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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치 극단주의(政治極端主義, political extremism)란 정치 영역에서 특정 이념이나 진영논리를 절대시하여, 기존의 제도적 절차나 합리적 규범을 거부하고 타협 불가능한 적대 관계를 전제로 한 급진적 행동으로 나아가는 정치 성향을 말한다. 이러한 성향은 극좌와 극우 등 정치 스펙트럼의 양극단에서 모두 나타날 수 있으며, 때로는 이를 완화하려는 중도주의 또는 극중주의와 대비된다. 정치 극단주의는 흔히 정치적 양극화(政治的兩極化, political polarization)의 심화와 연결되며, 민주주의의 안정성과 사회 통합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으로 간주된다.2. 상세
정치적 논쟁이 격화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이념이나 진영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적대감이 쉽게 나타나며, 이는 종종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 개인 간의 갈등으로 확산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자신이 속한 진영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상대 진영을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 극단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정치 극단주의가 심화될수록 합리적인 비판과 토론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정치인은 물론 그 지지자들까지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며 적대시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상대 진영뿐만 아니라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의견이 조금만 달라도 갈등과 분열이 발생하며, 사회 전반의 정치 문화가 점점 더 양극화되는 결과를 낳는다.다만, 단순히 상대 진영을 비난하고 자기 진영을 옹호한다고 해서 정치학적으로 곧바로 정치 극단주의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정치 극단주의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한 기준이 필요한데, 그 핵심적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체주의적 지향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수단으로만 이용하며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민주주의 자체를 억압하고 체제를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재편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둘째, 표현의 자유 훼손과 검열 옹호로, 자신들과 다른 의견이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이를 억압하거나 강제로 통제하려는 태도이다. 셋째, 타협의 전면 거부로, 정치적 협상이나 절충을 배신으로 간주하고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을 관철하려는 경향을 뜻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될 때 비로소 확실하게 정치학적으로 의미 있는 정치 극단주의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극단주의자들은 정치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수용하고, 인간적 면모나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지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들조차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중도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은 극단주의자들에게 양쪽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기 쉽다. 우파 극단주의자들은 이들을 '용공분자'나 '배신자'로 몰아붙이며, 좌파 극단주의자들은 '수정주의자' 혹은 '기회주의자'로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 냉전 시기뿐 아니라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중도적인 인물들은 양쪽 모두에게 공격을 받아 사실상 '동네북'처럼 취급되기 쉽다. 이는 자신의 진영과 조금이라도 다른 입장을 보이는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 극단주의의 배타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가령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세력 내부에서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과 견해가 조금이라도 다른 중도 좌파를 '가짜 페미니스트', '반환경 기회주의자' 등으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이념에 철저히 동조하지 않는다며 공격한다. 반대로 대안 우파(Alt-right) 세력 내부의 극단주의자들 역시 중도 우파를 '백인 사회의 배신자', '환경주의 음모론자' 등으로 낙인찍으며 적대시한다. 이는 결국 정치적 극단주의가 지닌 배타성과 순혈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이견을 보이는 세력까지 내부의 적으로 간주해 공격하는 전형적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미국의 문화 전쟁(Culture war)이 서구권 전체로 확산되면서 나타나는 세계 공통의 반(反)중도 현상으로, 정치의 양극화와 극단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현대 한국 정치에서도 정치적 극단주의의 양상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극좌 진영은 자신들의 노선과 조금이라도 다른 중도 좌파가 "미국 중심의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이중과세 논란이 있는 세법은 완화할 필요가 있다"와 같은 상식적인 주장을 해도 곧바로 '친일', '친기득권' 등의 낙인을 찍으며 배척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대로 극우 진영은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악법은 국민의 반발을 불러올 뿐이다", "군대와 회사의 유교적 폐습을 개선해야 한다"와 같은 실용적인 견해를 보이는 중도 우파에게 '종북', '사회주의자' 등의 딱지를 붙이며 공격한다.
이처럼 양 극단은 서로 다른 진영의 실용적·중도적 목소리를 적대시하고, 자신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동조하지 않으면 곧바로 '배신자'로 규정하며 배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서로 다른 정치 세력 간의 건설적인 논쟁과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정치 전반을 극단화시키며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특정 정치 성향, 정치적 진영, 혹은 정치인의 이름에서 비롯된 정치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멸칭이 다양하게 생겨났다. 이러한 비하 용어들은 서로 상대 진영을 향해 되돌려 사용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특정 사건이나 밈을 계기로 한쪽 진영을 지칭하던 호칭이 곧바로 정반대 진영에도 사용되곤 한다. 심지어 같은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도 의견이 조금만 달라지면 서로를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모습까지 나타난다.
