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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 ||||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 → | 2월 역류 | → | 3월 흑풍 |
탈권 현상 시작 | → | 군 원로들 실각 | → | 전면내전 |
1. 개요
1967년 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황보고회의에서 예젠잉, 쉬샹첸, 녜룽전, 천이, 탄전린 등 인민해방군과 공산당의 원로들이 천보다, 캉성, 4인방 등 문화대혁명 지지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붓다가 마오쩌둥의 개입으로 실각한 사건을 말한다.회인당 사건[1]이라고도 하며 4인방은 이를 '자산계급복벽역류'라고 비하하였다. 하지만 문혁이 종결된 후에 현재 중국에서는 '2월 항쟁'이라고 긍정적인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2. 배경
1966년 해서파관 사건을 계기로 점화된 문화대혁명은 1966년 8월의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으로 걷잡을 수 없는 광풍으로 발전했고 이어 경험 대교류 운동과 1967년 1월의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으로 아예 성정부나 시당부의 통치를 부정하고 코뮌과 혁명위원회가 수립되어 홍위병들끼리 전투가 벌어지는 내전을 방불케하는 혼란으로 치달았다. 혼란과 무질서가 극도에 치닫고 천보다의 지지를 받은 조반파들의 폭력행위가 극심해지자 인민해방군과 당의 원로들은 이를 크게 우려하게 되었으며 특히 군의 원로이며 개국 10원수의 일원인 펑더화이와 허룽까지도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비투회에 끌려다니며 조리돌림당하는 신세가 되자 군 원로들은 격분하였다.[2] 원수들은 마오쩌둥에게 항의했고 이에 마오쩌둥은 군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군이 혼란을 바로잡을 것을 허락했는데 이에 청해성 등 중국 각지에서 군부가 홍위병들을 상대로 가혹한 무력진압을 단행하여 수천, 수백명이 사망하는 유혈충돌이 중국을 휩쓸었다.[3]사실 마오쩌둥 역시도 통제 불가능의 상황을 보고 불만이 많았다. 우선 캉성과 천보다는 사이가 좋지 않아 계속 으르렁거리며 온갖 일을 두고 시끄럽게 일을 만들었고 여기에 장칭이 끼어들어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 하면서 중앙문화혁명소조는 개판 5분전이었다. 게다가 조반파는 마오쩌둥의 자신의 편이라 여겨 그와 상의하지도 않고 멋대로 일을 벌였다. 장춘차오가 주도한 상하이 코뮌 수립 등도 마오쩌둥과 상의없이 멋대로 벌어진 일이었다. 장춘차오가 상하이 코뮌을 수립했을 때 마오쩌둥은 격분하여 "모든 성과 도시, 지구가 코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면 우리나라는 중화인민공화국 대신에 중국 코뮌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 그렇게 된다면 당은 어떻게 될까? 당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당 위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어쨌거나 당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구심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장춘차오를 비난했고 장춘차오는 기겁하여 코뮌 수립을 취소했다.
그러던 중 1967년 1월 19일, 홍위병들이 총정치부 주임 샤오화를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 샤오화는 예젠잉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다음날 경서빈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경서빈관 대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군 원로들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원로들의 불만과 마오쩌둥의 불만이 겹치면서 원로들은 슬슬 조반파에 대한 공격을 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3. 전개
3.1. 마오쩌둥의 분노
1967년 2월 10일 심야,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 중앙문혁소조 지도부를 소환하여 크게 질책했다. 그는 먼저 1월 4일, 중앙문혁소조가 정치국 상무위원 타오주를 타도하여 숙청한 것을 트집잡아서 천보다를 가장 혹독하게 공격했다."너! 천보다 말이야! 과거에 사오치와 나에 관한 한 너는 언제나 기회주의자였어. 내가 너를 오랫동안 알았다만 너는 너하고 개인적으로 관련이 된 일이 아니면 결코 나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당황한 천보다가 자아비판할 기회를 청했지만 마오쩌둥은 무시하고 이번엔 장칭을 공격했다.
