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8-20 15:16:01

후이족

회족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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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족
回族 | 회족 | Hui People | خُوِذُ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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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A677281-C0FF-47D5-B6C9-4481A542A879.jpg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후이족 요리사들.
파일:1179DF81-7A68-4CE2-A670-357A28A60041.jpg 파일:E2B887D8-095E-494B-93DA-1095A8369DD4.jpg
동심청진사(同心清真寺)[1]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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خُوِذُو (샤오얼징)
Hui people (영어)
인구 10,586,087명
주거주지역 닝샤 후이족 자치구

1. 개요2. 어원3. 정의4. 문화
4.1. 풍속
5. 후이족의 작명법6. 역사
6.1. 당, 송 시대의 해상 교역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6.2. 송, 원, 명 시대의 육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6.3. 청나라의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
6.3.1. 자흐리야파 반란6.3.2. 동치제 시절 후이족들의 반란 (同治回亂)
6.4. 현대
6.4.1. 1980년대 이후
7. 한족 외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
7.1. 위구르인과의 관계7.2. 티베트인과의 관계
8. 중국 당국의 이슬람교 규제9. 둥간족10. 판데이11. 냉담자 / 비무슬림 후이족12. 우츨족 / 바바 뇨냐13. 인물
13.1. 원나라 & 명나라13.2. 청나라 & 중화민국13.3. 현대
14. 참고 문헌
14.1. 한국어 문헌14.2. 영어 문헌14.3. 아랍어 문헌
15. 둘러보기

1. 개요

중국소수민족. 한족화되어 중국어를 쓰는 무슬림 중국인이다. 한국 한자음대로 회족이라고도 한다. 중국 내 인구는 약 1,058만 명. 중화권[3] 외에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등지에는 약 15만 명이 거주하는데, 이들을 둥간족(東干族, Дунгане)이라고 한다. 언어는 둥간어로, 중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자가 아닌 키릴 문자로 표기하는 게 특징이다.

후이족이라는 개념에는 이슬람을 믿는 한족(한회, 漢回)과 중세 이후 중국 본토에 정착하여 한화된 무슬림의 혈통적 후예라는 개념을 모두 포괄한다. 무슬림 조상을 두었으나 이슬람을 믿지 않고 완전히 한화(漢化)되었거나 이슬람을 배교한 후이족을, 계속해서 후이족으로 분류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현재는 후커우(戶口·호적)로만 후이족인지를 알 수 있다.

전체 후이족 중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거주하는 비율은 약 34%에 불과하며, 이들은 중국 전역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과거 간쑤성, [4] 섬서성, 허난성 일대에 집단 거주했으나, 청말 회민반란 이후 상당수가 죽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중국 각지로 흩어졌다. 현재는 도시에서 도축업, 소매업, 운수업(택시) 등에 주로 종사하며, 정치적으로는 소수민족 중 가장 성공적으로 안착해 한족 일색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원에서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후이량위(回良玉) 전 부총리와 같은 고위직 인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중국은 다른 이슬람 민족과 달리 후이족에게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시행할 수 있도록 자치권을 부여하며 중국의 사법 체계를 자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5] 일부 모스크에서는 설교자이자 지도자인 이맘과 법원이 같은 중재 사무실을 사용하고 이맘은 샤리아법을 근거로 분쟁을 조정하며 중국 사법 체계는 조정에 실패하거나 샤리아법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때에만 개입한다.[6] 서구 사회의 일부 무슬림 이민자들이 '샤리아 경찰'을 자처하며 말썽을 부리는 데에는 종교적인 목적보다는 같은 나라 출신 이민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고, 입국 브로커에게 지불하느라 빌린 돈을 잘 갚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큰 반면 후이족은 정교분리가 확실한 데다가 중국에서 장기간 정착하며 쌓은 노하우 덕분에 독자적인 샤리아를 시행하더라도 이웃한 비무슬림들과 마찰이 적은 편이다.

2. 어원

  • 당나라부터 원나라 시기에 걸쳐 유럽, 중동, 남아시아 출신의 수많은 외국인이 회흘(回吃)[7] 지방을 거쳐 중국에 정착했다.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이들이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중동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기에 ‘돌아올 회(回)’자를 붙여 후이족으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 있다. 당시 이들 색목인 중에는 무슬림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 신자가 많았다. 이 때문에 한때는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는데, 이를테면 기독교인을 '십자회회(十字回回)'[8], 유대인을 '남모회회(藍帽回回)'[9][10] 등 '회회'자 앞에 특징을 붙여 일컬었다.
  • 중세 원나라의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회회인”들은 코가 무척 길고 털이 덥수룩하고, 킵차크 칸국에서 온 사람들은 머리색이 노랗고 눈 색이 파랗기 때문에[11] 괴이한 외양으로 한족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했다고 한다. 여기서 보듯 중세 기록에 나오는 회회인은 무슬림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중동인들을 뭉뚱그려 지칭하는 어휘였다고 볼 수 있다.
  • 명나라 시기에는 서역 출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한족하고만 혼인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어 이들을 한화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의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이 한족들과 완전 동화하며 원래의 종교를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슬람 회회인 이외에는 그 수가 급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회회라는 말 자체는 무슬림을 칭하는 어휘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이슬람은 회교라고 칭해지고 무슬림은 회민, 후이족, 한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한회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3. 정의

  • 일단 후이족이란 이슬람화된 한족으로, 한족과 섞여 살며 한족과 언어, 문화 면에서 공통되어 있지만 무슬림이 절대다수인, 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은 문화와 풍속을 가지고 있어 별도의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식생활만큼은 일반 한족들과 타협하지 않고 할랄 푸드(무슬림의 식문화)를 고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후이족들이 청나라 시대부터 요식업 분야에 활발하게 진출하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할랄 중화 요리는 청진 요리로 불린다. 그러나 현재 후이족의 후예 가운데는 비무슬림들도 더러 있으며, 다른 소수민족 가운데 무슬림 부족을 '너네도 후이족'이라고 한데 묶어놓기도 한다.
  • 후이족과 위구르인은 양쪽 다 무슬림이지만, 두 민족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한 차이점이 있다.
    • 첫째, 후이족은 한족과 혼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당나라부터라고 한다.[12] 중세 무슬림들은 중국에 가족들과 함께 이민온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 이민온 무슬림 남성들이 한족 여성과 결혼하면서 후이족의 기원을 이루었으며, 이런 가정에서는 대부분 성으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으로부터 취한 "마(馬)"씨 성을 택했다. 심지어 십회구마라는 말도 있다. 후이족 열에서 아홉은 마씨라는 뜻. 후이족이 당나라 때부터 중국 역사 속에 존재했다면 이슬람화한 위구르인이 중국의 지배를 받은 시기는 이보다 훨씬 늦은 청나라 때부터이다. 위구르인들은 한족과 혼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화된 문화도 적다.
    • 둘째, 모국어의 차이. 명나라 때부터 후이족들의 모국어는 아랍어도 아니고 튀르크어나 페르시아어 계통의 언어도 아닌 중국어이다. 장기간의 혼혈과 통혼으로 중국 문화에 많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까지 중국어를 아랍 문자로 표기하는 체계인 위구르어 표기보다 더 복잡한 아랍식 병음인 샤오얼징(小兒經, 소아경)이 비공식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후이족은 극히 드물며, 후이족 절대 다수의 아랍어 구사 능력은 예배용으로 필수적인 기도문을 암기하는 수준에 머문다.
    • 반면 위구르인들의 모어는 튀르크어족위구르어로,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와는 유사성이 없고, 같이 차가타이어파에 속하는 우즈베크어와 많이 비슷하다. 자세한 내용은 튀르크어족 문서 참조. 그리고 어족 단위에서 별개의 언어로 분류되는 언어동조대 중에서는 아랍어페르시아어와 더 비슷한 편이다.
    • 하지만 언어적, 혈통적으로 비슷해 보인다 할지라도 이슬람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확고해서 위구르처럼 분리 독립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뿐[13], 주류민족과의 갈등은 여전히 무시 못할 수준. 현대 칭하이성과 같은 곳에서는 티베트족과도 갈등이 있다.
  • 현지 문화와의 융화와 인종적 유사성으로 인해 중국 내에서 후이족은 대부분 무슬림임에도 그냥 중국의 한 민족이 되었다. 오히려 줄서기나 인재 배출을 잘해서 다른 무슬림 민족과 다르게 정부의 지원을 더 받는 면도 있다. 이슬람교가 주도한 동치회란 등, 많은 억압과 학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타협점을 찾아내 공존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에 있어서도 타 소수민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민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후이족은 미국에서 유대인과 비슷한 처지로서 특별한 종교를 믿는 중국인 정도로 보면 된다.

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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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저우 후이족 구역에 남아있는 후이족 가정의 명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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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문장을 한자 서법으로 쓴 후이족의 서예작품이다. 문장은 뜻은 "신께서 지식과 코란을 저에게 주심을 감사한다". 오른쪽 옆에 중국어로 뜻을 적어놓았다. 이 글씨를 쓴 마이핑(馬益平)은 이맘으로 시안시에서 유명한 이슬람 인사이자 서예가이다. 알자지라 방송[14]

자기 지역의 요리할랄에 맞게 변형한 칭전 요리(清真菜) 문화를 발달시켰다. 중국 각지에 가면 후이족식당에서 그 지방의 요리를 할랄 푸드로 만든 요리를 맛볼 수 있고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들도 후이족의 요리를 맛보러 식당을 찾는 일이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매뉴로는 우육면(牛肉面)으로 알려진 란저우 라몐(蘭州拉麺)이 있다. 이 라몐을 일본의 라멘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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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 차이나타운의 중국식 할랄 요리 전문점. 상술한 십회구마(후이족 열명 중 아홉명은 마씨 성) 스테레오 타입을 이용해서 간판에 한문으로 마씨네 할랄 식당이라고 붙여놨다.

4.1.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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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족 노인의 모습.
후이족의 복식은 히잡과 모자 외에는 한족과 별 차이가 없다.
교파를 따지자면 후이족은 수니파에 속한다. 또한 중국화가 되는 과정에서 일부 유교적인 요소도 흡수하여 일부 후이족은 조상숭배를 중시한다.[15] 후이족들은 하나피파를 따르는데 하나피파는 현지 관습법을 중시하는 법학파(마드하브)이고 중국에 유입된 하나피파 역시 중국의 상황 및 다른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3가지 분파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었다. 후이족 사회의 주요 교파로는 당나라에서 명나라 시기에 유입된 거디무(格迪目)파,[16] 청나라 치세 초 유입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수피 낙슈반디야 교단에서 갈라져 나온 쿠피야(虎夫耶; خفيه)파와 여기에 다시 시아파 수피즘을 흡수한 자흐리야(哲赫林耶; جهرية)파가 있다. 쿠피야파와 자흐리야파는 수피 교단이고 거디무파(까딤파)는 수피즘 대신 유교 사상과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후이족은 예배를 하루에 5번 드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금요일마다 모스크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수피의 영향으로 성자묘를 숭배하는 경우도 있으며, 관혼상제의 풍속은 이슬람을 따른다. 중국에 있는 모스크는 '청진사'로 불리며 건축 양식과 이슬람식 건축양식이 융화된 양식이다. 언어는 중국어를 쓰지만, 일부 아랍어, 페르시아어 어휘가 도입되었다. 과거에는 샤오얼징이라고 해서 아랍 문자를 빌려서 관화를 표기하는 전통이 있었으나,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다. 파키스탄 길기트 발티스탄주의 티베트계·이란계 혼혈 발티인, 인도 라다크 지방의 푸릭파족 등과 함께 중국티베트어족의 무슬림에 속한다.

또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서 이슬람화된 민족의 특성 때문인지 남성의 할례 문화가 있어 후이족 남성은 다른 중국의 민족[17]과는 다르게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 참고로 위구르족, 보안족, 둥샹족 등 중국의 다른 무슬림 소수민족들도 후이족과 마찬가지로 무슬림이라는 점에서 할례 문화가 있어 해당 민족들 또한 남성들이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후이족 중에는 완전히 세속화되어 아예 무종교인이거나 이슬람교를 버린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은 언어나 생김새나 문화나 한족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사실 이슬람 국가가 아닌 이상 할랄푸드를 지키는 게 어렵기 때문에 대도시에 나와 있는 후이족 중국인 중에서는 명백한 돼지고기만 피하는 후이족도 많다.[18]

청결을 중시하는 이슬람교 특성상 이들의 음식 문화는 위생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마치 미국에서 코셔 푸드가 안정성이 검증된 고급 식자재로 평가받는 것처럼 청진 요리도 안전한 중화요리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족은 야생동물을 즐겨먹는 관습이 있고,[19] 이게 SARS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같은 질환의 원인이 되곤 하지만, 후이족은 이슬람 율법에 하람 푸드로 규정된 개와 돼지는 물론, 박쥐, 설치류, 천산갑, , 사향고양이류 따위는 입에 대지도 않는다. 다만 야생동물 고기 중에서도 사슴고기와 고기는 이슬람교에서 먹지 못하게 하지 않으므로 후이족도 개인적으로 싫어하지 않는다면 먹는 데 거부감이 없는 경우가 많으나, 대부분은 다비하 의식과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위생 검사를 거쳐야 할랄 푸드로 인정받는 음식의 특성상 야생으로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각 사슴농장과 꿩농장에서 사육된 사슴과 꿩으로부터 다비하 등의 절차에 의해 생산된 사슴고기와 꿩고기를 먹는 데 거부감이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한족이 즐겨 먹는 돼지고기는 이슬람 율법상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후이족들은 쇠고기양고기를 즐겨 먹으며, 이슬람교 계율대로 피를 완전히 빼서 먹는다. 명나라, 청나라 때 중국인들은 쇠고기 하면 후이족을 떠올릴 정도였다. 한편, 소나 양의 고기를 구하기 힘든 지역(특히 중국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후이족들은 쇠고기와 양고기 대신 닭고기오리고기 내지는 염소고기를 많이 먹는다. 해안이나 강가에 사는 후이족은 어패류를 즐겨 먹기도 한다.