3. 급진주의와의 차이
정치 극단주의와 급진주의는 종종 혼동되지만, 정치학에서는 이 두 개념을 구별한다. 두 개념은 목표와 방법, 타협에 대한 태도, 민주주의와의 관계 등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급진주의가 반드시 극단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역사적으로 급진주의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사례도 많다. 반면 정치 극단주의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부정하고 체제를 파괴하거나 장악하여 권위주의 혹은 전체주의 체제로 전환하려는 성향을 보인다.3.1. 정의의 차이
급진주의(Radicalism)는 정치와 사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운동을 뜻한다. 기존 제도의 일부를 유지하면서도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변화를 추구하며,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 반드시 전체주의나 독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설령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성격이 일부 동반되더라도 유럽의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 전쟁·잭슨 민주주의·노예 해방 운동, 초기 68혁명 운동처럼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기여한 사례도 많다.정치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는 특정 이념이나 진영논리를 절대화하고, 타협을 부정하며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정치 성향을 말한다. 민주주의적 절차나 규범을 거부하거나 도구적으로만 이용하며, 군사 쿠데타, 부정선거, 여론조작 등 반민주적 수단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성향은 결국 파시즘, 나치즘, 마르크스-레닌주의, 후기 마오주의 등 전체주의 체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된 현대의 연구로는 "Measuring political radicalism and extremism in surveys: Three new scales"(Jungkunz, Helbling, Osenbrügge, 2024)가 있다.[1] 이 논문은 두 개념을 명확히 구분한다. 급진주의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근본적인 사회·정치적 변화를 추구하지만 반드시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것은 아니며, 극단주의는 이러한 급진적 목표에 더해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려는 성향을 포함한다고 본다. 연구진은 이 차이를 실증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세 가지 설문 척도(scales)를 개발하고, 유럽과 미국의 대규모 설문 데이터를 통해 이를 검증했다. 그 결과, 두 개념은 통계적으로도 분리될 수 있으며, 정책 연구나 극단주의 예방 전략에서 두 집단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3.2. 목표와 방법의 차이
3.2.1. 급진주의
급진주의는 민주주의, 특히 헌법의 틀 안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단순히 현 체제의 부분적인 수정을 넘어, 시민권 확대, 보통선거권의 보장, 인권의 강화 등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추구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급진주의가 추구하는 변화는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거나 완전히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결점을 보완하고 그 이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다.이러한 특성 때문에 급진주의는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은 절대왕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며 근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인권 선언과 의회 제도는 이후 유럽 전역의 정치 변화를 촉진했으며, 근대 국가의 법치주의와 시민권 개념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세기 유럽의 급진민주주의 운동 또한 보통선거권과 의회 개혁을 통해 제한적이었던 정치 참여의 범위를 넓히고 노예제를 폐지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보다 널리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 지배층과 특권 계급의 권력을 견제하고 시민 사회의 정치적 발언권을 확대시킴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또 68혁명은 당시 유럽에 만연하던 근대 이데올로기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표현의 자유를 한층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급진주의가 반드시 좌파적 운동과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우파적 성격이 강했으나, 동시에 상기한 프랑스 혁명보다도 성공적인 시민혁명으로 평가된다. 또한 잭슨 민주주의는 근대적 대통령제와 자본주의 정신을 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유럽식 절대왕정과 귀족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하였고, 이후 민주주의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역시 기존 지배층과 특권 계급의 권력을 견제하고 일반 시민층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현대사의 사례에서도, 애국자법과 같은 권위주의적 성격의 악법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은 우파 성향이 강한 론 폴을 중심으로 한 우파 자유지상주의 세력이 주도하였다. 또한 현대 미국에서 보수주의와 정치적 올바름 진영에 의해 규제되기 쉬운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 역시, 이들의 견제와 활동 덕분에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측면이 크다.
급진주의는 민주주의적 보통 선거와 사회 운동을 결합하여 합법적이고 제도적인 경로를 중시했으며, 법률 제정, 대중 집회, 시민 저항 운동 등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였다. 폭력은 필요할 경우 사용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 제한되었고,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도 민주주의 절차를 존중하며 제도적 개혁을 이어가는 특징을 보였다.
