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21:16:46

옌후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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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집정대행
중화민국 19, 25, 29대 국무총리
정체 顔惠慶
간체 颜惠庆
한국식 독음 안혜경
영문 Yan Huiqing
준인(駿人)
출생 1877년 4월 2일
청나라 절강성 상해
사망 1950년 5월 24일 (향년 73세)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상해동문관
버지니아 대학교
워싱턴 대학교
직업 외교관, 정치가
종교 기독교
국무총리
재임 기간
대행 1921년 12월 18일 ~ 1921년 12월 24일
대행 1922년 1월 25일 ~ 1922년 4월 8일
19대 1922년 6월 11일 ~ 1922년 7월 31일
25대 1924년 9월 14일 ~ 1924년 10월 31일
29대 1926년 5월 13일 ~ 1926년 6월 22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군벌혼전 시기2.3. 항일외교의 선봉장2.4. 소련대사 시절2.5. 말년
3. 기타4.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 중화민국 19대, 25대, 29대 국무총리, 주독 중국 공사, 주미 중국 공사, 주소 중국 대사를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7년 상하이 훙커우에서 태어났다. 상해동문관을 졸업한 다음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에 유학했다. 1899년 버지니아 대학을 졸업한 이후 워싱턴 대학교에서 다시 국제법을 공부했다. 귀국 후 청나라 주미 공사관 참사, 1909년 외무부 주사 등 직업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초대 외교총장인 루정샹의 발탁으로 1912년 외교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13년 독일 주재 공사를 지냈으며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 중국 대표단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2.2. 군벌혼전 시기

1920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안휘군벌이 몰락하자 1920년 출범한 진윈펑 내각에서 외교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21년 진윈펑이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퇴하자 쉬스창 총통의 지명으로 국무총리를 대행했다. 이후 량스이 내각이 출범하자 다시 외교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우페이푸의 위협으로 량스이가 톈진으로 도주함에 따라 내각 출범 28일만에 쉬스창 총통에 의해 국무총리 대행에 임명되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으로 직예군벌이 집권하자 직예군벌들은 2대 대총통이었던 리위안훙을 총통으로 추대하였는데 이때 옌후이칭은 중화민국 19대 국무총리에 정식으로 임명되어 법통중광 이후 첫 내각을 맡게 되었다. 옌후이칭은 남북통일과 재병을 위해 교육총장에 황옌페이, 육군총장에 우페이푸, 내무총장에 탄옌카이를 임며아혔으나 이들은 모두 취임을 거절하였고 아홉 총장 중 여섯명이 없는 무력한 내각이 되었다. 여기에 중의원 의장 우징롄이 내각인선에 불만을 표시하며 중의원의 내각 불신임을 천명했고 8월에 국회가 개회하자 총사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1923년 차오쿤회선 사건을 통해 대총통에 취임하게 되면서 1924년 25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지만 10월에 펑위샹북경정변을 일으킴에 따라 황푸에게 내각을 내주고 사퇴해야 했다. 1926년 3월, 직봉풍전쟁이 발발하고 대고구 사건으로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가 붕괴되자 장쭤린진윈펑을 총리로 삼고자 했는데 오성연군 총사령관 쑨촨팡우페이푸를 옹호하며 4월 20일, 옌후이칭을 총리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5월 5일, 북양군벌의 원로 왕스전까지 개입하여 옌후이칭 총리 임명을 지지하자 장쭤린이 어쩔 수 없이 동의하여 옌후이칭에게 총리직을 제안했고 5월 12일, 옌후이칭이 총리직을 수락하여 5월 13일 친서방 내각이라 불리는 우페이푸 파벌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장쭤린이 옌후이칭을 핍박하자 옌후이칭은 1926년 6월 22일, 처음이자 마지막 내각회의를 개최하여 두시구이를 총리 대행으로 지명한 다음에 국무총리에서 사퇴했다. 여담이지만 1926년 시점은 돤치루이의 사퇴 이후 국가원수가 없어 정부수반인 국무총리가 국가원수를 대행하던 시기로 엄밀히 말하자면 옌후이칭은 이 시기 국가원수였다.

국무총리 사퇴 이후 잠시 공직에 몸을 담지 않고 공공사업에 매진하였으나 국민혁명으로 북양정부가 무너지고 국민정부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자 국민정부에 합류, 능력있는 직업 외교관들을 적극적으로 국민정부에 진출시켰다.

