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0:43:23

마부팡

서북삼마 西北三馬
<rowcolor=#FFF> 청해군벌 감숙군벌 영하군벌
마부팡 마훙빈 마훙쿠이
파일:마보방.jpg
중화민국 4대 청해성 정부주석
정체 馬步芳
간체 马步芳
한국식 독음 마보방
영문 Ma Bufang
자향(子香)
출생 1903년 청나라 감숙성 하주현
사망 1975년 7월 31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민족 회족
학력 청해군관훈련단
직업 군인, 정치가, 외교관
종교 이슬람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서북왕2.3. 청해성에서의 통치2.4. 외교관 시절과 말년
3. 매체에서4. 여담5.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서북을 주름잡은 마씨군벌인 마훙쿠이, 마훙빈과 함께 서북삼마의 일원으로 꼽혔으며 서북왕으로 불리었다.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이주하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냈다.

마훙쿠이와 함께 청녕이마로도 뽑혔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3년, 청나라의 군인 마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마치는 아들을 이맘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젊어서 이슬람 신학교에 들어가 쿠란을 공부했다. 19세에 이슬람 종교지도자인 아굉(阿渹: Akhûn)이 되었으나 인생목표를 종교지도자에서 군사지도자로 바꾸고 19세에 청해군관훈련단에 입단하여 군사학을 배웠다. 졸업 후 영해순방영 부영장, 영장, 단장을 거치며 몽장의 여러 부락 정복전에 참여했다. 펑위샹이 서북지역으로 진출하자 펑위샹에게 투항하여 76여단 부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중원대전에서 펑위샹이 몰락하고 마씨 군벌들이 장제스에게 투항하자 신편 9사단장에 임명되었다.

마부팡은 일찍이 1920년, 의원상 상점을 인수하여 운영한 경력이 있었는데 1929년, 마부팡은 서녕에 입성하면서 서녕 동관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상점들을 이전하여 총상점으로 확대 설립, 청해성의 시장을 독점했다. 의원상 상점은 청해성 각지에 분점을 설치했고 톈진에 대리점을 설치하여 양모, 피혁, 사금, 감초, 대황, 사향, 녹용, 동충하초 등을 판매했다. 또한 군수용품과 피복을 생산하는 공장과 피혁가공 공장들을 설립해 텐진, 상하이로 물품을 판매함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군비를 중앙에 빌리지 않고도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마부팡이 이후 장제스의 밑에 들어가고 나서도 독자적인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31년 9월, 마치의 동생 마린이 청해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자 아버지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마린 실각운동을 벌였다. 마린은 정부주석에 임명된 후 감숙성과 국민군이 발행했던 군용포를 모방해 1931년 11월 청해성 금고를 설립하고 청해성금고유지권을 발행하여 많은 부를 축적했는데 마부팡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유지표 수매 및 군사적 위협을 통해 재정청, 현정부, 세국에 군비충당을 구실로 모든 수입을 압수하고 예금인출을 강요했다. 하지만 마린은 1932년, 경비부족을 구실로 공직자와 교직원들의 봉급을 착복하면서 버텼는데 이 때문에 각 기관과 학교의 경비가 지불정지되는 경제위기가 도래했다.

2.2. 서북왕

1932년 1월, 후쭝난이 중앙군 제1사단을 이끌고 감숙성 천수로 진주하여 마부팡 세력 진압을 도모하기 위해 부사단장 팽진지를 청해성에 파견하자 당황한 마부팡은 1932년 2월, 청해성 남주 옥수에서 티베트 승려를 폭행하여 티베트와의 갈등을 조작하였고 달라이 라마 13세가 병력을 파견하자 일부러 퇴각했다. 이에 장제스가 후쭝난에게 티베트군을 격퇴하라고 지시하면서 중앙군의 관심사는 티베트 쪽으로 바뀌었고 마부팡은 후쭝난의 공격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32년에 이르러 마부팡은 류원후이와 합작하여 티베트군을 크게 격파하고 청해성 남부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다.

이 와중에 1933년 41군 군장 쑨뎬잉이 청해둔간독판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국민정부가 청해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이에 마부팡은 11월, 영하 지역의 여러 군벌들과 연합하여 쑨뎬잉을 공격했다. 쑨뎬잉은 영하로 주둔지를 옮겼다가 마부팡, 마훙쿠이, 마훙빈의 연합공격으로 박살나서 모든 병력을 잃고 쑹저위안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마씨군벌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신편 7사단을 신편 2군으로 개편하고 예하에 100사단과 2개 기병여단을 두게 했다. 그리고 마부팡을 2군장 겸 100사단장으로 임명하여 2만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했다. 1935년, 대장정 중인 홍군과 교전했는데 이때 마부팡과 싸웠던 자가 바로 1방면군 섬감지대사령 펑더화이였다. 1935년 법폐개혁이 행해지자 이를 따르지 않고 청해성에서 기존의 은원을 계속 사용하는 등 국민정부의 통제력 강화에 저항했다.

