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4 01:07:17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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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함마드 깐수2. 정체3. 근황4. 저서와 역서

1. 무함마드 깐수

1946년역사학자로 이름은 무함마드 깐수(Muhammad Kansu). 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모국어아랍어이다. 원래 국적은 필리핀이었으나 7살 때 레바논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1984년 말레이시아 말레이대에서 있던 중 「동아시아에로의 이슬람 문화 전파사」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준비하다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처음 입국했다. 1984년 4월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공부하다가 그 해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해 1989년 9월 <신라아랍·이슬람 제국 관계사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한국과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인연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할 수 있도록 단국대 측에서 배려를 많이 해 주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눌러앉게 되었다.

동서 문명 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1990년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1994년에는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서 문화 교류사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80년대부터 KBS 3(지금의 EBS) 등의 교양 역사 프로에 고정 자문 위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신문사설도 게재하고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국내 문명 교류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1990년부터는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에도 출강하였다. 그러면서도 매우 연구를 열심히 해서, 항상 밤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공부하였다. 논문. RISS에 깐수로 검색해보면 꽤 많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연구자이다 보니 그의 글이 1991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의 업적을 능가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의 수필이다.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외에도 불어, 독일어, 일본어, 한문까지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한국어를 처음 배운 게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서였는데 불과 5년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한국어를 잘 했다. 말투가 어눌해서 외국인 티를 숨길 수는 없지만 그건 당연한 거고...

매주 금요일마다 기도를 드리는 등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고[1], 레바논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할 때는 늘 레바논을 응원했으며,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할 때에는 미국에 비판적인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 따르면 깐수 교수는 "된장국까지 좋아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했다고 한다. 아내와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아랍어 통역을 하다가 만난 인연으로 1988년 11월 결혼했는데, 당시 깐수는 42세, 아내는 26세였으며 아내는 서울시내 종합병원 간호사로 재직하던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귀화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그는 『내가 귀화하면「20세기 처용」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크게 웃었다.
그를 처음 만난 한국인은 그의 완벽한 한국어 구사와 거침없는 매너에 그가 외국인임을 눈치채지 못하기 십상이다. 콧수염을 기르기는 했지만 한국 남성의 평균신장과 몸무게를 벗어나지 않는 그의 체구와.「튀지않는」피부색, 평범한 의상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한다. 게다가 고향을 충청도쯤으로 짐작케 하는 구수한 말투와 소탈한 웃음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이다.
1992년 중앙일보

성품도 선량한 사람으로, 사학과 석사과정 대학원생은 "성격이 밝고 쾌활해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외국인 선생님이었다"고 평하였다. 이웃들은 "자상한 '간디' 교수"라고 평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훌륭한 외국인 교수로 보이겠지만...

2.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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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체는 조선족 출신 북한 간첩 '정수일' (鄭守一)이었고 나이, 이름, 국적, 종교, 경력, 할 줄 아는 외국어, 기혼 여부 및 자녀 유무까지 모두 거짓이었다.

1934년 11월 12일 중국 지린성 옌지(길림성 (연길)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조선족이었던 그는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역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공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2]으로 활동했다.

모로코 국왕과 중국 고위직 사이의 통역을 맡았던 사진도 남아 있다. 엘리트 코스였고, 그 스스로도 그대로 살아간다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63년 6월 북한으로 귀화하게 되었다. 당초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에 실망하여 귀화했다고 알려졌으나, 본인은 2018년 신간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각한 뒤에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자 내린 결심이었다고 밝혔다.#