중국은 주류문화가 발달되어 있지만, 후이족은 코란에 음주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20] 또한 중앙아시아나 동남아의 무슬림과는 달리 흡연도 금기시되어 있다. 물론 다른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대추야자술과 물담배는 금기시하지 않는다.
파일:EF51998B-9E6C-4AC9-B750-C9F095B7C6B5.jpg
1930년대 우루무치의 타란치[21]와 후이족 남성들. 청나라 시절 후이족들이 이와 비슷한 복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이족의 전통 의복문화는 한족과 대동소이하되, 남성은 회회모(回回帽)라고 불리는 무슬림용 모자,[22] 여성은 여기에 히잡[23]을 두르는 정도이다. 복식으로는 흔히 흰 옷을 선호한다. 물론 현대에 대도시에 나와 있는 후이족은 거의 세속화되어 있어 일상 복장은 일반 중국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성도 마찬가지. 다만 모스크에 기도를 드리러 갈 때는 모자나 히잡을 반드시 착용한다. 이맘 같은 성직자들이나 독실한 신자들은 턱수염을 기르는 풍습을 잘 지키는 경우도 있다. 성형 수술 또한 금기시된다.#(영어)한국어 기사

또한 원래 물이 귀한 지방이 많은 중국은 씻는 문화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지만[24] 이슬람교는 하루 5번 있는 기도 전에 반드시 손발을 씻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후이족은 자주 씻는다. 중국 모스크의 앞에는 무슬림 전용 목욕탕(清真淋浴)이 영업중이거나 혹은 손발을 씻기 위한 수도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족은 아무데나 침뱉기를 하지만 후이족은 이슬람교 관습상 금기시되어 거의 하지 않는다.[25]

후이족 문화에는 여성할례[26] 같은 극악한 여성억압 악습은 없다. 다만 과거 후이족은 한족과 마찬가지로 전족 및 일부다처제가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둥간족들의 경우에도 1948년도까지 전족을 시행했으나 이후 소련 정부의 노력으로 근절되었다 한다. 민국시대의 무슬림 군벌인 마훙쿠이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두기도 했지만[27], 중국 수립 후 사회주의화 과정에서 일부일처제가 확립되고 남녀평등이 확립됨에 따라 모두 없어졌다. 대만의 후이족 및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중국계 무슬림 공동체 역시 일부다처제가 사실상 절대 금지된 상태이다.

5. 후이족의 작명법

후이족은 거의 중국화가 되었기 때문에 한족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명한다.

성(姓)이 오고 그다음 이름이 오며, 겉보기로 봐서는 한족의 이름과 똑같다. 이는 같은 무슬림계 민족인 위구르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계와 다른 점이다. 위구르족은 페르시아권의 영향을 받아 주로 성이 뒤에 온다. 원래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혈연에 따른 연고주의를 제한한 영향으로 가문명 대신 아버지 이름을 성처럼 사용했는데, 중국에 정착함에 따라 조상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앞자를 주로 자기들의 성씨로 삼았다.

후이족에게서 빈도수가 높은 성씨는 무함마드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마(馬)씨인데, 십회구마(十回九馬)라는 말이 돌 정도이다.[28] 무함마드라는 이름 관련해서는 마(馬)씨 외에 무(Mu, 木(나무목), 穆(온화할 목)) 씨를 쓰기도 한다. 아니면 아랍어 din(정의)에서 온 딩(ding, 丁(정))씨와 아랍어 Sadiq(진리)에서 온 사(沙)씨도 주로 쓰는 성이다. 중일전쟁 당시 명장 바이충시의 경우 성 백(바이)씨는 “바하두룻딘”이라는 무슬림 이름의 앞부분을 음차한 것이다. ‘바하두르’는 힘 센 용사란 뜻의 튀르크어 이름이고, ‘앗 딘’은 라카브이다. 이렇듯 후이족은 성씨에는 아랍어 외에도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영향도 있다.

그리고 메카 순례를 다녀온 사람은 다른 나라의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이름 앞에 자기 이름 앞에 하지(哈吉, جالحجّي‎)를 붙인다.

독실한 신자들은 아랍식 이름을 따로 갖는 경우가 많다.

중국통계에 따르면 해(海)씨 중 한족은 31.2%, 회족은 46.4%에 달한다. 보(保)씨중 한족은 37.9%, 회족은 41.4%이다. 사(沙)씨중 한족은 60.7%, 회족은 32.2%이다. 합(哈)씨중 한족은 30.3%, 회족은 30.3% 몽고족은 21.2%이다. 만(满)씨중 한족은 52.2%, 회족은 23.9%이다. 선(鲜)씨중 한족은 78.9%, 회족은 21.1%이다. 법(法)씨중 한족은 80%, 회족은 20%이다. 미(米)씨중 한족은 71.6%, 회족은 19.4%이다. 중국 목(穆)씨중 한족은 69.9%, 회족은 19%이다. 중국 마(馬)씨중 한족은 75.7%, 회족은 18.6%이다.

6. 역사

당, 송 시대에는 무슬림들이 주로 해상 무역을 하러 왔다가 광둥성, 푸젠성에 정착했다면, 원, 명 시대에는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들이 회흘 지방을 통해 주로 간쑤성, 섬서성에 정착했다. 이렇게 해로로 중국에 정착한 남방 후이족(아랍, 페르시아 계통)과 육로로 정착한 북방 후이족(투르크, 중앙아시아 계통)은 기원이 다르다. 다만 이들은 모두 중국화되었으며, 특히 남방 후이족은 명청대 이후 해상교통로에서 이슬람세력이 약화되어 이슬람권과 접촉이 끊긴 뒤 대부분 상당수가 신앙이 희미해져서 일반 한족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

재밌는 점은 이슬람 세계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대에는 중국 내 무슬림들이 무역업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시기,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나[29] 이슬람 세계가 쇠퇴기에 접어든 시점인 청나라 시절에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대놓고 무시당했다는 점. 일례로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원나라에서 투항한 무슬림 관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주마 예배(이슬람의 금요일 합동 예배) 때마다 연설을 했는데, 이를 두고 청나라 시절 역사가들은 주원장이 사실 한족이 아니라 근본도 없고 무식한 후이족이라고 날조를 시도했었다. 청나라 때 후이족의 평판과 사회적 입지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청의 통치에 맞서 1862~1877년 회민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는데 이 와중에 중앙아시아 일대로 피난간 이들은 둥간족이라고 불리고 있다.

6.1. 당, 송 시대의 해상 교역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

대식(大食)은 본래 페르시아의 땅으로 남자는 ‘심목고비(深目高鼻, 눈이 깊고 코가 높다)’로 검은 수염을 갖고 있으며, 여자는 얼굴이 희고 외출 시에는 얼굴을 가린다. 이들은 하루에 천신(天神)에게 5배(拜)하고, 은대(銀帶)에 은도(銀刀)를 차며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하지도 않는다. 예배당은 수백 명을 수용하는데 7일에 한번 왕은 높은 곳에 앉아 아래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하늘에서 태어나고 적을 죽이는 사람도 복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전투에 용맹하다.번역출처
-『신당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무역 상인들이 6~8세기 무렵 중국의 행정력이 당시 잘 미치지 못하던 광저우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였다. 광저우를 통한 중국과의 해상 교역 루트는 곧 아랍인들에게도 알려졌다. 후이족들의 전승에 의하면 중국에 이슬람에 전파된 것은 수나라 때부터라고 하지만 수나라는 서기 622년 무렵 헤지라[30] 이전 618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고[31] 중국에 이슬람이 전파된 것은 당나라 시대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당나라 때 광저우의 유력자들은 대부분 아랍인 무슬림 혹은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상인 출신이었지만, 이들은 자기 고향의 부녀자들을 데려오는 경우는 드물었고[32] 대개 중국인이나 동남아시아인 현지처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광저우 루트는 이미 꽤 유명해서 탈라스 전투 때 아랍군의 포로가 되었던 중국인이 12년 만에 이라크에서 광저우로 가는 뱃길을 이용해서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758년 10월에는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이끄는 동남아 출신 해적들이 광저우를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한편 안사의 난 당시에 당의 요청으로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만수르는 4천의 무장 상인들을 파견해 반란 진압을 돕게 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중국 여인과 결혼해 화북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이 초창기 후이족 공동체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878년 황소의 난 때는 황소의 반란군이 광저우에 체류하던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12만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수치는 광저우에 체류하며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통제를 받던 동남아인들까지 포함한 수치로 추산된다. 광저우가 파괴된 이후에는 푸젠성취안저우가 해상 무역 중심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취안저우의 파르시무슬림 상인들이 당나라 남부의 해안 지대의 교역을 장악한 가운데, 신라인들은 황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었다. 당나라 신라방에 정착한 신라인들과 페르시아인 상인들은 권위 있는 아랍, 페르시아 지리서에 신라가 여러 차례 언급된 것을 보면 상당한 수준이었던 듯하다. 이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신라인들과 발해인들이 빈공과에 자주 급제했듯이 아랍-페르시아인 중에 능력이 유별나게 좋은 경우에는 빈공과에 지원해 급제하는 경우도 있었다.[33]
왕이 거둬들이는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향기 나는 풀이었다.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곤 했는데 마을마다 아주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를 '차(al-sakh)'[34]라고 부른다. 세 잎 식물보다 잎이 많고 향도 약간 더 강하며 시큼한 맛이 난다. 중국인들은 물을 끓인 다음 잎을 뿌려 넣었으며 모든 병을 다스리는 데 썼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35]

후이족들이 처음 중국에 정착하던 시기는 중국에서 차가 대중적으로 유행하게 되는 시기와 겹친다. 광저우의 페르시아인, 아랍인 상인들을 통해 차 문화가 중국에서 중동으로 직접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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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시대 당시 잡아온 기린을 그린 그림
신종 희녕(熙寧) 연간(1068~1077)에 대식에서 온 자가 번장사(蕃長司)의 업무를 통할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광저우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 도번수보순랑장(都蕃首保順郞將) 포타파리자(蒲陀婆離慈)가 아들인 마물(麻勿)로 하여금 공물을 바치며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직위를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고 또 장군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마물을 낭장으로 삼았다. ... 대식의 각 부족은 각각 이름이 달라서, 물순(勿巡),[36] 타브리즈(阤婆離), 유로화지(俞盧和地),[37] 말라바르(麻囉跋) 등의 나라가 있지만, 모두 대식이란 이름으로 대표되었다.
- 『송사번역출처

송나라 때에는 광저우와 취안저우의 페르시아인, 아랍인 후손 대부분이 한화되었다 하며[38] 명목상으로만 무슬림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송나라의 시박사에서 일하는 등 해상 무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있는 다른 페르시아-아랍 무역 거점들과 해상 교역을 지속하였다. 오대십국송나라의 황제들은 광저우와 양저우 출신 서역인 후손들 중에 미인이 많다고 후궁으로 선호하였다 한다. 당시 중국인들의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피상적이었는데, 심지어 메카를 붓다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하거나, 메카가 불교도들이 1년에 한 번 순례를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등 잘못된 정보가 널리 퍼져있었다.

중국 해안 도시의 후이족들은 명나라 때 정화의 해상 원정에 대거 참여하며 활약한 이후, 명나라 정부에서 해금령을 내리고 인도양 해상 무역의 실세가 무슬림에서 서양인으로 교체되며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한족과 동화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광저우와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한 해상 도시의 후이족 후손들은 족보를 통해 자신의 후이족 조상들에게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등 대부분 완전히 한화한 상태이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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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17년 사망한 술루 술탄국 군주의 무덤인 더저우 쑤루왕묘 (덕주소록왕묘 德州苏禄王墓).[40] 해당 유적은 중화권과 이슬람권 사이의 교류에서 동남아 현지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6.2. 송, 원, 명 시대의 육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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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성 칭저우에 남아있는 모스크인 진교사. 원나라 대인 1302년에 세워졌다

불교의 중국 전래는 서역 출신 호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종교 지형이 다각화되는 과정에서 경교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유대교 신도들 역시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중앙아시아가 확고하게 이슬람화된 시기인 송나라 때부터는 중국에 유입되는 서역인 중에 무슬림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당나라 때는 이슬람이 대식법(大食法)이라고 칭해졌던 이슬람교는 북송 시대를 기점으로 회회(回回)교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이는 북송에서 고용한 무슬림 용병들이 회골(回鶻)[41] 지방을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1070년대 북송에서는 카라한 칸국 출신 무슬림 용병 5,300명을 고용했으며, 1080년에는 만여 명을 추가로 고용하였다. 카라한 칸국은 한자어로 아융란회골(阿蕯蘭回鶻)로 음역되었는데 카라한 칸국의 칸들 중 가장 이름을 널리 떨친 아르슬란 칸(사자 칸이라는 뜻)의 이름을 음차하고 여기에 중세 위구르 칸국의 한자어 이름에 더한 형태였다.

