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8 04:33:09

영국령 홍콩

대영제국의 식민지
왕령식민지 Crown Col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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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Hong Kong
대영제국의 식민지
파일:영국령 홍콩 기.pn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9px-Coat_of_arms_of_Hong_Kong_%281959-1997%29.svg.png
국기휘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k-map-colonial.png
1841년 ~ 1997년
언어별 명칭 영어: Hong Kong
광동어: 香港 (Hēunggóng)
중국어: 香港 (Xiānggǎng)
위치 홍콩
국가 God save the Queen
수도 빅토리아 시티
정치체제 대영제국의 식민지
국가원수 영국 국왕
주요 총독 존 보우링(1854~1859)
머리 매클호스(1971~1982)
크리스 패튼(1992~1997)
언어 영어, 광동어
문자 라틴 문자, 한자
종교 기독교, 중국 토속 종교,
유교, 불교
민족 영국인, 광동인, 인도인
통화 홍콩 달러
성립 이전 청나라
해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행정구
현재 국가 중국(홍콩)

1. 개요2. 역사
2.1. 영국의 점령2.2. 전후와 사회 변동2.3. 반환
3. 군사4. 의의5. 참고 문서

1. 개요

영국령 홍콩(British Hong Kong)은 1841년부터 1997년까지 156년동안 존속했던 영국의 식민지이다. 1997년 7월 1일영국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하면서 해체되었다.

중국어로는 이 시기를 영속향항(英屬香港)이라고 한다.

2. 역사

2.1. 영국의 점령

영국 동인도 회사광동 성 광저우에 무역항을 설치한 후 무역을 해나갔지만 1839년 청나라 조정의 승인으로 아편 수입을 임칙서가 금지하자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1841년 홍콩은 영국군에 함락당했다. 이후 1842년에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정식으로 영국에 양도된다. 1843년에는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를 건립할 겸 홍콩 총독부를 센트럴에 신설한다.

총독부 시스템이 자리잡은 이후에 홍콩 총독은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통치할 권리를 인정받은 홍콩 최고위 통치자로서 권력을 행사했고, 행정 부분은 비선출직 각료들과 경력직 관료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으로 영속적으로 영국에 귀속된다. 1898년에는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신 행정구역으로 알려진 신계를 99년 간 조차받았다. 이때 신계는 초록택시가 운행하는 현 중국 국경 지대와 구룡반도 북쪽 신구룡을 포함하는 곳으로 이 곳과 구시가지의 경계가 바운더리 스트리트이다. 이후 신계 남부 카이탁에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을 세워서 사실상 이 지역의 조차 협약을 사문화하고 신계 북부 중국 국경지대만을 반환 대상으로 봐서 택시 색을 신구룡과 다른 초록색으로 지정하고 황무지로 남긴다.

19세기에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되었고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서 활용되는 자유 무역항으로 선언되었다. 구룡반도-광둥성 광저우 간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또한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1870년대~1880년대 이후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 있어 중국 국내 세력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군벌이고 혁명당원들이고 궁지에 몰리면 홍콩으로 다들 망명하곤 했다. 한편 1922년 홍콩 선원 파업과 1925년의 5.30 운동 등 중국의 정치적 격변에 수차례 휩쓸리기도 했다. 또한 중국 내부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기지 역할도 하여서 영풍함 사건, 광저우 상단 사건 등의 사주에 개입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 제국이 홍콩을 영국군과의 전투 끝에 점령하고 군정을 시행했다. 이 때 중일전쟁에 대한 분풀이 등의 이유로 중국계 홍콩인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5년 8월에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영국은 홍콩을 수복했고, 특별군사법정을 열어 일본군에 부역한 중국인들과 홍콩에서 전쟁 범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처벌했다. 중국인 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22명이 투옥되었다. 일본인들은 21명에게 사형이, 85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외에는 도주하거나 무죄방면되었으며 추가적인 기소는 없었다.