또한 급진주의는 목표가 급진적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타협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19세기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이 보통선거권과 의회 개혁을 요구하며 점진적이고 합법적인 절차 속에서 변화를 모색했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에서도 다양한 정치 세력이 연정과 협상을 통해 정책을 실현하는 모습은, 급진적 요구가 반드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2.2. 극단주의
반면 정치 극단주의는 민주주의의 틀을 본질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를 단지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만 활용할 뿐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헌법 체제를 완전히 파괴하고 자신들의 이념으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치 극단주의 세력은 반대 세력을 단순한 정치적 경쟁자가 아닌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다양성과 다원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따라서 이들의 행위는 단순한 개혁 운동이 아니라, 기존의 정치 질서를 뿌리째 뒤엎고 자신들의 이념을 절대화하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적 절차와 규범은 완전히 무시되며, 폭력과 강압이 정치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된다. 정치 극단주의 세력은 명분이 부족한 유혈 혁명과 테러, 군사 쿠데타, 언론 검열과 여론 조작, 정치적 숙청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하고, 집권 이후에는 민주주의적 견제 장치를 철저히 제거하며 사회 전반을 강제적으로 통제한다. 이들은 집권 이전에는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 절차를 표면적으로 이용하여 합법성을 가장하지만, 일단 권력을 확보하면 민주주의를 철폐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절대화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나치 독일은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뒤 경쟁 정당을 불법화하고 반대 세력을 숙청하며 전체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파시스트 이탈리아 또한 의회를 무력화하고 일당 독재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마오쩌둥 시기의 중국에서는 대규모 정치 숙청과 문화대혁명을 통해 폭력과 사상 통제를 극단적으로 강화하였다. 이처럼 정치 극단주의는 민주주의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며, 표현의 자유와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결국 민주주의적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게 된다.
3.2.3. 종합
결국 급진주의와 정치 극단주의는 모두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공유하지만, 급진주의가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데 비해, 정치 극단주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권위주의 또는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급진주의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합법적이고 제도적인 경로를 통해 변화를 추구하며, 민주주의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민주주의 자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정치 극단주의는 민주주의를 단순히 권력 장악의 도구로만 이용할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한다. 따라서 정치학에서는 두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특히 정치 극단주의가 민주주의 체제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경계하고 그 확산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다만 급진주의는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종종 혁명이나 권위주의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언제든지 극단주의로 치달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그 본질 자체가 매우 논쟁적인 성격을 지닌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은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초기에는 인권 선언의 발표와 의회 제도의 도입을 통해 시민권과 자유가 확대되었으나, 급진화가 진행되면서 자코뱅파의 집권과 함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반대 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과 처형이 이루어지고, 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체제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혁명적 이상이 폭력과 독재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경고로도 인식된다.
또한 서부 개척시대의 잭슨 민주주의 역시 결과적으로 보통선거권 확대와 의회 개혁을 통해 제한적이었던 정치 참여의 범위를 넓혔고, 이를 통해 미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보다 널리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대통령의 초법적 권한을 강화하고, 멕시코 전쟁과 강력한 자본주의적 정책, 그리고 원주민 탄압을 추진함으로써 미국의 패권주의적 성격을 강화하였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평가를 두고 큰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전기 나폴레옹 혁명 역시 프랑스가 왕정 체제를 타파하고 급진적인 자유 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한 우파적 급진주의 운동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권력 확장을 위해 왕정의 상징인 황제에 즉위하고, 이후 무리한 전쟁을 감행한 시점부터는 그 행보가 정치 극단주의로 해석된다.
3.3. 현대: SJW와 대안 우파 담론
대안우파(Alt-Right)와 SJW(Social Justice Warrior, 사회정의전사)는 서로 다른 정치적 스펙트럼에 속하지만, 두 집단 모두를 일괄적으로 정치 극단주의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들은 서로를 극단주의로 규정하며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나, 각기 다른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그 성격과 활동 방식, 지향점 또한 다르다. 이에 따라 각각의 내부에서 일부는 민주주의의 범주 안에서 활동하기도 하지만, 다른 일부는 점차 극단화되어 정치 극단주의로 변질되기도 한다.대안우파는 서구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정치 흐름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미국에서는 인종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 등 여러 진영이 혼재되어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대, 전통적 가족 가치와 종교적 보수성의 수호,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강한 반발이 주요 결집 요인으로 작용한다. 반면 유럽에서는 보수주의와 민족주의적 색채가 더욱 강하게 드러나며, 유럽연합의 통합 정책이나 이민자 문제에 대한 반발, 그리고 각국의 전통적 정체성 수호가 중심 의제를 이루는 경향이 있다. 관점에 따라 동아시아 청년 세대의 우경화 현상 역시 이러한 흐름에 포함되기도 한다. 일부는 정당 활동이나 사회운동 등 합법적인 정치 활동에 머무르지만, 그중 일부 집단은 인종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혐오 선동을 기반으로 폭력적인 행동을 시도함으로써 극우 또는 정치 극단주의로 평가받는다.
