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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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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
(창장강 / 양자강 / 대강 / 강수 / 양쯔강)
长江 / Yangtze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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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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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쓰촨성 · 안후이성 · 윈난성 · 장시성 · 장쑤성 · 충칭시 · 후베이성 · 후난성 · 칭하이성 · 티베트 자치구
도시 이빈시 · 루저우시 · 충칭시 · 완저우구 · 이창시 · 징저우시 · 웨양시 · 우한시 · 어저우시 · 황스시 · 주장시 · 안칭시 · 츠저우시 · 퉁링시 · 우후시 · 마안산시 · 난징시 · 전장시 · 우시시 · 창저우시 · 난퉁시 · 쑤저우시 · 상하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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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오강 · 원강 · 쯔강 · 상강 · 감강 · 황푸강
수계 장강 수계
발원지 위치 탕구라 산맥
(칭하이성 하이시 몽골족 티베트족 자치주 거얼무시)
고도 5,042m (16,542ft)
좌표 북위 31° 23′ 37″ 동경 121° 58′ 59″
하구 위치 동중국해
고도 0m (0ft)
좌표 북위 31° 23′ 37″ 동경 121° 58′ 59″
길이 6,300km (3,915mi)
면적 1,808,500km² (698, 300sq mi)
유량 평균 30,166m/s (1,065,302 cu ft/s)
최대 110,000 m3/s (3,884,613 cu ft/s)
최소 2,000 m3/s (70,629 cu ft/s)


1. 개요2. 명칭3. 역사
3.1. 형성과 변화3.2. 선사시대3.3. 시대 ~ 춘추전국시대3.4. · 시대 3.5. 삼국시대 ~ 위진남북조시대3.6. · 시대3.7. 송나라 시대3.8. · 시대3.9. 청나라 시대3.10. 근현대 장강사
4. 환경 문제
4.1. 수질 오염 문제4.2. 가뭄 문제
5. 기타
5.1. 주요 지류5.2. 치수
6. 강변 주요도시7. 항구도시8.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장강.jpg
오늘날 장강의 모습
不盡長江滾滾來
끝없는 장강의 물결은 도도하게 흐른다.[1]


장강(长江) 또는 양쯔강(扬子江)은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 내륙을 거쳐 동중국해로 흐르는 이다. 국제적으로 널리 불리는 명칭인 '양쯔강(Yangtze River)'은 양자강()의 영어 표기다.[2] 원래 ‘양자강’ 은 난징시, 전장시, 난퉁시, 상하이시 근처에서 흐르는, 장강 하류 일대를 이르는 명칭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경우이다. 유럽인들은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왔으므로, 하류를 칭하는 말을 많이 접했던 것이다. 이 밖에 대강(大江)이라는 이름도 있다.

이름답게 세계의 하천 가운데 세 번째[3]로 길며 아시아에서는 가장 길다. 당연히 중국에서도 가장 긴 강이다. 강의 길이는 6300km에 달하지만 유역 면적은 180만 8500km²로, 길이에 비하면 그리 넓지 않다. 해발 5042m인 겔라댄동산에서 발원해 티베트 고원윈난 고원을 지나 쓰촨 분지로 흘러가면서 싼샤를 지나는데, 여기에 싼샤 댐이 있다. 싼샤 댐을 지난 물줄기는 평야 지대를 흐르며 둥팅호포양호[4]처럼 큰 호수들이 여럿 존재한다. 장강은 상하이 북쪽 하구에서 동중국해로 흘러들어간다.

2. 명칭

상고 시대에는 '(강)'이란 한자 자체가 장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으나, 한대에 이르러 민물이 흘러가는 길을 통칭하는 일반명사로 바뀌었다.[5] 이에 다른 강과 구별하기 위해 육조시대부턴 장강(긴 강)이라 불렀다. 산해경 등 고문서를 보면 江(강) 자만 쓰여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장강을 뜻한다. 장강이랑 비슷하게도 '(하)' 역시 원래 황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강'은 '수(水)'라고 불렀는데, '회수(淮水)'가 대표적인 사례.

길이가 워낙 길어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하여 흘러가는 최상류 지역은 티베트인들이 드리추(འབྲི་ཆུ, Drichu)라고 부르고 중국에선 통천하 /퉁톈허(通天河)라고 하는데, 서유기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상류 지역은 금사강 / 진사강(金沙江)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유네스코 중국의 자연 유산으로 등록된 윈난성을 흐르는 세 강 중 하나이다. 또한 쓰촨 지역을 흐르는 부분을 천강(川江), 후베이 / 후난 지역을 흐르는 부분을 형강(荊江)[6]이라 하기도 한다.

양쯔강은 원래 장강의 최하류 300km 정도를 부르는 말이었으나 와전되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이 되었다. 즉 원래 사진에 나온 전체 강의 이름은 '장강(長江)'이고 양저우시 > 쑤저우시 > 상하이시 인근 장강 하류를 일대 주민들이 부르는 명칭이 '양쯔강'이라고 불렀는데, 그 지역에 파견 나왔던 서유럽 선교사가 해당 강 전체를 양쯔강이란 명칭으로 유럽에 알리면서 졸지에 장강의 일부를 의미하던 양쯔강이 장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다. 양쯔강 지역에서 사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 강을 양쯔강보단 장강으로 인식해왔지만, 서양에선 '양쯔강'의 지명도가 압도적인지라 그렇게 굳어버렸다. 한국에선 '장강'과 '양쯔강', '창장강'이 혼용되고 있으며 '창장'이나 '창강'은 거의 쓰인 적이 없으며 '양자강'은 옛날 1970년대 전후로는 좀 사용되었으나[7] 1990년 한중 수교 이후로는 이러한 용례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장강'이나 '양쯔강', '창장강'으로 쓴다.

3. 역사

3.1. 형성과 변화

중생대 말기인 백악기, 그러니까 1억 4500만 년 전부터 6600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테티스해와 같이 광활한 바다로 덮혀 있었으나, 약 5500만 년 전 인도판유라시아판이 충돌하며 인도 아대륙티베트 고원이 융기하는 과정에서 장강의 상류라고 할 수 있는 수계가 형성된다. 그렇지만 이때의 장강은 오늘날처럼 동쪽으로 흘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서쪽에 있던 내륙 방면의 바다와 그 일대에 있던 수많은 호수들로 흘렀던 것 같다.[8][9]]

신진기를 지나 플라이스토세 시기인 약 300만 년 ~ 200만 년 전 사이에, 티베트 고원 일대의 급격한 융기와 함께 강력한 침식 작용이 장강의 유로를 동부로 돌리면서 하천쟁탈(Stream capture)이 일어났다.[10] 그 과정에서 여러 고대 호수들이 장강으로 흘러들며 오늘날 장강의 중 · 하류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장강은 오늘날의 황해로 흘렀지만, 모종의 이유로 상류의 수계가 그보다 남쪽으로 흘렀던 다른 강의 수계와 합쳐지며 최종적인 유로가 동중국해 방향으로 변화하였고, 이후 여러 침식이나 풍화와 같은 여러 지질변화를 거치며 현재의 장강의 형태가 완성되었다.[11]

장강 삼협(長江三峽)에는 최소 7단의 충적계단식 하상구조[12]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장강이 총 7번에 걸쳐 주변 지형들을 침식시켰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최종 빙기의 해수면 하강과 상승의 반복에 의해 이러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장강의 하천 침식(River incision)이 시작된 시점은 플라이오세 · 미오세(500~180만 년 전)에서 플라이스토세 중 · 후기(180 ~ 70,000년 전)까지 학자들에 따라 각각 다르다. 열연대학과 지형 역모델링에 따르면 미오세 초기에 접어들며 강의 침식이 가속화되었고 플라이스토세에 둔화되기 전까지 그러한 기조를 계속해서 유지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장기적인 하부 침식은 장강 하류에 수많은 퇴적물을 흘려보내어 배후습지와 퇴적평야(Delta)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이 지역은 홀로세 초 · 중기에 급속한 퇴적, 잦은 범람과 극심한 가뭄, 수위의 상승 및 하강 등의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남아시아 방면 몬순의 강화에 따른 결과일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남중국의 계절풍이 몬순의 영향으로 더욱 습하고 따뜻하게 바뀌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로 인해 남중국의 환경이 온난다습하게 변하면서 장강 유역에 울창한 정글이 형성되었고, 그 주변으로 여러 저습지들과 늪지대가 생겨났다.

