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 운동하는 관측자가 물체를 직선 방향으로 던졌을 때 회전 방향으로 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관한 힘에 대한 내용은 전향력 문서
, 매직 더 개더링의 카드에 대한 내용은 Misdirection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
전향(轉向/conversion)은 어떤 일을 하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린다는 뜻이나, 의미가 물리적인 방향이 아닌 정치적인 신념 등을 가리키는 말로도 확장되어 기존의 사상이나 이념, 성향을 바꾸어 그와 배치되는 사상이나 이념, 성향으로 가는 것을 뜻하게도 되었다. 그리고 축구와 야구에서 포지션을 바꾸는 걸 전향이라 하기도 한다.종교의 경우 개종이라 부른다.
2. 전향의 예
- 정치적 전향.
- 종목을 바꾼 운동선수.
-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
- 축구 -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골키퍼 등에서 뛰던 선수가 각각 다른 포지션으로 바꿈.
- 야구 - 투수에서 타자로 바꾸거나 타자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바꿈.(김대우, 하준호, 나성범, 권준헌,김재윤, 나균안등)
- 내야수에서 외야수로 바꾸거나 또는 그 반대로 포지션을 바꿈. (임병욱, 이정후, 김민석 등)
-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아이돌이 바뀌어 갈아타는것을 전향한다라고 하기도 한다.
- 아이돌에서 트로트 가수로 전향.
3. 정치적 전향
한마디로 적이 된 아군이나 아군이 된 적을 말한다. 전향을 해도 방향성만 바뀌지 실제 정치적 방법은 바뀌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세간에서 하는 말로 전향자들은 극단적이며 과거에 자신이 지향했던 것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동안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면서 활동했다는 생각에 과거를 부끄러운 흑역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흑역사를 청산하고 싶다는 보상심리가 극단적으로 나타나서 극단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대표적으로 국내외 막론하고 과거 극좌, 공산주의자였다가 극우, 반공주의자, 파시스트가 된 경우들이 있는데, 실제로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상충되는 이념이지만 전체주의, 반자본주의 등 상당수의 이념적 요소들을 공유하므로 이념적 거리가 멀면서도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이유로 극좌에서 극우로의 전향 사례는 거의 클리셰 수준으로 흔해빠졌다. 극과 극은 통한다의 대표적 예시.[1] 당장 한국의 뉴라이트들 중에도 젊은 시절에 좌파였거나 운동권이었던 경우가 많다.
다만 극단주의자의 전향을 잘 살펴보면 결국 정치극단주의라는 측면에서 좌우는 그저 패션일 뿐, 근본적으로 그 내면엔 뚜렷한 내적일관성이 존재한다. 전향하는 과정에 대한 진지한 고뇌나 전향해야 할 뚜렷한 이유가 없음에도 시행한 자칭 전향이란 그저 노선선회일 뿐이다.
3.1. 변절과의 차이점
보통 적이 된 아군을 두고 변절이나 배신이라고 일컫긴 하지만, 이건 '전향'이라는 개념을 특정 이해집단의 시각에서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지극히 가치판단적이며 주관적인 용어다. 전향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상의 자유에 따른 선택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으며 실제로도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단순히 전향했다고 해서 배신이나 변절이라 손가락질하는 것은 내부고발자를 비난하는 논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간혹 자신들과 사상적 지향점은 다르면서 연대를 했던 사람들이 본래의 방향대로 나아가는 것을 전향이라고 매도하여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글 특히 대한민국 제5공화국당시의 운동권 출신 인물들에 대한 비난이 있는 편이다. 박종운 같은 인면수심의 예도 있지만 당시에 노선, 사상적 지향점이 제각각인데도 대통령 직선제 쟁취, 군사독재 종결이라는 목표 아래 적의 적은 나의 친구로써 함께 행동하기도 했다.
물론 매국노 같은 인간도 있긴 하지만 이는 사상 등의 변화라기보다는 이익과의 타협에 가깝다. 이런 경우가 진짜 변절이나 배신, 반역 행위에 해당한다.