원나라 때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유럽에서 수십만 명의 색목인들이 중국에 정착했는데, 이는 원나라를 지배층이었던 몽골인들이 중국인들을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색목인들은 불교처럼 이미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종교를 믿는 경우도 흔했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유대교, 마니교, 이슬람을 아우르는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원나라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 종교 모두를 회회교로 통칭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취안저우포수경이 있으며, 원나라가 송나라를 공략할 때 회회포를 제작, 운용한 알라웃딘(阿老瓦丁; Al ad din)과 이스마일(亦思馬因; Ishmail),[42] 원나라 천문학계에 알마게스트을 본격적으로 소개, 도입하고 천문대 설계를 감독한 부하라 출신 천문학자 자말앗딘(扎馬剌丁; Jamal ad-din), 아랍식 외과를 운영한 기독교도 의사 이사 타르야만(Isa Tarjaman 1227-1308), 원나라 황궁 건설을 지휘 감독한 부하라 출신 건축가 아미룻딘(亦黑迭儿丁; Amir ad din) 등이 유명하다.

색목인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집단은 고창 위구르의 위구르인들로 당시 고창 위구르에서는 평범한 노예도 계약서를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문해율이 높았으며, 주민 대다수가 폴리글롯이었던 점이 컸다. 고창 위구르인들은 불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도가 많았으나 이들 역시 회회인으로 지칭되었는데 티베트 불교를 몽골 지배층에 소개해 준 집단 역시 위구르인들이었다. 원나라 때 사료는 위구르인 관련한 설명이나 이슬람 관련 설명에서 모두 회회(回回)라는 어휘를 사용하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해당 어휘를 접하는 경우 장순룡 같은 위구르인을 이슬람교 신도로 오해하거나 하는 혼란의 소지가 있었던 편이다.
묵덕나(默德那)는 회회의 조국(祖國)인데, 위치는 천방과 가까웠다. 선덕 연간(1426~1435)에 그 추장이 사신을 보내 천방의 사신과 함께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지만, 후에는 다시 이르지 않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처음에 국왕 모한맥덕(謨罕驀德)이 태어나면서 신령(神靈)스러워, 서역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복(臣服)하였고, 여러 나라에서 별암발이(別諳拔爾)[43]로 존칭하였는데, 천사(天使)라는 말이었다. 나라 안에 경서(經書) 30책이 있었으니, 모두 3,600여 단(段)이었다. 그 책은 옆으로 글씨가 쓰여 있는데,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모두 이를 사용하였다. 그 종교는 하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주로 했지만, 신상(神像)은 두지 않았다. 매일 서쪽을 향하여 경건하게 예배하였다. 해마다 1개월은 재계(齋戒)하며, 목욕(沐浴)하고 옷을 바꾸었으며, 거처는 반드시 상주(常住)하는 곳을 바꾸었다. 원나라 때에 이르러 그 나라 사람이 사방으로 두루 퍼졌는데, 모두 그 가르침을 지키어 바꾸지 않았다.
명사(역사책) 서역열전 발췌 번역출처

원나라가 망한 이후 무슬림들을 제외한 색목인들은 대부분 중국인과 동화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후이족이 되었으며, 중국에 마지막까지 남은 네스토리우스 파 공동체는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인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면서 사멸했다. 일단 원나라 때 무슬림 의사, 천문학자, 역관, 관료 중 상당수가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관직을 보존했는데, 이들을 한꺼번에 다 죽이면 대체 가능한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명나라 조정에서는 홍무제의 칙령으로 재색목인 출신 외국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무조건 한족과 통혼해야 한다는 법을 제정하여 한족과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원명교체기에는 마드라사가 소멸하는 듯했으나, 명나라 만력제 시절에는 호등주(胡登洲)라는 회민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섬서성 셴양에 다시 마드라사를 세우고 이를 계기로 간쑤성과 섬서성에 여러 마드라사들이 들어섰다.
가정(嘉靖) 12년(1533)에 천방(天方)·토로번과 함께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는데, 왕(王)을 칭하는 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장부경(張孚敬) 등이 아뢰기를, "서역의 여러 왕은, 아마도 자기 나라에서 봉(封)을 받은 것이거나 부락이 서로 붙인 존칭인 것 같습니다." ... (중략)... 이에 하언(夏言) 및 추신(樞臣) 왕헌(王憲) 등이 아뢰기를, "지금 토로번은 15명의 왕, 천방은 27명의 왕, 살마아한53명의 왕이니, 실로 이 이전에는 없던 수치입니다. ... 감숙 순무(巡撫) 조재(趙載)가 상주하기를, “각국에서 왕을 칭하는 자가 150여 명에 이르는데, 모두 본조(本朝)의 봉작(封爵)이 아니니, 마땅히 개정(改正)토록 하고, 또한 조공사절의 인수(人數)를 확정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번인(番人)은 장사를 잘 하여 중화(中華)와의 교역을 탐하였는데, 입경(入境)한 후에는 일체의 음식과 교통비용을 모두 담당 관원에게 받아가니, 비록 5년 1공(貢)으로 정했지만, 당시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준수하려 하지 않았고, 천조(天朝)도 또한 꾸짖을 수가 없었다.
명사(역사책) 서역열전 발췌 #

명나라 정부의 적극적인 쇄국 정책[44]에도 적지 않은 수의 무슬림 상인들이 자신들을 왕이라고 사칭하며 조공을 바치고 대신 더 많은 양의 답례품을 받아 이익을 챙긴다거나 혹은 간쑤, 섬서 지방에 눌러앉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늘날 후이족의 유전자 조사 결과 이들은 서아시아인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고 간쑤성 변경에서 둔전을 일구던 몽골계 무슬림 둥샹족, 튀르크계 살라르족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자성의 난을 일으킨 이자성이 한 번은 명나라 관군에게 크게 패해 같이 싸우던 반란군 대부분이 전사하자 그는 병력을 보충하고자 후이족들에게 찾아가 반란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고, 이 때문에 이자성 반란군의 상당수는 후이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자성 군의 상당수는 기병이었으며 보병들도 대부분 이동 시에 말을 타고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족 농민병만으로 이렇게 기동성 있는 병력 구성을 갖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출처:]

6.3. 청나라의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

후이족들이 주로 정착한 간쑤, 섬서 지역은 강남 지방이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과 반대로 가뭄이 계속되며 극빈 지역으로 전락하였고, 이로 인해 간쑤, 섬서, 닝샤의 후이족들은 청나라 사회에서 사회, 경제적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하며 극심한 소외감에 빠지게 되었다. 베이징, 난징 지역의 부유한 색목인 관료의 후손이었던 후이족들 역시 절대다수가 한족과 완전 동화되거나 아니면 도축업자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후이족들은 청나라의 지배 계급 만주족에 대한 불만을 직접 표출하기 힘들자, 만주족들이 특히 열심히 믿던 불교에 대해 증오감을 대리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후이족 전승 중에 불교를 비하하는 내용이 많은 것도 이 때문. 원나라 시절 아잘 샴숫딘[46]이나 명나라 시절 정화를 비롯한 후이족 상당수가 불교에 우호적이던 것과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때 들어서 후이족 사회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이 번성하였다. 청나라 치세 초 간쑤성섬서성의 후이족들은 마내지(馬來遲; 1681년~ 1766년)의 영향으로 당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유행하던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으로 개종하였다.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은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영향을 받은 수피 교단으로 교단주의 권위를 절대화[47]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수피 성직자들이 지나치게 재산을 탐해도 평신도들이 견제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명나라의 기존 후이족 사회에서는 무슬림이라 하더라도 유교 교양을 쌓는 것이 권장되었다면, 당시 새로 들어온 낙슈반디야 교단은 논리학이나 철학, 과학수학을 비롯한 합리주의를 배격하였다.[48]

6.3.1. 자흐리야파 반란

메카에서 유학한 후 1761년 간쑤성에 돌아온 후이족 마명심(馬明心)은 급진적인 수피즘('자흐리야'라고 불린다.)을 전파하였고, 살라르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살라르족들은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 군인들이 티베트 부족들과 한족 거주지 사이 쉰화 일대의 둔전을 부여받으면서 형성된 부족 집단으로, 살라르족 남성은 전쟁 포로로 잡은 혹은 자신들보다 더 가난했던 티베트인 여성과 결혼하고 다시 살라르족 여성은 자신들보다 좀 더 부유한 후이족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티베트인들과 계속된 통혼과 잦은 교류는 이들의 일상생활이 이슬람과 티베트 불교 사이의 이중신앙으로 나타났고, 이는 마명심의 자흐리야파 수피 교단이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이유로 작용했다. 자흐리야 수피 교단 역시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의 일파였지만 예배 방식이 상당히 달랐다. 이들은 사원에서 발을 구르고 뛰면서 예배를 보았으며 다른 무슬림들과 다르게 지크르(하나님의 성함을 외우는 기도 행위)를 톱을 연주하는 듯한 특유의 고음으로 크게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행했다. 한 편 해당 교단은 살라르족 이외에도 간쑤성, 산시성 일대 빈곤한 후이족 농민들에게도 상당한 수준의 포교가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기존 낙슈반디야 교단과 다르게 율법학자들에게 청빈한 생활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후이족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던 살라르족과 후이족 농민 상당수가 율법학자들의 청빈을 강조하는 점을 반기며 자흐리야 수피 교단을 따르자, 기존 낙슈반디야 교단(쿠피야 교단)[49]에서는 자흐리야 수피 교단의 예배법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며 잦은 패싸움이 벌어졌다. 마명심을 따르던 살라르족 공동체는 쿠피야 교단과 계속되는 싸움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청나라 관리들에게 요청하여 법정 소송을 벌였으나, 청나라 관리들은 살라르족들과는 잘 소통이 되지 않았고 중국어에 유창한 후이족들의 쿠피야 교단 편을 들어주었다.

1781년 마명심이 살라르족들을 불온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당하자 살라르족들이 마명심의 석방을 요청하며 시위를 벌이며 란저우 일대로 진격하였다. 이를 보고 당황한 청나라 관리들이 마명심을 란저우에서 참수하였다. 교단주가 죽자 충격을 받은 살라르족들은 대놓고 청나라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살라르족은 명나라 때 이래 둔전병으로 감숙성 변경 지대를 티베트 부족민들로부터 방어하던 부족이었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현 한 개 규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3개월 정도를 소모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살라르족 인구 40% 정도가 사망하였으며 생존자 중 상당수가 천산북로, 운남성 일대로 강제이주당했다.

18세기 중반 청 제국이 준가르 칸국을 정복하고서 준가리아 평원의 목초지를 농경지로 개간하는 식민 사업을 시행할 때 상술한 1781년 반란 당시 추방되거나 빈곤 상태에 처했던 후이족들을 동원했다. 주로 우루무치 근방에 정착한 후이족 농민들이 경작한 농산물은 청나라 팔기군이 돈을 주고 구입하여 군량으로 활용하였다. 원래는 해당 지역의 군사기지들은 팔기군이 직접 둔전을 경작하여 자급자족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여름에는 미친 듯이 덥고 겨울에는 미친 듯이 추운 이 지역에서 군인들이 열심히 농사짓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었고, 실질적으로 이들에게 보급품을 공급하는 일은 후이족들이 맡게 되었다.

당시 신장은 전통적으로 천산남로(회부)[50]와 천산북로(준가르부)[51]로 나뉘어 있었다. 후이족 상인들은 천산북로와 감숙성 일대를 연결하는 무역에 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현지 위구르인들과 서로 기초적인 수준의 아랍어 문어로 소통하였다. 천산 남로 내 위구르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장사하러 이민 온 한족이 거래나 결혼 등의 목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후이족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건륭제는 1781년 반란 진압 전후하여 자흐리야파를 이단으로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자흐리야 교단 신도들은 백련교 신도들 비슷하게 비밀 결사 형태로 살아남아 오히려 순교자 신화를 가지고 선교를 지속하여 오히려 교세가 더 막강해졌다. 이는 한 편으로는 건륭제의 정복 사업 및 내몽골 개발 때문이기도 했다. 건륭제 시절 준가르 칸국이 멸망하면서 몽골 일대가 안정화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신대륙에서 전파된 감자와 고구마, 호박과 옥수수, 담배가 내몽골에서 재배가 가능해졌다. 일부 후이족들은 천산북로에서 영하와 내몽골을 거쳐 북경을 통하는 교역로에서 무역을 하면서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다. 이들 후이족 무역 상인들은 강남 지방의 상인들에 비하면 훨씬 더 영세했으나, 일부는 군납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자흐리야 수피 교단은 이들 상인들로부터 선교 후원금 외에도 군수물자를 아낌없이 희사받았다.

6.3.2. 동치제 시절 후이족들의 반란 (同治回亂)

태평천국의 난 발발 과정에서 청나라 팔기군들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권위가 대폭 실추되었다. 한 편 태평천국군이 후이족 인구가 밀집한 섬서성 일대로 진군하자, 한족 사회 내에서 후이족들이 태평천국군과 내통했다는 엉뚱한 유언비어가 퍼지고 해당 유언비어로 위협을 느낀 후이족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 섬서성의 한족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 1862년 동치회란(同治回亂)[52]이 일어났다. 그에 앞서 윈난성에서는 판데이[53]들이 농민 출신 생원 두문수의 지휘하에 이미 1856년 봉기하여 대리를 비롯한 50여 개의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이른바 평남국을 건국한 상황.

섬서성의 회민 반란은 마명심의 후계자 중 한 명이었던 마화룡을 정신적 지도자로 삼았으며 동시에 시안이 백언호가 이끄는 회민 반군에 의해 포위되었다.[54] 해당 봉기는 하서회랑을 통해 신장으로 가는 보급로를 마비시켰고, 2년 후인 1864년에는 신장의 후이족들이 1850년대 윈난성의 후이족들처럼 수천 명 단위로 각지에서 집단 학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쿠차와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후이족들이 대거 봉기하고 신장의 팔기군 요새들을 포위하였다. 후이족들이 몽둥이와 식칼을 들고 팔기군 요새를 기어오르자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희망을 잃은 만주족 팔기군들은 대개 요새와 함께 자폭했다. 후이족들이 반만주족 감정을 가지고 먼저 봉기하자, 현지 튀르크계 무슬림들이 뒤이어 봉기하고 이후 만주족 팔기군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후이족과 위구르족들이 서로 도시, 출신지별로 나뉘어서 싸움을 벌이다 결국 코칸드 칸국 출시 야심가 야쿱 벡이 해당 지역을 점거하기 이른다.