3.2. 선사시대

파일:난징 원인.jpg
난징 원인의 두개골
장강 유역에서 초창기의 인류 활동은 대략 70만 년 전, 혹은 그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난징에서 발견된 원인(南京原人) 화석은 62만 년에서 58만 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후 안후이에서도 난징의 그것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것으로 밝혀진 인류의 두개골 및 치아 화석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장강 유역은 상술했듯이 온난다습한 기후였고, 수량이 많은 강과 울창한 정글을 끼고 있어 동식물의 분포가 다양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인류가 이곳에 거주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당 지역 외에도 쯔산옌, 지앙촨 등의 지역에서 뗀석기와 불을 피운 흔적, 동물 뼈 등이 발견되었다.

선사시대에 이 지역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대 한반도인과 일본인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고대 민족(O1b2) 역시 여기에 살고 있었는데, 이후 한족(O2) 등 다른 세력에 밀려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온 쪽이 한반도 토착민[13], 위로 올라가 한반도로 내려온 게 예맥[14]이다. 삼한때도 북부에서 한국어족 세력이 계속 내려온 흔적들이 보인다.[15] 이때 몽족(O2a2a1a2a1a)도 장강 유역에 거주했는데, 한족에 밀려서 남하했다. 하지만 장강에는 한국어에 대한 구전을 찾을 수 없었다.

구석기 시대를 지나 신석기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장강 유역에 문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장 최초의 문명은 장강 중상류 지역에서 등장한 펑터우산 문화(彭頭山文化)로서, 기원전 7천 년에서 기원전 5천 년 사이에 존재했던 듯하다. 펑터우산 문화 이래로 장강 중류를 중심으로 하여 옥 공예와 토기 제작이 발달하며 기원전 5천 년 무렵에 다시 문화(大溪文化)가 출현하였다. 해당 문화의 거주민들은 강 주변에서 벼를 재배하며[16] 완전한 정착 생활을 하였는데 죽편과 진흙으로 지은 반지하식 가옥에서 거주하였다. 다시 문화는 이후 취자링 문화(屈家嶺文化), 스자허 문화(石家河文化) 등으로 분화하여 발전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장강 하류에서는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 마자방 문화(馬家浜文化), 쑹쩌 문화(崧澤文化) 등이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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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주 문화권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옥벽. 당시에는 부와 군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장강 문명의 절정은 기원전 3400년쯤에 등장한 량주 문화(良渚文化)였다. 량주 문화권의 거주민들은 대규모의 수리 시설과 관개 시스템을 건설하여 벼를 대량으로 재배했으며, 바다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물고기를 양식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는 피라미드 형태의 대형 제단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함께 발견된 무덤 일부에서는 수백 개에 이르는 옥벽과 비단, 상아, 옻칠된 유기 등이 출토되어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순장의 흔적 역시 발견되었다.

량주 문화는 기원전 2천 년쯤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량주 문화권이 극심한 기후변화로 몰락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증거로서 엘니뇨 남방 진동의 빈도 증가로 인해 수십 년 동안 남중국 일대의 강수량이 매우 증가했다는 점을 들었다. 아마도 고강수 기간과 함께 일어난 해수면의 상승으로 량주 문화권의 경작지가 물에 잠겼거나, 혹은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강우가 퇴적물의 운반을 방해하여 장강 삼각주에서 이루어지는 농경을 방해했을 수도 있다. 량주 문화의 이러한 붕괴는 인더스 문명, 이집트 고왕국, 아카드 제국의 쇠퇴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전지구적으로 한 차례의 기후 변화가 있었다.

중국 사학계의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량주 문화의 유민들 일부가 북상하여 하나라의 기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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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퇴 문화의 청동기 유물

량주 문화의 쇠퇴 이후인 기원전 2천 년대 이후, 장강 중 · 하류에서 문명의 발전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장강 중상류 지역인 사천 분지 일대는 기후변화로 인한 타격을 비교적 덜 받았고 토질 역시 비옥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문화들이 등장하였다. 기원전 2500년부터 기원전 1700년 무렵까지 존재했던 바오둔 문화(寶墩文化)를 계승하여 생겨난 삼성퇴 문화(三星堆文化)는, 비슷한 시기에 황하 유역에 존재했던 상나라와 비슷하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17] 이들의 유적군에서는 청동기와 황금, 상아, 옥기 등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를 자세히 분석한 결과, 삼성퇴 문화권의 거주민들은 고도의 청동기 재련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세공하는 기술 또한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18]

3.3. 시대 ~ 춘추전국시대

장강 문명은 삼성퇴 문화의 등장을 기점으로 황하 문명의 영향을 짙게 받기 시작한다. 앞서 설명했던 우청 문화와 같이, 특히 장강 중류를 중심으로 하여 황하 문명과의 교류가 자주 이루어졌다. 다만 당시 상나라는 중심지가 황하 중하류에 위치해 있었기에 장강 유역을 직접 지배하지는 못했으나, 남방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졌고 해당 지역에 무역 거점들을 건설하기도 했다. 갑골문 기록에서 등장하는 삼묘(三苗) 등의 집단은 장강 및 그 이남 지역에 거주했던 토착 세력으로서, 상나라의 원정 대상이자 교류 상대였다. 실제로 장강 중류의 고대 유적지에서 상나라 양식의 청동기와 유사한 유물이 발견되는데, 이는 장강과 황허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 문왕 시기, 계련(季連)의 후예를 육웅(鬻熊)이라 하였다. 육웅은 자식의 예로 문왕을 섬겼으나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은 웅려(熊麗)라 했고, 웅려는 웅광(熊狂)을 낳았으며, 웅광은 웅역(熊繹)을 낳았다. 웅역은 주 성왕 시기에 해당하며, 성왕은 문왕과 무왕을 위해 애를 썼던 유공자의 후손을 천거토록 하여 웅역을 초만(楚蠻)에 봉하고 자작과 남작의 지위에 해당하는 땅에 봉하여 미씨(羋)라 하고 단양(丹陽)에 기거하게 하였다.
《사기(史記) · 초세가(楚世家)》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남방, 특히 장강 유역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나타났다. 주 무왕성왕은 북방과 동방뿐만 아니라 남방에도 봉건 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장강 유역의 여러 토착 세력에게 제후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초나라의 시조인 웅역(熊繹)이다. 사마천의《사기(史記)》에 따르면, 주나라 성왕은 웅역을 봉하여 초(楚) 일대의 제후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장강 중류 지역을 주나라의 봉건체제 안에 편입하려 한 최초의 시도이며, 아마도 주나라의 영향력이 장강 일대까지 미쳤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주나라의 이러한 봉건체제는 실질적인 군사적 정복이나 행정적 지배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책봉을 통해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주나라'라는 울타리 안에 편입시키려는 일종의 외교적 제스처에 가까웠다. 주나라의 정치 · 군사적 중심지는 여전히 황하 유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장강 유역은 거리도 꽤나 멀거니와 문화와 민족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환경이 달라 직접적인 통제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주나라는 종주국으로서의 권위, 그리고 교역을 통한 영향력 정도만 행사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토착 세력이 주나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할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황하 문명의 남방 진출이 단기적으로는 영향력을 확장한 것에 그쳤지만, 장기적으로는 장강 유역의 독자적인 세력의 발흥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19]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으로 천도한 이후 전대미문의 난세인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춘추전국시대의 장강 유역은 (吳), (越), (楚) 세 나라의 각축장이었다. 장강 중류 지역에서는 초나라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여 광대한 영토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초나라는 황하 중심의 청동기 문명과는 달리 샤머니즘, 토템 숭배, 독창적인 예술양식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장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서는 오나라와 월나라가 성장하였다. 이들은 초나라와 대립하면서도 해양적·상업적 성격을 띠었고, 장강 하류를 통한 교역로를 장악하며 남방 문화권을 확장하였다. 이 시기 장강 유역은 북방의 중원 문화와 대비되는 남방 특유의 정체성을 갖추었고, 동시에 양쪽의 교류로 다채로운 문명 요소가 결합되었다. 이 세 나라들은 모두 중원의 혼란에 개입하여 춘추오패로 등극함으로써 황하 문명권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등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쓰촨 분지 일대에서는 삼성퇴 문화로부터 생겨난 (巴)와 (蜀) 등의 나라들이 중원과의 교류를 이어갔다. 중원의 국가들이 형만(荊蠻)이라 일컫으며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백가의 활발한 활동과 더불어 패자회맹, 합종연횡 등의 사건을 거치며 전국시대 말기에 접어들면 장강 문명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중원과의 문화적인 통합이 가시화되었다.[20]