2.2. 전후와 사회 변동

한편 4대 강국으로 떠오른 중화민국은 홍콩 반환을 요구하면서 영국 정부를 압박했지만 영국은 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다가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으로 패배했다. 1949년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중국 국민당타이완 섬으로 쫓아내면서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자 이민자들이 중국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도망쳐왔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홍콩은 의류와 주석 장난감을 만드는 제조업으로 유명해졌다. 공장이 있던 곳은 주로 구룡반도의 홍함과 산포콩, 쿤통 일대로 특히 쿤통은 카이탁 공항과 가까워서 공항과 연계해서 보세 의류공장이 많이 생겼다.[1] 이후로 1960년대 들어서 대만과 한국이 의류업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되자 전자산업에 손을 댔다. 주로 일본에서 부품을 사왔다가 홍콩에서 조립해서 수출하는 방식이었는데, 1960년대에 라디오가 세계적인 대중매체가 되면서 한때 홍콩은 세계 1위 라디오 수출국가(지역)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업체들의 규모가 영세해서 확장에 한계가 있었던데다가 대만과 한국에서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오일쇼크가 닥쳐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전자산업도 개혁개방 이후로 중국본토로 건너가게 된다.

한편 1960년대 홍콩은 분배가 잘 안 되어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오늘날 홍콩 사회도 빈부격차가 큰 편이지만 당시에는 현재보다 더 계층 격차가 심각하고 하층 계급의 생활 수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홍콩 섬롤스로이스가 택시 노릇을 하고, 고급 유럽식 사교클럽이 불야성을 이루며 말 그대로 돈이 썩어나는, 아시아 최고로 부유한 곳인 반면 중일전쟁국공내전, 게다가 베트남 전쟁까지 겪으며 피난민들이 중국 및 베트남에서 몰려든 구룡반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생활 수준이 처참하게 어려웠었다. MTR이나 자동차용 해저터널이 개통하기 이전에는 구룡반도와 홍콩 섬을 오가는 건너는 교통수단이 배뿐이었다. 그래서 구룡반도와 홍콩 섬의 교류가 극히 적어 다른 나라처럼 따로 국밥으로 놀았다. 여기에 홍콩 섬에 비해 상당히 낮은 구룡반도 주민들의 경제력이 더해져 몇몇 홍콩 섬 주민들은 아예 구룡반도 주민들을 홍콩인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홍콩 섬에 사는 사람들은 구룡반도에 절대 발도 들이밀기 싫다는 식으로 구룡반도 주민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에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더불어 부정부패도 현재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심각했었다. 소위 차값을 주고 받는다는 은어로 통하던 뇌물은 기본이라서 뇌물을 안 주면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도 하지 않거나[2] 병원에서는 의사에게 차 값을 안 주면 죽든 말든 내버려 두거나, 취업에서 면접관에게 차값을 줘야 합격하는 식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돈 세탁도 기승을 부리는 등 여러모로 개판이었다. 이 때는 조세 피난처로도 아주 선호받았다.

이에 따라 하층민들의 권리 투쟁이 여럿 있었다. 1966년에 MTR도 없고 크로스하버 터널도 없어서 홍콩 섬-구룡반도 간 연락을 스타페리가 독점하던 시절, 페리 요금이 인상되자 이에 대항해 비폭력 시위가 일어났다. 총독부 정부가 이 항의시위를 탄압하자 어렵게 살던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시위가 폭동으로 격화된다. 주로 조던 로드나 침사추이 등 구룡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이때 구룡반도의 버스회사인 KMB도 공격당했다. 홍콩 총독부는 당황해서 경찰을 투입해 얼른 진압해 버린다.