흥미롭게도 1862년 일어난 간쑤성과 섬서성의 후이족 봉기는 오늘날 서구권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박탈감을 느끼던 무슬림 소수자들이 극단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종교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비무슬림 국가 정권을 대상으로 지하드 무장저항을 준비하는 지하조직을 운영하고, 사상적으로 극단화하며 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했다는 점이 그것이다.[55] 당시 봉기의 핵심 지도자 두 명 중 한 명인 마화룡은 상술한 마명심의 후손이었고, 백언호는 극단주의 성향인 자흐리야파에서도 과격파에 속했다. 건륭제에 의해 자흐리야 수피 교단이 불법화된 것은 해당 교단이 이슬람 극단주의의 일반적 양상 즉 (기존 후이족 사회의) 정교분리 사회를 비판하고 정교일치를 추구하는 성향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일단 동치회란은 이른바 청나라 최후의 명장 좌종당에 1867년부로 투입되면서 서서히 진압되는데 마화룡은 한 번 투항했다가 다시 봉기를 일으켰던 이유로 처형되었으며 백언호는 마화룡을 구하려다 실패하고 시닝으로 달아났다. 좌종당은 해당 반란에서 교파, 지역 간의 차이를 파악하여 마화룡이 속한 자흐리야파에 속한 후이족들이나 먼저 한족을 대거 학살했던 섬서성 출신 반군들의 경우는 항복해도 처형했지만, 감숙성 출신 후이족 반란군들은 특히 자흐리야 교단이 아닌 쿠피야파나 거디무파(까딤파)의 경우에는 오히려 투항 이전보다 더욱 후한 대접을 해주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당시 베이징에 살던 후이족들은 교리 문제로 마화룡의 자흐리야파와 서로 대치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회민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에서도 태평천국 운동 진압과는 다른 방향으로 대처하였다. 시닝으로 도주한 백언호와 섬서성 후이족들은 다시 야쿱 벡이 장악했던 신장 일대로 도피하였으나, 좌종당군이 야쿱 벡을 정벌하자 여기에 위협을 느끼고 국경을 넘어 러시아 제국으로 도피하였다.[56]

후이족 반란 진압 이후 1876년부터 1878년까지 섬서성을 중심으로 가뭄과 이에 따른 기근으로 중국인 2천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1877년에는 간쑤성 일대에 1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400만여 명에 달했던 섬서성 내 후이족 인구는 반란과 뒤이은 기근으로 2만여 명 수준으로 격감하였다. 후이족 상당수는 반란 진압과 뒤이은 대기근을 피해 간쑤성, 섬서성을 떠나 칭하이성 같은 인구 밀도가 낮은 변경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인구가 낮은 지역으로 이주한 후이족들이 새로 땅을 개간하면서 한족과 후이족 사이의 갈등을 부추겼던 해당 지역의 빈곤 문제 역시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

6.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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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도스 (어얼둬쓰) 시의 모스크

신해혁명 후 마씨일족은 군벌로 성장하여 마가군을 이끌었고, 이들은 다른 군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지를 독립왕국처럼 다스렸다. 비교하자면 신장성의 경우 한족 군벌(진수런 등등)이나 관료들이 위구르인에 대한 몰이해나 혐오로 위구르인들의 봉기를 조장했던 것과 다르게 서북 지역의 후이족들은 같은 후이족 군벌들의 통치를 받는 상황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은 이슬람권에서 이슬람 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이슬람 모더니즘의 영향이 같은 시기 신장에서는 이슬람 모더니즘이 위구르 민족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면, 후이족 사회 내에서는 그동안 지하드를 주장하던 자흐리야 수피 교단 등의 약화로 이어졌다.[57]

후이족 군벌들은 국민정부에 복속했고, 국민당 정부의 편에 서서 이 근처로 대장정을 해온 홍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장궈타오가 지휘한 홍 제4방면군은 이들과의 전투에서 궤멸적으로 참패하고, 거의 전멸한 끝에 지휘부만 옌안에 겨우 도착한다. 공산당은 마씨일족에 반대하는 회민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들을 자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한족 병사들이 후이족 마을에서 이슬람 관습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여러 주의를 주었다. 1946년 이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후이족 군벌 마훙쿠이가 지휘하는 마가군은 후쭝난군에 편입되어 공산당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지만, 이후 전세는 역전되었고, 후이족 군벌은 공산당에 투항하거나(마훙빈, 마둔징) 대만으로 망명해서(마부팡, 마훙쿠이, 마부칭) 거의 100여 년간 이곳을 지배하던 마씨일족의 왕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마씨일족의 영지는 닝샤 후이족 자치구로 개편되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국공내전 종료 이후 국민당군에 소속된 후이족과 위구르인 약 2만여 명이 대만으로 피난하였는데, 이들은 오늘날 대만 무슬림 인구의 직계 기원이 된다. 이들이 대만에 유입되기 전 일제강점기 당시 대만에서도 소수의 후이족 인구가 있었으나, 일제가 이슬람을 강경 탄압하면서 사멸된 상태였다고 한다. 대만으로 유입된 외성인 무슬림들은 중국회교협회나 중국회교청년회 등의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에는 “사회주의 국가는 약소민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소수민족의 자치를 강조하는 레닌주의 교리 때문에 그다지 탄압이 심하지 않았으나,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는 중국공산당의 정책 + 중국 내 반종교 정서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 또한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받았었다. 이 당시 이맘들은 홍위병에게 폭행당하고, 당연히 모스크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에 반발한 윈난성 거주시의 샤덴마을의 후이족은 1975년 반란을 일으켰고 군부대를 습격해서 무기고를 털어 무기를 탈취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베이징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 진압군을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모스크를 파괴하여 1,6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4인방이 몰락한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 정부는 1979년 이에 대해 사과하고 모스크를 재건했다.

6.4.1. 1980년대 이후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전까지 무슬림 회족들은 중국의 한족들 틈에서 정체성에 대한 특별한 고민이나 문제없이 중국인의 일원으로서 중국 한족 문화에 동화하면서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성공 이후 전통보수주의 이슬람과 급진적 성향의 이슬람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의 무슬림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회족들에게 무슬림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한족과 회족이 한 마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협력관계를 유지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1979년 이후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1979년 이후 무슬림 회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이슬람의 전통적 보수주의 성향이 점차 강화되었다. 이들의 변화는 식생활에서 이슬람의 깨끗함과 청결을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목격되었다. 이슬람의 할랄(halal: 허용)에 해당하는 이슬람식 생활방식 ‘qing zhen'(pure and true: 청진)을 유지하기 위해 초대를 받아 중국 한족의 가정을 방문하는 회족들은 거의 대부분 해바라기 씨나 과일만을 요구하였다. 이슬람 음식문화의 청결 유지에 대한 보수적 입장과 점증되는 이슬람식 식습관의 유지 노력은 회족과 한족 사이의 상호 교류와 의사소통을 제약하고 접촉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다. 1979년 이후 무슬림 회족들의 종교적 활동 강화와 보수주의적 생활방식 유지는 1958년 중국공산당의 종교제도 개혁조치 이후 폐쇄되었던 모스크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제한된 종교 활동에도 활력을 제공하였다. 이후 무슬림 회족 사회에는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예배에 참석하는 무슬림 숫자의 증가, 이슬람 종교의식의 철저한 준수, 그리고 이슬람 교육의 강화였다. 1979년 이후 모스크 합동예배에 참석하는 무슬림의 숫자는 점차 증가하였으며, 라마단 단식 기간 동안 각 무슬림 가정에서는 적어도 1명 이상이 단식을 하였다. 교육적 측면의 변화는 이슬람 교육기관인 마드라사 교육의 활성화였다. 1979년 이후 공립학교 입학생 수는 감소한 반면, 모스크에 딸려 있는 쿠란을 가르치는 사립 마드라사에 입학하는 학생 수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무슬림 회족의 아이들은 학교 공부보다 집이나 모스크에서 코란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공산당 간부들에게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무슬림 회족 아이들이 공립학교보다는 모스크 부설 코란학교를 선택하는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1982년에 중국 이슬람의 작은 메카로 알려진 간쑤성린샤 후이족 자치주(河州라고도 불린다.)에서는 공립학교 학생 수의 비율이 78%에서 50% 이하로 떨어졌다. 무슬림 회족들이 자식들을 공립학교에 보내길 주저한 이유는, 중국어영어 등 주요과목을 공부해 봤자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미래의 희망도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을 마친 무슬림 회족들은 한족들에 비해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현저히 낮았다. 회족들에게는 공교육보다 농업, 수공업 등 가업에 종사하거나 코란과 아랍어를 공부하여 이슬람 관련 직업이나 이맘이 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담배와 음주는 1979년 이후 회족 사회에서 금지되었으며, 회족 여인들은 히잡을 쓰도록 요구받았고, 젊은 남녀의 만남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한편 한족들과의 결혼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일단 회족과 결혼한 한족 여성은 무슬림으로 개종해야 했다. 중국 사회 내에서 무슬림의 숫자가 증가한 원인은 한족의 개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무슬림의 이주와 상호결혼관습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슬림 회족 사회의 보수주의화에 대한 중국 당국의 반응은 신중했다. 회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중국 당국은 과거와 같은 강압적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회족 사회의 장점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여전히 회족 사회의 종교적 원리주의 현상을 걱정하였으며, 덩샤오핑 이후 중국공산당의 30년 작업이 불과 수년 만에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중국 당국은 회족들에게 이슬람 전통에 근거한 회족의 인종적 관습 유지를 허용하였고, 종교와 민족성을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였지만, 회족들은 두 개념을 결코 별개의 개념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이슬람은 회족들의 정체성 확립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KCI 등재 논문 : 위구르족, 회족 무슬림의 정체성과 문화접변 양상 연구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걸프 아랍 왕정국가들은 자국 내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이란에서처럼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발언권을 늘려주기 시작하는데, 이는 중국 이슬람 사회를 비롯한 세계 이슬람권이 보수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 역시 이란 호메이니 정권 수립 이후 자국 무슬림들의 봉기를 우려해서인지[58] 이슬람 관련한 제약을 상당 부분 완화하였다. 원래 중국에서는 종교의 전도 행위가 불법이지만 후이족들이 이를 무시하더라도 그렇게 크게 제재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종교 행위에는 정부도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다.

지금도 닝샤나 간쑤에 가보면 가보면 모스크가 곳곳에 있고, 나름 기도시간마다 많은 무슬림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이런 곳은 이슬람 우세지역이기 때문에 라마단도 엄격히 지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단식 후 모스크에서 공동식사를 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은 공산화 이후 장례에서 화장을 법제화했지만, 후이족은 이슬람교 전통상 화장이 금기시되기 때문에 후이족에게 이 법률은 해당되지 않고, 매장을 주로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중국 내 무슬림들이 해외와 교류하는 것을 상당 부분 제한하고 있다.[59]

오늘날의 쿠란중국보통화 번역판이나 중국 내 이슬람 교리는 이슬람과 중국 애국주의가 절충된 형태의 번역으로 되어 있다.[60] 학문적 입장에서는 논란일 수도 있겠지만, 반종교 정서가 있는 중국에서 이슬람이 별문제 일으키지 않고 공존하려면 어쩔 수 없는 타협이기도 하다.[61] 일단 후이족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중국인 및 외국에서 온 무슬림과 통혼한 한족으로 구성된 민족이기 때문에 일반 중국인 비무슬림들과 무조건 척을 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명장 바이충시가 중일전쟁에서 맹활약한 역사가 있기 때문인지, 오늘날 후이족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중국과 대만의 후이족은 각각 청나라나 일제강점기 때보다는 후이족에 대한 종교 차별과 억압이 줄었다며 비교적 만족하는 분위기이다. 청나라 때는 만주족을 제외하고 한족 뿐 아니라 후이족도 변발을 강요당하거나, 현재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팔기군들이 위구르족과 후이족을 학살하기도 했다. 모스크 입구에 “황제만세 만만세”라는 간판을 강제로 걸도록 하는 모욕적 조치 때문에 후이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었다. 대만일치시기 때 대만은 이슬람이 완전 사멸한 적이 있으며,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의 청진사들을 부수고 후이족들을 학대하여 중국 내 무슬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후이족들은 이슬람 국가와 중국 사이에 외교에서 많이 기여하고 있으며, 칭하이성과 윈난성을 개발하고, 소수민족들과 한족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 우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여담으로 중국의 유명 축구선수 우레이, 장린펑, 전 중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인 가오훙보도 후이족이고, 양양(A), 왕춘루와 더불어 90~00년대 중국 쇼트트랙의 1차 전성기를 이끈 양양(S), 연예계에서는 유명 배우인 천젠빈위허웨이가 후이족이다. 또 엽문4에 나왔던 태극권의 고수 오월(吴樾) 역시 회족이다.

오늘날 후이족들은 한족에 비해 중국 내에서 학업 성취도가 비교적 떨어지는 대신에 주로 예체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고위 정치인 중에서 후이족은 찾기 힘들지만 지린성 출신의 후이량위 (回良玉)가 2003 ~ 2013년간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며 농업, 민족, 종교 분야에서 활약한 바 있다.[62] 그 외에 후베이성, 안후이성, 장쑤성 등에서 성장이나 당위원회 서기 등을 맡는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7. 한족 외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

같은 종교를 믿는 위구르족과 사이가 애매하다. 한 편 후이족들은 티베트인들과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지만 중국 정부 차원에서는 언론에 잘 보도하지 않고 있는 편.