"당신, 장칭! 당신은 괜히 눈만 높을 뿐 솜씨는 없어. 포부가 크면 뭐하나! 능력이 모자란데!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어!"
그리고 린뱌오에게 화살을 돌렸다.
"보시오! 여전히 이전과 같지 않소! 나는 보고를 받지 못했소. 여전히 나에겐 비밀로 하고 있단 말이지. 유일한 예외는 총리 뿐이야. (저우언라이는) 어떤 중요한 일이 진행될 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도 항상 나에게 보고하고 있소."
문혁소조 지도부는 마오쩌둥의 분노 앞에 공포에 떨었고 마오쩌둥이 문혁소조 지도부를 질책했다는 사실은 리푸춘과 예젠잉에 의해 군 원로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3.2. 2월 11일 회의
다음날인 2월 11일부터 2월 16일까지 저우언라이의 주최로 중난하이에서 정치국 확대회의가 소집되었다. 저우언라이가 중앙에 앉고 오른쪽 줄에 군 원로들이, 왼쪽 줄에 문혁소조 측이 앉아 대치했다. 마오쩌둥이 분노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원수들은 전에 없이 문혁소조 지도자들에게 강경하게 나왔다. 먼저 예젠잉이 나서 천보다를 맹공격했다."당신들은 당을 혼란에 빠뜨렸고, 정부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공장과 농촌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이제는 군대까지 혼란에 빠뜨리려는가? 당신들은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이에 천보다가 빈정댔다.
"예 원수(葉帥)!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구료!
이어 쉬샹첸이 나서 책상을 두드리며 일어서서 외쳤다.
"부모를 타도하기 위해서 아이들에게까지 린치를 가하고 있소. 그리고 가족 전원이 박해를 받는다. 무엇 때문인가? 군대는 무산계급독재의 기둥일세. 그런데 당신들은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려 하니 기둥을 뽑아 버리겠다는 것인가? 우리같은 이들은 안되고 콰이다푸 같은 이들이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자는거요?"
저우언라이가 캉성에게 발언권을 주자 캉성이 반박했다.
"군대는 당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오, 쉬샹첸! 당신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자 예젠잉이 즉각 캉성을 공격했다.
"당의 영도가 없이 혁명을 할수 있단 말인가? 군대가 필요하지 않단 말이야?"
녜룽전도 예젠잉을 거들었다.
"고약한 심보를 품은 자들이 원로 간부들을 잔혹하게 박해하고 물에 빠진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고 있소."
이쯤되자 회의장이 침묵에 빠졌고 저우언라이는 일단 회의를 끝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부총리인 천이가 예젠잉이 정말로 용감했다고 칭찬했고 저우언라이는 5일 정도 지나면 감정이 식을 것이라 여겨 2월 16일에 회의를 재개하기로 했지만 이는 저우언라이의 오산이었다.