마부팡은 삼촌 마린의 정권을 차차 위협, 청해성의 경제를 붕괴시키고 마린의 도덕적 해이를 고발하여 대중적 분노를 촉발시켰다. 궁지에 몰린 마린은 1936년 6월, 6개월 간의 휴가를 신청한 후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이때 마부팡은 청해성 주석대리에 임명되어 섬서성의 중국공산당 토벌에 참여하는 등 군공을 세웠다. 1937년, 순례에 돌아온 마린이 청해성에 들어오려 하자 마부팡은 마린의 복직을 막기 위해 성정부기념주대회를 열어 마린을 공개적으로 탄핵했다. 마린이 공직에서 추방되자 1938년 3월, 장제스로부터 청해성 정부주석 겸 국민당 청해성 당부 집행위원회 주임위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청해성 경비사령부 사령, 청해성 보안처 처장, 국민정부군 82군 군장, 50집단군 총사령 등을 역임했다. 마부팡의 군대인 82군은 마치가 조직한 군대를 물려받은 것으로 산하에 잠편 2사단, 기병 5사단, 기병 8사단, 40집단군, 129군 등이 속해 있었으며 1949년까지 8만명 규모로 증강되었는데 전투력이 강력하여 서북철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기병 5사단은 과거 감수 기병 1사단이 모태가 된 것으로 반장전쟁, 초공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정예부대였다.

2.3. 청해성에서의 통치

취임 직후 마부팡은 회족 사회의 주류 종파인 하나피파를 지원하여 각 현에 하나피파 율법학자들을 배치하고 모스크에 많은 기부를 하여 무슬림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슬람 교육촉진회를 설립해 회족과 위구르족 장교들을 양성하여 이들을 적극적으로 군대에 받아들임으로 소수민족의 지지도 확보하였다. 또한 청해성에서 역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티베트족들에게 중국화를 강요하는 대신 티베트 불교의 활불들에게 군정 직위를 나누어줌으로 티베트인들의 불만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진수런, 성스차이 정권 하에서 민족 갈등으로 분규를 빚은 신강성과 달리 청해성은 여러 민족이 얽혀있음에도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38년 주석에 임명된 후, 마부팡은 향촌건설 운동, 6대 중점사업을 실시하여 청해성의 경제건설과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마부팡은 보갑제 실시, 민단 조직, 나무심기, 도로건설, 아편금지, 문맹퇴치를 6대 목표로 선언하였다. 1938년 3월 13일, 지방보갑조사위원회가 설립됨에 따라 청해성에서 정식으로 보갑제가 실시되었으며 청해성 보안처를 설치하여 전성에 15개의 보안국을 두고 15만명의 남자들을 107개 보안단으로 편성하여 공산당의 침략에 대응했다. 이 민단조직은 1935년에 이미 조직되어 있었는데 마부팡은 주석에 정식으로 취임한 후 이를 개편하여 청해성을 7개 구로 나누어 15세에서 50세의 남자들을 동원, 예비군 겸 노무자로 활용했다. 마부팡 집권 기간 동안 청해성의 도로는 3143킬로미터로 확장되었으며 교량 71개가 건설되었다. 청해성에 등록된 차량도 216대로 증가했다. 나무심기에도 열심이라 집권기간 동안 총 6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1938년에 성금연위원회를 설치, 1943년과 1946년, 금연법을 제정하여 아편을 금지하고 학교를 증설하고 교복, 교과서를 지원하는 등 문맹 퇴치에도 열심이었다. 이렇듯 마부팡은 군벌들 중에서 근대화에 힘쓰는 개혁군벌에 속했다.[1]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기병 8사단을 파견하여 산동, 하남, 감숙, 안휘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또한 청해성의 공업화에 힘써 중일전쟁에는 후방기지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1930년과 1931년에 설치된 육군수계소에 2000만원을 투자하여 중공업 공장을 설치했다. 1939년, 해양화학공장이 계획되어 1941년에 완공되었는데 8대 공장이라 하여 성냥, 정비 유리, 인, 모직물, 시멘트 등을 생산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중앙정부는 마부팡을 견제하기 위해 기병 8사단과 잠편 2사단을 해체했다. 1945년 11월, 마부팡은 서녕에 40명의 주주로 구성된 황중실업공사(湟中實業公司)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황중실업공사는 초기는 청해성의 면직의류공업을 경영했으며 이후 몽골과 티베트의 양모, 가죽, 털 수출 및 중원의 차, 포목, 공산품 수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마부팡은 황중실업공사를 바탕으로 단숨에 청해성의 경제권을 틀어쥘 수 있었고 티베트, 상하이, 난징에 각각 지부를 설치하는 등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1946년 1월,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어 청해성은행을 설립하고 청해성의 경제발전을 지원했다. 1947년 1월, 마부팡은 황중실업은행을 추가로 설립하여 청해성의 금융까지 장악했다. 청해성은 마부팡이 법폐를 거부했던 까닭에 중일전쟁 직후 발생한 대규모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청해성의 경제는 중원의 혼란과 관계없이 건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2.4. 외교관 시절과 말년