일부 카이펑 유대인들도 후이족으로 분류된 바 있다.#

후이족의 몽골족 버전, 티베트족 버전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후이족은 한족에서 나온 무슬림 종교, 민족집단이다. 이와 비슷하게 중국 내 몽골계 민족 중에는 보안족동향족이라는 무슬림 민족이 있으며, 살라르족의 경우 한족 대신 티베트계 혈통을 상당히 많이 물려받은 집단이다.

적어도 상술한 후이족과 위구르인, 후이족과 티베트인 사이는 서로 이런저런 갈등은 있더라도 교류도 많이 하고 서로의 일상생활이 밀접하게 엮어 있기 때문에 일방적인 적대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방적인 적대 관계라 볼 수 있는 쪽은 따로 있다.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인 판데이(Panthay)족은 로힝야족이 자신들의 역사를 도용했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싫어한다. 그러나 정작 미얀마에서는 판데이족 또한 로힝야족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계 소수민족에 해당하기에 상당히 미움 받고 있는 이유로 판데이족의 의견 역시 무시당하면서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7.1. 위구르인과의 관계

위구르인과 후이족은 같은 민족 명칭 기원을 공유하는 관계이다. 상술했듯 후이족의 회()자는 회흘 지방을 건너온 종교라는 의미이고, 현대 이전 중국에서는 위구르인들 역시 위구르에서 음역한 회흘, 회골 같은 명칭으로 지칭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 신장 지역을 정복한 직후 청나라는 이슬람을 믿는 위구르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준가르족이 전멸하고 무주공산이 된 중가리아 등지에 후이족을 정착시켰던 바 있으며, 현지에 정착한 한족들 역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청나라 측은 위구르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천산남로 일대는 회부, 준가르 칸국의 중심지였던 중가리아 일대는 준가르부락 지칭했다. 후이족들과 위구르인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청나라 출신 위정자들에게 대두되기도 했으나, 청나라의 한족 관리들은 중국화된 후이족은 한회(漢回) 현지 튀르크계 무슬림 위구르인들은 두건 머리라는 뜻의 멸칭으로 전두()[63]라고 대충 구분하곤 했다. 20세기 초반 소련의 언어학자 세르게이 말로프가 회(回)자의 어원이 되는 위구르에서 따와 신장성 내 튀르크계 무슬림들의 민족 명칭을 따로 위구르인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런 민족 명칭상에서의 혼란이 해결될 수 있었다.

한 편 이들 후이족들은 1862년 간쑤성, 산시성 회민 반란에 자극을 받아 위구르인보다 앞서 청나라에 항거하여 봉기하였던 바 있다. 1864년 당시 신장 지역 봉기에서 위구르인이 아니라 후이족들이 봉기에 앞장선 것이 특기할 만한데, 후이족 입장에서는 만주족과 청 왕조가 역사적인 이유로 상당한 증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64년 봉기 과정에서 신장으로 진입하여 독립왕국을 세운 야쿱 벡은 밥그릇 싸움 과정에서 이렇게 먼저 봉기를 일으켰던 현지의 후이족들을 대거 학살하거나 추방하는데, 이는 그의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평가받는다.

20세기 초반 신장성을 통치한 한족 군벌 양쩡신은 윈난성 출신으로 후이족을 데려오면 현지 위구르인들과 안 싸울 줄 막연히 오해하여 자신의 고향 윈난성에서 후이족 사병 2천여 명을 데려왔으나, 이들 중 일부가 현지에서 위구르인을 대상으로 현지 여성들을 마구 납치해 하렘을 만드는 등 폭정을 시행하여 오히려 봉기를 촉발했던 바 있다. 당시 해당 지역을 탐사한 서구인들 역시 위구르인들이 한족 비무슬림하고 결혼을 하는 경우는 이맘들의 종교적 반대에도 나름 성행했던 반면, 후이족 무슬림과의 통혼은 극히 드물었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마중잉의 경우 위구르인들의 요청으로 신장 지역으로 와서 진수런 정권의 폭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으나, 모종의 이유로 배신을 당하고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과 전쟁을 벌였던 바 있다.

이러한 갈등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청나라 통치의 유산으로 위구르 왕공들은 청나라 시대 몽골 팔기에 소속되어 한족 녹영 등에 편성되곤 하던 후이족보다 명목상으로는 우대를 받았고, 이는 양자 사이의 통혼이 드물고 서로 거리를 두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두 번째로는 위구르인들이 후이족들을 '한족의 앞잡이' 또는 '문화적으로 중국화된 사람'로 여겨 의심하고 경계했다는 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이슬람 문화는 단일 민족의 문화가 아니라 두 민족의 혼합문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로 인해 신장의 위구르족 이슬람 문화는 모스크 건축, 종교의식, 언어 그리고 교육 등에서 회족 이슬람 문화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신장 지역의 이슬람 문화가 종교 분파뿐만 아니라 인종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의미이다. 위구르족 무슬림과 회족 무슬림 사이의 차이점은 모스크 형태 등 건축예술과 언어교육 문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목격되고 있다.

신장위구르 지역의 모스크 형태는 종교적 분파나 수피 종단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과 민족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모스크 형태를 살펴보면 크게 위구르족의 모스크와 회족의 모스크로 구분된다. 위구르족의 모스크는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의 모스크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회족의 모스크는 청나라 시기부터 중국 불교사원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의 모스크 형태를 따르고 있는 위구르족의 모스크는 햇볕에 말려 만든 어도비 벽돌 외벽, 타일, 그리고 작지만 두드러진 첨탑 등 전통적인 이슬람 모스크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회족은 위구르족의 모스크를 방문하지 않고, 위구르족은 회족의 모스크를 방문하지 않는다. 위구르족은 회족을 무슬림이라기보다는 중국인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며, 회족은 위구르족을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사람들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

(회족은)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에서 중간적, 중재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위구르족은 회족을 타우즈(tawuz: 수박)라는 경멸적 용어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회족은 어떤 문제에서는 한족의 편을 들고, 어떤 문제에서는 위구르족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구르족은 회족이 겉으로는 무슬림(상징적으로 녹색)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공산당원(상징적으로 홍색)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일부 한족은 회족이 무슬림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족을 배신하고 위구르족의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구르족은 회족과 같은 무슬림이지만, 회족이 언젠가는 위구르족을 배신하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한족의 편을 들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위구르족과 회족 사이의 상호 불신과 경계심은 중국 정부가 원하는 회족의 중개자적 역할과 위구르족의 중국 문화로의 접변 또는 동화에 결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회족이 중국 한족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고 문화접변을 이루는 데는 약 700 내지 800년이 걸렸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감안할 때 위구르족의 한족 문화로의 접변과 동화는 더 오랜 기간이 걸리거나 아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KCI 등재 논문 : 위구르족, 회족 무슬림의 정체성과 문화접변 양상 연구

위구르인과 후이족 간의 민족 감정은 종교 교파의 차이는 아니다. 두 민족 모두 이슬람 수니파 중에서도 하나피파 마드하브를 따른다. 후이족이 결국은 유교 경전을 배우거나 군대에서 활약하는 등 중국과 타협을 선택한 반면, 위구르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들과 연대하면서 생겨난 차이다. 그러니까 종교만 같을 뿐, 혈통과 문화도 다르고 동질감도 적다.[64] 하플로그룹 연구 조사 결과 후이족은 유전적으로 위구르인보다는 살라르족, 동향족 그리고 한족과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나왔다.

민족감정을 배제한 종교적 측면에서는 서로 협력할 때가 많다. 애초에 이웃한 민족집단 끼리는 서로 애증이 교차하는 사이인 것이 당연한 데다가, 상술한 대로 서로 종교 교파 상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15년 카슈가르시에서 튀르키예인/타타르인 교사들이 가르치는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정부의 압력으로 폐교당할 위기에 처하자, 카슈가르의 후이족이 위구르인과 한족 군벌 사이를 중재하여 교과과정에 중국어를 추가한다는 조건 하에 폐교를 막았던 적이 있었다. 이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서구식 교과과정에 중국어 수업이 추가된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위구르에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중국이슬람협회는 후이족과 위구르족, 그리고 그 밖의 중앙아시아계 이슬람계 민족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중국 내에서는 위구르인의 성지순례를 사실상 금지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후이족이 여기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65] 과거 금기시되던 후이족과 위구르인 사이의 결혼 역시 21세기 들어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고 한다.

7.2. 티베트인과의 관계

중국의 수십여 개 소수민족 중에서도 티베트인과 후이족만큼 사이가 나쁜 민족은 드뭅니다. 이러한 적대감은 2008년 3월 중순 이후 발생한 충돌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그 이면에는 언론의 관심도 거의 없었습니다. 3월 14일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에서 발생한 폭동 당시, 공격받은 상점과 식당 중 상당수는 후이족 소유였습니다. 폭도들은 시내 주요 모스크를 습격하려다 정문에 불을 지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슬림 거주 지역의 상점과 식당들도 파괴되었습니다.

지난 5년간 쓰촨성, 간쑤성, 칭하이성, 그리고 티베트 자치구에서 티베트인과 후이족 간의 충돌이 수십 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보도되지 않습니다. 중국 국영 언론은 소수민족이 중화민족으로 화합해 산다는 공산당의 주장에 반하는 어떤 것도 공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런던에 거주하는 티베트 학자이자 이 주제에 대해 저술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앤드류 M. 피셔는 티베트 망명 공동체 역시 티베트의 국제적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사건을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고 말했습니다. 피셔는 "이것이 바로 티베트 민족주의의 어두운 면"이라며 "티베트인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분노를 또 다른 취약한 소수민족에게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불교 신자인 티베트인들은 동물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고기를 먹고 모피를 입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축과 가죽 가공은 무슬림 정육점 주인과 가죽 세공업자에게 맡깁니다. 무슬림들은 또한 많은 식당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한족들이 발을 들여놓기를 꺼리는 외딴 티베트 지역에도 진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라 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은 티베트 문맹 유목민들로부터 물건을 구매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티베트인들은 후이족만큼 사업 수완이 좋지 않아요. 티베트인들은 후이족에게 물건을 팔아야 하고, 후이족은 티베트인들에게서 사야 하죠." 칭하이성 출신의 티베트인 의사 겐가 자치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반감을 갖는 것 같아요."
출처

티베트인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두 민족이 함께 분포하는 칭하이성에서는 폭력사태가 자주 벌어질 정도이며, 칭하이성에서 후이족 군벌 마부팡을 재평가하고 기념하는 움직임이 나오자 티베트인이 대거 반발하고 나서기도 했다.#[66] 이는 티베트 자치구에서도 예외가 아니라 2008년 티베트 봉기 당시 후이족도 한족과 마찬가지로 티베트인 시위자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당시 후이족들이 영업하는 식당과 상점 및 마스지드가 봉기의 타깃이 되어 라싸의 마스지드에 방화까지 일어났을 정도.

한 편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에서나 티베트인들은 술꾼으로 악명이 높은데, (티베트인 남성 중 25.4%가 알코올 의존증 환자로 조사되었던 바 있다. 세계 평균은 2.6%...) 중국 서부의 후이족들은 독실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은 데다가, 음주를 금기시하는 이슬람 교리 특성상 음주를 상습적으로 하며 성격도 드센 티베트인들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본다. 한 편 티베트인 중에서 이슬람 교리에 관심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적다 보니 후이족들이 인육을 먹는다는 근거 없는 괴담이 성행하기도 했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전 티베트 사회에서는 까체족이라 불리던 카슈미르 출신 무슬림들이 사회 각 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의 입지는 과거 중부유럽 일대의 유대인(헝가리 유대인이나 폴란드 유대인 등)의 그것과도 무척 유사하였다. 중세 신분제 사회가 유지되던 구조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외부인이 신분제 사회의 중간 간극을 메우는 형태의 그것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합병 과정에서 상당수의 까체족들이 인도나 파키스탄 방면으로 피신하였고, 1959년 티베트 봉기 와중에는 티베트인들이 이슬람 사원을 방화하고 까체족들을 마구 구타하는 일마저 발생했다. 해당 상황 관련하여 인도 정부는 티베트 내 카슈미르인들은 인도 국민으로 인도 측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주장하였고, 국제 사회는 해당 문제에 있어서 인도 편을 들어주었다. 까체족 절반 이상이 인도 시민권자로 인정받아 인도로 이민하게 되었다.[67] 티베트 사회에서는 무슬림들은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기피하는 가죽 가공이나 도축업은 물론, 티베트 유목민들이 익숙하지 않은 상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었다. 이들이 빠져나가면서 생긴 빈자리는 중국 본토에서 이민 온 후이족들이 채웠다.
현지 티베트인 가이드는 티베트에는 중국인 무슬림(후이족)만 있을 뿐, 티베트인 무슬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연구를 통해 라싸에 300년 넘게 무슬림 공동체가 존재해 왔고 여러 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티베트인 무슬림들이 티베트 문학, 문화, 정치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 라싸에 거주하는 티베트 무슬림은 1,000명이 넘었지만, 영구 거주하는 5,000명의 중국 무슬림 후이족(그리고 여름철에 장사를 하러 오는 후이족들은 이보다 두 배는 더 많다)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라싸의 사라진 과거 / David G. Atwill[68]

8. 중국 당국의 이슬람교 규제

이렇게 중국화된 후이족이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당국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후이족에게도 전파될 것을 우려한다는 명목으로, 종교 통제를 더욱 강화한다고 한다. 사실 중국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이래 이슬람교가 기독교나 불교보다 딱히 더 큰 탄압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다에쉬 등이 주동이 된 이슬람 극단주의로 인해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악화되자, 인도나 미얀마 같은 국가들 비서구권 국가들은 인권 문제 비판을 피하면서 무슬림 소수자들을 동화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무슬림들에게 더 억압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우도 미얀마처럼 극단적인 수준은 아닐 뿐이지, 통제가 강화된 계기 자체[69]는 다르지 않다.