반면 SJW는 본래 사회 정의와 평등을 옹호하며 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즘, 인권과 동물권, 소수자 권리 확대 등 진보적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뜻했으나, 현대에는 일부 세력의 과격한 언행으로 인해 비판적이거나 풍자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초기의 SJW는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사회운동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일부 세력이 점차 자신들의 가치관을 절대화하고 반대 의견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며, 나아가 언론과 창작물에 대한 검열을 시도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여론몰이와 정치적 압박을 통해 자신들과 다른 정치 세력을 도덕적으로 배제하려 하며, 이러한 경향이 심화될 경우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권위주의적, 나아가 정치 극단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내게 된다. 현대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즘 역시 이러한 흐름의 한 예로, 자신들의 가치관을 절대화하며 반대 의견을 억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 극단주의의 기준은 단순히 이념의 방향이 좌파인지 우파인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타협을 전면 거부하고, 반대 세력을 적으로 규정하며 제거하려 하며, 민주주의적 절차와 규범을 도구로만 이용하거나 아예 무시하는가가 핵심 판단 기준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안우파와 SJW 모두 집단 전체가 극단주의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 내부의 일부 세력은 민주주의적 질서와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고 적대적 행위를 강화함으로써 정치 극단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다만, 대안우파와 SJW 모두 급진주의의 범주에 속한다고는 볼 수 있다. 두 집단 모두 기존 제도나 사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요구 또한 매우 급진적이다. 급진주의 자체는 반드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활동하며 제도 개혁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요구가 지나치게 편향되거나 타협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흐를 경우, 급진주의는 쉽게 정치 극단주의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급진적 개혁 세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극단주의로 나아갈 가능성도 항상 내포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좌파냐 우파냐의 이념적 방향이 아니라, 해당 집단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절차를 존중하며 활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면서 정치 활동을 한다면 급진적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범주 안에 속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 자체를 거부하거나 파괴하려 한다면 좌우를 불문하고 정치 극단주의로 간주될 것이다.
4. 핵심적 특징
아래는 정치학적으로 확실히 정치 극단주의로 분류되는 세력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세 가지 핵심 특징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를 단순한 도구로만 활용하며, 궁극적으로는 전체주의적 체제를 지향한다. 둘째, 자신들의 이념이나 가치관을 절대화하여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고, 이를 명분으로 언론 통제와 검열을 옹호하거나 강화하려 한다. 셋째, 정치적 타협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자신들과 다른 집단을 단순한 경쟁자가 아닌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특징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되며, 현대 정치에서도 극단주의 세력을 식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된다.다만 정치학계에서는 극단주의의 정의와 기준을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어느 진영이든 전체주의를 지향한다면 이는 명백히 정치 극단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성향이 뚜렷하지 않을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해석 차이나 타협 거부의 정도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이로 인해 일부 정치학자들은 표현의 자유 제약이나 타협 거부 중 하나만 두드러지더라도, 그 맥락과 상황에 따라 정치 극단주의로 규정하기도 한다. 반대로 다른 학자들은 동일한 사례를 급진주의의 범주로 해석하며, 반드시 극단주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특정 집단이나 운동을 규정할 때에는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세 가지 특징이 모두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서 극단주의가 아니라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그중 하나가 부분적으로 드러났다고 해서 곧바로 극단주의로 규정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래의 서술은 세 가지 특징이 모두 뚜렷하게 나타나는 나치즘, 마오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4.1. 전체주의
정치 극단주의자들의 배타적 행태가 격화되면, 결국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을 망각하고 "우리와 생각이 다른 모든 세력을 말살해야 한다"거나 "우리가 지지하는 정당을 따르지 않는 지역과 단체는 모두 박멸해야 한다"는 식의 광신적인 전체주의 논리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특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대표적 사례로는 우파의 파시즘과 좌파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있다.정치 극단주의 세력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만, 필요할 때는 민주주의 제도를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선거, 의회, 정당 활동 등을 형식적으로 이용해 합법적인 정권 획득을 시도하지만, 일단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견제 장치를 해체하고 일당 독재나 지도자 숭배 체제로 전환한다. 즉, 민주주의는 그들에게 목표가 아니라 도구일 뿐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전체주의적 통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나치 독일이 선거 집권 이후 경쟁 정당을 불법화한 것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의회 해체 사건이 대표적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환경 속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인 규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나, 극단주의 세력은 대체로 이러한 절차를 거부한다. 다만 극단주의 세력은 쿠데타, 여론조작, 부정선거 등 위법적이고 반민주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사례도 많지만, 종종 정상적인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절차로 선출되었다 하더라도,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여론을 통제하며 정치적 경쟁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
이들은 이러한 행동을 대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주장하거나, 오히려 구국의 결단이나 과감한 행동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친다 해도 실제로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며, 민주주의의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를 옹호하고 표현의 자유와 여론을 통제한다. 그 결과,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쳤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지지자들이 이러한 여론 통제에 동조하게 되고, 결국 민주주의 자체가 내부로부터 붕괴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나치 정권의 선동가 괴벨스의 어록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는 국민의 정신을 형성하고, 여론을 감독할 절대적 권리를 가진다."
