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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일치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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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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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점령지
香港占領地
일본 제국의 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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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1941 ~ 1945
위치 홍콩섬
정치체제 군정
국가원수 천황
정부수반 군정청장관(1941~1942)
점령지총독(1942~1945)
언어 일본어
광동어
국가 기미가요[2]
주요 사건 1941년 일본군의 점령
1945년 일본군의 철수
성립 이전
[[틀:국기|]][[틀:국기|]][[영국령 홍콩|]]
철수 이후
[[틀:국기|]][[틀:국기|]][[영국령 홍콩|]]

1. 개요2. 역사3. 역대 홍콩 총독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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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香港日治時期

일본 제국홍콩을 지배한 기간을 일컫는다. 3년 8개월(三年零八個月), 홍콩일점시기(香港日佔時期)이라고도 한다.

2. 역사

원래 영일동맹으로 대영제국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어 일본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했고, 반대로 일본도 영국이 인도청나라에서 갖는 권리를 인정하였다. 이때 일본이 영국 영유권을 인정해 준 아시아 식민지는 청나라로 가는 관문인 영국령 홍콩이었다. 이 동맹 결과 조선은 다들 알다시피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일본의 속령으로 전락했고, 홍콩을 둘러싸고는 일본영국이 말썽을 빚을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신해혁명으로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세워지며 장제스가 북벌로 중국을 완전히 장악하여 대륙 상황이 180도로 변했고, 여기에 일본이 하필 만주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여 중화민국과 충돌하면서 상황이 전혀 딴판이 된다.

결국 만주사변으로 중국과 충돌하기 시작한 일본 제국1937년부터 중국전면전중일전쟁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중국에 차관을 제공하는 등 중국을 지원했다. 일본은 선전시를 폭격할 때 홍콩을 오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영국은 아돌프 히틀러가 하필 유럽에서 야심을 보이기 시작할 때인지라 굳이 저 멀리 아시아에서까지 문제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서 일본의 행패를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해야 했다. 1930년대 후반이면 히틀러의 나치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감행하고 폴란드단치히 회랑을 요구하는 등 깽판치기 시작할 때이며, 독일과의 대립도 벅찬 영국인데, 아시아까지 일본과 틀어져서 말썽이라도 일어나면 유럽아시아에 양면전선이 형성되어 무리가 가는 판이라 그냥 못본 척 하고 무마시켰다. 심지어 미국 역시 장강에서 미합중국 해군 소속 함정이 일본군에 의해 격침되었으나 역시 불간섭주의로 일관하며 눈감아야 했다.[3]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를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유럽열강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뺏을 목적으로 영국의 식민통치하에 놓여있던 홍콩을 침공했다. 일본은 영국이 홍콩을 통해 중국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무단으로 쳐들어갔다. 이미 1940년 프랑스가 지배하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도 대대적 침공을 감행한 상태였으며, 영국과 달리 비시 프랑스라는 괴뢰정부에 이미 넘어간 프랑스는 순순히 일본에 항복해야 했다.[4] 그러나 전선을 동남아시아로 돌려 수렁을 벗어날려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더구나 미국이 석유 공급을 끊자 산유국인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를 장악할 필요도 있었다.