또한 이 와중에 몇몇 홍콩인들은 홍콩의 사회 문제를 영국 식민지 체제의 폐단으로 보고 그 해결책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에서 찾고자 했다. 1960년대 본토에서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이에 호응하는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1967년에 67폭동이 발생했다. 홍콩 당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크게 반발하여 홍콩 홍위병들에 대한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자 홍콩 당국은 이를 가차없이 거절했고 흥분한 대륙 홍위병들이 주중 영국 대사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영국령 홍콩 정부로 하여금 사회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1974년 염정공서가 세워지고 계좌 개설을 어렵게 해 놓는 한편 신설 염정공서가 검은 돈을 전부 적발해내 돈세탁을 더이상 할 수 없게 하였다. 조세피난처 노릇도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1976년 크로스하버 터널 개통, 1979년 MTR 쿤통선[3] 개통, 소방훈련학교 및 경찰훈련학교 설립, 부패 경찰관 전원 해고와 구속수사 및 신임 경찰관 대거 채용, 영국 본토의 반부패 전문가 초빙, 공중위생을 높이는 클린 홍콩 운동 등을 벌이며 말 그대로 홍콩의 질적 선진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빈부격차도 많이 해소된다.[4]

1978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경제 개혁안을 시작했을 때, 홍콩은 중국 본토에 투자되는 외국 자금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이듬해 경제 특구가 홍콩 바로 북쪽에 있는 선전에 건립되었고, 재정과 금융 분야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이 커지면서 홍콩의 산업은 제조업과 섬유에서 점진적으로 서비스 업종으로 대체되었다.

2.3. 반환

1979년, 홍콩 신계 지역의 조차가 1997년으로 끝남에 따라 크로포드 맥리호스 홍콩 총독이 후속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비공식 회담이 시작되었다. 처음 영국 측에서는 조차 기간을 연장하려 했으나 중국 측 대표인 덩샤오핑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차차 홍콩 전역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영국으로서는 홍콩을 계속 점유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홍콩 행정구역을 보면 정식으로 할양받아 영구 소유권을 확보한 홍콩 섬 및 구룡반도는 이미 도심 지역으로서 개발이 끝났고, 이를 배후지로 뒷받침하는 지역이 바로 신계 지역이다. 이 상황에서 신계 지역의 조차 기간이 끝나고 중국에 반환하면 홍콩은 기존의 도심 지역만이 남게 된다. 이러면 홍콩의 자립은 불가능해진다. 이 상황에서 신계 조차의 연장이 무위로 끝나자 영국은 홍콩의 영구적인 점유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홍콩 전체를 반환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

그 와중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첫 번째 공식 회담이 시작되었다.

1984년까지의 긴 토론 끝에 결국 일국양제 원칙에 따라 영국홍콩 전역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합의했고, 1984년 12월 19일 영국 측 대표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중국 측 대표인 자오쯔양 중국 국무원 총리 사이에서 중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5] 이어 1985년 5월 비준이 이루어졌고 1985년 6월 30일 전면 발효되었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반환 문제가 해결된 1984년과 1997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민주적 정치개혁을 해놓았다. 구의회를 주민 직선 선출로 바꾸고 국회 격인 입법국에 일부 보통선거 선출 의석을 마련했다. 저런 개혁이 하나 하나 있을 때마다 중국은 독재국가 클라스 어디 가지 않아서공동선언 위반이라며[6] 개지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중영공동선언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자정에 영국이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하여 홍콩 특별행정구가 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3. 군사

홍콩/군사 항목에서 주홍콩영국군 문단 참고.

4. 의의

영국의 홍콩 지배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무역항 중 하나인 홍콩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자유항(自由港)이라는 이미지가 구축된 것도 영국 지배 시기 부터였다.