괴벨스, 1933년 3월 23일, 국가의회 연설
괴벨스의 이 발언은 국가가 단순히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수준을 넘어, 국민 개개인의 사상과 여론까지도 통제하고 주입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체주의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가 국민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언론과 문화, 교육 등 모든 영역을 국가가 장악하여 하나의 이념만을 주입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며, 결국 국민을 독립적 개인이 아닌 국가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이와 같은 이념 아래 대규모 검열과 선전 활동을 통해 여론을 통제하며, 반대 의견을 철저히 억압하고 국민을 전쟁과 학살에 동원하였다.괴벨스, 1933년 3월 23일, 국가의회 연설
극단주의 우파 진영이 전통을 근거로 전체주의를 주장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특정 종교, 민족, 국가의 전통을 절대적 가치로 신성화하며, 이를 수호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강제적 동원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전통은 본래 다양하고 유연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극단주의자들은 이를 하나의 경직된 이념으로 단순화하고, 그에 따르지 않는 모든 사상과 문화를 '퇴폐적' 혹은 '반전통적'으로 낙인찍는다. 그 결과 전통의 보호라는 명분 아래 언론, 예술, 학문까지 통제하게 되며, 국민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강압적 질서 속에서 획일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나치 독일이 게르만 민족의 전통과 우월성을 강조하며 전체주의를 확립한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극단주의 좌파 진영 역시 자신들의 사상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며, 이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을 반혁명 세력 혹은 계급의 적으로 규정한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인민 해방과 평등을 명분으로 시작된 운동이 시간이 흐를수록 내부의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숙청하는 방향으로 변질된다. 결국 좌파 극단주의는 사상적 순수성을 유지한다는 명목 아래 비판과 다양성을 철저히 억압하며, 스스로가 반대하던 권위주의 체제와 동일한 형태의 전체주의로 퇴행하게 된다. 이는 스탈린 시대의 대숙청, 마오쩌둥 시기의 문화대혁명, 그리고 현대 일부 좌파 정권의 언론 통제 등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패턴이다.
4.1.1. 교조주의
교조주의란 자신이 믿는 교리나 이념만을 절대적 진리로 규정하고, 그 외의 가치나 관점은 모두 틀렸다고 단정하며 다원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확신이나 신념을 넘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생각과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믿는 체계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특징을 가진다. 이 때문에 교조주의는 종교적 교리뿐만 아니라 정치, 철학, 도덕, 사회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으며, 특히 집단주의적 성격을 띨 때 그 영향력이 매우 강력해진다.이러한 교조주의는 주로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에게서 나타나며, 특정 이념이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모든 사상과 의견을 부정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는 파시즘이나 독재적 공산주의 같은 전통적인 전체주의 체제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대안 우파와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같이 서로 대립하는 진영들 내부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즉, 극좌와 극우를 불문하고 어느 한 진영이 자신의 가치관을 유일한 진리로 규정하고 이를 강요하기 시작하면, 그 지지자들은 상대 진영을 악으로 규정하고 타협을 거부하며, 결과적으로 사회의 다원성과 자유로운 공론장을 심각하게 훼손하게 된다.