3.2. 실제 사례
소송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변절' 같은 가치판단적인 용어는 쓰지 말고, 실제 전향 사례만 건조하게 서술하십시오. 특히 현직 정치인이라든가 논객들은 넣지 말 것. |
일제강점기의 전향 문제는 꽤 심각했다. 특히 좌익계열 때려잡은 것은 독립운동가 때려잡은 것 보다 더더욱 철저하게 했기 때문[2]에, 구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좌익계열 인사로 구속된 인물들은 형기가 끝난 다음에도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출옥은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 공산주의자, 좌익계 독립운동가, 조선인 공산주의자 할 것 없이 전향서를 쓰고 나와서 감시 받는 수순으로 나간 인물들이 많았다. 아래도 적혀 있지만 이런 것을 쓰고, 해당 내역이 공개되면 원래 집단에게도 비판받고, 본인도 괴로워했기 때문에 진짜로 전향하는 예도 많았다.
남북분단과 6.25 전쟁을 거친 1950년대에는 좌익 공산주의, 사회주의에서 우파 자본주의로의 변화가 자의반, 타의반 대거 발생했다. 이때 생포된 북한군 포로와 남파공작원들 중 일부는 사상전향을 거부하며 1990년대 초반까지 비전향 장기수로 수십년씩 수감생활을 하였다.
1950년대부터 1998년 준법서약제로 바뀌기까지 권위주의 정권기에는 사상전향제도가 존재해 좌파/진보계열 인사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각종 고문을 가하여 강제적으로 전향을 하게 만든다던지, 출소의 조건으로 일제강점기의 유산인 '사상전향서'를 쓰게하여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지게 만든다던지 하는 형태였다.[3]
구소련과 동유럽 등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냉전체제가 종식된 1990년대 초반에는 구소련식 사회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을 보이던 학생운동가와 사회운동가들이 대거 전향했다.(ex. PD, ND 그룹) 이들은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진보정당), 혹은 미국식 자유주의(민주당) 그리고 보수주의(뉴라이트)로 나뉘어졌다.또한 남북교류가 활성화되고 고난의 행군 등으로 북한체제의 실상이 드러나자, 주체사상을 추종하던 NLPDR운동가들 상당수도 전향하였다. 이들도 위의 탈북자처럼 3분류로 흩어졌다.
당연하지만, 정반대로 우파 성향 인사들이 좌파로 전향하는 일도 생각보다 흔했다. 한국의 경우는 군사독재정권이라는 암흑기 속에서, 서구권은 68혁명의 혼란을 겪으면서 사회 전반에 문화적인 억압과 사회 내부의 빈부격차로 인한 각종 부조리와 불평등에 대한 좌절감과 회의감이 증폭되었다. 특히 유럽은 이를 계기로 사회가 급속도로 좌경화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경제적 자유주의나 우익 내셔널리즘, 전통주의와 같은 여러 우파적 담론들이 크나큰 도전을 받기 시작했고, 때문에 우파에서 좌파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침 그 실현 가능성이 의심받고있던 구소련식 사회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체 방안으로 사회민주주의가 대두된 후에, 유럽 각국이 이 체제를 바탕으로 안정된 사회를 성공적으로 구축해나가면서 기존의 우익 정당들마저 좌클릭하는 양상을 보였으며, 이런 경향은 사회 전반의 좌경화를 더욱 부추겼다.
3.2.1. 국내 사례
- 김신조 : 1.21 사태 때 북한 공작원. 체포 후 전향했다.
- 이광수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생포된 공작원. 체포 후 전향했다.
- 김현희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당시 북한의 공작원이었으나 한국으로 전향.
- 김영환 등 뉴라이트[4][5]
- 김용민 : 젊었을 시절에는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는 등의 철저한 보수 성향이었으나, 김어준과 함께 나는 꼼수다 방송을 진행하던 즈음에 진보 성향으로 전향했다.
- 박정희 : 남조선로동당 소속으로 남한을 공산화시키기 위한 각종 공작 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군사총책이라는 거물급 직책을 맡았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사법거래 + 전향 하는 조건으로 사형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훗날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다.
- 박지원 : 젊은 시절에 미국에서 살 당시에는 극렬 보수 성향이어서 전두환을 적극 지지하고 그가 저지른 악행들인 12.12 사태나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벌인 학살을 옹호할 정도였다. 그러나 1983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던 김대중을 만나서 이에 대한 진상을 전해듣고는 크게 후회한 나머지 친민주당 성향으로 전향했고[6], 이후에 민주당계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성향[7]으로 확실히 굳어지자 재차 그쪽으로 전향했다.
- 김문수 : 원래 극좌 성향이었고 노동운동의 대부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후 극우 성향으로 전향했다.