외무부장 천이 (1901-1972)와 대판 싸우고도 귀화를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로 탄원해서 귀화한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도망갔던 조선족들은 대부분 종파 분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는데, 정수일은 저우언라이가 공식 발급한 허가증을 받고 귀화한 덕분에 이후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때 저우언라이도 정수일과 같은 인재가 떠나는 게 아까워서 직접 여성을 소개해 줄 테니 결혼해서 중국에 남아달라고 권유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북한으로 가게 된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다문화 출신 일개 5급 공무원이 본국으로 가기 위해 자진 사표를 냈는데 외교부 장관이 거절하는 바람에 격하게 싸우고, 국무총리가 편지를 보내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직해서 귀화한 셈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비범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북한으로 귀화한 후 1974년까지 평양 국제관계대학 교수와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아랍어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맡았다. 정수일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회의를 품어 넘어온 북한에서 자신을 일개 어학 교수로 대접하며 매주 1, 2일씩 막노동을 강요하고 매주 25시간, 강의 외의 아랍어 방송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에 힘들어 했으며, 심지어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귀의 미로염(전정신경염)을 앓았다고 한다. 1963년 9월 8일자 로동신문에는 아랍 대표단 방북시 김일성통역을 맡는 사진이 보도되었다.

김일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김일성의 공식 통역을 맡고 그게 로동신문에 실렸다는 점에서 이 사람의 능력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평양외국어대 아랍어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수일 교수의 해박한 언어 구사 능력과 이국적인 외모[3]에 관심을 가진 조선노동당에 의해서, 1974년 9월부터 4년 5개월에 걸쳐 간첩 교육을 받으면서 남파 간첩으로 변신하게 된다.

1979년 1월 공작금 1만 달러를 가지고 "레바논 국적을 취득해 남한에 잠입해 주요 정세정보를 수집하라"라는 지령을 받았고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당시 전쟁으로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운 레바논 베이루트로 향했다. 친북단체인 '레바논 조선친선협회'와 북한 대사관의 도움으로, 1979년 11월 '무함마드 깐수'[4]란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레바논 국적으로는 남한에서의 활동이 힘들다는 판단 하에 튀니지에 입국해 튀니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회 경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기회를 모색하였다. 튀니지는 호적관계법이 잘 정비되어 있어 국적을 취득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말레이 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강사(1982.7)를 거치는 등 호주,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적 취득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1984년 2월에 필리핀 아버지와 레바논 어머니 사이의 아들인 '무하마드 깐수'로 국적을 세탁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 들어와서 한국어를 배운 것도 당연히 전혀 배울 필요 없는데 위장을 위해서 배우는 척 한 것이다.

사실 더 일찍 잡힐 수도 있었다. 1984년 5월에 방을 구할 때 한국의 화폐 단위를 원화가 아닌 구 화폐 ""으로 착각하여 용산구 한남동의 복덕방 주인에게 의심을 샀고, 은연 중에도 북한 사투리가 강하고 연락처가 없다는 점에서 위화감을 느낀 복덕방 주인이 신고를 했으나 국내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 보증을 해줘서 풀려났다. 이 사실은 수사 기록에도 남지 않은 채 오랫 동안 잊혀졌고, '깐수'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본 복덕방 주인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1984년 6월부터 단파라디오[5]를 이용해 1996년 7월까지 161차례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신했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상부에서는 구체적인 첩보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월간 잡지에 나온 '신상옥 · 최은희의 최근 소재지', '클린턴의 방한', '남조선 학생 운동권의 최근 동향'[6], '최신형 전차 생산 및 첨단 첩보기 도입'같은 기사들을 편집, 분석하여 중국 베이징 시선양으로 보냈다. 1987년 2월부터 1995년까지 4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 부자 충성 맹세문과 "조국 통일상"을 수상하고, 단파수신기, 암호표, 독약앰프, 공작금 19,000달러 등을 받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첩보 방식과 비교하면 원시적인 행위였지만, 어쨌든 이 방법은 굉장히 안전했다. 1996년 2월까지는 암호 편지를 이용해 약 75회 정보를 보냈고 안기부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겉으로는 영어로 쓴 편지지이지만, 뒷면에 특수 잉크로 정보 보고문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 잉크는 작성 뒤 20분 정도 지나면 육안으로 절대 확인할 수 없으며, 특수 약품 처리를 해야 글씨가 나타난다.

그러다 1996년 3월부터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는 바람에 잡혔다. 1996년 3월 안기부도청을 통해 '서울 시내 특급 호텔 비즈니스센터 팩스'를 통해 남한의 군사정치정보가 외국으로 전송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팩스의 수신지는 북경 주재 북한대사관이었다.