교조주의자의 인식 구조는 폐쇄적이며,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대화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논쟁 속에서 반대 논리에 직면하면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즉각적으로 배척하거나 무시하며, 심지어 이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향은 종종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로 나타나며, 논리적 토론보다는 감정적 분노, 침묵, 혹은 집단적 무시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곧 다양성과 자유로운 토론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사회 전체의 소통 구조를 경직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치적 맥락에서 교조주의는 특히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교조주의적 집단은 자신의 이념을 국가와 사회의 절대 기준으로 삼으며,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상과 제도를 제거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법과 제도는 수단화되고, 권력은 특정 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 결과,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다원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단 하나의 이념만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질서로 기울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교조주의는 전체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있어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로 평가된다.
4.2. 표현의 자유 반대
정치 극단주의는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위험 요소로 간주하며, 이를 억압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강력한 검열 체제를 구축한다. 이는 단순히 정치 선동만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학문 등 모든 영역에서 사상의 다양성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그 결과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 기반인 자유로운 여론 형성이 불가능해지며, 국민들은 특정 이념만 주입받는 폐쇄적 환경 속에 놓이게 된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언론을 검열하고, 여러 극단주의 정권들이 출판 및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대표적이다.이러한 표현의 자유 억압과 검열 강화는 정치 극단주의가 권력 유지와 지지층 결집을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이다. 다양한 의견과 비판이 존재하는 환경에서는 권력의 정당성이 끊임없이 도전을 받게 되므로, 극단주의 정권은 이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려 한다. 이를 위해 언론을 장악하고, 정부 비판적인 매체를 '가짜 뉴스'나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여 탄압하며, 출판물이나 인터넷을 강력하게 통제한다. 나아가 교육과 학문 영역까지 지배해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고 특정 이념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가르침으로써, 국민들을 체제에 순응하는 도구적 존재로 만들어 간다.
이 과정에서 문화와 예술 역시 검열의 대상이 된다. 정치 풍자와 실험적 예술 등 체제에 불리하거나 불편한 메시지를 담은 표현들은 금지되거나 축소되고, 대신 정권의 이념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콘텐츠가 장려된다. 대표적인 예시로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시기의 문화대혁명 당시, 정부가 예술·학문·언론 전반을 통제하며 사상의 일원화를 강요했다.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며, 모든 예술과 문화가 당의 정치 목표를 위해 봉사해야 함을 강조했다.
"모든 예술은 정치의 도구이며, 문화는 혁명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마오쩌둥, 1942년 옌안 문예좌담회 연설
마오쩌둥의 해당 발언은 예술과 문화를 인간의 자율적 창작 활동으로 보지 않고, 철저히 정치 권력의 하위 도구로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는 곧 예술가와 지식인이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부정하고, 권력에 복무하지 않는 창작물을 억압하거나 검열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실제로 1942년 옌안 문예좌담회 이후 중국 공산당은 모든 문학·예술 활동을 당의 이념 아래 통제하였으며, 당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창작물은 반혁명적이고 반국가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철저히 금지했다. 이처럼 정치가 문화 전반을 통제하는 구조는 사회 전반의 창의성을 억누르고, 표현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말살하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마오쩌둥, 1942년 옌안 문예좌담회 연설
이러한 사상은 현대 동아시아 좌파 진영에도 깊게 뿌리내려, 오늘날까지도 검열과 표현 통제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좌파 운동 일부가 자신들의 정치적 가치관을 절대화하고, 반대 의견이나 비판적 콘텐츠를 '해악적인 것', '사회 질서를 해치는 것'으로 규정하며 억압하려 드는 행태는 바로 이 사상적 유산의 연장선에 있다. 특히 인터넷과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검열 욕구가 법률 제정, 온라인 여론 규제, 콘텐츠 삭제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동아시아 정치 문화가 여전히 마오 시대의 잔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는 인민의 주권과 해방을 강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음에도, 북한의 주체사상이 오히려 그 어떤 이념보다도 강력한 전체주의와 검열 체제로 귀결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정치 극단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과정에서 예술뿐만 아니라 대중 오락과 대중 매체 역시 강력한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비판을 차단하기 위한 데 그치지 않고, 국민이 체제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도록 일상적인 즐거움과 문화적 소비까지 철저히 통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나아가 이러한 검열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도덕 규범을 국민에게 강요하며, 정권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포장해 국민의 복종을 유도한다.