- 원정화 : 원정화 간첩사건 당시 북한의 간첩이었으나 한국으로 전향하였다.[8]
- 이원복 : 1980년대까지 사회민주주의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9], 1990년 이후로는 중도우파 성향으로 전향했다. 다만, 경제적 자유주의와 반공주의적 내셔널리즘, 그리고 엘리트주의[10] 성향만 받아들였을 뿐, 사회적으로는 문화적 자유주의와 서유럽식 복지 제도를 지지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제3의 길 주의자로 볼 여지도 있다. 정치인 중에서는 유승민이나 앙겔라 메르켈과 매우 유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 정수일 :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활동한 북한의 간첩이었으나 전향하였다.
- 일부 조선인민유격대 회원들
- 이진숙 : 젊은 시절에는 진보 성향이었으나 김재철 취임 이후 보수 성향으로 전향했다. [11]
3.2.2. 해외 사례
-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 남북 전쟁 이전까지만해도 노예 제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예를 이용해 대규모의 목화 농장을 경영하여 남부연맹 최대 갑부가 되기도 했다. 이 상태로 남북전쟁에 남군의 장교로 임관하였다가, 전후에 그 악명높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KKK)의 초대 회장까지 지냈으나, KKK가 갈수록 과격한 테러단체로 변모하자 이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백인 우월주의 성향도 버리고 도리어 미국 흑인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일하는 인권운동가가 되어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덕분에 사망할 당시에는 수많은 흑인들과 남부의 여러 인권운동가들의 추모를 받았다.
- 롤란트 프라이슬러 : 원래 독일 공산당에 속해있었으나 이념에 충실하기보단 기회주의적, 출세지향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나치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바로 전향하여 나치당에 입당하여 이후 민족재판소장을 맡게 된다.
- 베니토 무솔리니 : 20대 시절에는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활동하던 좌익계 인물이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반전을 주장하던 사회당에서 제명되었고, 이후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며 극우로 전향, 국가 파시스트당과 검은 셔츠단을 조직하여 역으로 사회주의자들을 때려잡는 데 앞장서게 된다.
- 브라이언 메이 : 젊었을 적부터 보수당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나, 노년에 환경운동에 가담하면서 노동당 및 녹색당 지지 성향으로 바뀌었다.
- 빅토르 위고 : 젊었을 적에는 강경한 왕당파 보수주의자였으나, 1848년에 있었던 2월 혁명을 계기로 진보주의적 공화주의 성향으로 전향했다.
- 아사누마 이네지로 : 특이하게도 젊었을 적 좌파 사회주의 성향이었으나 무산운동의 분열과 파시즘의 대두로 무산운동 내 중도파가 국가사회주의로 전향할 때 같이 전향해 극우 성향의 관변단체인 대정익찬회에 속해있었으나, 대정익찬회의 국가자본주의 성향에 회의감을 느끼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에 다시 좌파 사회민주주의 성향으로 전향했다.
- 오르반 빅토르 : 헝가리의 현 총리. 젊은 시절에는 청년민주동맹의 당수로서 반소련 민주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총리 취임 후 1기 때까지만 해도 친서방, 자유주의 정책을 폈으나 2기 때부터 우경화되고 반서방 기조를 펴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반자유주의, 극우적 지도자로 변모했다.
- 자크 도리오 : 젊을 적에는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나 이후 공산당과 SFIO와의 연대를 두고 당내 의견차로 인해 출당되었으며 이때부터 공산당에 반감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 극우 성향의 프랑스 인민당을 창설하며 완전히 전향했고 강력한 반공을 내세웠으며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비시 프랑스를 세운 후에는 매국노가 되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부역에 앞장섰다.
- 진 커크패트릭 :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젊었을 때 미국 사회당에서 활동했고 민주당에도 있었으나, 이후 전향하여 네오콘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고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외교정책 고문을 맡기도 했다.
- 카를로스주의 정통파 : 본래는 유럽의 다른 근왕파 세력처럼 보수주의 성향을 띄었으나, 원래부터 철저한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주도로 스페인 공산당과 연대한 것을 계기로, 정반대인 극좌 성향을 띄게 되어, 세계적으로도 흔치않은 좌파계열 왕당파가 되었다.