일본군카이탁 국제공항을 폭격해 영국 공군을 무력화시켰다. 영국 해군의 상당수는 싱가포르 방어를 위해 홍콩을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해안포를 배치한 해안요새에는 해군육전대, 즉 해병대로 구성된 소수의 병력만 남았다. 이러한 전력 차이 덕에 일본군은 파죽지세였다. 일본 육군신계로 중국 국경선을 넘어 기병과 치하 전차로 구성된 기갑, 그리고 포병을 앞세워 텅 빈 국경을 밀고 내려왔고, 캐나다군과 식민지 인도에서 모집한 용병대, 중국인으로 구성된 수비대와 홍콩 경찰 등이 저항했으나, 모두 갈려나갔다.[5] 구룡반도신계는 간단히 함락되었다. 그리고 12월 18일에는 일본 해군이 육전대를 홍콩섬에 상륙시켰다. 말레이 식민지 방어를 위해 해군 상당수가 홍콩에서 떠나버린 뒤였고, 극소수 육전대 수병들만 남은 상황에서 한 줌의 수병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압도적인 일본 해군의 함포사격에 해안포대 대다수가 갈려 나갔으며, 해군을 도와 해안방어를 벌이던 홍콩 경찰 해안경비대(水警)도 대원 상당수가 전사하고 숱한 부상병을 양산했으며, 전부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육로로 쭉 내려온 일본군 본대는 12월 25일, 침사추이에 입성한 후 페닌술라 호텔에 있던 마크 애치슨 홍콩 총독을 총칼로 위협해 항복을 받아내었다.[6]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은 홍콩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페닌술라 호텔에 홍콩군정청을 임시로 설치했다가 1942년 홍콩 상하이 은행 본점 빌딩에 대본영 직속의 홍콩 점령지 총독부를 설치하여 이소야 렌스케를 홍콩 총독으로 임명했다. 치안은 일본 제국 육군헌병대가 맡았다.

홍콩인들은 모두 일본군에게 탄압을 받았고 일본 육군이 이들을 학살했다. 홍콩섬의 경우 해안 지역들 전 지역들에서 중국인 학살이 벌어졌다. 일본이 당시 중일전쟁으로 중국과 전쟁 중인지라 적성국가를 돕는 한통속이라는 이유로 밑도끝도 없이 중국계 홍콩인들을 미워했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피난민들도 색출해서 같이 학살했다. 이러한 광기어린 학살은 나중에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등에서도 똑같이 벌어져서 싱가포르는 학살무대인 풍골이나 창이 등 해안지역에 귀신 출몰 괴담이 떠돈다.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의 여성들처럼 중국인 여성들은 물론 영국인 여성들까지 일본군에게 끌려가서 강간당했다.[7] 일본군 성범죄 문제는 여기도 똑같았다. 그래서 민주파 홍콩 정치인들의 후원으로 홍콩섬 센트럴 한복판에 한국인중국인, 필리핀인을 상징하는 소녀상이 들어섰으며, 심지어 일본인 관광객들도 꼭 들린다. 한국에만 있는 사람들, 특히 어린 세대들은 신흥 민주파인 서방주의자만 보고는 민주파를 친일로 오해하지만[8] 원래 활동하여 오고 영향력도 강한 본래 민주파는 엄연히 반일 성향이 강하며 중국 공산당만큼 일본 제국주의도 싫어한다. 당장 민주파의 좌장인 렁콕홍 의원은 2005년, 고이즈미 정부의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시위를 조직함은 물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인형을 구타하는 퍼포먼스까지 펼쳤다.

경제적으로도 침탈을 실시해 백인들이 소유하던 공장들은 전부 일본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홍콩 달러는 일본군 군표로 대체되었다. 홍콩증권거래소의 주식거래도 일시적으로 잠정 중단하였다. 당연히 홍콩은 경제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인플레이션이 벌어졌으며, 무능한 일본군정은 이를 해결조차 못해서 그냥 굶어죽든 말든 수수방관만 했다. 공권력의 경우도 홍콩 소방처는 해산되고 일본 해군의 설영대 소방중대가 이를 대신했다. 홍콩 경찰은 직원 대부분이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는 등 인적 손실을 크게 겪었으며, 결국 이 쪽도 일본 육군 헌병대가 대신했다. 헌병대는 백인에게만 허락되던 홍콩 버스홍콩 트램, 스타페리의 2층에 올라가 자리를 독차지하거나 홍콩인들에게 이유 없이 군도를 휘두르며 위협하는 등 유세를 부려댔다. 이래저래 황당한 이유로 체포를 남발하기도 했다. 홍콩인들의 민심은 이미 한참 전에 안드로메다로 떠났으나 저항할 힘이 없었고, 식민지 지배층이던 백인들도 이제는 힘을 잃고 엎드려 있거나 괴롭힘당하는 초라한 신세였다. 일부 영국인 귀족층은 야만인으로 우습게 보던 일본인들에게 온갖 망신소리를 듣다 못해 일본군이 도달하지 못하는 호주로 몰래 도주하기도 했다.[9]

