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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연회 요리.
청나라 때 고안된 요리로, 청 황제 강희제가 직접 고안해 지시했다고 추정된다. 지배민족인 만주족과 피지배민족인 한족 사이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만주족과 한족의 요리를 잔치에서 다 같이 성대하게 차려냈던 코스요리로 강력하게 추정된다.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는 이름은 만주족(滿)과 한족(漢) 모두의 잔치라는 의미이다. 만한 두민족의 최고로 진귀한 요리를 모아놓은 최고의 잔치로 청나라 황제가 만주족과 한족의 단합을 위해 베푼 화합의 잔치로 강하게 추정된다.
황제가 준비한 궁중요리답게 눈이 돌아갈 정도로 거창하고 화려하게 구성되었다고 한다. 상에 오른 요리들은 음식이 아니라 조각 같고, 그림 같아 젓가락 대기가 아까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재료, 조리법, 취식 순서 등이 엄밀한 법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1]
일단 연회 자체가 3~4일씩 연이어지는 대규모 행사였고, 만한전석이라는 코스 요리는 행사 내내 이어지는 요리열전의 개념이었다. 그런 만큼 요리의 가짓수가 상당히 많았다고 하며, 한 끼에서 기승전결을 구현하는 일반적인 코스 요리와는 스케일이 다르다. 다만 흔히들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청나라 시기 중국에서 황실요리가 비밀의 요리가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이 당시에는 베이징 중심가 식당에서 황실요리를 당당하게 맛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황실요리들의 양이 평소에도 음식 가짓수가 48가지에 달하는 데다가[2] 거기에 더해서 한 젓가락에 3번씩만 음식을 가져갈 수 있다는 예법이 있고, 아랫사람까지 먹을 것을 감안해서 어마어마한 양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또한 황실 가족, 환관과 궁녀, 신하는 물론 일반 시종들까지 먹고도 남았기에 남은 음식들을 궁궐 외부에 있던 식당에다가 판매했는데, 청나라 황실에서도 재정을 충당하기 좋은 수단이었기에 이를 묵인했다. 상태가 좋은 것은 그대로 재가열한 다음에 팔았고, 상태가 안 좋은 것은 꿀꿀이죽처럼 팔았는데, 한창때는 황실요리 판매업이 1만명을 먹여살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래서 청나라 당대의 베이징 도성민들이 맛이 좀 떨어지기는 했어도 돈과 시간만 있다면 황실요리를 맛보는 것은 가능했다.[3] 물론 만한전석은 잔치에 쓰는 음식인 만큼 평소보다 훨씬 많이 신경을 써서 요리를 구성했다.
만한전석은 6개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1등급부터 3등급까지는 청나라 황실 제사 요리였고, 4등급 이하가 연회에 사용되었다. 4등급은 황제의 생일, 결혼, 동지 연회 때, 5등급은 조선의 왕, 몽골의 칸,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게 베푸는 연회, 6등급은 기타 국가의 사절에게 베푸는 연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2. 유명무실
만한전석의 내용은 비록 안타깝지만 21세기에는 완전히 맥이 끊긴 상태다. 실존하는 단일 요리 코스가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으며, 이에 관해서 다루는 서적도 문화대혁명 당시 수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어서 현재 남은 것이라고는 반쯤 불에 탄 책 한 권이 전부이다. 이에 청나라 말기 궁에서 일하던 노인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는 등 남은 사료를 최대한 긁어모아 조사했지만, 결과는 미비했다.오늘날에는 실제로 존재하기는 한 요리인가 또는 비유적 표현으로 지어낸 요리는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말 그대로 유명세에 비해 실체가 없는 요리이다.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 현존하는 조리법도 없고 관련 증거도 도무지 발견되지 않는 만큼 앞으로도 복원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전설의 요리 그 자체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대만에서는 중화민국이 국부천대 할 때 같이 동행한 본토 각지의 요리사들이 많아서 중국 황실 요리가 그나마 보존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보존되었다고 하지만 외성인 등 북방계 비율이 높다는 대만도 주류는 광둥성, 푸젠성, 장쑤성, 저장성 등 남방 지역이다.[4] 그래서 궁중요리의 중심이었던 베이징이나 산동의 고급 요리 및 쓰촨성 등 다른 지역에 있는 옛 고급 요리들을 되살리기 어려워 완벽하다고 하기 힘들다.
그리고 홍콩, 마카오 등 서양의 지배를 받던 타 중화권이나 화교가 많은 영미권 국가 싱가포르로 이민간 중국인 요리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조차 결국에는 푸젠성, 광동성, 대만 등 남방을 기반으로 한 요리를 만들었기에 북방 요리와 소수민족 요리가 조화를 이뤘을 원조는 끝내 재현할 수 없었다.