3.4. · 시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이르러 (秦)이 전국 칠웅 가운데 가장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미 진나라는 기원전 316년 (巴)(蜀)을 멸망시키며 장강 상류를 장악한 바 있었다. 기원전 223년, 진왕 정은 휘하의 명장 왕전(王翦)에게 대군을 맡겨 (楚)를 멸망시켰으며, 이듬해인 기원전 222년에는 왕분(王翦)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월(越) 일대를 평정하도록 함으로써 장강 중 · 하류와 그 이남까지 지배권을 확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진나라는 장강 유역에 군현제(郡縣制)를 도입함으로써 토착 세력을 억누르는 한편으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였다. 예컨대 오늘날의 저장성 일대에 설치되었던 회계군(會稽郡)은 동남부 해안과 장강 하류를 관할하였으며, 장강 중류에 설치된 남군(南郡)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남방 경영의 거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장강 유역은 황하와 달리 아열대~열대 기후에 속하는, 나무로 뒤덮힌 울창한 정글이었다. 이런 기후 속에서 토착세력의 끈질긴 저항으로 진나라의 중앙집권화는 난항을 겪었다. 비록 진나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더라도 사회·문화적으로 장강 유역은 여전히 다원적이었고, 진의 군현제가 형식적으로는 도입되었지만 남방의 토착문화와 생활양식은 황하문명과 크게 달랐다. 언어·종교·풍습의 차이는 중앙집권적 통제의 한계로 작용했다. 따라서 진의 남방지배는 행정적 군현 설치와 군사적 주둔에 기반한 피상적인 통치에 가까웠다. 결정적으로, 진의 통일 제국이 고작 15년밖에 가지 못하는 바람에 장강 유역에 대한 제도적 장악은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 진나라도 주나라 대와 마찬가지로 상징적 · 제의적 차원에서만 장강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의 남방 경영은 중요한 2가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첫째, 장강 유역을 중앙집권적인 제국 체제 속에 처음으로 편입시킨 시도였다. 둘째, 군현제를 통해 장강을 제국 내의 지역으로 인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의 남방 지배는 이후 한나라가 장강을 제국의 핵심 지역으로 발전시키는 기초를 놓았다.

상술했듯 진나라가 약 15년 만에 멸망한 뒤, 초한쟁패기를 거쳐 유방한나라(漢)가 들어서며 장강은 다시 한번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상술했듯이 진의 통치는 군현 설치와 군사적 지배에 치우쳐 있어 화북의 영향력이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던 반면에, 한나라는 약 400년 동안 장강을 통치하면서 보다 체계적으로 이 지역을 제국의 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초기에는 민월 등의 토착 세력과 군국제로 인해 장강 일대에 봉해진 제후들이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전자는 천천히 한족에 동화되어 갔으며 후자는 오초칠국의 난 이후 강력해진 중앙권력으로 찍어눌렀다.

이후 장강은 제국 남부의 경제와 행정을 떠받치는 중심지로서 기능하였고 중간에 한 무제의 남방 정복(민월 · 남월)으로 인해 장강 · 주강 · 교주로 이어지는 대남(對南) 행정구역이 완성되었다.[21] 무엇보다도 장강은 황하에 맞먹을 정도로 생산량이 뛰어난 지역이었다. 비록 이 시기에는 완전히 개간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나, 이미 진나라 시기에 건설되었던 도강언(都江堰) 등의 관개시설은 한대에 이르러서도 강의 범람 통제 외에도 대규모 관개농경을 별 문제 없이 수행하여 일대의 식량생산량을 안정화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장강 상류(익주)가 곡창 지대로 거듭나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장강 중류와 하류(형주 · 양주)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치수와 개간사업이 실시되며 경작지가 급속히 확대되어 생산량이 폭증하였고, 한 무제 대에 실시된 소금·철·술의 전매에 있어 중하류 지역은 해당 상품들의 주요생산지로서 수운교통로의 정비 및 확장이 이루어졌다.

사회·문화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한은 북방의 유민들을 남방으로 이주시켜 토착 세력과 함께 정착하게 했으며, 이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방에서 전해진 유교적 학문과 제도는 점차 장강 유역에 뿌리내려, 학교와 향촌 사회의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토착 세력의 문화적 자율성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토착의 풍습·언어·종교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한 문화와 융합하면서 독특한 지역적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이 과정은 후일 강남이 독자적인 정치·문화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장강 유역은 또한 상업과 교역의 확대를 통해 제국 질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장강 수운은 북방의 황하와 연결되었고, 동시에 동중국해와 이어져 해상으로 이어지는 서양과의 새로운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이를 통해 강남의 자원은 북방과 교환되었고, 장강 하류의 항구 도시들은 점차 교역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가운데서 장강 유역은 중원과 점차 정치적 · 문화적 · 경제적으로 긴밀히 통합되며 정체성이 거의 일체화되어 갔다.

3.5. 삼국시대 ~ 위진남북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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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중국
후한이 무너진 뒤, 중국은 (魏)·(蜀)·(吳)의 세 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삼국시대의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장강은 세 나라의 주요 전장이자 정치적 판도를 결정하는 무대였다. 후한 말, 하북을 평정하며 기세를 얻은 조조는 장강 이남으로 남하하여 중원을 통일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조군이 유비손권이 이끄는 촉 · 오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대패하면서 위나라의 장강 이남 진출은 좌절되었다. 자세한 것은 적벽대전 문서 참조. 이후 장강은 위·촉·오 사이의 실질적인 국경선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장강 중류의 형주(荊州)를 두고 촉과 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형주는 북으로 위, 서쪽으로 촉, 동쪽으로 오와 맞닿아 있어 장강 수운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유비는 관우를 형주에 주둔시키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219년 관우가 북진하여 번성과 양양을 공격하다가 후방이 비게 되었다. 이 틈을 노린 손권은 여몽(呂蒙)의 계책으로 형주를 기습했고, 관우는 장강 방면의 퇴로를 상실한 채 패배하고 참수되었다. 이 사건으로 형주는 완전히 오나라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촉과 오의 동맹은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촉과 오의 균열은 곧바로 이릉대전(221)으로 이어졌다. 관우의 죽음을 빌미로 유비는 대군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동진하여 오나라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오나라의 명장 육손(陸遜)이 장강 연안의 지형과 화공술을 활용해 유비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촉군은 수십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잃었고, 유비는 백제성(白帝城)으로 퇴각한 후 곧 병사하였다.