그래서 안기부는 시내 각 호텔 근처에 CCTV를 설치해 감시했고, 그 결과 아랍계로 보이는 사람이 비즈니스센터를 이용해 특정시간대에 북경으로 팩스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기부는 몽타주를 만들어 시내 각 호텔에 돌리면서 신고를 부탁했고, 결국 1996년 7월 호텔에서 팩스를 발송하려고 시도하던 중 호텔직원 김모양(26)이 팩스 고장을 가장해 전송을 지연시키면서 간첩신고를 해서 그를 체포하게 된 것이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첩보 내용만 보면 북쪽에서 도움이 될 만한 가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판결문에도 그런 점이 반영되어 구형인 사형에서 12년형으로 선고되었다. 사실 그가 보낸 잡지나 신문 기사 따위는 정보분석자의 손을 거쳐 유용한 정보로 사용할 수 있으나, 그런 것들은 일본 혹은 제3국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획득은 어렵지 않아서 북한한테는 있으나 마나한 정보원이었다. 인간 정보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아무래도 대학 교수보다는 군 간부나 고위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훨씬 유용하다.

그의 위장이 철저하다 보니 아내조차도 정수일이 검거되기 전까지는 그가 간첩인 줄 전혀 몰랐는데, 잠꼬대도 아랍어로 했다고 한다. [7]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 발언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가끔 가다 무슬림들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코스프레까지 하는 등 정말 철저했다. 또한, 교수로 활동할 당시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과 아랍권 국가가 축구경기를 할 때면 늘 아랍국가를 응원했다고. 교수 임용을 할 때도 신원조회 절차가 있었지만 워낙 치밀하게 위장해놔서 걸리지 않았다. 이슬람 사원에서 수많은 아랍인을 만났을 텐데도 들키지 않았다.

심지어 남한에서 한 결혼이 초혼도 아니었고 북한에 아내가 있었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이 알고 있었나?"라는 질문에 북한의 조강지처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당시 정수일이 62세로, 아내 박광숙(61, 당시 평양 모란봉극장 안무지도자), 장녀 정미란(33, 김일성종합대학 프랑스과 졸업 후 당시 평양시당 선전국 홍보원), 차녀 정달미(31, 김일성종합대학 문학과 졸업 후 중앙통신사 기자), 삼녀 정소나(30, 평양무역대 졸업 후 당시 무역회사 근무) 가족이 북한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하마드 깐수라고 극구 주장하다가 안기부 수사관이 서류상 고향인 필리핀 민다나오 섬 사투리를 물어보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후 그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한 듯 자백하기 시작했다.

서류상 국적이 필리핀이었으므로 정수일은 국제법 상 국외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수감된 곳도 구치소가 아니라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국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밝혔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외국인으로 행세 중이었는데, 체포된 이후부터는 취조부터 재판까지 아주 멀쩡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간첩혐의를 수사하던 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재판에서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체포 당시 그는 방대한 자료와 주석을 붙인 《동방교역사(가제)》[8]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던 상태였는데, 검사는 그를 취조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사는 압수당한 그의 원고를 찾아다 준 후 검사실에서 정리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그가 전향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북한의 아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해서였다. 남한에서 만난 후처에게도 '나를 잊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후처는 매달 2번씩 면회를 오면서 편지를 계속 교환했다. 둘의 부부관계는 투옥 이후 새롭게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으며 그녀의 지극한 옥바라지에 흔들렸다고 한다. 결국 1996년 11월 전향서를 제출했다.