1947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후쭝난의 지휘 하에 3개 정비 개편사를 이끌고 마훙쿠이와 함께 공산군을 공격했다. 장정 시기 공산군 포로들을 처형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공산군에 투항한다 하더라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 호남이나 사천 군벌들과 달리 공산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1949년, 서북야전군의 공세로 9월에 휘하 세력이 완전히 섬멸되어 마훙쿠이와 함께 충칭과 홍콩을 거쳐 대만으로 도주했다. 마훙빈은 공산군에게 투항했다.

전후 이집트 왕국에 대사로 파견되었으나 가말 압델 나세르 장군이 주도하는 이집트 혁명 이후 1957년, 이집트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자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로 전임하여 1961년까지 근무했다. 대사 임기가 끝난 후에도 간나이광을 비롯한 많은 외교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만으로 귀국하지 않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하다가 사망했다.

3. 매체에서

Hearts of Iron IV에서 서북삼마 세력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의 감숙군벌과 청해군벌을 합친 세력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고증에 맞진 않지만 서북군벌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더 비중이 있던 광동군벌이나 사천군벌도 구현되지 않았으니 역사서에서 거의 언급도 없는 서북군벌이 고증대로 구현되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일듯.... 중국이 군벌 예속화 중점을 완료할 시에 만약 국민정부에 복종을 하게 된다면 정치력 450을 지불하여 서북군벌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2번째 통합단계인 군사적인 통합을 행할 수 행하여 중화민국 육군장성으로 흡수할 수 있다. 초기에는 초상화가 구현되어 있지 않고 마오안잉의 초상화를 기반으로 한 랜덤 초상화를 쓰고 있었으나 1.5 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온 다음에 룽윈과 함께 초상화가 패치되었다. 중국에게 복속된 후에 정치력 소모 합병 디시전을 선택하게 된다면 디시전 첫단계인 군대 통합 디시전 이후 중국 장성진에 추가된다.

호이4의 모드인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 모드에서는 청해성 군벌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역사의 시대 2에서도 서북삼마(씨베이산마)의 수장으로 나온다. 서북삼마의 영토는 상단 하츠 오브 아이언4의 서북삼마 영토와 같다.

4. 여담

  • 1933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입적하자 티베트의 고승들이 달라이 라마 14세를 찾기 위해 마부팡의 영지에 있는 카르마톨파이 다르제 사원 인근을 수색하다가 훗날 달라이 라마 14세가 되는 텐진 갸초를 발견했다. 라싸의 지령에 따라 인근의 모든 후보들을 데리고 라싸로 가던 승려들은 마부팡에게 달라이 라마 후보들을 라싸로 데려가는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고 마부팡은 이에 관심을 보이면서 후보가 되는 아이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당시 승려들은 이미 텐진 갸초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찍고 있었지만 마부팡이 술수를 부릴까봐 이를 말하지 않았는데 마부팡은 아이들을 불러모은 후에 사탕상자를 내주었다. 어떤 아이들은 놀라서 사탕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어떤 아이들은 사탕을 미친듯이 집어드는데 텐진 갸초 혼자서만 얌전히 사탕 하나를 집어먹었다. 그 모습을 본 마부팡은 텐진 갸초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진 후 그를 쿰붐 사원에 보내게 했고 그의 몸값으로 티베트 정부에서 10만 달러를 뜯어냈다. 티베트 정부가 순순히 10만 달러를 지불하자 마부팡은 텐진 갸초를 계속 잡아두면서 30만 달러를 추가로 요구하였고 티베트 측은 이 엄청난 돈을 지불하느라 허리가 휘었다고 한다.
  • 군벌답게 반공주의적 독재자이긴 했지만 의료, 노동, 복지, 농업, 위생 등의 분야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중시하였다.
  • 엄청난 호색한으로 40명이 넘는 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자가용 비행기로 중국 전토를 누비며 미녀를 구했다고. 심지어 "나를 낳은 자내가 낳은 자를 빼고 다 따먹어도 된다." 라는 소리를 했다고도 한다.

5. 참고문헌

  • 청해군벌 마보방의 지역개발정책에 관한 연구, 김소연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 다만 인구가 오아시스 지역을 중심으로 밀집해 있던 신장 지역과 다르게 칭하이성은 인구 분포가 너무 조방하게 이루어진 이유로 문맹 퇴치 작업 성과는 신장성 성스차이 정권에 비해 부진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