나치 독일은 영화를 선전 도구로 활용하며 오락 영화마저도 나치 이념을 은연중에 주입했으며, 소련은 스포츠와 음악조차 당의 노선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상기한 마오쩌둥 시기의 중국 역시 문화대혁명 동안 전통극과 대중가요를 금지하고, 혁명가와 선전극만을 허용하여 국민들이 당이 허락한 세계 안에서만 오락을 누리도록 강요했다. 이는 현대 중국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영화·게임·인터넷 콘텐츠 등 대중문화 전반이 국가의 검열 아래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국민의 사고를 다양성 없는 단일한 가치관에 가두며,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대중문화 영역까지도 권력 유지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검열과 사상 통제의 결과 사회는 점차 단일한 세계관으로 수렴하게 되며, 다양한 관점과 창의적인 사고가 사라진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자유로운 여론 형성과 비판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결국 국민들이 체제의 허위 정보에 길들여지는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4.2.1. 자기검열의 유도
또한, 표현의 자유 탄압은 단순히 정부나 특정 집단이 언론을 직접적으로 검열하거나 통제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유언비어 유포, 정치적 폭력, 협박, 사회적 낙인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발언을 자제하게 되는 '자기검열의 유도' 또한 포함된다. 이러한 간접적 억압은 공식적인 법률이나 제도를 통한 검열보다 더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 탄압을 논할 때에는 법적·제도적 검열뿐만 아니라 정치적 폭력, 위협, 경제적 불이익, 사회적 압박 등 비가시적 억제 메커니즘 전반을 포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현대 사회에서는 우파 정치권뿐만 아니라 좌파 정치권 역시 오랜 역사와 세력 확장을 거치며 기득권화되었다. 이에 따라 두 진영 모두 반대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치적 폭력과 경제적 압박을 동원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직접적인 법적 제재가 아닌 사회적 불이익과 경제적 보복을 통해 반대 진영 인물들이 스스로 발언을 자제하도록 만드는 자기검열을 유도하며, 결과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훼손하는 원인이 된다.
정치적 압박의 방식으로는 세무 조사, 각종 인허가 지연, 공공사업 배제 등 행정 권한을 이용한 압박이 있다. 또한 법률 개정이나 수사기관 동원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거나 위축시키는 방식도 활용된다. 경제적 압박의 방식으로는 기업 광고 불매 운동이나 후원 철회와 같은 경제적 보복이 대표적이다. 또한 특정 인물이나 단체를 고립시키기 위해 취업 기회 제한, 계약 해지, 투자 철회 등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방식도 사용된다.
자기검열을 유도하는 방식은 정치권을 넘어 민간 영역에서도 존재한다. 최근에는 SNS와 유튜브 등 온라인 매체의 확산으로 인해, 소위 '음모론'과 '온라인 마녀사냥'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음모론을 활용하는 방식은 유언비어와 음모론을 대량으로 퍼뜨려 자신에게 반대하는 진영의 발언을 왜곡하거나 그 신뢰성을 훼손함으로써, 사실상 민주주의적 절차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전략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같은 진영 내부의 인물들까지도 자기검열로 몰아간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이러한 전략은 주로 대안 우파 내 극우 진영에서 활용된다.
반면 온라인 마녀사냥은 유명인, 창작물, 문화행사, 상품 등을 대상으로 의도적으로 '공론화'라는 명목 아래 대규모 논란을 일으키고, 직접적인 법적 제재 대신 사회적 압력과 낙인을 가해 자발적인 자기검열이나 온라인 반달리즘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 명분을 앞세워 허위사실을 퍼뜨림으로써 문화적·사상적 다양성과 창작 활동을 억압하게 되며, 그 폐해가 매우 크다. 이러한 전략은 주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중시하는 극좌 진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 두 진영이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왜곡·과장 선동을 벌이면서 사회 전반에 가짜 뉴스가 범람하게 된다. 이러한 정보 혼탁은 사실과 허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 일반 시민들이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하며, 사회적 신뢰를 급격히 약화시킨다. 그 결과 갈등은 더욱 격화되고, 민주주의적 의사소통의 기반이 무너져 사회 전반에 심각한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4.3. 타협 거부
정치 극단주의자들은 타협을 적과의 영합이나 배신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격화한다. 따라서 반대 세력을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협상을 거부하며 폭력이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억압한다.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 다양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합의와 조정 메커니즘을 붕괴시킨다.정치 극단주의가 타협 거부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정치 제도 자체가 무력화된다. 의회, 선거, 사법 체계와 같은 민주주의적 절차는 더 이상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장치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성향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레닌은 혁명 이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타협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오직 계급투쟁을 통한 절대적 승리만을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타협하지 않는다. 타협은 계급 간의 화해를 뜻하기 때문이다. 계급은 화해할 수 없으며, 오직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만 하나가 살아남는다."