3.3. 2월 16일 회인당 회의
5일 후 회인당에서 열린 회의는 여전히 고성과 고조된 감정의 연속이었다. 당의 원로인 국무원 부총리 겸 정치국원 탄전린이 장춘차오가 상하이 1서기 천폐이셴을 쫓아낸 것을 맹비난하자 장춘차오는 자신이 상하이의 군중과 논의해 일을 처리했으며 군중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탄전린은 격분하여 장춘차오를 질책했다."말끝마다 대중, 대중 하는데 도대체 대중이 무엇인가? 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부는 여전히 당이다! 당신은 당의 지도력을 무시한 채 하루종일 대중이 어떻게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교육하고, 자유로워져야 하는지 떠들고 있다. 이게 다 무엇인가? 이것은 형이상학이야! 당신들의 목적은 나이 든 간부들을 숙청하는 것이다. 원로 간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쓰러뜨리려 하고 있다. 노간부가 하나하나 정리되면, 40년의 혁명은 집이 망하고, 사람이 흩어지며, 마누라는 떠나고 자식은 흩어지는 결과가 돼 버릴 것이다! (...) 고위 간부의 자제들이 너나없이 모두 박해를 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반동적인 혈통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이번 일들은 당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투쟁이다. (...) 나는 평생 울어본 일이 없는데, 최근에 세번이나 울었다. 우는데 울 곳이 없어서 비서 앞에서도 울고, 아들 앞에서도 울었다. (...) 정강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당신들이 한번 검토해보라. 내가 단 한번이라도 마오 주석에 반대한 적이 있는지. 나는 나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전체 노간부를 위해서, 전체 당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이런 꼴을 보려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애당초 혁명에 참가하지도 않고, 공산당에 가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순다섯살까지 살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난 41년동안 마오쩌둥 주석을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발언을 마친 탄전린에게 공안부장 셰푸즈가 장칭이 몇번이나 그를 살려준 일이 있다고 탄전린을 공격하자 탄전린은 격노하여 "장칭은 나를 반혁명으로 몰고 있다. 장칭은 내 면전에서 말했다. 나는 장칭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나는 당을 위해 공작한다. 당신들끼리 하라. 나는 하지 않겠다! 목을 잘리든, 투옥을 당하든, 당에서 제명당하든, 철저하게 싸우겠다!"라고 외치며 옷과 문건을 챙겨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려 했고 이에 저우언라이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다시 앉으라고 했고 천이가 "가지 마시오. 남아서 투쟁합시다!"라고 소리치며 그를 만류하여 다시 착석했다. 이후 예젠잉과 리셴녠이 문혁 소조를 공격했다. 3시간 동안 욕설과 고성이 오갔고 저우언라이는 양측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어 천이가 나서서 가장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그런 자들은 권력을 잡으면 틀림없이 수정주의에 빠질 것이다. 옌안에서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전 등은 마오쩌둥 주석의 가장 열정적인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공개적으로 마오쩌둥 주석을 반대한 적이 없다. 마오쩌둥 주석을 반대해 비판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 총리도 마찬가지로 비판을 받지 않았던가?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도대체 마오쩌둥 주석을 반대하는 이가 누구인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권력을 계승했다. 하지만 권력을 잡기 무섭게 스탈린을 악의적으로 공격한 것이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천이의 너무도 공격적인 발언에 놀란 저우언라이는 황급히 회의를 종료시켰다. 천이는 이날 저녁 귀국 유학생 대표들을 만나 중앙문혁소조를 맹렬히 규탄했다.
"이처럼 위대한 당 가운데 오직 주석, 린 부주석, 저우 총리, 천보다, 캉성, 장칭만 깨끗하다고 한다. 그리고 너그러운 당신들 덕분에 우리 다섯 부총리까지 거기에 속하게 되었다. 어떻게 위대한 당 가운데 만약 오직 이 11명만 깨끗하단 말인가? 만약 오직 이 11명만 깨끗하다고 한다면 나 천이는 이같은 '깨끗함'을 사양하겠다! 나를 끌어내어 조리돌림을 해도 좋다! 한 공산당원으로서 이런 때에도 나서서 말할 용기가 없다면 그 값이 동전 한닢보다도 못한 것이다!"