현재 만한전석이라고 전해지는 요리들은 그 특성상 광동이나 푸젠 기반일 수밖에 없으며, 역사 속의 만한전석도 그 실체가 희미하기 때문에 과연 제대로 재현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결국 현재 중국 본토에서 부유층이나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만한전석은 현존하는 중국 요리 중 호화로운 고급 요리들을 모은 것에 가깝다. 당시 청 황실의 만한전석이라기보다 중국 코스요리 끝판왕 정도의 의미로 통용되는 메뉴이다.[5]
3. 의문?
지금 만한전석이라고 부르는 연회 요리가 과연 역사상의 만한전석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청나라 궁중잔치에 '만한전석'이라는 이름의 잔치는 없었기 때문이다.정사(正史)인 청사고 등의 기록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야사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관청이나 민간이 주최한 연회 가운데 만한석(滿漢席)이라는 이름의 잔치가 있었다는 사실은 개인 문집에 기록으로 나온다.그러나 실질적으로 '만한전석'에 해당하는 잔치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궁중 잔치에는 어차피 지배층인 만주족과 관리 계층인 한족이 모두 참석했으니 ‘만한’이 함께하는 잔칫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잔치는 연회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만주 요리는 여섯 가지, 한족 요리는 다섯 등급으로 준비해 따로 따로 준비했다.
이런 연회 중에서 흔히 만한전석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잔치가 강희제와 건륭제가 주최한 천수연(千叟宴)이라는 잔치다.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강희제의 잔치에는 65세 이상 만주족 문무대신 680명, 한족 관리 340명 등 약 1000명이 참석했고, 건륭황제 재위 50주년 기념 천수연에는 만주족과 한족 노인은 물론 조선을 비롯해 주변국 노인까지 모두 3000명을 초대했다.이 잔치가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한 잔치라고 하기에는 성격이 달랐다. 이 당시 청나라는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화합의 잔치였다기보다는 청나라 황제가 피지배 계층인 한족, 파트너인 몽골, 새 신민인 위구르와 카자흐 등의 타종족 등은 물론 조선, 월남, 류큐, 시암 등 주변 제후국에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위세를 보이기 위한 잔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실제 만한전석이 유명해진 것은 1970년대 홍콩의 모 TV가 거금을 들여 청나라 황제의 잔치에 등장했다는 요리를 재현해 TV로 중계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옛날 청나라 황제가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해 마련했던 만한전석'이라고 언급한 것이었다.출처
만주족의 음식과 한족의 음식이 함께 오르게 된 것 자체는 청나라가 중원에 입관한 이후로 만주족이 한족의 음식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로 보인다.
당시 청나라의 만주족은 원나라의 몽골족에 비해 한족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청나라 말기에는 만주족이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만 간신히 유지한 채 언어, 문화적으로 거의 한족에 동화되었을뿐더러 한족들의 힘이 매우 비대해졌기 때문에, 청나라 말기의 만한전석은 만한전석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와는 별개로 제3자의 입장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연상시켰을 듯하다.
그러다보니 위에있는 '재료, 조리법, 취식 순서 등이 엄밀한 법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라던지 '한 그릇에서 3번씩만 음식을 가져갈 수 있다는 예법이 있었다' 라는건 신비하고 고급스럽게 보이려고 날조한것이던가 그냥 특정인의 취향이 법도 였다고 왜곡된거라는 의견도 있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만한전석
대중매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중국 요리의 끝판왕 정도로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엄밀한 당대 요리의 지식이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만한전석이란 중국 요리의 자부심을 걸고 호화 요리로 도배하는 코스 정도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요리의 가짓수, 코스의 전개, 재료의 수준 등은 연회의 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기본적으로 내올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왕중왕인 요리들만 나온다고 보면 된다.- 신 중화일미에 등장해서 국내에서 만한전석의 인지도를 올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최종 결전의 과제로, 100가지 요리로 구성된 호화 코스요리로 등장한다. 원작 코믹스에서는 최종 결전의 예선 과제로 등장한다. 이쪽은 수량이 미묘하게 틀려서 108접시로, 혼자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특성상 주인공 마오가 고전할 뻔했으나 하나둘씩 등장하는 동료들의 가세로 아슬아슬하게 통과가 가능했다.