종교및 문화적으로도 일본의 억압이 지속되어 홍콩신사 등 신사를 짓고 홍콩인들에게 이 곳에서 참배를 강요하기도 했다. 성공회루터교 등 개신교회들과 가톨릭 홍콩교구 성당들은 모두 폐쇄되거나 장교 사교클럽으로 전환되었으며, 성당들은 성체를 집어먹거나 성상이 훼손당하는 등 심각한 신성모독을 겪었다. 반일 성향 기독교인들은 몰래 죽이기도 했다. 페닌술라 호텔은 토야 호텔로 이름이 바뀌었고, 영어 사용은 금지되고 대신 일본어를 보급하였으며, 거리 이름도 빅토리아 등 영국풍을 없애고 일본식으로 고쳤다. 이는 사실 이유가 있는데 홍콩이라는 이질적인 지역을 단시간에 동화시키고 싶어서 이런저런 것들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이는 싱가포르 등 다른 영국 식민지 점령지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도 마찬가지였다. 싱가포르는 아예 이름이 쇼와의 남쪽 섬이라는 이름의 쇼난(昭南)으로 통째로 개명당해야 했다. 물론 민심은 전혀 얻지 못했으며, 저항심을 우려해 더욱 난폭히 억눌렀다.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 이 때 일본 해군에 의해 활주로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위세는 여기까지였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전열을 재정비한 영국군미군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일본군을 쫓아내기 시작했다.[10] 이미 일본군은 곳곳에서 밀리고 있었으며, 되려 오키나와를 미군에 빼앗기고 도쿄 - 요코하마 수도권이 미군의 대대적 공습을 받는 등 본진까지 털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미군은 홍콩 수복을 시도하기 시작해 미 공군의 전신 미 육군 항공대 소속 폭격기인 B-29 등이 완차이 등 홍콩섬의 일본 해군 해안요새들에 집중적으로 폭격을 퍼붓고 미 해군 함정들도 빅토리아만에 모습을 드러내 함포를 갈겼다. 일본은 제대로 반격조차 못하고 털리기나 하는 신세였다.[11] 미군의 맹공격으로 일본은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렸으나, 끝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결사항전으로 1억 총옥쇄를 들고 나왔으나, 이미 1945년 5월 쯤 게임은 끝났다. 같은 추축국인 독일은 이미 아돌프 히틀러자살 후 그의 부관 되니츠가 연합군에 항복해 전쟁에서 패했고, 이탈리아는 이미 1943년 항복하여 연합국으로 전향한 상태였으며,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으로 독일에 빌붙어 명맥만 이어가던 무솔리니 정권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성난 군중에게 끌려나온 후 총살당해 거꾸로 메달리는 신세가 되며 멸망했다. 홍콩 점령지 역시 연합군에게 뺏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던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2방을 그대로 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렇게 1945년 8월 15일에[12]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여 일본의 홍콩 지배가 다 끝나자 중화민국장제스 주석은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 역시 중국 국민정부의 특별행정구로 반환이 마땅하다며 옹호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8월 30일에 영국 해군홍콩섬 센트럴 부두에 상륙해 홍콩을 완전히 재점령하면서 홍콩은 다시 영국 치하로 돌아온다.[13]

영국은 특별군사법정을 열어 일본군에 부역한 중국인들과 홍콩에서 전쟁 범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처벌했다. 중국인 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22명이 투옥되었다. 일본인들은 21명에게 사형이, 85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그 밖의 인원들은 대부분 야반도주했으며, 일부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 일본으로 되돌아갔고, 추가적인 기소는 없었다. 사실 연합국 점령지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비교적 전후처분이 관대한 편이었고, 이는 독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14] 오히려 소련이 점령한 점령지들인 북한, 만주, 내몽골, 사할린, 동독 등에서 피의 숙청이 벌어져 북한 내 친일파는 전원 NKVD가 체포해 갔고[15] 만주국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 선통제도 탈출을 시도하가다 실패하고 NKVD에 체포된 후 새로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푸순 감옥에 수감돼버리는 신세가 되었다. 홍콩은 비록 짧은 시간 동안만 점령당했으나, 이 때 너무 괴롭힘을 당해 일본문화에 대한 선호와는 별개로 반일감정이 극심한 편에 속하며, 민주파 정치인들 역시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센카쿠 열도 문제 등이 나왔다 하면 반일 운동을 벌인다. 친중파와 민주파가 단 하나의 의제로 단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반일 이슈이다. 홍콩 독립운동 관련 인사들 가운데 일부 인사들은 일본 극우에 의해 흑화되어 맹목적 친일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극단주의자로 배척받으며, 민주파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3. 역대 홍콩 총독