한편 위는 여러 차례 장강을 돌파해 오나라의 수도 건업(建業)을 공격하려 했지만, 오나라는 강력한 수군과 장강 특유의 천연 장벽에 기대어 이를 막아냈다. 대표적으로 조예(曹叡) 시기, 위군은 대규모 수군을 동원하여 오나라의 수도를 위협했으나, 장강 수군전에 숙련된 오나라의 저항에 밀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촉한은 장강 상류와 연결된 익주를 근거로 수차례 북벌을 감행했지만, 장강 중류의 요충지를 상실한 뒤로는 오나라와의 연합에도 제약이 생겨 전략적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삼국 후반기에 이르러 위가 촉을 멸망시킨 뒤(263), 사마씨 집단은 최종적으로 장강 이남의 오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오나라는 여전히 장강 하류의 천연 방어선을 의지하며 건업을 중심으로 항전했으나, 280년 서진(西晉)의 대대적인 남정과 당시 오나라의 군주였던 손호의 무능에 의해 장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건업이 함락되었다. 이로써 오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시대는 종결되었다.

서진이 오나라를 무너뜨리며 장강 전역이 다시 한 번 통일왕조의 영역에 들어갔다. 그러나 내부정치의 혼란과 외척·귀족의 권력 다툼, 그리고 291년에 발생한 팔왕의 난으로 인해 통일은 급속히 와해되었고, 이어 311년 흉노의 잔존세력들이 일으킨 영가의 난으로 오랜 고도였던 낙양이 함락되며 서진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후 화북에 이민족들이 유입되며 수많은 세력들이 난립하자, 수백만에 달하는 한족 백성들과 진 왕실의 일부는 장강 이남으로 대거 이주하여 동진(東晉)을 세웠다. 이민족이 세운 여러 국가들(전조, 후조, 전연, 전진, 후진, 후량 등)은 끊임없이 남하를 시도했지만, 장강이라는 천연의 장벽과 동진의 수군 방어 체계에 가로막혔다. 특히 북방 기병 중심의 군사력이 장강을 건너려 할 때, 병참과 전술에서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 장강 중하류는 수십 km에 달하는 넓은 수역과 범람원, 그리고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저습지와 수많은 하천에 이중삼중으로 가로막혔고, 여기를 건너기 위해서는 수군 운용이 필수였다. 그러나 북방 정권들은 기본적으로 이민족 출신이라서 수군 운용경험이 부족해 이를 단념해야 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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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시대 남조들의 북방 경계선의 변화
5세기 들어 선비족 계열의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함으로서 북중국은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며(북조), 남방에서는 건업을 중심으로 동진이 존속한 뒤 송·제·양·진으로 이어지는 네 왕조(남조)가 차례로 성립하면서 남북의 대치 구도가 형성되었다(남북조시대). 이들 남조 정권은 모두 장강 하류를 근거지로 삼아 북방의 강력한 국가들과 대치하였고, 그 과정에서 장강은 남조의 생존을 지탱하는 방어선이자 정권 교체의 무대가 되었다. 동진~송 시기에 장강은 대체로 안정된 방어선으로 기능하였다. (宋)은 동진의 계승 정권으로, 초기에는 무장 세력의 지원 아래 비교적 강성한 체제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 장강은 북벌과 남방 방어를 동시에 고려하는 전략적 거점이었으나, 결정적으로 북벌은 실패하고 그뒤에는 장강 이남의 방위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귀족가문들의 권력 다툼과 내란이 빈번해지면서 장강 방어선은 정치적 분열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송의 뒤를 이은 제나라(齊)는 정권 자체가 군사 쿠데타로 성립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이 불안정하였다. 이 시기 장강은 계속해서 남조의 생존기반이었지만, 내부정치의 불안정성은 방어체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북위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점차 강성해짐에 따라 장강 방어선은 점점 더 전략적으로 중요해졌으나, 남조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내부권력다툼은 효과적인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양나라(梁) 대에 이르면 장강은 남조 정권의 중심 무대이자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양무제는 불교 진흥에 적극적이었고, 건강과 장강 유역은 불교와 문벌 귀족 문화가 융성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북방의 강성한 세력에 대항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빈부격차와 함께 내부분열 등이 있었다. 진나라(陳)는 남조 최후의 정권으로서 장강 중하류를 마지막 방패로 삼았다. 그러나 이미 양나라 말기에 장강 상류를 북주에게 빼앗겼으므로 진나라의 약세는 명약관화하였다. 그 뒤 진나라가 겨우겨우 버티는 사이에 화북에서는 북제북주를 거쳐 수나라가 강력한 통일 국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결국 589년 수 문제의 대규모 남정군이 수륙병진을 통해 장강을 돌파하여 건강을 함락시킴으로서 장강 방어선이 마침내 무너지고 남조는 멸망하였다.

3.6. ·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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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지도
약 400년에 걸친 혼란기를 종결지은 것은 수나라였다. 그러나 수나라는 중국의 통일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맞이해야 했다. 전통적으로 중국 왕조들의 정치 중심지는 고도 낙양장안이 위치해있는 관중 일대였던 반면, 경제적 중심지는 황하 일대에서 장강 유역으로 이동해버렸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묘책은 아예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정말 어마어마한 비용과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수 문제는 이를 단념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의 뒤를 이은 희대의 폭군 수 양제(煬帝)는 비용과 노동력 따위는 백성들에게서 뜯으면 그만이었으므로, 즉위 직후인 604년부터 여러 차례 공사를 지시하여 장강과 황하, 그리고 회수와 제수 등 주요 하천들을 연결해 대운하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수나라는 대운하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40년 만에 망해버렸다.

대운하의 효과를 제대로 본 것은 수나라의 뒤를 이어 들어선 당나라였다. 대운하를 통해 장강 이남이 황하 유역과 직접 연결되었고, 이를 통해 곡물·비단·차·도자기 등이 대량으로 운송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수운교통망은 단순한 경제 교류를 넘어 정치적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수도가 위치한 관중 지역은 본래 농업생산력이 한정적이어서 항상 식량이 부족했으나, 대운하 덕분에 장강 유역에서 안정적으로 세곡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특히 8세기에 일어난 안사의 난으로 화북의 주요 농경지대가 완전히 황폐화되었고, 대규모의 인구가 전란을 피해서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당나라는 화북의 조세 기반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함과 동시에 더욱이 장강 일대의 생산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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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기의 해상 무역로
당대 중후기에는 벼농사가 장강 중·하류에서 본격적으로 확립되었고, 이모작이 점차 보편화되면서 화북보다 훨씬 생산성이 높았다. 이 시기 호구조사에서도 강남의 비중은 꾸준히 증가했고, 8세기 후반을 지나서는 인구와 세수 모두에서 화북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장강 유역의 개발은 경작지의 확대에만 머물지 않고, 지역적 상업 활동과 수공업의 발전 역시 촉진하였다. 양저우(揚州)·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 등 장강 이남의 도시들은 곡물과 상품의 집산지로 성장하면서 점차 국제무역에서도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실제로 당나라의 개방적 대외정책과 해상 교역의 활성화는 장강 하류의 여러 항구도시들을 국제적 무역항으로 부상시켰는데, 양저우는 당대 최대의 소금생산지이자 무역항으로 번성했고, 쑤저우와 항저우는 비단과 차의 집산지로 국제 교역망에 편입되었다. 강남에서 생산된 차·도자기·비단 등 상품들은 해상교역망을 통해 일본·한반도·동남아, 심지어는 서아시아까지 흘러들어갔다.