일단 닝샤의 여러 곳에서 아라비아풍 모스크를 철거하고, 이를 중국 전통 양식으로 다시 짓게 했으며,[70] 춘절 기간 동안 아동에 대한 이슬람교 종교 교육을 금지한다고 한다.# 후이족이 위구르족이나 다른 중앙아시아 이슬람계 민족보다 중국화가 되어 있고 정부와 갈등도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청 말기에 반란이 있기도 했고 최근 뜨거운 감자인 위구르족과 같은 종교를 믿는 점도 있고 해서 그런지 중국 지배층의 전폭적인 신뢰는 얻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애초에 후이족 뿐 아니라 최근 중국 정부가 최근 소수민족들에 대한 동화(한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관측이 있다.

시진핑 집권 이래 닝샤에서는 "불법적으로 증축된" 20여 개의 모스크가 철거되었다고 하지만 웨이저우에 세워진 대모스크는 후이족의 항의 및 서방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법에 어긋난 부분만 철거하는 쪽으로 행정조치가 내려졌다고 한다.# 물론 위에도 말했듯이 중국 정부는 이슬람교 건물만 콕 집어 탄압하는 것은 아니고, 기독교나 불교 건축물들도 정부 지침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철거하는 등 종교가 당보다 우선시될까봐 매우 경계한다.#

위와 같이 후이족은 청말에야 중국에 온전히 편입되어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있는 위구르족과는 달리 한족화된 중국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전 중국에 골고루 퍼져있기 때문에 분리운동을 벌일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후이족에 대한 종교 규제도 다른 종교와 비슷한 수준이다.

위구르인에 대한 중국에 직접적인 종교 탄압에 비하면 후이족에 대한 종교 규제는 약하다. 위구르인은 성지순례 허가를 받기 대단히 힘들지만, 후이족에게는 성지순례를 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다. 일부 신앙심 강한 후이족들은 중국 정부에 위구르인들의 성지순례 권리를 보장 및 확충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오히려 후이족이나 위구르인들을 배려하는 형태의 규제를 했던 경우도 있는데, 2007년 이른바 황금 돼지의 해 당시 중국 정부에서 자국 내 무슬림들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돼지가 등장하는 광고들을 제한했던 바 있었다.#1#2#3 비슷한 규제는 2019년에도 실시되었던 바 있다.

이 외에도 대학교의 경우 유학생 및 소수민족들을 고려하여 반드시 별도로 할랄 음식을 판매, 배식하는 시설이 배치하도록 법으로 정해놓았다. 대학교 구내 할랄 식당들은 중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며, 조리 및 식기 세척 장소가 여타 비할랄 급식시설 및 식당과 완전 분리되어 있다. 초중고교의 경우 할랄 급식이 안 되는 곳이 더 많지만 대학의 경우는 무조건 할랄 급식 시설이 이슬람 율법에 완전히 맞게끔 법으로 못박아놓았는데, 국가 무신론을 주장하는 중국 정부에서 외려 서구권보다 무슬림 소수자 학생들의 급식권을 더 신경을 써줄 정도로[71] 후이족들이 입지가 탄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중국 내 이슬람 관련 유화나 배려 정책은 덩샤오핑이나 후진타오 시절 이루어졌던 정책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을, 시진핑 정권은 자국 내 무슬림들의 권익을 점차 축소시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9. 둥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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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판데이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을 판데이(Panthay)라고 부른다. 이들은 윈난성의 후이족들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때는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중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19세기 버마로 세력을 확장하던 영국은 버마인들로부터 중국계 무슬림들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윈난성의 후이족들도 판사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원나라 시절 윈난성을 다스리던 부하라 출신 사이이드 아잘 샴스 알딘(赛典赤·贍思丁)이 같이 온 식솔들을 포함한 무슬림 이민자들과 함께 오늘날의 쿤밍에 해당하는 지역에 모스크를 세우고 이슬람을 포교하였다. 한 편으로 샴스 알딘은 불교 사찰 역시 재건하고, 송나라의 농업 기술을 윈난성에 도입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아잘의 사후 동생 후세인(忽辛), 아들 나스룻딘(納速剌丁; Nasr ad din) 역시 윈난성을 다스렸으며, 중국과 미얀마,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확대, 개척하였다. 판사이는 미얀마어로 :페르시아인"을 의미한다.

쓰촨성버마를 육로로 직접 연결하는 무역로는 전한 시절에도 존재하긴 했으나 원주민들의 무관심으로 규모와 수익이 적어 주목받지 못했다. 원나라 때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무슬림들이 도래하고 나서야 유의미한 규모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 판데이(Panthays)는 버마와 중국 쓰촨성을 잇는 무역로를 개척한 원나라 무슬림들의 후손이다. 이들 중 일부는 태국 북부 치앙라이로도 이주했는데, 오늘날 치앙라이의 중국계 인구 중 3분의 1이 윈난성 후이족 출신 무슬림이라고 한다.

원명 교체기 명나라가 윈난성에서 원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이 과정에서 윈난성의 후이족들은 명나라에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하였는데, 이렇게 포로가 된 대표적인 인물로 정화가 있다. 명나라는 바이족과 나시족의 갈등을 이용하여 윈난성의 대리국 복원 시도를 무력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원나라 때 무슬림들과 통혼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부 바이족들도 바이어 대신 중국어를 사용하며 다른 후이족들과 동화되었다.

1853년 윈난성에서는 한족 광부들과 후이족 광부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후이족 수천여 명이 학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후이족들이 1855년 두문수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한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할아버지 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이족 출신 두문수는 소수민족 바이족나시족의 갈등을 이용하여 바이족을 봉기에 끌어들인 뒤 봉기 참여자를 늘렸다. 후이족 봉기군들은 1856년 대리를 점령하고 평남국을 건국하였으며 두문수는 술레이만 술탄이라는 아랍어 이름으로 즉위했다. 평남국 군대는 윈난성의 성도 쿤밍을 두고 청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간쑤성과 산시성에서 일어난 반란이 한족과 후이족 사이의 무차별 학살극으로 비화되었던 것과 다르게, 평남국에서는 반만흥한의 기치를 내세우고 한족과 후이족을 아우르는 중원인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한족과의 화합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두문수는 버마를 통해서 영국에 평남국을 국가로 인정할 것과 평남국을 원조할 것을 요청하지만, 평남국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파악한 영국에서는 지원을 거절하였다. 1872년 대리가 함락되자 두문수는 음독자살하고 74년부로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버마를 통해 두문수의 난 관련 소식을 듣던 영국은 이 사건을 Panthay Rebellion(판데이 반란)이라고 칭했다. 이후 얼마안가 1886년 영국은 미얀마를 병합하여 영국령 인도 제국에 편입시키고, 판사이들의 무역을 제한하였다.

중일전쟁이 벌어지면서 무슬림들이 윈난성과 미얀마를 잇는 무역 루트는 미국과 영국의 군수물자가 중국으로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 윈난성의 후이족 사회에서는 일본 제국에 대한 지하드를 선언하고, 이맘들은 중국 애국주의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나서 벌어진 국공내전 전후하여 국민당 잔당들이 해당 루트를 이용하여 중국을 탈출하기도 했다.
900명의 이름을 새겨둔 순교자 기념비에는 아랍어와 중국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문화 대혁명을 이끈 4인방의 극좌적 오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 사단의 출발은 1968년 12월이다.

윈난성 혁명위원회에서 인민해방군 1000명을 샤디엔(沙甸)에 파견했다. 일종의 '하방'이었다. 혁명열에 불타는 붉은 전사들은 이슬람을 믿는 촌민들을 무시하고 적대했다. 모스크를 숙박 시설로 삼아 기거했고, 촌민들에게 돼지 사육을 강요했다.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돼지고기를 먹고 남은 뼈를 마을 우물에 버리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경멸이고 치욕이었다.

격분한 신도들이 쿤밍에 있는 성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도리어 탄압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반혁명 폭동을 진압한다며 더 많은 군인들을 파병했다. 비극의 절정은 1975년 7월 29일이다. 새벽 3시부터 무차별 포격과 총격이 개시되었다. 소총만이 아니라 대포까지 동원되었다. 삽시간에 불바다와 피바다로 변했다. 거의 모든 집과 모스크가 붕괴되고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7700명 주민 가운데 900여 명이 사망했음이 공식 기록이다. 그러나 사후에 병사한 이들까지 합하면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어쩌면 그리도 잔혹했을까. 혁명의 맹목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쿤밍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동아시아를 갈라놓았던 분단 체제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분열과 적대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윈난성 당국은 냉전기 내내 미얀마에 남아 있는 국민당 잔당의 침투를 경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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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태국에 거주하는 후이족들의 후손들 중 현재도 이슬람을 믿는 인구는 양국에 각각 7~8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미얀마의 판데이들의 경우 미얀마 내 국민당 잔당이 대만으로 돌아갈 때 상당수가 합류하면서 오늘날에는 소수만 남아있게 되었다.

11. 냉담자 / 비무슬림 후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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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안저우의 마스지드 유적. 현재는 관광지화 되어 있다.

청나라 때 후이족이 상당한 탄압을 받았던 데다가, 현대 중국은 강력한 세속국가이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떠난 후이족도 많다. 남부 해안지방, 특히 푸젠성취안저우, 광둥성광저우 등의 후이족들은 아랍계, 페르시아계 무슬림을 선조로 하는 족보도 가지고 있지만, 이슬람권인 중앙아시아와 접하고 있는 서북지역의 후이족들과는 달리 명대 이래로 서양세력이 해상교통로에서 우세해지면서 이슬람권과는 단절된 연유로 이 지역 후이족들은 현재는 냉담자 성향이거나 이슬람교를 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서북의 후이족들이 이들에게 다시 이슬람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이맘을 여러 명 파견했지만 이들을 재이슬람화하는 데 실패하고 돌아갔다고.

후이족의 기원과 관련한 후이족과 한족 양측의 구전 전승은 역사적으로는 상당히 부정확하지만, 후이족 일부가 이슬람을 버리고 완전히 한화한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해 준다.

후이족 측 전승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악한 정령들을 몰아내달라는 당나라 황제의 부탁을 받아 360명의 교우를 파견했으며, 중국에 도착한 무슬림들은 환영을 받으며 장안 근교에서 살게 되었다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자손이 점점 늘어나자 중국 황실은 불편함을 느끼고 이들을 변경 지대로 추방했다는 것이다. 정작 쿠란과 하디스에서는 중국에 대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므로[72] 해당 구전 전승은 이슬람계에서 가짜로 분류하고 있다. 즉, 해당 구전 전승은 중국에 정착한 후이족 상당수가 자신들의 정확한 기원을 잊어버렸으며, 이슬람권에서 심각한 중죄에 해당하는 하디스 날조가 이루어졌음에도 상당수가 이를 인지조차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족 측 전승에 의하면 수천여 명의 무슬림 군인들이 중국 황제의 요청으로 중국에 와서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한다. 반란을 진압하고 임무를 완수한 이후 무슬림 군인들은 중국에서 돼지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 일이 알려져서 고향에 돌아가면 해코지를 당할까 봐 두려워졌고, 결국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해당 구전 전승은 한족 입장에서 다소 희화화되어 왜곡된 묘사이긴 하지만 비무슬림 후이족들의 기원과 관련하여 정곡을 찌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73]

일단 이들은 민족상 후이족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다수민족인 한족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들은 민족 등록을 바꾸지 않고 있는데, 이는 소수민족이면 소수자 우대정책으로 여러 혜택, 특히 대학입학 및 계획생육정책 면제 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1982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후이족으로 민족을 바꿀 수 있었지만, 이후 이런 혜택을 노린 개종이 늘어나자 법률이 개정되어 불가능해졌다.

중동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승도 있다. 한 무슬림 철학자가 공개적으로 무신론을 선언하면서 십자가형에 처할 위기에 처하자, 멀리 중국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벼슬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사대부들은 천국과 지옥 등을 불신하던 입장이었던 반면, 중세 유럽과 중동에서는 공개적으로 무신론자임을 천명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74][75]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보면 당시 중동에서 송나라로 온 사람들 중 독실한 무슬림과는 반대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대식국(大食國)은 본디 페르시아(波斯)의 별종이다. 수나라 양제 시절 페르시아에 걸힐(傑黠)한 자가 나타나 동굴에서 글자가 써 있는 돌을 찾아낸 다음 이를 길조라 여기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재물의 약탈을 일삼다가 무리의 숫자가 점차 많아지자, 마침내 자립하여 왕이라 하고 페르시아의 서쪽 지역을 점거하였다.번역출처

전근대 무슬림 사회 출신 무신론자, 이신론자, 불가지론자들 입장에서는 중국으로 이민, 정착하는 게 매력적인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에 정착한 독실한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 후손들 중에서도 냉담자 성향인 사람들은 하나둘씩 기존 종교를 버리고 그냥 이웃해 사는 여타 중국인처럼 살더라도 별다른 불이익이 없었다.

현재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기독교나 불교로 개종한 후이족도 종종 보인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중화민국 시절 장군이었던 백숭희의 아들인 백선용(바이셴융)[76]은 나름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불교를 믿는다.[77] 후이족 내부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후이족에서 제외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한 바 있고, 중국 정부에서도 이슬람교를 떠난 자의 민족 분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한 듯하다. 하지만 "민족"을 종교가 아니라 혈통에 근거해 분류한 헌법 문제가 얽혀있어서, 일단 선대에 후이족이었으면 그 자손도 후이족이라고 분류하는 듯.