직위명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홍콩군정청장관[16] 사카이 다카시
(酒井隆)
1941. 12. 25. 1942. 2. 20.
신미 마사이치
(新見政一)
홍콩점령지총독 이소야 렌스케
(磯谷廉介)
1942. 2. 20. 1944. 12. 24.
다나카 히사카즈
(田中久一)
1945. 2. 1. 1945. 8. 15.

4. 기타

오늘날 홍콩에서 한국처럼 일본풍 어묵을 길거리 음식으로 많이 먹게 된 것은 홍콩일치시기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1] 군정부인만큼 군기욱일기일장기만큼 많이 쓰였다고 한다.[2] 당시 홍콩에서는 웡쪼우(皇祚, 황저)라 불렸다.[3] 애초 이때 미국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유럽 상황도 불간섭주의를 이유로 일부러 모른 척 했다.[4] 이 때는 이미 나치가 프랑스를 장악해 비시 프랑스를 세웠고, 샤를 드 골 등의 레지스탕스는 식민지인 아프리카로 건너가 차드에서 망명투쟁을 선언하고 지하에서 저항을 펼치는 시기였다.[5] 홍콩 경찰은 이때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으며, 결국 일본군에 의해 조직 자체가 해체되어 직원들이 전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도주한 경찰관들은 중화민국의 지원 하에 게릴라화되었다. 홍콩섬 센트럴의 성공회 성 요한 성당에 산화한 영국군과 홍콩 경찰을 추모하는 공간이 있다.[6] 항복한 날이 하필 크리스마스라서, 이 날은 'Black Christmas' 라고 불리운다. #[7] 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즉 인도네시아도 똑같았다. 그래서 위안부 피해자 중에 프랑스나 네덜란드 여성들이 나오는 것이다.[8] 사실 서방주의자도 영국으로의 회귀나 홍콩의 전면 자치를 주장하지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일본 내 진보적 시민단체나 일본 공산당 등과 연대할 뿐이다. 일본 극우의 영향을 받는 건 어디까지 홍콩 독립운동 세력이다.[9] 이 때 필리핀이 함락되자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도 호주로 철수한다.[10] 광복군이 연합군을 돕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 때에는 수많은 일본군 징집 조선 청년들이 광복군에 귀부하여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일본인 병사나 초급장교들도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는 알아서 연합군에 투항하고 고급정보를 술술 불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11] 이 때 미군의 맹공격으로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들에선 불발탄이 나온다. MTR동철선홍콩섬으로 끌어오는 프로젝트를 지연시킨 원인도 완차이 쪽에서 대규모로 나오는 불발탄이 원인이었다. 이 불발탄들은 홍콩 경찰 소속 EOD팀이 전부 수거 후 해체했다. 완차이 외에도 타 지역들에서도 간혹 미군 폭격기가 떨군 불발탄이 나온다.[12] 이 날은 대한민국광복절이고, 일본은 패전기념일이다. 일본 내에서는 종전기념일이라고 에둘러 의미를 축소시키려 하지만, 일본인들 스스로 전쟁에서 패한 날로 알고 있다.[13] 이미 홍콩섬 동부와 남부 등 일부는 1945년 5월에 영국 해군이 상륙해 해방시킨 상태였고, 그 이후로도 연합군이 이곳 저곳 상륙하거나 월경해서 점령 후 해방시켰다.[14] 오히려 독일로부터는 페넴원데를 장악한 후 기술 등을 빼가고 사람도 빼갔다. V2 로켓 개발자 베르너 폰 브라운도 이 때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15] 하지만 이는 과장된 면이 있다.[16] 2명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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