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1-26 14:39:35

이븐 바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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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행로)

1. 개요2. 생애3. 유럽에서의 수용4. 한국어 완역5. 트리비아

인생이 즉흥, 쿨가이 이븐 바투타 선생

1. 개요

طة, Ibn Battuta
1304년 2월 25일 ~ 1368년 / 1369년 경[1]

중세 모로코의 위대한 탐험가이자 모험가, 순례자, 상인, 여행가, 법관이다. 마르코 폴로와 같은 시대에 세계 일주를 한 사람으로 모로코 탕헤르 출신. 본명은 샴스 알 딘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븐 압달라 븐 이브라힘 알 루와티 알 탄지. 귀환 후 모로코의 술탄 아부 이난 파리스의 명을 받고 이븐 주자이를 편집자로 삼아 유명한 "여행기(리흘라)"를 써내었다. 본래 제목은 "여러 도시의 경이로움과 여행의 신비로움을 열망하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

원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이후 복사본이 남아있기에 그 기록이 전해지게 되었다. 걸어서 세상 속으로.

2. 생애

1304년 모로코의 탕헤르의 법학자 집안으로 태어났다. 1325년 메카를 향해 순례를 떠났는데 순례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왕들의 사신과 대상을 겸하여 중동, 중앙아시아, 콘스탄티노플, 동아프리카, 남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중국을 거치는 장대한 여행을 했다. 24년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서아프리카 말리 지역을 여행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 모든 여정을 여행기에 자세히 남겼으며 말년엔 모로코에 돌아와 법관으로 일하다 1368년 사망하였다.

3. 유럽에서의 수용

이븐 바투타 사후 중동 특히 그의 모국인 모로코에서 큰 인기를 누린 것으로 추정되며 아랍 여행자이자 탐험가인 울리히 야스퍼 시첸과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중동 여행중에 "여행기"의 축약본을 구입했고, 이후 많은 유럽 학자들이 축약 출판물에서 "여행기"의 일부를 발췌해 번역했다.
영국에서는 사무엘 리가 1829년 "아랍어 축약판으로 번역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발간했고, 프랑스에서는 183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완벽한 형태의 "여행기"가 발견되어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옮겨져 번역되었다. 그리고 1853년 - 1858년까지 번역, 4권으로 출간되었다.

4. 한국어 완역

명성에 비해 한국엔 그다지 많이 알려져있지 않았는데 이는 국내에 아랍어 전공자가 드물어 그의 여행기를 번역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역이나 영역을 한국어로 중역해서 소개하는 정도였는데, 나무위키에서도 유명한 역사학자 정수일이 2001년 원문을 한국어로 완역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로는 이곳저곳에 많이 소개되는 편이다.

정수일 교수에 의하면 초역본은 그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바 있으나 아랍어 원본 완역은 프랑스어에 이어서 자신의 한국어 번역이 세계에서 두 번째라고 한다.

5. 트리비아

인도의 정치가 자와할랄 네루는 자신이 딸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쓴 세계사 편력에서 이븐 바투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로 꼽았다.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을 오갔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으나[2] 이븐 바투타는 워낙 그의 여행기라는 정확한 기록이 있어 그의 장대한 여행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중세 시대 아프리카부터 중국까지 직접 경험한 시대상과 문화, 정치, 종교, 사회에 대해 폭넓게 기록하고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3] 지금 하지만 데이비드 웨인즈(David Waines)의 "이븐 바투타의 오딧세이(The Odyssey of Ibn Battuta: Uncommon Tales of a Medieval Adventurer)"에 의하면 이 양반도 워낙 장기간 여행한터라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적는 이븐 주자이에게 기억이 헷갈려 엉뚱한 이야기를 말하기도 하고 아무리 중세가 남의 글을 베껴쓰고 덧붙이고 2차 창작하는데 이골이 났다지만 자신 이전의 여행기를 참조하면서 베끼고 확장했다는 것을 알아낸 학자들과 정말 그가 중국에 갔는지 의심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랍에미레이트(UAE) 두바이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이븐 바투타 몰'이 존재하며, 각 구역마다 이 사람이 여행했던 국가들을 테마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으며 구조물도 있다. 그러나 본질이 쇼핑몰인 것은 변치 않는다.

모로코의 대도시 탕헤르에는 그의 이름을 딴 종합경기장 '스타드 이븐 바투타'가 존재한다. 최대 수용 가능 인원이 65,000명에 달한다.

폴란드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나, 공산주의 운동가 헨리크 바투타를 따온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대항해시대 3에 "여행기"가 "삼대륙 주유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진흙모스크, 면 불탑, 달리는 새(타조)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선 삼대륙 주유기가 퀘스트를 통해 얻는 발견물로 등장한다.


[1] 구글에서 검색하면 1377년 사망이라고 나오기도 한다.[2] 하지만 주류 역사학계는 마르코 폴로 역시 중국에 다녀온 것이 맞다고 보고 있다. 당시의 중국 왕조인 원나라 측에서 마르코 폴로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야 수많은 외국인들이 공존하던 당대에 마르코 폴로같은 이탈리아인을 한낱 듣보잡 색목인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부 과장된 내용을 제외하면, 원나라 당시에 행해졌던 여러가지 풍습 등, 직접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내용들이 동방견문록에 많이 실려있기 때문이다.[3] 다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문화상대주의 따위는 없었던지라, 여행한 지역의 토착민들의 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야만인 취급을 곧잘 하곤 했다. 예를 들어 말리 제국에서는 '금과 자원이 넘쳐나는 자원이 풍부한 제국이자 신실한 이슬람 국가'라는 이미지를 기대했지만, 도착하고보니 말리의 종교 문화는 이슬람교와 아프리카 토착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융합되어 있는, 현대의 시각으로는 이상적인 사회였지만 그의 눈에는 이교도가 판치는 사회였다. 말리의 여자들은 히잡 등 머리카락을 가리는 의상을 입지 않았고, 남자들과 거리낌없이 대화할 수 있었으며, 남자만큼의 자주성이 있었다. 역시나 이 또한 현대의 시각으로는 열리고 진보적인 사회지만 그의 눈에는 '야만적이고 문명화가 덜 된' 모습이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말리 제국의 환상을 철저히 박살냈다고 그의 여행기는 말하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당시 말리의 황제였던 만사 술레이만의 행보였는데,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쥔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지로 뒤덥힌 꼬질꼬질한 일개 병사 두명과 눈을 맞추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바투타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직접 만났을 때는 이븐 바투타에게 빵덩어리 세 조각과 구운 소고기, 그리고 발효된 크림을 대접했는데, 이는 말리에서 전통적으로 여행객에게 대접하던 음식이었다. 그러나 돈과 황금 등의 큰 환대를 기대했던 바투타는 이를 보곤 실망한 나머지 비웃음을 크게 터뜨렸다고 한다. 사실 금을 주지 않은 말리 제국도 그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말리는 고립 정치를 하고 있었기에 외부 영향을 피하고 금을 외교 관계에서 더욱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금광의 위치를 알리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