- 키몬 게오르기에프: 불가리아의 전 총리로, 흔치않게 두번이나 전향을 한 케이스다. 처음 정계에 입문했을때는 중도좌파 성향의 농본주의 정당인 농민연합에 몸을 담았으나, 이 당이 내분으로 공중분해되자 극우로 전향해서 즈베노라는 우익 정당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왕실이 친독, 친이탈리아 성향을 띄면서 추축국에 가담하자 이에 반발해서, 불가리아 공산당과 손잡고 불가리아 조국전선에 가담하면서 극좌 민주사회주의 성향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이 성향을 유지했다. 좌파에서 우파로, 다시 좌파로 전향을 했던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 프랑수아 미테랑: 젊은 시절에는 극우 단체인 크루아 드 푀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고, 부르봉 왕가의 복위 운동에도 참가하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로는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하면서 좌파로 전향하여 죽을 때까지 그 성향을 유지했다.
- 히피 :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무종교, 신비주의 등으로 빠져 들었다가 80년대가 되자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극단적 기독교로 전향한 이들이 꽤 있다. 덕분에 간증 사례를 무수히 쌓았다.
- 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 러시아 내전 초기 적군에 자원했으나 회의감을 느껴 백군 세력 니콜라이 유데니치 장군의 북서군에 합류하고 나중에는 폴란드와 협력해 벨라루스 재건국을 시도했다. 벨라루스 임시정부의 붕괴뒤에는 폴란드군에 입대했다.
- 인도 국민 회의: 민주사회주의 좌파 정당으로 시작했지만 시대가 지나며 차츰 온건화되더니 21세기에는 아예 자유주의 중도 정당이 되었다.
[1] 아돌프 히틀러 역시도 민주주의자를 나치 추종자로 만드는 것보다 공산주의자를 나치 추종자로 만드는 것이 쉽다고 한 적이 있다.[2] 치안유지법에 의해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를 사형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이건 상대적으로 우익계 독립운동 세력이 국내에 잔존할 수 있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익은 독립운동만 포기하면 되었지만, 좌익은 독립운동+좌익성향을 동시에 포기해야 일제에게 용납이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것은 일본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 법은 일제에서 적용하던 정부비판 봉쇄 목적의 긴급칙령을 법으로 업그레이드한거다.[3] 그깟 종이 1장이 뭐가 대수냐고 하겠지만, A를 믿는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나는 A를 믿지 않(으며 B를 믿)습니다'라는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종교에 비유하자면 절에 다니는 불교 신자를 개처럼 두들겨 패서 '나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교회가 진리이며, 불교는 사이비입니다!'라고 공개선언하게 강요한다고 생각해 보라.(반대 사례로는 신사참배라는 아주 좋은 예시가 있다.) 당대의 전향공작은 이런 식이었다. 인지부조화 문서로.[4] 뉴라이트의 정신적 대부인 이영훈은 1970년대에 서울대생 신분으로 위장 취업을 했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을 하자 그의 시체를 지키러 가장 먼저 빈소로 달려갔으며, 심지어 동창인 허수열 교수를 의식화시키려고 하다가 군대로 강제 징집을 당했던 강경한 운동권이었으나 1980년대 중엽부터 점차 그동안 신봉해오던 마르크스주의에 회의를 느끼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에서 극우파로 완전히 돌아섰다.[5] 그러나 김영환은 기존의 주체사상이 김일성 등의 북한 수뇌부들에 의해 변질되었다고 볼 뿐, 그 자신은 여전히 주체사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반북 성향 때문에 뉴라이트와 오월동주하고 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좌파 성향이다.[6] 이는 그가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정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7] 정확히는 2024년 현재 민주당계 정당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의석 수를 차지하는 더불어민주당을 예시로 들었을 때,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자유주의까지 당내 정치 스펙트럼이 분포되어있다.[8] 그런데 원정화가 진짜 남파 간첩이 맞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조작설의 최초 제기는 2014년 신동아 4월호, 가장 큰 비판자는 역시 탈북한 여동생과 양아버지.[9] 허나 그 이전에도 반공주의 성향이 짙은 불타는 그라운드라는 만화를 내놓는 등, 반공 좌파로서의 성향이 이미 존재했다.[10] 먼나라 이웃나라 유럽편 출간 당시에는 영국의 학벌과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었지만, 2000년대에는 서울대 총동창회보에 상고 출신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을 비하하는 만평을 그리는 등 엘리트주의 사상을 수용한 모습을 보였다.[11] MBC 전 사장 김재철, MBC 전 아나운서 한선교, MBC 전 기자 배현진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