- 조선시대 수랏간을 무대로 한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만한전석이 등장하는데, 극중에서는 최상궁이 장금의 요리 때문에 언짢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명나라 사신을 달래기 위해 회심의 한 수로 준비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고증오류다. 대장금의 작중 시기는 조선 중종 때이고 청나라는 이보다 100년 뒤에 세워진 나라다.[6] 게다가 만한전석의 이름과 의의 자체가 망한 명나라 한족들에 대한 청나라 측의 회유 및 화합임을 생각하면, 명나라가 멀쩡한 시절에 존재할 수가 없으며 명나라의 조공국이 명나라 사신에게 대접하는 게 말이 안된다. 물론 애초에 작중에 나온 만한전석이 실제 청나라 때의 만한전석이 아니라 현대에 상상에 의존하면서까지 무리하게나마 재현된 만한전석이므로 애매한 측면도 있기는 하다만 어쨌든 청나라 시대 문화가 명나라 시기에 나온 것이기에 중국사의 기본 지식도 없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니네 나라를 멸망시킬 놈들이 만든 요리다. 맛있게 먹으라고. 하하하하우리나라로 비교하면, 고려 때 조선시대 문물이 튀어나오는 격이다. 이 때문인지 코미디하우스에서 대장금 패러디 코너가 방영됐을 때 사신을 연기한 개그맨이 "청나라 때 나온 요리를 명나라 사신에게 대접한다" 라고 디스했다.
5. 여담
만한전석을 배푸는 등급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은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해 내부적으로 청나라에 대한 악감정을 품었지만 정작 청 황실에서는 조선 군주의 의전 서열을 황제 다음[7] 자리로 두었고 만한전석 또한 조선을 5등급 요리로 베풀었다는 점이다. 이는 월남(베트남)이나 류큐(오키나와)보다 한 등급 높은 요리였다.[8]조선이 품은 청나라에 대한 악감정은 청나라는 진정한 '중화'가 아니며, 진정한 중화인 명을 멸망시킨 오랑캐라는 인식[9]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청나라로서는 병자호란은 수많은 군사 원정 중 하나였고 승전했다.[10]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은 청나라 이전 국가인 명나라의 가장 가까운 조공국이었다. 문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중국의 봉신국 중 가장 철저하게 유교화가 진행된 나라였다는 점에서 항상 '중화'로서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던 청나라에게 있어 객관적인 국력에 비해서도 훨씬 더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주변 조공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나라의 조공국 중 가장 상석에 있었던 조선의 조공을 받는다는 것은 곧 유교 문명의 종주국이자 패권국인 중화의 천자로서 정통성을 인정 받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조선 사신들은 의전상으로도 명나라 시절 그대로 높은 대우를 받았다. 17세기 중후반 삼번의 난 같은 정권 안정성이 여전히 위험했던 청나라 초기만 하더라도 조선 사신들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험악하고 고압적이었지만 18세기에 진입할 시점에는 열하일기 같은 자료가 증빙하듯이 상당히 후한 태도로 바뀌었다.[11]
[1] 어미가 추측형인 이유는 후술되듯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모든 자료가 소실되어 버려서 이 요리가 실제로 존재한 요리였는지조차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통문화에 미친 악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는 사례 중 하나인 셈이다.[2] 청나라 초기에는 단출하게(?) 18가지 요리를 올렸지만 이후로는 48개 음식을 올려놓게 되었다.[3] 이는 당시 법으로는 불법이라서 들키면 파직이었지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음식이 죄다 잔반으로 만드는건 심각한 낭비였기 때문에 봐준 면이 컸다.[4] 그래서 사실 외성인들도 남방계 비율이 의외로 높은 편이다.[5] 문화대혁명 이후 맥이 끊긴 소위 '중국 무술'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파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중국 본토는 이미 실전된 것들이 대부분이라 소림사도 거의 관광지화했다.[6] 만한전석과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대륙에 있는 여러 중국 문화와 역사 기록 중에서 훼손되거나 소실 및 실전된 경우가 많다 보니 명나라와 청나라에 관한 사료들은 1949년 이전의 중국 대륙에서 직접 기록한 사료들과 유교 관련 문헌보다 조선 왕조 당시의 한국에서 기록한 사료들과 유교 관련 문헌이 더 많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명나라 및 청나라와 관련된 기록과 유교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7] 참고로 몽골의 대칸은 청나라 황제가 겸임하고 있었다.[8]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구범진 참조[9] 물론 아무 근거 없이 그런 건 아니고 청이 망하기 직전까지 자행한 한족에 대한 변발 등 만주족 복장 강요, 전통학문 탄압 등의 명분이 있기는 했다. 한민족 사이에서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 제국이 자신들의 조선 지배 및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만선사관을 퍼뜨려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를 미화한 것의 영향이다.[10] 하지만 만약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승리했다면 그 후유증으로 청나라가 빨리 멸망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병자호란은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11] <Remaking the Chinese Empire: Manchu-Korean Relations, 1616–1911>, Yuanchong W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