3.4. 2월 18일 회의
회인당 회의가 끝난 후 장춘차오, 야우원위안, 왕리 등은 회의록을 정리해서 조어대 15호관에 있던 장칭에게 보고했고 장칭은 즉각 마오쩌둥에게 모든 내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장춘차오가 대표로 전화를 걸어 마오쩌둥 접견을 요청, 마오쩌둥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동차를 타고 중난하이로 이동하여 회인당 회의 경과에 대해 마오쩌둥에게 보고했다.[4] 장칭은 흥분하여 "그들의 창끝은 내가 아니라 당신을 겨누고 있다구요!"라고 말했지만 마오쩌둥은 처음에는 군원로들의 자극적인 발언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부 대목에서는 재미있다면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가장 공격적인 천이의 발언을 들었을 때는 "옌안 정풍도 잘못된 것이라고? 또 왕밍이 돌아와서는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표정이 좀 어두워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마오쩌둥은 회인당 회의에 대한 보고를 듣고도 그다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5] 하지만 군원로들의 강경한 발언은 엄연히 마오쩌둥에 대한 완강한 반대였고 마오쩌둥은 이를 깨부수고자 했다.정치적으로 영민한 마오쩌둥은 우선 군원로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저우언라이로 하여금 2월 17일, 인민일보와 홍기에 간부들을 타격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반드시 정확하게 간부를 대우해야 한다>라는 논설을 발표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월 18일 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저우언라이, 캉성, 셰푸즈, 예췬[6], 리푸춘, 예젠잉, 리셴녠을 거처로 불러들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마오쩌둥은 마구 고함을 쳐댔다.
"중앙문혁소조는 제8기 11중전회에서 채택된 노선에 따라 집행하고 있는 것이야. 성적이 괜찮아. 굳이 따진다면 과오는 1%나 2%, 어쩌면 3% 정도고, 잘한 점이 97% 정도라고 할 수 있소. 만약 누군가 '중앙문혁'을 반대한다면 나는 단호하게 그를 반대할 거요. 당신들이 문화대혁명을 반대할 생각이라면 내가 당신들에게 분명하게 말해주리다. 그건 결코 성공할 수 없소! 예췬 동지, 당신이 린뱌오에게 말하시오. 그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금 몇몇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잡아채려고 하니 준비를 하라고 말이오. 만약 문화대혁명이 실패라면 나는 그 즉시 갈 것이오. 린뱌오 동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우리는 징강산에 가서 다시 혁명을 시작할 것이오. 당신들이 장칭이나 천보다는 안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문혁소조를 개혁하시오. 탄전린이 조장이 되고 천이랑 쉬샹첸이 부조장, 위추리랑 보이보가 조원이 되겠네. 그래도 안되면 왕밍이나 장궈타오를 부르지! 그래도 안되면 미국과 소련까지 불러 보시오. 장칭하고 천보다는 사형시키고 캉성을 군대에 보내면 되겠군, 나머지야 당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테고. 그렇게 하면 되겠네. 그러면 당신들 목적을 이룰 수 있겠네!"
회의장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고 캉성은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수준의 분노'를 보였다면서 그렇게 화가 난 것은 처음 보았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마오의 분노는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주된 목표는 천이, 탄전린, 쉬샹첸이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로 하여금 천이에게 자아비판을 하게 했으며 리푸춘, 셰푸즈에겐 탄전린을, 예젠잉, 리셴녠, 셰푸즈에게 쉬샹쳰을 공격하게 했다. 물론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캉성, 천보다, 장칭이었다. 그들은 원수들을 주자파라고 마구 몰아세웠고 원로들이 '역류'를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탄전린, 천이, 쉬샹첸은 죄를 인정하고 자아비판해야 했고 중립을 지키던 저우언라이조차 정치국 위원들의 불량한 기풍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깨닫는데 느리고 우둔하여 두차례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는데 실패했다고 자아비판해야 했다.
3.5. 문혁소조의 집권
2월 역류로 인하여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제외한 당 간부들에게 제공되던 마지막 보호까지 제거되고 거의 모든 간부들이 홍위병의 만행에 노출된 상황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국무원과 중앙정치국을 마비시키고 문혁소조에 모든 권력을 실어주었다. 득의양양해진 장칭은 저우언라이에게 "저우언라이, 당신도 우리 회의에 참가하셔야겠네. 더 이상 주재할 회의도 없으니!"라고 깐족댔다. 저우언라이는 "이제부터는 부인이 모든 결정을 내리십시오. 그런 다음에는 제가 나서서 부인의 명령이 차질없이 이행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2월 25일부터 3월 18일까지 2월 역류에 연루된 사람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회의를 주재하며 마오쩌둥에게 굴복했다.이후 조반파는 탄전린, 천이 등 2월 역류의 강경파에 대한 맹공격을 퍼부었으며 이들의 과오에 대해 마구 고발했다. 수많은 대자보가 붙어 이들을 공격했고 이들의 배후라 여겨진 저우언라이도 공격했다. 저우언라이는 간부들을 최대한 보호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오쩌둥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고 마오쩌둥은 자신이 원한다면 전체 간부의 95%를 보호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대부분 개입을 거부했다.