3.7. 송나라 시대

장강사 역사상 최전성기이자, 강남이 역대급으로 화려한 번영을 누렸던 시대.

앞서 설명했지만, 이미 강남의 생산력은 중세에 이르러서 점차 화북을 압도하였던 탓에[25] 정치·군사의 중심지는 장강 이북으로, 경제의 중심지는 장강 이남으로 굳혀지는 구도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형세는 이미 수·당대부터 가시화되었으나, 이 구도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것은 바로 송나라 시대부터였다. 장강 유역의 저습지와 호수 주변이 수세기에 걸친 개간 작업을 통해 대규모 수리시설과 수운교통로가 확보된 대규모 농경지로 전환되었고, 타이밍 좋게 이모작이 확산되고 새로운 벼 품종이 도입되어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이리하여 송대의 정치권력이 황하와 그 북방 방어선에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제의 핵심부는 점차 장강 이남으로 옮겨갔다.

강남의 생산력이 황하 일대를 추월한 현상은 사회 전반의 구조변화를 초래했다. 당대 중기까지만 해도 경제적 우위는 여전히 황하 유역에 있었으나, 오대십국시대를 지나 송대에 접어들면서 장강 이남은 비옥한 토지와 안정된 치수(治水), 그리고 활발한 상업활동을 기반으로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전 세계를 둘러보아도 가장 번영을 누렸다. 이는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였던 하북과 하남, 섬서 지역과는 대조적이었다.[26]

하지만, 송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경제적으로는 황금기를 맞이하였으나 동시에 연운 16주의 상실과 군사력의 약화로 인해 서하, 요나라 등 북방 이민족들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실제로 송은 북방 국경의 방어를 거의 포기하고, 대신 장강 이남의 경제력을 활용해 거액의 세폐(歲幣)를 바치며 국경의 평화를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이는 장강 유역의 경제력이 튼튼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결국 북송의 멸망을 불러온 원인이 되었다. 1127년 금나라가 남하해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자(정강의 변) 송 왕조는 장강 이남을 중심으로 남송을 세웠다. 이때부터 장강 유역은 명실상부하게 '중국의 중심'이 되었다. 상술했지만 강남은 경제력, 물자, 인구에서 화북을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점했기에, 남송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체제를 꾸렸다. 하지만 문제는 군사였다. 남송은 강남 경제 덕분에 막대한 세입을 얻었지만, 이 재정의 대부분이 군사력 강화보다는 관료제 유지나 문치(文治) 중심의 정책으로 흘러갔다.

물론 장강 유역은 이민족들이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자연 방어선이자 대북방 방파제였다. 금나라 군대가 남하했을 때, 남송은 장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대표적으로 1130년대~1140년대에 걸친 악비(岳飛)의 대(對)금 전쟁에서 장강 방어선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남송 조정은 내부적으로 문신 관료들이 주도하면서, 무신들을 견제하거나 심지어 모함을 씌워 제거해버리는 크나큰 병크를 저질렀다. 그 결과 장강 유역의 방어잠재력은 충분했음에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외교적 타협으로만 버티는 체제를 굳혔다. 송나라의 이런 외교 일변도 정책은 결국 몽골 제국의 정복 과정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13세기 후반, 몽골은 강력한 기동력과 공성 기술로 장강 이북의 금을 멸망시킨 뒤 남송으로 압박을 가했다. 남송은 장강 방어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27], 내부 분열과 지휘 체계의 문제, 그리고 몽골이 수군까지 조직하면서 장강 방어선은 결국 무너졌다. 1276년 수도 임안이 함락되었고,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최후의 남송군이 궤멸하면서 장강을 기반으로 영화를 누렸던 송나라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8. · 시대

몽골 제국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세우면서 중국 대륙의 정치 중심은 큰 변화를 맞았다. 장강 유역은 이미 송대부터 경제적 핵심지로 자리 잡았지만, 원대에는 그 비중이 더욱 커졌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풍요 때문만이 아니라, 북중국이 오랫동안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거란·여진·몽골이 차례로 중원을 차지하면서, 화북 지역은 지겨울 정도로 끊임없는 전쟁과 수탈에 시달려 경제 기반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다.[28]

그러나 원대 경제체제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수나라 때 완성되어 당·송대까지 유지되었던 대운하는 오랜 전란으로 크게 파괴되어 제 기능을 상실했고, 화북과 강남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조운체계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원은 이를 복구하려 애썼지만 이전의 기능을 완벽히 되살리지는 못했다. 대신에 원나라는 해운을 통해 강남의 세곡을 북경(대도)으로 수송했다. 원이 수도를 전통적인 정치중심지였던 내륙의 관중이 아니라 연운 16주 일대, 즉 지금의 북경에 둔 것도 이런 구조와 관련이 깊었다. 장강 유역에서 수집된 세곡은 해상로와 회수·황하의 일부 구간을 거쳐 대도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 해운체계가 너무 취약했다는 점이다. 원은 유목민 세력의 전통적 약점답게 바다와 강을 통제할 능력이 부족했고, 동남 연안의 해적과 왜구들이 활개치면서 조운망은 자주 붕괴되었다. 더구나 원의 관리들이 해적 세력과 결탁하여 뇌물을 챙기거나 세곡을 빼돌리는 일이 일상화되자 세금제도는 사실상 무너져버렸다. 결국 강남 지역의 경제적 풍요는 중앙 정부로 흘러들어 가지 못하고, 농민과 지방지배층 사이의 갈등만 키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강남을 중심으로 한 한족 민중의 불만은 폭발했다.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홍건적의 난이었다. 장강과 회수 유역에서 퍼진 이 반란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원나라는 내부의 무능과 부패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원대 후기에는 이미 세곡수취체계가 무너져 중앙재정이 고갈되었으므로, 대규모 반란을 제압할 군사력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리하여 원은 급속도로 쇠퇴했고, 결국 장강 유역을 근거지로 한 주원장의 세력이 반란 세력의 주도권을 잡으며 원을 북쪽으로 몰아냈다.

주원장은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친 뒤 새로운 왕조인 명나라를 열었고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 이는 단순한 상징적 선택이 아니라, 명 초기 국가의 실질적 경제기반이 장강 하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왕조가 직면한 외부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북쪽에는 몽골 잔당인 북원이 잔존하였고, 남쪽 바다에서는 왜구가 빈번히 출몰했다. 내부적으로도 오랜 전란으로 전통적 향촌사회는 붕괴되어 농촌질서가 무너졌다. 명 태조 주원장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철저한 농본주의 정책을 폈다. 그는 토지를 재분배하고 농민을 재정착시키는 한편, 농업을 중심으로 사회를 회복시키려 했다.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는 만리장성을 보수하여 북방의 몽골을 막고, 바다에서는 해금령을 내려 왜구와 해적의 위협을 차단하려 했다. 명대에는 무엇보다도 대운하의 재개통이 결정적이었다. 주원장은 운하를 다시 정비하여 항주를 비롯한 강남의 경제 중심지와 북경을 직통으로 연결시켰다. 이 공사가 너무 잘 되어 해상수송에 버금가는 효율이 나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로써 장강 유역의 세곡과 물자가 안정적으로 북방으로 운송될 수 있엇다.