대만의 경우 국공내전 이후 피난 온 후이족과 위구르인 등의 후손 약 6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완전히 세속화하고 상술한 것처럼 아예 다른 종교로 개종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대만의 후이족들은 오늘날 대만 내 인도네시아인 무슬림 이주노동자들[78]과 가깝고도 먼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12. 우츨족 / 바바 뇨냐

중국 하이난성에도 후이족으로 분류되는 민족이 있다. 바로 우츨(utsul)족이다. 이들은 이슬람을 믿던 참족 난민의 후손이라 대만 원주민과도 같은 계열이다. 다른 후이족은 중국티베트어족중국어를 쓰는 데 반해 이들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 찻(tsat)어를 쓴다. 무슬림인 것 말고는 겹치는 점이 없음에도 후이족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오리지널(?) 후이족과의 대립이 좀 있다. 후이족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영향으로 수니 하나피파에 속하지만 이들은 베트남의 참족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동남아 샤머니즘과 결합된 형태의 이슬람을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2020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정부소수민족 탄압이 심해지면서 우츨족들도 타깃이 되었다. 하이난 섬의 우츨족 공동체가 중국 정부의 타깃이 되면서 종교 탄압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지기 전에는 주석 광산에 일하러 온 중국인 노동자 남성과 말레이인 여성이 결혼하면서 중국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을 바바 뇨냐[79]라고 불렀다.[80] 그러나 20세기 들어 중국인과 말레이인 사이의 상호 갈등이 증가하면서, 중국인이 말레이인과 통혼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는 예외적인 일이 되기 이른다.

화교 중에도 물론 후이족 인구가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생각보다는 후이족 인구 수가 적은 편이긴 하지만 이슬람 국가인 이유로 나름 영향력이 있으며,[81] 미국의 LA와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 타운에도 후이족 화교들이 다른 화교들과 같이 어울려 산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후 말레이인의 정의를 “말레이 인종에 속하며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라고 못을 박아버리기 이른다. 말레이계 유명 인물 중 후이족 조상을 둔 사람들이 꽤 있음에도, 오늘날 말레이시아 내 후이족들은 일단 불교, 기독교를 믿는 다른 중국계와 구분 없이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분류된다.[82] 즉, 부미푸트라 정책에 따른 차별이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전근대 후이족 사회에서는 이슬람 교리와 성리학을 비교분석하고 융합하려는 시도가 활발했었다. 화교 인구와 말레이 무슬림 인구가 어울려 사는 말레이시아에서 이 점에 착안하여, 1997년도 이슬람 교리와 유교 사상의 공통점을 긍정적으로 비교 검토하는 세미나를 개최했던 적이 있었으나, 중국과 이슬람권 국가들 양측 모두로부터 부정적인 반응만 얻었던 바 있다. 유교와 이슬람 신학을 조합하려는 시도는 옛날 중국에 살던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나름 실용적인 공부일 수는 있지만, 오늘날 기준으로는 유교 탈레반이라는 신조어가 한국에서 유행하는 것에도 보듯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전근대 유교사회의 악습' + '이슬람 근본주의'의 콤비네이션이 연상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말레이시아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후이족들이 종교 원리원칙보다는 경제적 실리를 더 중시하는 상당히 세속적인 무슬림들이라는 이미지가 퍼져 있다고 한다.[83] 이는 중국 남부 해안 지방의 후이족들 상당수가 더 이상 이슬람을 믿지 않고 사실상 한족과 완전 동화된 상태인 이유도 있다.

말레이시아 무슬림들은 거의 대부분 수니 샤피이파로 같은 수니파이지만 하나피파에 속하는 후이족들과 율법과 관습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말레이시아 내 후이족들은 편의상 샤피이파 모스크에서 예배를 드리며 샤피이파 율법을 따른다. 현재 말레이시아 내 중국계 무슬림 인구는 4~5만여 명에 달하는데 이들 중 조상이 후이족인 경우는 2천여 명에 불과하다.#

13. 인물

혼혈인의 후손들이라 피지컬이 좋은지, 후이족 중에 축구인들이 많다. 연예계에도 후이족이 상당히 많다.

13.1. 원나라 & 명나라

  • 고극공(高克恭) 원대 화가. 오늘날 카자흐스탄 출신. 한자어 이름만 남아 원래 종교나 이름이 뭐였는지는 불명.
  • 데르비시(迭里彌實) - 원명 교체기의 장수. 야구 선수 다르빗슈와 이름 어원(Darvish; 수피 수도승)이 같다.
  • 마귀(명나라) - 정유재란 당시 명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참전하였던 명나라 만력제 때의 장군. 마귀의 4대손 마순상(麻舜裳)이 조선에 귀화하여 상곡 마씨(上谷 麻氏)의 조상이 되었다. 상곡은 중국 허베이성에 있는 지명이다.
  • 사둘로(薩都剌; Sadulo) - 원나라의 시인
  • 사이드 아잘 샴숫딘 우마르(赛典赤·贍思丁) - 원나라 시대 윈난성을 개발한 대신. 부하라 출신으로 아잘이 데려온 가족들과 같이 온 무슬림 이민자들이 중국과 미얀마 사이의 육로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그의 동생 후세인(忽辛), 아들 나스룻딘(納速剌丁; Nasr ad din) 역시 윈난성을 다스렸으며, 이들이 오늘날 윈난성 및 미얀마의 중국계 무슬림 판사이의 직계 조상이다.
  • 아미룻딘(亦黑迭儿丁; Amir ad din) - 원나라 황궁 건설을 지휘한 건축가로, 부하라 출신
  • 아합마(阿合馬; Ahmad) - 중국사 최악의 탐관오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로, 원나라 내에서 강남(중국)한족유교를 적대하는 입장이라 기록이 안 좋은 쪽으로 과장되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서는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서는 그가 엄청난 부자에 아들만 25명이라고 기록되었다. 굳이 출신을 따진다면 카라 키타이 출신으로 고향은 시르다리야 강 유역 파나카트(오늘날 타지키스탄에 해당)이다. 한국사 관련해서는 충렬왕 당시 고려인 공녀를 요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 알라웃딘(阿老瓦丁; A’la ad din) - 페르시아 출신 포로로 원나라의 송나라 공략 때 회회포를 개발, 운용하였다.
  • 애설(愛薛 1227-1308) - 원나라의 십자회회(기독교인)로 네스토리우스파 사제이다. 원나라의 이슬람 박해를 주도하였으며, 이븐 시나의 의학 서적을 “회회요법”이라는 책으로 한역하였다.
  • 이스마일(亦思馬因; Ishmail) - 위에 알라웃딘과 마찬가지로 원나라 회회포를 개발, 운용하였다.
  • 이탁오 - 명나라 후기의 유학자이자, 당대의 괴짜. 분서라는 책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책을 태운다는 뜻의 분서 맞다. 자기 책을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불살라 버려야 한다'고 말했던 데서 노리고 지은 이름이라고. 이 사람이 쓴 <분서>에는 남녀평등과 같은 진보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탁오가 무슬림 종족인 후이족 출신이고, 오늘날의 이슬람교 국가들에서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실로 시대를 앞서나간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400년 전 사람보다 사고방식이 후진 근본주의자들
  • 자말룻딘(扎馬剌丁; Jamal ad-din) - 부하라 출신 천문학자로 훌라구쿠빌라이 칸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원나라로 올 때 혼천의, 지구의, 천문관측의를 들고 왔다 한다. 이 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역법(알마게스트)을 전수하고 천문대를 설계했다. 이후 명나라 홍무제 시절에는 자말룻딘이 전수한 이슬람력알마게스트를 바탕으로 회회력이 제정되어 조선 칠정산에 영향을 주었다. 회회력과 자말룻딘이 설계한 천문대는 청나라 치세 18세기 초까지 활용되었다 한다.
  • 정학년(丁鹤年) 원말명초 색목인 출신으로 전란 와중에 피난 다니면서 절에서 동자승으로 살았다 한다. 명나라에서 유학자로 활동했으며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 정화(명나라) - 아버지가 원나라 조정에서 근무한 후이족으로서 명나라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세당했으나, 영락제의 명을 받고 환관임에도 대규모 해양 원정을 지휘하였다.
  • 포수경

13.2. 청나라 & 중화민국

  • 두문수 - 청나라 시절 윈난성의 후이족으로 판사이의 난을 일으켜 평남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술탄을 자칭했으나 진압 당하고 자살했다.
  • 마린(1873)
  • 마명심(무함마드 아민) - 중국 자흐리야 수피 교단의 시조. 메카와 예멘에서 유학한 이후 간쑤성[84] 일대에서 자흐리야 교단을 선교하다 기존의 쿠피야 수피 교단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막판에 청나라 조정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다 처형당했다.
  • 마부칭 - 서북후이족 군벌. 마부팡의 형으로 마찬가지로 대만으로 도피.
  • 마부팡 - 중화민국의 서북후이족 군벌로 장제스에 복속하여 홍군을 공격하다가 전세가 역전되자 대만으로 도망갔다.
  • 마신이
  • 마젠(馬堅) - 표준 중국어로 쿠란을 번역한 인물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출간, 배포하는 쿠란의 중국어판 번역본도 마젠의 번역본이다.
  • 마중잉 - 서북후이족 군벌로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되는 신장성까지 자신의 영지를 확장하려다가 한족 군벌 성스차이와의 갈등을 벌였다. 소련에 갔다가 (혹은 잡혀갔다가)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 마치(1869)
  • 마화룡(馬化龍) - 청말 간쑤성, 섬서성에서 대규모 회민반란을 이끈 자흐리야 수피 교단 지도자. 이름의 뜻은 “무함마드(馬)가 용이 된다(化龍).”는 의미가 된다. 간쑤성과 내몽골, 베이징을 연결하는 상권을 장악한 후 화기를 충분히 마련한 후에 1862년 봉기하였다. 이후 내몽골 장악을 목표로 하여 10여 년간 청군과 전쟁을 벌였으나 진압군을 이끈 좌종당에게 1871년 체포되어 능지처참 당했다. 그의 휘하 녹영대장 18명 중 11명은 좌종당에게 투항 후 벼슬을 받았고 6명은 전사했으며 나머지 한 명 백언호는 러시아 제국 영토로 피신(둥간인 항목 참조)하였다.
  • 마훙빈 - 서북후이족 군벌, 다른 마씨군벌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에 투항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체제에서 간쑤성 부성장에 올랐다. 마홍쿠이와 사촌이다.
  • 마훙쿠이 - 서북후이족 군벌. 마찬가지로 장제스에 충성을 바치다가 대만으로 도피.
  • 바이충시 - 중국의 군인 광서계 군벌의 거두. 아래의 마씨와는 달리 남부에서 활동했고 번번이 장제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 백언호

13.3. 현대

14. 참고 문헌


14.1. 한국어 문헌

  • 이슬람 - 교리, 사상, 역사 / 손주영
  • 이슬람 문명 / 정수일
  •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저, 신연성 역
  • 중국 소수민족 연구: 소수민족으로 분석하는 중국 / 정재남
  • 황하에서 천산까지 / 김호동

14.2. 영어 문헌

  • Beyond the Pass: Economy, Ethnicity, and Empire in Qing Central Asia, 1759-1864 / James A. Millward
  • Familiar strangers: a history of muslims in northwest china / Jonathan Lipman

14.3. 아랍어 문헌

1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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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사상 중화사상 | 중화민족론 | 파일:티베트 국기.svg 티베트 독립운동 }}}}}}}}}