4. 결과
하지만 1967년 7월 20일에 벌어진 7.20 사건 등 조반파와 보수파, 문혁소조와 군부의 갈등은 극을 달리기 시작했고 조반파의 깽판으로 질서가 붕괴되면서 군부의 개입 없이는 기본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중국의 대다수 지역은 군부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군부는 질서 유지를 위해 3월 흑풍을 비롯한 잔혹한 진압에 나섰다.5. 평가
1968년 10월 13일부터 31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8기 12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성과가 중요한가? 아니면 결함과 오류가 중요한가? 등을 토론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린뱌오, 캉성, 장칭, 셰푸즈 등은 천이, 예젠잉, 쉬샹첸, 녜룽전, 리푸춘, 리셴녠 등의 2월 역류에 대해 마오 주석에 대해 반대하고 왕밍 노선을 위해 번안하고 반역자, 특무,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들을 위해 번안했으며 자본주의 회복의 시연이자 가장 심각한 반당 사건으로 규정했다. 또한 천윈, 주더, 덩쯔후이, 왕자샹이 일관적 우경분자라고 비판했다.하지만 4인방 숙청 이후 중국 공산당은 당연하게도 이때의 평가를 뒤집어 '혼란을 반대한 정의적 항쟁', '중앙문화혁명소조의 비열한 행위에 대한 맹렬한 규탄'으로 규정하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6. 참고문헌
- 구보 도루, 중국근현대사 4권: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 1945-1971(서울: 삼천리, 2013).
- 로더릭 맥파커 외, 중국 현대정치사 : 건국에서 세계화의 수용까지 1949~2009(서울: 푸른길, 2012).
- 로스 테릴, 마오쩌둥(서울: 이룸, 2008).
- 로스 테릴, 장칭 : 정치적 마녀의 초상(서울: 교양인, 2012).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서울: 이산, 2004).
-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저우언라이 평전(서울: 베리타스북스, 2007).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上(서울: 문학사상사, 2001).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서울: 민음사, 2017).
- 오쿠무라 사토시, 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주곡(서울: 소나무, 2002).
- 에즈라 보걸, 덩샤오핑 평전 : 현대 중국의 건설자(서울: 민음사, 2014).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2권 하(서울: 서교출판사, 2014).
- 프랑크 디쾨터,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파주: 열린책들, 2017).
- 현이섭, 중국지 :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 평석 下, 대란대치편(서울: 인물과사상사, 2017).
7. 문화대혁명 중의 사건
- 해서파관 사건
- 5.16 사건
-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 경험 대교류 운동
-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 경서빈관 대소동
- 3월 흑풍
- 7.20 사건
- 67폭동
-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
- 571 공정
- 9.13 사건
- 닉슨-마오쩌둥 회담
- 비림비공운동
- 정돈사업
- 천안문 사태
[1] 중국어 독음으로 화이런탕 사건.[2] 린뱌오조차도 자신의 권력기반인 군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문혁을 주도하면서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원수들을 지지했다.[3] 이때에 벌어진 대표적인 사건이 1967년 2월부터 3월까지 벌어진 3월 흑풍 사건이다.[4] 이때 자기들 입맛에 맞춰 마오쩌둥을 자극시키기 위해 기록을 왜곡했다는 것이 정설이다.[5] 판초프의 서술, 하지만 로더릭 맥파커나 모택동비록 등의 기술에서는 마오쩌둥이 담배를 뻑뻑 피우며 크게 성을 냈다고 기록되어 있다.[6] 아픈 린뱌오를 대신하여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