초기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물론 재판부도 그의 사연과 그 동안의 연구 성과, 전향 의사, 그리고 조사 결과 '언론 보도 사실만 북측에 전달했기 때문에 국가 기밀 탐지 혐의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 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2000년 광복절 특사로 4년만에 출소한 후 2003년에 특별사면 및 복권을 거쳐 학계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단국대에서도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정수일이 구속되는 바람에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강좌가 폐강되는 등. 제자 대학원생들이 법정에 방청하러 왔는데, 정수일은 그들을 보고 담당 교수로서의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9]

어학에 대해서도 '한국어 외 6개 언어'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불어, 독일어, 일본어)는 간첩 활동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실제로는 조선어-한국어를 제외하면 총 11개 언어[10]를 구사했다. 그러나 러시아어, 중국어 등은 당시 한국의 적국이었으므로 의심을 살까 봐 숨겼다. 그가 옥중 서신으로 밝힌 외국어 습득은 다음과 같다.
번호 언어 비고
2 일본어 어릴 때부터 시작. (당시 만주국 시절) 수감 중에도 일본 서적을 읽음.
3 중국어 고등학교 때 시작. 중국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고위직 통역을 담당할 정도.
4 러시아어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대학 교재 원서로 또 배우고
북한 학계에서 러시아어 원전이 보편적이다 보니 연구를 위해 더 배움.
5 영어 대학에서 시작. 이집트 유학 중 공용어여서 계속 배움.
6 아랍어 전공. 10년 간 현지에서 살았고 남북한 모두 대학 교수로서 강의.[11]
7 독일어 카이로 대학 유학 시절 아랍어 고전을 연구하다 보니 필요해서 '어느 정도' 익힘.
8 프랑스어 중국 외교관으로 구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모로코 등) 체류 시 업무 목적으로 반드시 필요해서.
9 스페인어 중국 외교관으로 모로코 체류 시 스페인[12]과 접할 기회가 많아 취미.
10 페르시아어 이란인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웬만한 대화 가능.
11 마인어 말레이시아 대학 교수 재직 시.
12 필리핀어 필리핀 국적 취득 목적.

3.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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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 후인 2008년에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해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다만, 간첩 전력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전만큼 방송에 많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에는 꽤 나오는 편이다.

뉴스위크에서는 그를 가리켜 "분단시대의 불우한 천재학자,"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황석영도 극찬했다. 고은 시인은 자신의 시 '만인보'에서 '북으로 돌아갈 수 있어도/가지 않고 그냥 대한민국 국민의 하나로/굽은 소나무같이 살아가는 '깐수 정수일'이라고 언급했다. 물론, 이제 와서 정수일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전혀 없다.

# 수감 중 편지도 명문에 옥중에서 한 학문적 연구까지 담겨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조선일보마저도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였다. 게다가 수감 중 아내도 그를 버리지 않았고, 계속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수일'이란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와 아랍 연구 및 실크로드나 유라시아 관련 연구 책자를 쓰며 활동 중이다.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그가 간첩이라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대로 그가 진짜 간첩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북한으로 전달한 문건도 아랍 역사 및 연구 관련 정보를 많이 보냈기에 북한에서도 "이딴 걸 뭐하러 보내느냐?"라고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북한은 아랍 관련 인문학 분야 연구가 남한보다 뒤쳐진 상태라 북한 학계가 연구에 참고하길 바라면서 보냈다고는 하는데, 북쪽 동네에서 인문학, 그것도 아랍 지역에 관심이 있었을 턱도 없다. 지금의 한국에서도 아랍 지역 연구 분야에서는 지원이 많다고 할 수는 없는 판국이라서 더 그렇다.

사실, 그는 무슨 군사나 외교 관련 지식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역사 전문가였으니 군사 정보 취득을 목적으로 한 간첩으로는 부적합했다. 사람을 잘못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던 것이다. 북한이 그를 남파한 뒤 그로부터 얻은 정보와 남파된 그가 전향을 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학계에서 공유 · 발전시킨 정보를 비교해본다면 북한이 압도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냥 북한이 아랍 분야의 천재 학자 한 명을 공짜로 남한에 퍼준 셈이다.

더 나아가서 정수일 교수가 한국과 중동 국가(특히 이란)의 관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이 북한 정보를 얻는 중요 라인 중 하나가 이란이다. 특히 북한 무기를 직접 사 주는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정수일이 직접 북한에 준 남한 정보보다 간접적으로 남한에 준 북한 정보가 훨씬 더 양도 많고 가치는 비교가 안 된다.