한편 명대에는 장강 하류만이 아니라 중상류의 비약적 발전이 두드러졌다. 특히 후베이성과 후난성에 해당하는 지역, 즉 당시의 호광성이 명대 중기 이후 급격히 개발되면서 새로운 곡창 지대로 떠올랐다. 남송과 원대 전란으로 이 지역은 초기에는 피폐한 변방에 불과했으나, 명 정부가 체계적으로 이주와 개간을 장려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가벼운 세금, 개간지의 다수 확보 가능, 호수지역에 쌓인 퇴적물로 인한 개간의 용이함과 비옥한 토지의 질로 다수확이 가능해진 점도 한몫하였다. 이로부터 "호광숙 천하족(湖廣熟 天下足)"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즉, '호광 지방에서 곡식이 익으면 천하가 풍족해진다.'는 뜻으로, 장강 중류의 경제력이 장강 하류 삼각주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시사한다.[29]

3.9. 청나라 시대

명나라가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무너진 이후, 중국 대륙을 접수한 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만주 지역에서 쳐들어온 청나라였다. 청의 창업집단인 만주족은 북방 기마민족으로서 해양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정성공을 비롯한 명 잔존 세력이 대만과 복건·광동 일대를 거점으로 완강히 항거하였다. 이 해상세력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한 청 조정은 직접적인 해전 대신에 앞서 주원장이 했던 것처럼 해금령을 내려 해안 주민들의 대규모 강제 이주를 시행하고, 명 잔여 세력과의 경제적·인적 연계를 철저히 차단하는 방향으로 대응하였다.

이 조치는 연안사회에 일시적 붕괴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제국의 내륙교통망과 대운하를 통해 장강 유역의 경제역량을 더욱 제국의 중심부로 흡수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장강 하류 지역은 대운하의 남단과 직접 연결되어 북경으로 향하는 조운(漕運)의 핵심이었다. 양쯔강 유역의 쌀과 비단, 차는 대규모로 운송되어 수도의 식량 공급과 국가 재정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러한 체계 덕분에 청은 바다를 거의 봉쇄한 상태에서도 경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강희·옹정·건륭 연간은 흔히 강건성세(康乾盛世)라 불리는데, 이 시기의 번영은 상당 부분 장강 유역의 물산과 상업 네트워크에 의존하였다.

장강 유역의 발전은 단순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그치지 않았다. 강남 지역에서는 미곡 이외에도 면화·차·도자기 같은 특산품의 생산과 유통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는 전세계적인 해상 교역망과도 긴밀히 연계되었다. 비록 청나라이 해금 정책을 실시했지만, 광동 체제를 통한 제한적인 무역이 허용되면서 장강 유역의 상품들은 광저우를 통해 서구와 연결되었고, 이 과정에서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상업경제의 기초가 튼튼해졌다. 따라서 장강 유역은 단순히 '제국의 곡창'에 머물지 않고, 점차 전세계적 교역질서 속에서 중국 경제의 주도적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장강 유역의 도시 발달은 명대 이래 축적된 상업 자본을 바탕으로 새롭게 활력을 얻었다. 양주·소주·항주와 같은 도시들은 사치품과 고급 소비재 시장의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서민층의 도시 문화도 활기를 띠었다. 장강 유역에서 형성된 문화적·경제적 번영은 북방의 정치 중심지와는 대비되는 남방의 독자적 활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훗날 청 말기, 근대적 개항이 진행될 때 장강 유역이 가장 빠르게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접속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청나라는 내외의 위기를 연속적으로 겪게 되었고, 그 여파는 장강 일대의 정치, 경제,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우선 17~18세기에 걸쳐 장강 중 · 하류 지역에서 가장 큰 사회적 충격을 일으킨 사건은 백련교의 난이었다. 이 반란은 종교적 색채를 띤 민중봉기로, 홍건적의 전통을 계승한 밀교적 사상이 기반이 되었다. 특히 장강 유역의 농민들은 세금 부담과 관리들의 부패, 토지 문제로 인해 불만이 쌓여 있었고, 백련교가 이를 집결시켜 대규모 봉기로 확산시켰다. 청 조정은 진압에 나섰지만, 전투는 수년간 이어지면서 장강 일대의 농촌 사회를 심각하게 파괴했고, 지방의 경제기반 역시 크게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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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주요 활동 범위
태평천국의 영향권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장강 유역은 다시 한 번 대격변을 맞이했다. 바로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홍수전이 기독교적 색채와 평등사상을 앞세워 세운 태평천국은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아 장강 유역을 장악했다. 이로써 장강은 반란 세력과 청 조정이 맞붙는 전략적 무대가 되었으며, 전쟁은 수십 년에 걸쳐 인명피해 수천만 명을 초래하였다. 장강 유역의 도시와 농촌은 이 과정에서 초토화되었고, 사회적 혼란은 청나라의 국가적 통제력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이후에는 아편전쟁의 패전으로 개항 정책이 강제로 시행되면서 장강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경로가 되었다. 난징조약(1842)의 체결로 영국은 장강 유역의 여러 항구를 개방시켰고, 이는 곧 서구열강이 장강을 거점으로 삼아 내륙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하이·한커우·구강 같은 항구도시는 외국 조계지와 무역 거점으로 변모했고, 이는 장강 유역을 국제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토착 경제를 붕괴시키고 지역 사회의 불균형을 심화시켰으며, 청나라의 주권 약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장강은 단순한 경제·군사적 경로를 넘어 외세와 내부세력이 충돌하는 격전장이 되었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에도 양무운동이나 변법자강운동 같은 청말 개혁의 흐름은 모두 장강 유역을 거점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양무운동은 장강 하류의 상하이와 난징 일대를 중심으로 군수산업과 신식공업을 발전시키려 했으나, 외세의존과 내부부패 때문에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3.10. 근현대 장강사

19세기 말 청 제국은 아편전쟁과 열강의 침탈, 그리고 내부의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국력이 크게 쇠약하였다. 특히 태평천국의 난과 그 여파는 장강 유역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의 내륙 진출을 가속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장강을 따라 통상항을 개방하게 하였고, 상하이·한커우·구강 등 주요도시가 외국 조계지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청 왕조의 정치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근대적 상업·산업이 장강 하류에서 급속히 확산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911년 10월 우창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폭발이었다. 우창은 장강 중류의 핵심 군사도시였으며, 신군 내부의 혁명파 장병들이 기의를 일으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반란은 순식간에 장강 일대 도시로 확산되었고, 상하이·난징 등 하류 도시들도 이에 호응했다. 결국 청 조정은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퇴위에 이르렀으며, 쑨원 등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제정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위안스카이 손으로 금방 해체되었고, 이후 중국은 여러 군벌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1910~20년대 동안 장강 중·하류 지역을 장악한 세력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세력을 유지했으며, 북양군벌과 남방의 혁명세력 사이에서 끊임없는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192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북벌 도중 장강 하류의 상하이에 입성하면서 공산당 세력을 무력진압한 사건(4.12 상하이 쿠데타)은 국공분열의 시발점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군은 상하이 전투를 거쳐 난징으로 진격했고, 곧이어 난징대학살이 발생하였다. 이어 장강을 따라 진군한 일본군은 한커우, 창샤 등 장강 중류의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내륙까지 침투하였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장강 상류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버마 로드 - 쿤밍 - 장강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연합군의 전략적 보급로로 활용되었으며, 동시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이 끊이지 않았다.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장강 유역은 안정되지 못했다.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장강 중하류는 다시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1949년 4월 인민해방군은 장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 방어선을 돌파하였고, 곧이어 난징을 점령했다. 이는 국공내전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어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퇴각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장강 유역은 새로운 체제 아래 재편되었다. 사회주의 경제 건설 속에서 장강 중·상류의 수력 발전과 대규모 공업단지 개발이 추진되었고, 상하이는 다시금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장강 일대도 정치적 혼란과 문화재 파괴, 산업 정체 등의 악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장강 일대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지역이 되었다. 특히 상하이를 비롯한 장강 하류 지역은 외국자본 유치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우한 · 충칭 등 중류와 상류 도시들 역시 중공업 및 물류거점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 이후 추진된 싼샤 댐 건설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환경 문제를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국가 차원의 전력공급과 수운개선을 목표로 한 대규모 국책사업이었다.