영국은 홍콩을 호주캐나다, 뉴질랜드, 싱가포르처럼 자기네 영토의 연장으로 건설했었고 그래서 극소수인 영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이 잘 사는데도 치중했다. 물론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광동에서 피난민이 내려와 구룡반도의 생활환경이 나빠지고 빈부격차는 넓어졌긴 했다만 홍콩 섬에 사는 오리지널 홍콩인들의 생활 수준은 원래부터 높은 편이었다. 구룡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롤스로이스가 홍콩 섬에서는 1905년부터 보이는가 하면 아시아에서 첫 번째 도시철도에 속하는 홍콩 트램도 섬쪽에서 이미 1904년 개업한다. 어쩌다가 홍콩을 거쳐 유럽이나 미국 등에 다녀온 일제강점기 당시 상류층들은 홍콩 섬의 부유한 생활상과 조선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진귀한 유럽제 물건들이 일상품으로 쓰이는 풍경에 놀랐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배 동안 선진적인 행정제도가 홍콩에 잘 안착되었고, 효과적인 공무원 제도와 사회기반 시설, 높은 시민 의식, 친절한 공무원 및 공공 서비스 종사자들 등을 자랑한다. 영국은 비교적 민주적이고 청렴한 정부를 구축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했기 때문에,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이를 승계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영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다. 일본군의 점령에서 벗어난 이후 취임한 21대 총독부터는 뭔가 하나쯤은 홍콩 사회에 긍정적인 업적을 남겨왔고, 비록 영국령 홍콩 정부는 완전한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치를 허락한 적은 없지만 그와는 별개로 67폭동 이후로는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빈부격차 해소, 영국인과 중국인의 차별 해소, 부패 척결 등등)을 해왔으며 언론 자유도도 크게 상승했고 미진했던 민주화도 1980년대 이후로는 그럭저럭 이뤄놓고 떠났다.

역대 총독들은 부임할 때마다 스스로 광둥어식 이름을 짓는 전통이 있었다. 비록 홍콩에서 영어가 사회주류가 쓰는 언어이긴 했지만 다른 방면으로 식민지인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

그리고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그 당시 영국인 총독과 수뇌부를 감금하는 등 일본군으로부터 영국 총독부가 핍박을 받은 역사 때문에 비록 총독과 식민지인 관계지만 일본군 점령 하에서 같이 고생한 사이라는 미묘한 감정도 있다.

홍콩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반환되면서, 많은 본토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들어왔고, 이는 홍콩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시기 들어온 중국 이민자들은 대부분 부패가 만연했고, 홍콩에서도 중국 본토에서 했던 것과 동일하게 뇌물을 주고 받았다. 주로 민간 영역에서 문제가 빈발하며 염정공서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겉으로는 일국양제를 고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심 공산당은 홍콩의 자치와 반쪽짜리 민주주의조차 불쾌해하며 이를 침해하고 있다. 때문에 홍콩인들은 중국 공산당중국 대륙 출신 중국인들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쌓여있으며, 2014년 우산혁명 이후로는 공공연하게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홍콩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홍콩 독립운동 문서를 참조할 것.

5. 참고 문서



[1] 이들은 1980년 중국의 개방 이후 인건비가 비싸지고 금융업이 홍콩 산업으로 떠올라 중국으로 건너가고 현재는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잔존한다.[2] 돈이 없으면 물도 없다며 소위 물세를 걷었다. 구급대는 유류비를 받았다.[3] 그땐 쿤통에서 침사추이, 몽콕을 거쳐 센트럴로 연결되는 식이었다.[4] 25대 총독 크로포드 맥리호스의 업적으로 역대 총독 가운데 홍콩의 발전을 가장 크게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트래킹 코스도 있을 정도로 홍콩인의 평가가 좋다. 다만 재임시절 영국에서는 비난을 받았는데 홍콩의 사회적 인프라를 짓느라 영국의 예산을 엄청 땡겨다 써서 중국에 돌려줄 식민지에 예산을 퍼준다고 여야의 비난을 받았다.(...)[5] 기본합의서 조인은 1984년 10월, 리처드 에반스 주중 영국대사와 저우난 중국 외교부 부장 사이에서 이루어졌다.[6] 중영공동선언은 중국에 홍콩의 현행 체제를 유지할 것을 규정했는데, 중국은 '현행'의 의미를 선언 발효 시점인 1984년으로 본 반면 영국은 반환 시점인 1997년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