제하려 했으나 광동성의 1인 지배자가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는 장제스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1931년 6월 1일, 훈정시기 약법 반포 시행 후 6월 13일의 국민당 3기 5중전회에서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되자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2.3. 1차 양광사변에서 제1차 상하이 사변까지
하지만 1931년 2월 탕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큰 정치적인 파장이 일어나게 된다. 장제스가 입법원장이며 광동파의 정신적 지주인 후한민을 감금하자 그간 장제스의 편이었던 구잉펀, 등택여 등 광동파의 일원들이나 린썬 등 중앙을 지지하던 서산회의파의 일원들까지 동요하여 반장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군비 문제로 장제스와 관계가 악화된 천지탕이 장제스에 대항하여 일어나면서 천밍수는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장제스는 천밍수에게 전보를 보내 국가의 통일과 건설을 위해서는 국민회의와 약법 제정이 필수였다고 주장하면서 천밍수의 지지를 호소했다. 천밍수는 탕산 사건을 대단히 부적절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하였으나 광동에서의 반장운동이 성공하지 않으리라 여겨 계속해서 장제스를 지지했다.자신의 측근들인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가 내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자 천밍수는 천지탕의 반장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사태가 확대되자 시비를 피하기 위해 광저우를 떠나 일본으로 떠났다. 천지탕은 천밍수가 떠난 틈을 타서 천밍수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천밍수에게 매일같이 전보를 보내 재정적인 지원을 제안하는 한편 조속히 귀국하여 현안 해결을 위해 논의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천밍수는 장제스와 손잡으면 광동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여겨 1931년 6월 5일, 난징에 도착하여 장제스와 회담하였고 장제스는 이를 이용하여 19로군에게 자신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회담 후 천밍수는 초적우익군단 총지휘에 취임, 제3차 초공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강서성을 시찰하면서 장광나이와 차이팅카이에게 공산당 토벌과 평화유지를 위해 노력할 것을 호소했다.
이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장쥐,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난징 측 대표로 광둥 측과 담판하여 통합을 논했다. 난징의 안전 보장 및 광동파를 안심시키려는 장제스의 안배에 따라 1931년 9월 30일 송호경비사령 대리 겸 경호위수사령에 임명되었다. 천밍수는 10월 11일, 상하이를 통해 귀환, 10월 12일에 난징에 도착하여 경호위수총사령장관 겸 송호경비사령에 취임하였고 19로군을 난징-상하이 일대에 배치하였다.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 겸 행정원장직에서 사퇴하자 행정원장 대리를 맡았다. 1931년 12월 28일 제4기 1중전회에서 행정원 부원장에 선출, 1932년 1월 1일에 취임하였다.
불과 얼마 후에 제1차 상하이 사변이 터지자 1932년 1월 28일, 왕정팅, 쑹쯔원, 샤오위안충, 장췬, 우차오수, 구멍위, 쿵샹시, 뤄원간, 구웨이쥔, 우톄청, 궈타이치, 다이지타오, 천궁보와 함께 특별외교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장왕합작 체제 수립 후 제3방위구 부사령관에 임명, 허잉친과 함께 난징, 상하이 방위를 맡았는데 신임 행정원장 왕징웨이의 명령을 무시하여 큰 불만을 샀다. 이때 중립국의 중재와 평화구의 행정, 경찰권의 중국 측의 담당을 주장했다. 또한 장제스에게 만주 진공을 통해 상하이 방면의 압력을 해소해달라고 주장했는데 장제스는 이를 거절했다. 중국 학계나 야사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청방의 실력자 왕야차오와 결탁하여 김구, 안창호를 지원하여 훙커우 공원 의거를 사주하였다고 하는데 물적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2.4. 반장파가 되다
이후 천밍수는 교통부장을 역임하는 등 잘 나갔으나 1933년 5월 뇌물 수뢰 사건에 연루되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정부 자금 70만원을 챙겨서 프랑스 파리로 외유를 떠나야 했다. 한방에 날아가게 생긴 천밍수는 영국령 홍콩으로 돌아와 상하이 사변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복건성으로 쫓겨나 장제스에게 불만이 많던 차이팅카이, 장광나이, 리지선을 포섭, 1933년 11월 복건사변을 일으켜 생산인민당을 조직하고 중화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제5차 초공작전을 위해 강서성 일대에 막대한 대군을 집결시키고 도로를 정비해놓은 장제스 측에게 순식간에 토벌당했다. 1933년 11월 23일, 국민당 상무위원회는 천밍수를 국민당에서 제명하였으며 천밍수는 영국령 홍콩을 거쳐 유럽으로 망명했다.1935년 7월, 천밍수는 차이팅카이, 리지선과 함께 홍콩에서 <민족혁명동맹>을 창설, 장제스를 타도하고 항일을 하자고 호소했으며 "민족독립을 쟁취하고 인민정권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1935년 11월, 천밍수는 리지선과 공모하여 장제스와 왕징웨이를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는데 이것이 바로 왕징웨이 저격 사건이다. 1936년 2차 양광사변도 지지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반장항일에서 옹장항일로 입장을 전환하고 중일전쟁 기간 동안은 장제스를 지지했다.
2.5. 말년
1944년 9월, 중국민주동맹이 창설되자 담평산, 주은산 등과 함께 참석했으며 충칭에서 삼민주의동지연합회를 창설했다. 중일전쟁 종전 후 1948년, 리지선과 함께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설립에 참여, 혁명위원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가 패한 후 대륙에 잔류, 혁명위원회 상무위원, 중남군정위원회 농림부장, 중남행정위원회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정협 위원 등을 역임했다.허나 1957년 반우파 투쟁이 일어나자 우파분자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 1962년 우파로 몰린 것이 취소되었고 1965년 베이징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1978년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에야 완전히 복권되었다.
3. 참고문헌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국공산당 역사 1권 상, 하,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중국학연구회.
4. 주요경력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장 | |||||||
2대 | → | 대행 | → | 3대 | |||
장제스 | → | 천밍수 (1931년 12월 15일 ~ 1932년 1월 1일) | → | 쑨커 |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 부원장 | |||||||
3대 | → | 4대 | → | 5대 | |||
쑹쯔원 | → | 천밍수 (1931년 12월 16일 ~ 1932년 1월 1일) | → | 천밍수 | |||
4대 | → | 5대 | → | 6대 | |||
천밍수 | → | 천밍수 (1932년 1월 1일 ~ 1932년 1월 29일) | → | 쑹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