21세기 들어 장강 경제벨트 구상은 중국 발전 전략의 핵심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장강 유역을 따라 형성된 거대한 산업·물류 네트워크를 국가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는 의도였으며, 실제로 이 지역은 중국 GDP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경제권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장강의 급속한 개발은 수질오염, 생태계파괴 등 환경적 문제를 심화시켰고, 이를 둘러싼 정책적 긴장 또한 커지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하술.

4. 환경 문제

4.1. 수질 오염 문제

장강은 전세계에서 오염이 가장 심한 하천으로, 장강을 타고 해양으로 유출되는 미세 플라스틱연간 약 146.9만 톤에 달한다. 이는 인도 갠지스강(7.2만 톤)의 20배에 달하는 규모이며, 1위인 장강을 제외한 상위 10개 강(인더스강, 황하 등)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2배 많은 수치이다.[30] 장강의 오염된 물은 황해동중국해로 빠져나가 한반도 서해안 및 오키나와 일대를 오염시키며,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북서태평양 어장에까지 도달하여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장강을 낀 중국의 공업 도시로는 청두, 충칭, 창사, 우한, 난징, 상하이 등이 있다. 방대한 인구가 배출하는 생활하수만으로도 문제가 심각하며, 1차 산업도 대규모로 이루어져 농축산업 폐기물은 물론이고 산업단지에서 무단으로 쓰레기를 투기하거나 방류한 오폐수를 포함하면 환경오염이 정말로 심각한 수준이다.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환경피해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2010년대 이후로도 여전했다.

그래서 제13차 중화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는 2020년 12월 26일 24차 회의에서 '장강 보호법'을 제정했다. 장강과 그 지류에서 1km 이내의 화학단지 또는 화학공장의 건설 또는 확장을 금지하고, 장강 부근의 대기오염물질 배출량을 더 엄격하게 규제한다는 내용이다. 또 장강을 오염시킬 우려가 있는 고독성 화학물질의 선박운송을 금지하고 장강 유역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산업시설에 대한 규제도 대폭 강화되었다. 아울러 지하수 오염원을 조사·평가하여 잠재적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로 했다.[31][32]

한때 황하와 장강 유역 일대에서는 아시아코끼리, 인도코뿔소, 자바코뿔소, 수마트라코뿔소, 물소 등이 살았었으나, 토목 공사와 농경지 개척으로 인한 서식지 파괴, 갑옷과 가죽 생산 및 농산물 피해 등으로 사냥당해 멸종되었다. 또한 과거 양쯔강돌고래라는 민물 돌고래가 살았는데 2007년 멸종되었다고 중국에서 공식 확인하였다. 모든 돌고래들이 그렇지만, 호기심이 많고 사람들을 보면 다가오는 바람에 그물에 걸리거나 어선의 프로펠러에 걸려서 찢겨 죽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1950년대에만 하더라도 6천 마리에 달하던 양쯔강돌고래가 1990년대에는 100여 마리 남짓으로 팍 줄어들었고, 2000년대에는 겨우 10마리 남짓이었다가 2005년 마지막 공식적으로 발견된 2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멸종되었다. 그나마 그 2마리도 이젠 죽었다고 추정한다. 2007년 목격 제보가 들어왔고 수색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이외에도 양쯔강에 서식하던 중국주걱철갑상어가 멸종되었고, 양쯔강악어를 비롯해서 다른 양쯔강에 서식하던 동물도 멸종위기를 맞았다.#

2020년에는 중국 정부가 장강 근처에 공장을 설치하지 말 것을 법으로 정하였고, 이곳 주민들의 어로행위를 전면 금지하였다고 한다.

4.2. 가뭄 문제

최근에는 이상기후로 인해 수량이 들쭉날쭉하다. 일반적으로 메마르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굳이 들쭉날쭉하다고 서술하는 것은 봄~여름~초가을까지의 우기에는 또 미친듯이 폭우가 퍼부어서 수해가 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장강의 메말랐다 퍼부었다 극단적 수량 변화 자체가 기후위기의 산 증거인 셈이다.

장강이 말라감으로 인해 둥팅호와 포양호도 같이 말라가고 있다. 특히 우한 시와 충칭 등지가 유난히 심각하다. 장강으로 흘러드는 가릉강도 말라가는 현상이 심각하다. 다만 둥팅호의 경우는 메마름 이전에 인간의 간척사업도 한몫 해서, 줄어든 유역면적에 상술한 호우가 밀려들어 수해를 야기하는지라 중국 정부가 4350 공정[33]을 진행 중이다.

2022년 8월 기상관측이 시작된 1961년 이래 최악의 가뭄의 영향으로 양쯔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600년된 불상이 3점 발견되었다. #

장강이 말라가는 것은 기후변화 외에도 싼샤댐 건설과 남수북조 문제, 쓰촨 지역을 포함한 서부대개발[34] 등 복합적 원인이 있다. 특히 중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남수북조 산업이 매우 영향이 크다. 남쪽에 있는 수자원을 북쪽으로 무분별하게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장강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들이는 남수북조 사업[35]을 구상했고 이 사업은 현재진행형이나, 중국 내부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남부지방이라도 수자원이 넘쳐나는 것은 아닌 데다가 또 화북 일대를 지나면서 오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36]싼샤 댐을 비롯한 무분별한 댐 건설[37]로 인해 대기중으로 증발하는 물이 많아졌다.

중국 내에서도 그동안 장강의 가뭄을 우려하는 경고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4억명 이상 인구의 생명줄이자 중국 전체 농경지 25%에 물을 대는 장강이 완전히 말라붙으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력의 80% 이상을 장강 수력발전에 기대고 있는 쓰촨성은 말할 것도 없고, 우한이나 창사처럼 원자재 대부분을 양쯔강 수운을 통해 전달받던 도시들도 산업이 마비될 지경이었고, 나중에는 장강이 황하처럼 가뭄이 일상화되는 하천이 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5. 기타

동아시아 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침몰 사고인 둥팡즈싱 호 침몰 사고도 일어났다. 항목을 참고.

일본의 유명 가수인 사다 마사시가 30억 엔이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직접 제작, 감독한 중일 합작 다큐멘터리 영화 <장강(長江, 1981)>이 중국에서 유명하다. 영화를 위해 촬영한 필름들을 중국에서 재편집해서 방영한 25부작 TV 시리즈 <장강을 말하다(话说长江, 1983)>도 큰 인기를 끌었다. 2020년대에 들어서도 중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전 다큐멘터리로, 검색해보면 일본어보다 중국어 자료들이 훨씬 많이 뜬다.

디시인사이드에선 중뽕 컨셉을 잡을 때 '장강은흐른다'라는 닉네임을 쓰고 글 아래쪽에 "끝없는 장강의 물결은 도도하게 흐른다.(부진장강곤곤래 /不尽长江滚滚来)[38]"를 적어놓는데서 따와서 중국의 행보에 따라서 못했다 싶으면 '장강은 말랐다', 잘한다 싶으면 '가끔 장강이 흐른다', '장강 범람' 등의 댓글이 달리곤 한다. 다른 나라한테도 똑같이 적용되어서 부진~~강곤곤래라는 식으로 미국은 미시시피강[39], 한국은 한강 등 여러 바리에이션도 있다.