2.3. 항일외교의 선봉장

1931년 9월 25일, 우차오수의 뒤를 이어 미국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만주사변에 대응하느라 한동안 취임하지 못하였다. 미국 공사직을 1933년 1월 7일까지 재직하다가 스자오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만주사변 발생 이후 특별외교위원회가 성립되자 전 외교부장 왕정팅의 추천으로 위원으로 선출되어 일본군의 철수를 이끌어내기 위해 적극적인 대응을 연구하였다. 또한 일본이 국제연맹의 중재안을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제2차 와카쓰키 내각과 협상하여 일본과의 직접 교섭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으나 장제스가 3국의 조정을 받아야 일본이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강요할 수 없으리라 여겨 무산되었다. 이후 다이지타오, 위유런, 구웨이쥔과 함께 일본의 <기본 대강 원칙>에 대응하기 위한 6개 항을 작성하였다.
  • 1. 일본 군대는 국제연맹의 감시 하에 점령 구역 내에서 철수한다.
  • 2. 중국과 일본의 장래 교섭은 반드시 국제연맹의 감독 하에서 진행한다.
  • 3. 교섭의 지점은 제네바 혹은 국제연맹에서 지정하는 장소로 한다.
  • 4. 이후의 교섭은 국제공약이 정하는 원칙 하에서 진행되어야 하고, 다음과 같은 3가지 사항을 위반하지 말아야 한다. 이 3가지 사항은 중국 주권의 독립, 영토와 행정의 완전성 존중, 문호개방, 기회 균등의 기회를 실행해야 하고, 극동의 평화를 촉진하며 국책의 실행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 5. 일본은 이번 출병의 책임을 진다.
  • 6. 중국은 일본의 어떠한 제안에 대하여도 수정하고, 다른 방안을 제안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중국 대표로 국제연맹에 일본군의 침략를 제소하여 만주를 만주사변 이전 상태로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발표한 리튼보고서의 수정을 요구하는 한편 정력적으로 중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특별대회, 1932년 국제연맹 13차 대회, 1932년 국제연맹 특별대회, 1933년 국제연맹 14차 대회에서 구웨이진, 궈타이치와 함께 중국 대표로 파견되었으나 일본의 국제연맹을 탈퇴를 비롯한 막나가는 행보와 서구 열강의 소극적인 태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를 두고 옌후이칭은 이솝 우화를 인용하여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걸겠는가?"라면서 평했다. 이후 미국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에게 일본을 제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

2.4. 소련대사 시절

옌후이칭의 연설.[1] 영상 설명란에 따르면 소련 대사 시절 중국의 평화에 대한 노력에 대한 연설이라고 한다.

이후 구웨이쥔과 함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중소 상호불가침조약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1932년 6월 6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가 소련과 관계회복을 결의함에 따라 옌후이칭은 소련과 국교 회복에 대해 담판했고 1932년 12월 12일, 소련 외교부장 막심 리트비노프와 국교 회복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2월 15일 중소 불가침 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옌후이칭은 1933년 1월 6일 최초의 소련 공사로 임명되어 3월 5일 부임했으며 1935년 대사로 승격되었다. 1933년, 소련에 억류 중이던 마잔산 부대의 석방을 주선하였으며 이때 마잔산의 참모였던 이범석 역시 같이 석방되었다.

1935년, 하매 협정진토 협정이 체결되자 크게 반발하여 "난징정부는 외교에 대해 어떠한 결단도 보이지 않고, 시기에 따라서 적당한 행동을 채택하면서 국제사회의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시대에도 외교문제에 대해 국가의 여론을 일치시킬 순 없었다. 외교부 부장이 되면 무엇이 정확하고 현명한 여론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대다수가 어떠한 정책을 채택하기를 원한다면 외교부장은 그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선안내 후양외 정책에 대한 항의 표시로 1936년 3월 23일에 소련대사에서 사직했다.

2.5. 말년

파일:중일전쟁안혜경.jpg
중일전쟁 시기의 옌후이칭

귀국 이후 자선문화사업에 전념하였으며 중국 홍십자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 홍십자회 회장으로서 난민과 부상병 치료를 원조했고 1939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두차례 방미했다.

1940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영국령 홍콩으로 들어왔으나,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함에 따라 일본군에게 억류되었다. 왕징웨이 정권에 합류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했고, 종전 때까지 상하이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다.

1949년 2월, 민주파 인사 쑹칭링, 장사조, 황옌페이, 장란 등과 함께 대리총통 리쭝런의 요청을 받고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같은 해 5월, 천이가 이끄는 공산군이 상하이를 함락시키자 상하이 임시치안유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0월 19일, 정무원 정치법률위원회가 성립됨에 따라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2월 2일, 중앙인민정부 제4차 회의에서 화동군정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50년 3월 9일, 상하이 생산구재위원회(上海市生产救灾委员会)가 성립되면서 부주임위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1950년 5월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이에 정무원 정치법률위원회 주임이었던 둥비우가 가족들에게 위문 전보를 보냈다.

3. 기타

쑨바오치의 여동생과 결혼해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상하이외국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차남은 미국육군사관학교을 나와 외교관을 했다. 3남은 화동전력설계원의 수석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장녀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모교 도서관 사서로 지냈다. 차녀는 코넬대를 나왔다. 3녀는 코넬대 수학과를 나왔다.

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제1차 직봉전쟁후 자유주의지식인의 북경정부관 - 호인정부론과 나문간사건을 중심으로, 윤혜영, 동양사학연구 26호, 동양사학회.
  • 塘沽停戰協定 이후 국제정세와 職業外交官의 항전 입장, 중국사연구 83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南京國民政府 職業外交官의 부상에 대한 硏究, 석미자, 중국사연구 89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職業外交官의 對日 强硬態度와 國內活動 硏究, 석미자, 중국사연구 95권, 중국사학회.
  • 만주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 직업 외교관의 역할 연구 : 1931-1936, 석미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 앞 부분은 장제스의 연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