정수일은 아랍어에 능통한데다 그 쪽 지리 및 여러 지식도 매우 많아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아랍 및 이슬람 관련 전문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이슬람 분야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석방 이후의 저술을 보면 심하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측면[13]이 종종 드러나기는 하나, 역사학자로는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정수일은 세계적으로도 권위 있는 이슬람권 역사학자로 극진하게 대접을 받고 있다.
  • 쿠란의 표기(코란, 쿠란, 꾸란)에 대해서도 한방에 논쟁을 종결시킨 것이 이 사람이다. 이것이 얼마나 이 사람이 국내 아랍 학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인데, 자세한 내용은 쿠란 문서를 참고할 것. 국내 아랍 학계 안에서는 이 쿠란 표기법 때문에 매우 심한 논쟁이 일어났었다. 쿠란이 필수 아랍어 단어이기는 한데,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들이 가장 중요한 발음들 - q, r, ء 이었기 때문이다.
  • 처용의 이슬람 도래인설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이기도 하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경주시로 제시할 만큼 실크로드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고 의미있는 주장을 내놓는 학자.

그래서, 이 사건 때문에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가 크게 곤욕을 치렀었다. 체포 당시 단국대학교 초빙교수였기 때문. 연세대는 어학당에 다녔던 정도지만 실질적인 학문 활동을 했던 단국대학교가 당황스럽기는 더했을 것이다. 그래서 교내 역사학 교수들 중에서 정수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교수가 종종 있다.

정수일 교수는 동아시아사, 특히 이슬람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분야에서는 반드시 전문가로 꼭 언급된다. 실제로, 단국대 사학과[14] 교수들은 죽전과 천안을 오가면서 강의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특히, 정수일 교수를 아는 분들은 대부분 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다. 만약에 1984년 이후부터 단국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시거나 석/박사 과정을 밟으셨던 분이 아직도 학교에 계신다면... 100%다.

2011년에는 중국으로 가서 조카 쪽 가족들과 50년만에 재회하기도 했으며 모교 방문등의 활동을 했다. 모교측에서는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북경대에 진학한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15]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로 정수일과 다른 학생의 사진을 확대해서 학교의 역사 자료관에 걸어뒀다고 한다. 가족들과 재회해서도 정수일의 조카들과 조카 손자들이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자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2013년에는 2013 경주-이스탄불 세계문화엑스포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중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고위 외교관이나 대학 교수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동시에 세계 문명교류사에 큰 공헌을 했을 사람인데 하필이면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인생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유능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받았다지만, 그리고 중국에서 갈 수 있는 한민족의 국가는 당연히 북한 뿐이기에 북한으로 건너간 것이라지만 외모 때문에 간첩으로 일을 하고, 이런저런 시간을 간첩 교육을 받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또한, 한국에서 연구와 간첩질을 병행하면서 간첩혐의가 걸린 이후 사형을 구형받고, 낮아진 형량과 특사 덕분에 4년을 복역하고 나왔으나 북에 있는 가족들과는 만나지도 못하게 되는 등... 처와 세 딸도 북한에 함께 가는 바람에 정치범수용소에서 죽는 것보다도 못한 삶을 살게 되었으므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굉장히 운이 좋다고도 볼 수 있다. 저우언라이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지 않은 채로 입북했다면 북한에서도 숙청당했을 것이며 학문적 능력이 없었다면 북한에서 다른 인민들처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자유를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간첩이 된 이후에 국가 안보에 해가 되는 정보를 북한으로 보냈다면 빼도박도 못하고 간첩 혐의로 사형당했을 것이며, 문민정부 때 들켰으니 망정이지 군사정권 시절에 잡혔다면 당연히 역시나 사형이다. 이 모든 걸 간신히 피해갔다! 즉 본인이 선택을 이상하게 해도 항상 뜬금없는 행운이 끼어드는 신기한 삶을 살아가다, 남한에 와서는 비록 북의 가족들과는 생이별하게 되었지만 아랍&이슬람 전문가로서 비로소 재능을 펼치게 되었으니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드라마틱한 삶의 연속이었다.