[1] 명나라때 지어진 모스크다. 중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모스크로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퉁신현에 있다.[2]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후이족의 일파 둥간족.[3] 대만에도 후이족 5만 3천여 명이 산다.[4] 간쑤 성 린샤 시는 후이족 비율이 50~60%로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주부인 인촨보다도 높아서 중국의 작은 메카라는 별칭이 있다.[5] 관혼상제, 채무민사재판은 샤리아를 적용하고 형사재판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기초한 형사법을 따른다.[6] 다만 중국의 종교 법규상 정부가 승인한 교육 기관 외의 학교에서는 종교 행사, 종교 과목 개설, 전도와 신앙 강요 등을 엄격히 금지한다. 후이족은 이따금씩 이러한 규정을 무시하며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위구르족과 달리 분리독립을 추구하지 않고 중앙정부에 협조적이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가 묵인하는 것이지 만약 위구르족이 이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면 바로 천안문 사태 시즌 2였을 것이다.[7]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8] 절대다수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다.[9] 교리상 유대인들은 머리를 가려야 하는데 귀하게 여기는 테헬렛 색 모자를 많이 써서 붙은 이름이다.[10] 중국유대인의 대다수는 송나라의 옛 수도인 카이펑시에 정착하여, 카이펑 유대인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11] 킵차크 칸국은 몽골족이 동슬라브족을 복속하고 세운 나라라서 몽골계, 튀르크계 지배층이 동슬라브족과의 혼혈로 백인화되었다.[12] 원래는 무슬림들끼리만 결혼하기도 했으나 명나라 때는 강제로 결혼시켰다.[13] 혈통적 동질성은 둘째 치고, 후이족들이 당나라 시절부터 거주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14]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집에서 몰래 코란공부를 하다가 덩샤오핑이 집권 한 이후부터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메디나로 유학해서 이슬람과 이슬람 서예를 공부했고, 메카를 세 번이나 갔다 온 독실한 신자이다.[15]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보수적인 근본주의 수니파 무슬림들은 후이족들의 조상숭배를 시아파 무슬림들의 성인숭배 및 성화숭배와 더불어 우상숭배라고 까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나,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우상숭배와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메카 방향으로 기도하는) 주류 이슬람의 주관적 관점에서는 신성을 부여하지 않는 정도의 일반적인 숭상으로 간주하는 듯하다.[16] 아랍어로는 까딤(قديم)파로 오래된 분파라는 뜻이다.[17]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과 그 외의 소수민족.[18] 한 한국인이 후이족 친구와 같이 피자를 시켜 먹었는데 소시지만 따로 떼어내고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다. 원리원칙대로라면 돼지고기가 닿은 음식은 버리거나 아예 사먹지 말아야 하지만, 비무슬림 친구와 같이 밥 먹을 때 이런 걸 너무 따지면 친구가 불편해할까 봐 그런 것. 다만 만약에 같은 후이족들이 이렇게 먹은 걸 알면 핀잔을 좀 들을 수 있다.[19] 음식 자체보다는 포획, 도축, 정육과정에서 인간에게 전파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중국 요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중국 요리에서는 날것은 먹지 않고 고열에서 조리된 것을 먹기 때문에 음식으로부터 바이러스를 섭취할 가능성은 의외로 낮다. 다만 일부 남방 지방에서는 드물지만 민물고기나 뱀 따위를 회로 먹는 경우도 있기에 먹으면서 감염될 가능성도 드물게나마 존재한다. 실제로 중국발 전염병들을 살펴보면 중국 남부 지방에서 발생한 게 적지 않다.[20] 다만 후술할 둥간족은 무슬림이면서도 어느 정도 술에 관대한 튀르크 제민족(특히 카자흐족과 키르기스족)과 국가 무신론을 추구했던 소련의 영향으로 그냥 술을 마시기도 한다.[21] 위구르인에 동화된 카자흐, 키르기스인들로 청나라 시절 우루무치 시 인구의 상당수를 구성했다.[22] 예배모라고도 불리며, 딱히 색깔 제한은 없지만 후이족은 주로 흰색 회회모를 선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위구르족은 다양한 색깔과 문양이 있는 모자를 착용하며 짙은색이 많다.[23] 중국에서는 바오터우진(包头巾:포두건)이라고 한다. 역시 후이족은 흰색을 선호.[24] 대만의 경우 일본의 영향으로 씻는 문화가 발달했다.[25] 다만 같은 한족이라도 싱가포르는 후이족처럼 이슬람교가 주류인 말레이인의 영향으로 청결함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하다.[26] 이것은 무슬림의 관습이 아니라 원래 이집트 상형문자에도 기록될 정도로 이슬람 이전부터 유행하고 있었고, 아프리카-중동으로 퍼져나간 악습이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기독교-이슬람교를 불문하고 시행되고 있다.[27] 에드거 스노우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보면, 마훙쿠이는 중국 전역을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직접 맞선을 보고 결혼했다고 한다.[28] 실제 통계를 보면 회족 중 마씨는 대략 30% 정도이다. 십회삼마[29]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보면 중국에 정착한 무슬림 상인들이 대체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 평판도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30] 박해를 받던 무함마드 그리고 무슬림들의 메디나 이주.[31] 같은 맥락에서 후이족들 사이에서 중국에 최초로 이슬람을 전파한 사람이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라는 전승도 있으나, 수나라 치세와 연대가 맞지 않는다.[32] 이들과 연관이 깊은 인도의 파르시들의 유전자를 조사해 본 결과 부계 Y-DNA는 대부분 이란에서 기원한 것으로 나왔으나 모계 mtDNA는 6% 정도만 이란에서 기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페르시아인 입장에서 인도보다도 중국이 훨씬 더 이동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중국에 정착한 페르시아인과 아랍인의 성비불균형은 인도에서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33] 다만 신라인들과 발해인들이 빈공과를 거의 휩쓸다시피 한 것과 다르게 아랍-페르시아계 빈공과 합격자는 한두 명 정도였다.[34] 오늘날 아랍어에서는 Shay라고 발음함.[35] 9세기 무렵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무역 상인들의 구술을 편집, 기록한 책.[36] 오만 동북부에 위치한 알 핫드 서안의 수르 항 인근을 가리킨다.[37]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서안의 알 카티프[38] 당나라 항구 도시에 정착했던 신라인 공동체도 한화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해상 무역 패권은 다시 중국인들이 장악했다.[39] 하단의 비무슬림 후이족 항목 참조.[40] 술루 술탄 파두카 파할라가 영락제에게 조공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가 대운하를 따라 귀국하던 도중 덕주에서 병사하자, 영락제는 왕의 예에 걸맞은 무덤을 조성하게 하였고, 현지 후이족 무슬림들에게 파두카 파할라와 그 유가족을 돌보게 하였다. 각각 안씨와 문씨를 하사받은 두 왕자들은 일대에 정착하였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더저우에 거주하며 능을 지키고 있다.[41]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42] 이 두 사람은 라시드 앗 딘에 저술 등에 교차검증 가능. 여담으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회회포를 직접 개발했다고 허풍을 떨었던 바 있다...[43] 페르시아어 "파이감바르"의 음차. 예언자라는 뜻이다.[44] 영락제의 해상 원정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후이족 정화(명나라)도 쇄국 정책에 의해 기록의 상당수가 말소되었다.[출처:] Late Imperial Chinese Army, Men at Arms. Osprey[46] 원나라 때 쿤밍을 건설하면서 절 한 채와 모스크 두 채를 건설했다.[47] 수피 스승이 죽은 이후에도 이른바 "황금 사슬"을 이용해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티베트 불교의 비장(秘藏)문헌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다른 수피들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고행을 하는 것과 다르게 낙슈반디야 교단은 수피 교단주가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샤리아를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와 유사하다. 다른 불교 종파에서는 승려들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고행을 하는 것과 다르게 겔룩파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정치적으로도 최고지도자 자리를 겸하였다.[48] 해당 교단의 대표적인 유명 수피 중 하나였던 호자 아흐라르는 전승에 의하면 의사들이 불신자 그리스인들이나 이단 무타질라파나 이스마일파의 사악한 기술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의사들의 치료를 거부하고 하디스에 나온 민간요법만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했다.[49] 조용히 지크르를 암송하는 교단이라는 뜻이다. 크게 소리내어 지크르를 하는 교단이라는 뜻의 자흐리야 교단과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다.[50]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튀르크계 주민들이 거주하던 타림 분지 일대[51] 준가르족을 몰아낸 후 팔기군 가족과 후이족, 위구르인 농부들이 식민 사업을 하던 북부 초원지대[52] 영어권에서는 간쑤, 섬서의 후이족 반란과 신장의 야쿱 벡 정권 성립을 묶어서 Dungan Revolt라고 칭한다.[53] 원나라 때 윈난성으로 이주하여 윈난성과 미얀마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무슬림들.[54] 백언호의 군대는 당시 흠차대신이었던 수완구왈기야 싱포의 군대에 승리하기도 했다.[55] 물론 전란으로 과하게 세금이 부과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현대와 완전히 동치시키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56] 이들의 후손을 둥간족이라고 부르며, 오늘날에도 백언호를 따라 카자흐스탄 일대에 정착한 둥간족 후손들은 심지어 오늘날 21세기에도 여성들이 청나라 전통 여성 복식을 고수할 정도로 매우 보수적인 성향의 이슬람 신앙을 고수하고 있다.[57] 이슬람 모더니즘은 반수피 개혁 운동을 띠고 있었다.[58] 이란의 호메이니는 위구르 무슬림들에게 중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봉기할 것을 요구하였던 바 있다.[59] 중국 내에서 해외교류가 제한되는 것은 이슬람 뿐만 아니라 정교회를 제외한 기독교 종파들도 마찬가지다. 가톨릭의 경우 교황청의 임명권을 배제한 채, 중국 내에서 독자적으로 국가가 주교를 임명하고 있다. 다만 2000년대 들어와서는 물밑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에 임명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정부가 임명한 중국의 가톨릭 주교들이 아예 교황청의 눈밖에 난 사람들은 아니라는 이야기.[60] 참고로 이 번역본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인증하고 보급하는 중국어판 번역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보급하는 한국어판 번역본은 지나치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다. 비무슬림 전부를 불신자라는 살벌한 단어로 표현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의역이 많다. 다른 한 편에서 보면 부인이 말을 안 들으면 “살짝” 때리라든지, 적의 목을 “때리라”같은 어설픈 번역으로 한국 이슬람계 내외에서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사실상 보급이 중단되었다.[61] 중국은 종교 계열이 주도한 민란으로 나라가 혼란해졌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중국 내 종교들을 빡빡하게 감시한다. 여호와의 증인파룬궁은 중국에서 아예 해체되었다.[62] 다만 2006년 유엔 안보리의 북한 제재에 찬성하였기에 방북 시에 냉대당하였다.[63] 영어권에서 무슬림이나 시크교 신도들을 지칭하는 혐칭 Towelhead와 동일한 뜻이다.[64] 러시아로 치면 볼가 타타르인과 체르케스인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전자가 토착 러시아인과의 타협을 선택한 반면, 후자는 러시아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튀르키예와 연대하려 하고 있다.[65] 중국의 재중 외국인 무슬림 공동체는 중국 정부에 의한 탄압의 대상이 아니다 보니 성지순례가 매우 자유롭다.[66] 이미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전에도 20세기 초반 칭하이성(코코노르) 일대에서는 후이족들이 티베트인들이 살던 구역을 중국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 있다. 이는 티베트 고원 일대가 워낙 생활 조건이 열악하여 한족 중에서 자발적으로 이주를 원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후이족들은 가뭄에 시달리는 빈곤한 지역 출신이 많았고, 과거 이들의 주 거주지 중 하나였던 간쑤성이 코코노르 등 티베트인들의 거주지와도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부팡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칭하이성 일대의 후이족과 티베트인 사이의 갈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67] 인도 측에서는 티베트 불교도나 티베트 뵌교도 난민들은 무국적자로 분류하였던 반면 이들 까체족들은 인도로 망명 즉시 인도 시민권을 부여받았다.[68] Islamic Shangri-La: Inter-Asian Relations and Lhasa’s Muslim Communities, 1600 to 1960의 저자[69] 다에쉬의 준동으로 인한 이슬람 이미지 악화를 소수민족 동화 정책의 기회로 활용[70] 대만, 홍콩, 마카오의 경우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의 자유 때문에 정권을 막론하고 아라비아풍 모스크가 건재하다. 말레이어가 국어이고 말레이계, 인도계, 후이족계 주민들의 이슬람교 신앙이 잘 보장되는 싱가포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가 싹 트기 시작하면 정부가 무슨 정책을 취할지는 모른다.[71] 프랑스와 독일은 할랄 급식이 아예 없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우 무슬림 학생을 배려해서라기보다는, 이주노동자가 급식 만들면 더 저렴하다는 단가 문제로 일부 학교에서 비무슬림 학생들에게도 모두 다 할랄 음식을 먹인다.[72] '중국에까지 가서라도 지식을 구하라'라는 유명한 하디스가 있긴 한데, 셰이크 알 알바니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후대에 창작된 가짜 하디스라고 한다.[73] 단, 한반도나 일본 열도까지는 아니지만 중국 대륙의 존재 자체는 (저 멀리 시니야나 세리카라는 비단 잘 만드는 동네가 있다고 하더라~ 수준이지만) 실크 로드 교역로를 통해서 이미 무함마드 시대 아라비아에도 희미하게 왜곡된 상태로나마 알려져는 있었다. 애초에 수백 년 전의 로마 제국도 한나라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74] 이슬람 황금기 당시 공개적으로 무신론자임을 천명해도 사회적 차별이 없었다는 오해도 퍼져있는데, 이는 진디끄라는 어휘를 오역해서 생긴 바다. 현대 아랍어에서 무신론자를 지칭하는 진디끄는 중세 아랍어에서는 마니교도를 지칭하던 말이었다. 이슬람 황금기 당시 공개적으로 무신론자라고 커밍아웃한 사례는 이븐 알 라완디의 사례가 유일하다시피한데, 임종 직전에야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밝혔다.[75] 서구 사회에서 무신론자들이 따로 제재받지 않기 시작한 시점은 근세 이후 서서히 종교의 자유 개념이 퍼지고 나서이다.[76] 중화민국, 즉 대만 국적이다.[77] 바이충시는 술과 돼지고기를 대놓고 먹기는 했으나, 애국주의 성향의 후이족 이슬람 학자 후쑹산의 영향으로 중일전쟁을 일종의 지하드로 여기고 적극 헌신하던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이충시는 작전 지역에서 도교 사원과 절을 여러 차례 파괴하고 다녔는데, 아들 바이셴융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78] 인도네시아계 대만인 문서 참조[79] 마인어로 각각 baba는 남자, nyonya는 여자를 의미한다.[80] 만약 “한족 무슬림 = 후이족”이라는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말레이시아인 상당수는 후이족 조상을 둔 셈이 된다.[81] 하단의 바바 뇨냐 항목 참조[82] 이점에서는 말레이시아 내 무슬림 타밀족들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들의 경우도 힌두교를 믿는 대부분의 다른 타밀인들과 같이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으로 분류된다.[83] 반대로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둥간족들이 이슬람 원리원칙에 철저한 사람들로 알려졌다. 음주와 흡연이 일상화된 현지 사회와 다르게 중앙아시아 내 둥간족들은 흡연음주 모두 터부시되는 분위기이다.[84] 당시에는 칭하이성과 닝샤까지 포함[85] 수니파 6대 하디스 편집본의 축약 발췌 해석본[86] 마드하브 구분 입문서[87] 출처가 의심되고 신빙성 약한 하디스 구분[88] 탑시르는 쿠란 주해본을 일컫는 어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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