5.1. 주요 지류

5.2. 치수

중국 최대의 강 답게 치수 시설도 매우 크다. 우한에는 강변에 '장성'을 갑문과 같이 만들어 놓고 홍수가 예고되면 수m 차벽으로 강을 완전히 봉쇄해 버린다.[40]

6. 강변 주요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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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항구도시

에 있는 하항 도시는 ☆표시를 호수에 있는 호수항도시는 ○표시를 한다.

8. 관련 문서



[1] 다만 해당 구절은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중국의 기행 등을 풍자하는 말로 자리잡게 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의 5. 기타 부분을 참고.[2] 한어병음으로는 'Yángzǐ Jiāng'으로 표기한다.[3] 나일강아마존강 다음이다.[4] 삼국지연의에서 주유가 오나라 수군을 훈련시켰고 적벽대전의 모티브로 훗날 주원장진우량의 군대를 격파한 파양호 대전의 파양호가 바로 여기이다.[5] 비슷한 경우로, (호)는 다양한 호수를 지칭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후난과 후베이를 가르는 둥팅호를 의미했다.[6] 후베이 / 후난 지역의 후한 시기 명칭인 형주에서 따온 이름으로, 형주의 남북을 가르며 흐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형주는 삼국지에서 유표의 근거지가 있었고 이후 유비익주와 함께 차지하고자 했던 그 형주 맞다.[7] 이 당시에는 모택동, 등소평, 북경 같은 한국식 한자 발음이 널리 통용되던 시기였다.[8] Birth of the Yangtze River: age and tectonic-geomorphic implications(2015)[9]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266603342400090X?utm_source=chatgpt.com|]Tracing drainage capture between the two large tributaries of the Yangtze River in the southeastern Tibetan plateau: Insights from detrital apatite fission-track thermochronology(2024)][10] Evolution of the Yangtze River network, southeastern Tibet: Insights from thermochronology and sedimentology(2020)[11] New evidence from heavy minerals and detrital zircons in Quaternary fluvial sediments for the evolution of the upper Yangtze River, South China(2022)[12] 쉽게 말하자면 하천의 나이테 같은 것으로, 해당 지역이 얼마나 지질변화를 겪었는지 알려준다.[13] 여기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은 조몬인과 혼혈화 되어 야요이인으로 발전해 이후 한반도로 와서 일부 지역에 일본어족 소국(미오야마국, 사이기국, 반파국, 미리미동국 등)들을 세우며, 전방후원분을 가져 오기도 한다.[14] 이후 한반도 토착민과 동화되며 한민족으로 발전했다.[15] 목지국, 백제국, 건마국, 사로국 등.[16] 탄화된 쌀겨가 발견되었다.[17] 장강 중류에서는 상나라 시기의 유적지인 반륭성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인근의 우청 문화권과 교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청 문화는 장강 중류 이남에서 발전한 청동기 시대의 문화권이었다.[18] 한편 이때 "파촉(巴蜀)의 어부(魚凫) 신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19] 웅역 외에도 주나라 시기에는 장강 유역 곳곳에 여러 제후들이 봉해졌고, 그 결과 후일 초(楚), 오(吳), 월(越) 과 같은 강력한 나라들이 성장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들 남방 세력은 주 왕실에 일종의 제후국으로서 편입되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독자적인 정치적 · 문화적 전통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20] 실제로 오나라와 월나라 이후에 장강 유역을 재패했던 초나라의 수도는 장강 이북인 , 거양이었다.[21] 무제 5년(BC 106)에 한나라 조정은 행정구역(州) 제도를 정비하여, 장강 유역에 익주(益州) 형주(荊州), 양주(揚州) 등을 둠으로써 남방을 관할케 하였다. 이 시점에서 말릉(末陵), 강릉(江陵), 성도(成都)와 같은 거점도시들은 장강 유역의 행정·군수 중심지로 작동하였다.[22] 예외로 383년 비수대전(淝水之戰)이 있는데, 이는 장강의 지리를 이용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전진 황제였던 부견의 뻘짓과 동진의 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승리했던 것이다.[23] 강남에서 거두어진 곡물과 철, 소금 등은 국가 재정에 필수적 이었으며, 차와 비단 등은 대외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효자상품이었다.[24] 다만 이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황소의 난이 일어나 강남 일대의 행정력마저 잃어버리자 당나라는 얼마 못가 망하게 되었다.[25] 하지만 당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황하 - 장강의 양강 체제였다. 장강이 확실하게 황하를 앞지른 것은 송나라 시대부터이다.[26] 북송의 개봉은 관중 분지와는 달리 황하 중류 평원에 자리 잡아 교통·행정상 이점이 있었으나, 국방의 취약성이 드러나는 한계가 있었다. 송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군사적 긴장을 겪었고, 특히 하술하겠지만 연운 16주를 요나라에 상실하면서 북방 방위선이 약화되었다. 군사적 중심지는 자연히 하북과 하남 일대로 수렴되었고, 황하 유역은 여전히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재정과 물적 기반을 떠받친 것은 장강 이남의 경제력이었다. 양자강 하류의 양회(兩浙) 지역, 중류의 호남·호북, 그리고 양절(兩浙)·강남동서로 대표되는 곡창 지대는 북송의 조세와 상업 세입의 핵심 원천이었다.[27] 남송의 재상이었던 가사도가 몽골 내부의 제위 계승 문제로 급했던 쿠빌라이 칸과 1260년에 밀약을 맺기도 했다.[28] 오호십육국 시대에도 전란으로 화북이 피폐해지긴 했지만, 당시에는 장강 유역이 아직 미개간지가 많아 '대체지'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29] 사실 송대의 격언인 '소주와 호주가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족해진다.'는 뜻인 소호숙 천하족(蘇湖熟 天下足)을 살짝 변형한 것이다.[30] Schmidt C, Krauth T, Wagner S. Export of Plastic Debris by Rivers into the Sea. Environ Sci Technol. 2017 Nov 7;51(21):12246-12253. doi: 10.1021/acs.est.7b02368. Epub 2017 Oct 11. PMID: 29019247.[31] 중국, 올해 3월부터 양쯔강 1km 이내 화학시설 규제 강화…신·증축도 금지[32] 세계법제정보센터 - 장강보호법(中华人民共和国长江保护法)[33] 1949년 신중국 건국 기준으로 둥팅호의 호수 면적이던 4350㎦을 회복하는 프로젝트.[34]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설이 녹는 등 이상기후의 문제가 심화되었다.[35] 화북 일대 뿐만 아니라 간쑤성, 칭하이성 일대까지 물을 조달하고자 했다.[36]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 지역은 본래부터 물이 부족했고 특히 베이징의 물이 부족한 건 베이징 사람들이 물을 스스로 고갈시켰다고 주장한다.[37] 상류에는 바이허탄 댐 등의 수력발전소가 많이 지어져 있다.[38] 중국의 시인 두보의 등고(登高)의 한 구절이다.[39] 미시시피강 말고도 허드슨강도 가끔 쓰인다.[40] 사실 이는 다른 나라들도 이렇게 한다. 토목 엔지니어링에 목숨 건 나라인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한강유역종합개발사업으로 미사리부터 한강 하구까지는 죄다 이렇게 되어 있다. 다만 우한의 장강 변 장성은 그 규모가 한국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이른바 대륙의 스케일을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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