4. 저서와 역서

수감 후 저작은 200자 원고지로 3만 장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현재 진행형... 역서는 모두 옥중 번역.
연도 서명
1994년 신라 서역 교류사
1995년 기초 아랍어
세계속의 동과 서
2001년 고대문명교류사[16]
씰크로드[17]
이븐 바투타 여행기1, 2[역][19]
2002년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이슬람 문명
문명 교류사 연구
중국으로 가는 길[역]
2004년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21]
혜초왕오천축국전[역]
2005년 한국 속의 세계 상·하
2006년 실크로드 문명기행
2008년 시대와 소통[23]
2009년 문명담론과 문명교류[24]
2010년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25]
2013년 실크로드 사전[역]
2018년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27]

[1] 그렇지만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중앙아시아사 전공)에 따르면 삼겹살은 잘 먹었다고 한다.[2] 외교관의 일종으로, 한국에서 외무고시(5급 공무원)를 통과하면 2등 서기관이 된다.[3] 좀 웃긴 부분이지만, 의외로 중요한 부분이다. 간첩 활동을 확실히 하려면 상대의 정보를 많이 캐낼 수 있도록 깊이 침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외모와 인상이란 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4] 실존인물로 유럽으로 이주했다. 당시 33세. 여담으로 '깐수'는 동방과 이슬람 사이의 교역지 이름이라고 한다.[5] 1993년까지 개인이 단파수신기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었다.[6] 당시 정수일은 북한 지도부의 선전과 달리 남한 학생 운동권은 '남한 혁명 운동'의 기수가 될 수 없으며, 재야운동 역시 활발하나 '혁명의 선봉'으로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80년대 북한 지도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으나 임수경 등의 운동권 세력의 방북 이후 교차 검증이 끝난 90년대 이후에는 북한마저도 이들의 정보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정수일의 표현대로 이후의 NL 운동권 세력의, 북한이 자신들을 높게 평가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연방제 통일 지지 행보는 말그대로 '짝사랑'이 되었다.[7] 다만 정수일은 처용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당시 아랍어가 아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8] 이는 출옥 다음 해 《고대문명교류사》란 제목으로 출판된다.[9] 학부 강의야 강사로 대체한다든지 방법이 있지만 대학원은 실상 교수 하나만 보고 따라가는것과 다름이 없고 동서문명교류라는 분야 자체가 국내에서 희소한 분야라 그냥 말 그대로 대학원 과정자체가 붕 떠버리는 것이다. 특히 박사과정생들에겐 학위논문 연구자체가 타격을 받을 중차대한 일이다. 게다가 그의 정체를 생각해보면, 애꿎게 '간첩의 제자' 소리를 들으며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니 제자들에게 미안해할 수밖에 없다.[10] 조선어, 한국어를 두 언어로 볼 지 한 언어로 볼 지는 정수일에 대한 설명을 벗어나므로 외국어 문서 참조바람.[11] 여권상엔 필리핀인으로 되어있지만 만나봤던 사람들 대부분은 아랍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12] 모로코는 스페인에 인접해 있다.[13] 사실 그는 1963년 북한국적 취득 당시 중국에서도 상당한 엘리트로 대접받는 처지였으면서도 민족적 자존심 하나 때문에 당시 직속상관으로 중국의 제1부총리 겸 외교부장(장관) 천이와 얼굴을 맞대고서 대판 싸운 끝에 북한 국적 회복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14] 천안캠퍼스에서는 역사학과로 부르고 2016년까지 존속될 예정이다. 현재 천안에 있는 학생들은 2012학년도 이전에 입학한 학생들이 있는 셈이다.[15] 다른 한 사람은 북경대 철학부에 진학한 임원철로, 역시 문화대혁명 때 북한으로 건너갔지만 정수일과는 달리 불법 도강을 선택했기 때문에 후일 숙청당했다고 알려졌다.[16] 옥중 저작.[17] 옥중 저작.[역] 역서.[19] 프랑스어 번역 이후 2번째의 아랍어 원전 번역판.[역] [21] 옥중 에세이.[역] [23] 공저.[24] 한국 문명 교류 연구소 학술 총서 1.[25] 창비사.[역] [27] 창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