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 칸국의 계승 국가 | |
백장 칸국 | 이흐 칸국 · 아스트라한 칸국 · 카잔 칸국 · 크림 칸국 · 카심 칸국 |
청장 칸국 | 노가이 칸국 · 시비르 칸국 · 부하라 칸국 · 카자흐 칸국 |
노가이 칸국 Ногайская Орда | ||
1440년대~1634년 | ||
위치 | 카스피해 북부~카스피해 동부 | |
수도 | 사라이 쥐크[1]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칸 | |
언어 | 노가이어 | |
종족 | 노가이인 | |
종교 | 이슬람 | |
성립 이전 | 킵차크 칸국 | |
멸망 이후 | 러시아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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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빅토르 아당(Jean Victor Adam, 1801년 2월 28일 ~ 1866년 12월 30일)이 묘사한 노가이인 기마병. |
노가이 칸국의 시조는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까지 킵차크 칸국의 에미르로 활동한 망기트부의 수령 에디구인데 그는 토크타미쉬가 티무르에 패해 도주한 뒤 티무르에 의해 킵차크 칸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인물로 1399년 토크타미쉬와 리투아니아의 대공 비타우타스의 침공을 막아내고 1408년에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다시 복속시키는 등 킵차크 칸국을 어느 정도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에디구 사후 그의 아들 누르 알딘이 노가이 칸국을 세웠다.
노가이 칸국은 인접해 있는 크림 칸국과 교류하면서 북쪽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 역할을 하였고 슬라브인을 대상으로 한 조직적인 습격으로 그들의 정착을 억제하기도 했다. 노가이인은 크림 타타르인의 형성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이들이 동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을 약탈하고 노예 납치와 무역을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목 국가는 안정되고 통합된 정치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림 칸국의 통수를 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용병으로 활동할 때도 있었으며[2] 카잔 칸국과 전쟁을 벌이던 루스 차르국에게 1년에 무려 3~4만 마리의 말을 국제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한 적도 있었다.[3]
2. 몰락
러시아 내 소수민족 대다수가 자치 지역을 갖고 있는데 노가이 칸국을 세운 노가이인들의 자치 구역이 없는 이유는 오이라트의 일파인 토르구트인들이 1634년 노가이 칸국의 영토로 쳐들어와 그들을 몰아내고 본인들이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착한 토르구트인들을 러시아인들은 칼미크인이라고 불렸으며 이는 오늘날의 칼미키야 공화국의 기원이 된다. 칼미크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학살과 노예화를 피한 일부 노가이인은 볼가 강 너머의 다게스탄이나 쿠반강 유역(오늘날의 크라스노다르 지방, 스타브로폴 지방,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공화국)과 같은 여러 지역으로 피난을 떠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17세기에 루스 차르국에 노가이 칸국이 복속된 이래 러시아 측은 노가이인이 거주하던 쿠반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를 눈여겨보고 있었으며 영토를 카자크인과 독일계 러시아인에게 맡겨 농지로 경작시키기 위해 18세기 말에 노가이인을 아조프해 일대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노가이인들은 이에 저항했으나 1783년에 쿠반 지방(오늘날의 크라스노다르 지방)에서 일으킨 대규모 봉기를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이 강경하게 진압하였고 잔존한 노가이인도 카자크와 칼미크인에 의해 제압당하면서 노가이인의 독립 국가는 실질적으로 18세기에 완전히 멸망했다. 19세기 초 쿠반 지방, 아조프해 북부, 부자크, 가가우지아 일대의 노가이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해당 지역에는 다른 민족들이 정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