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10 08:48:52

아스트라한


파일:external/s017.radikal.ru/4fd88b560407.jpg
파일:러시아 국기.svg 아스트라한주의 도시
아스트라한
Астрахан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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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구역 아스트라한주
시장 블라디미르 샤리포프
면적 294.42㎢
인구 465,524명[A]
인구 밀도 1001.68명/㎢[A]
시간대 UTC+4
1. 개요2. 상세3. 역사4. 기후5. 경제6. 관광7. 교통8. 여담

1. 개요

볼가 강 하류에 있는 도시로 아스트라한주의 주도로 카스피 해 기슭으로부터 90km가량 떨어져있다.

2. 상세

하자르 칸국의 수도였던 아틸이 그 기원으로, 킵차크 칸국 시절에는 튀르크 귀족[3]의 성지라는 뜻의 핫지 타르한이라고 칭해져 오늘날의 이름인 아스트라한이 되었다. 카자흐스탄과 가깝고 기차가 자주 다닌다. 언뜻 보면 카스피해를 낀 해안도시 같아 보이지만 이라크바스라처럼 볼가강의 퇴적으로 현재는 카스피해와는 100km 가까이 떨어져 있다.

중세 아스트라한 칸국의 수도였다. 사라이와 함께 중세 흑사병이 시작된 곳으로 추정된다.[4] 독소전쟁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도달 목표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의 기준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3. 역사

아스트라한 지역은 고대로부터 스키타이족, 사르마티아족, 그리고 이후 훈족등의 유목민족이 지배해온 스텝 지대에 속했다. 이 지역은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 이어진 실크로드 남부 루트의 일부였으며, 고대부터 카스피해를 통한 동서 교역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슬람 세력의 팽창과 함께 아랍 상인과 여행자들이 이 지역에 도달. 『타바리의 연대기』 등 중세 아랍 문헌에도 등장하였다.

몽골 제국이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아스트라한 일대는 킵차크 칸국의 일부가 되었다. 아스트라한은 볼가강 하구에서 이슬람과 동서 교역을 연결하는 항구 도시로 성장하였고 아랍・페르시아・중앙아시아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킵차크 칸국이 분열되자 아스트라한 일대에 아스트라한 칸국이 수립되었다. 아스트라한 칸국은 카잔 칸국크림 칸국, 노가이 칸국 등과 빈번한 충돌하였다.

그러나 1552년 이반 4세가 카잔 칸국을 정복하자 곧이어서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하여 볼가강 유역 전체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1558년 볼가 강을 내려다보는 가파른 언덕에 새로운 요새, 즉 크렘린을 세웠다. 1569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에 아스트라한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포위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맹공격으로 후퇴하였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볼가 강 유역 일대를 러시아에게 줄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인들이 아스트라한 일대를 집중적으로 식민화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였다. 1717년 11월 22일 표트르 1세 의 칙령에 따라 아스트라한 주가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조선소를 건설하고 아스트라한을 페르시아에 대한 적대 거점으로 삼았다. 특히 러시아 어업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아스트라한의 캐비어는 전 유럽에서 알아줄 정도로 품질이 매우 좋았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이 중앙 아시아와 코카서스 지역으로 팽창을 시작하자 아스트라한은 그 기점 역할을 하였다. 특히 1890년대 철도가 개통됨으로서 중앙아시아와의 연결망은 더욱더 강화되었다.

1919년 3월, 볼셰비키 통치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반란이 실패한 후, 세르게이 키로프의 명령에 따라 체카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3,000명에서 5,000명의 사람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이 일대에 살던 독일인, 칼미크인, 타타르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1941년 독소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A-A선까지 점령하려고 했다. 이는 거의 성공하여 1942년 여름에는 독일군은 아스트라한에서 불과 100~150km 떨어진 곳까지 접근하였다. 독일 공군은 볼가 강에 있는 상선을 폭격하여 러시아 중부로 가는 연료와 윤활유의 공급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아스트라한은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4. 기후

연평균 10.5도, 7월 평균기온 25.6도, 2월 평균기온 -3.7도로 우리나라 중부지방과 비슷한 온도를 보이지만 연강수량이 234mm로 매우 적어 건조기후에 속한다. 원래 이 정도 강수량이면 사막으로 분류되지만, 1년 내내 15~30mm 정도로 적지만 꾸준하게 비가 내리기 때문에 주변에는 짧은 풀이 자라는 황무지로 이루어져 있다.

5. 경제

도시 주변에서는 볼가 강에서 흘러오는 물길을 이용한 관개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볼가 강 하류 삼각주~카스피해로 이어진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특산물캐비어다. 이곳 캐비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편이다. 소련 시대에는 수산물 가공 기업이 발전했지만, 어획량 감소로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과일과 채소 가공 공장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있다.

6. 관광

  • 백색 모스크 (Белая мечеть) : 아스트라한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로 타타르 상인인 다비드 이즈마일로프의 지원을 받아 1810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 성모승천대성당 (Собор Успения Пресвятой Богородицы) : 1699년에 시작해 1710년에 완공된 정교회 성당으로 18세기 러시아 교회 건축의 가장 훌륭한 사례로 남아있다.
  • 아스트라한 크렘린 (Астраханский кремль) : 1581년 만들어진 크렘린으로 현재 19세기 아스트라한 군 수비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 들어섰다.
  • 바쿠 모스크 (Криушинская мечеть) : 1909년 지어진 모스크로 소련 시기 창고로 사용되었으나 아스트라한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노력으로 모스크가 새롭게 단장되었다. 그리고 모스크의 이름도 크리우스에서 아제르바이잔 수도인 바쿠로 바뀌었다.

7. 교통

교통은 2007년까지 노면전차, 2017년까지 트롤리버스가 있었으나 모두 폐선되고 현재는 시내버스와 승합차뿐이다.

8. 여담


[A] 2024년 1월 1일 기준[A] [3] Tarqan, 면세 특권을 지닌 튀르크족 전사 계급[4] 역병 자체가 발원했는지는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