블라디미르 레닌, 국가와 혁명, 1917년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계급 간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며, 혁명 이후에도 부르주아 계급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어록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정치적 협상을 인정하지 않고, 혁명 이후에도 반대 세력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극단적 입장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블라디미르 레닌, 국가와 혁명, 1917년
이러한 타협 거부 성향은 단순히 구(舊) 봉건 질서나 기존 지배 계급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체제에서는 일반 시민들까지도 사상적으로 철저히 분류하고, 조금이라도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지니거나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되면 적으로 규정했다. 그 결과, 혁명 정권은 계급 적대라는 명목 아래 반대파 정치인은 물론이고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까지 숙청하거나 강제 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계급 해방이라는 혁명의 본래 목적을 벗어나, 결국 사회 전체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탄압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대숙청과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의 '사상 개조' 운동이 그러한 극단적 사례이다.
레닌의 타협 거부 성향은 그의 사후에도 소련의 정치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며, 이는 스탈린 집권 이후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하였다. 스탈린은 당내의 모든 반대파를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고 협상이나 공존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며, 철저한 폭력과 공포 정치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 결과 1930년대의 대숙청에서는 수많은 공산당 간부, 지식인, 일반 시민들이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이러한 탄압은 동구권으로 확산되어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도 정치적 숙청과 대규모 대학살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체제는 이후 북한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쳐,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일인 독재 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소비에트 연방은 내전과 대숙청을 거치며 하나의 이념과 당만이 지배하는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고, 이는 정치적 다양성과 타협의 가능성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상기한 마오쩌둥 등 동구권과 제3세계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타협을 통한 점진적 개혁 대신, 반대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는 정치적 숙청과 일당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처럼 정치 극단주의에서 타협 거부는 단순한 전술적 선택이 아니라, 체제의 존립을 위한 필수 요소로 기능하며, 민주주의적 절차와 정치적 다양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4.4. 식별 방법
정치적 성향을 분석할 때, 특정 집단이나 운동이 정치 극단주의(Extremism)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처한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전체주의 성향의 강도이다. 만약 특정 집단이 민주주의적 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권력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려는 전체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면, 그 집단은 맥락과 관계없이 정치 극단주의로 분류된다. 전체주의는 자유주의적 질서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추가적인 조건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반면, 전체주의 성향이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뚜렷하지 않은 경우에는 보다 세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이때 두 번째로 중요한 판단 요소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태도이다. 만약 해당 집단이 검열, 언론 통제, 정치적 보복, SNS 선동 등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면, 비록 명시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지향하지 않더라도 그 행위 자체가 정치 극단주의의 핵심 특성과 일치하므로 정치 극단주의로 간주할 수 있다.
다만 전쟁이나 테러 등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일시적인 표현의 자유 제한이 법적으로 정당화된다. 따라서 "영구적이고 포괄적인 제한"을 옹호할 때만 이를 정치 극단주의로 판단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더 정밀하다. 물론 이는 기존 체제가 단순히 이미 발생한 심각한 안보 위협에 대응하거나, 제2차 세계대전처럼 전체주의 연합 정권에 맞서 해방전을 수행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반대로 기존 권력이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고 독재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안보 위협을 선동했다면, 그 행위 자체는 이미 내란죄 혹은 외환유치죄로 판단되어 전체주의적 행위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체주의 성향이 약하고,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며 검열에 반대하는 집단이라면 보다 복잡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 경우에는 해당 집단이 기존 정치권과 타협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그 사회가 비교적 온건하고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주의 제도가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집단이 기존 정치권과의 타협을 강력히 거부하고 정치적 갈등을 확대시킨다면, 이는 제도적 질서를 부정하는 행동으로 간주되어 정치 극단주의로 분류된다. 즉, 평화적 경쟁과 타협이 가능한 환경에서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 사회가 극우·극좌 세력이 지배하거나, 심각하게 경직된 권위주의 체제가 유지되어 정치적 자유가 거의 없거나, 혹은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작동하더라도 사회적 관습이나 지배적 이념으로 인해 부당한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기존 정치권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행동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경우 타협 거부는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위주의적 지배를 타파하고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투쟁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급진주의 개혁 운동으로 해석되며, 정치 극단주의와는 구분된다. 즉, 동일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정치적 맥락에 따라, 민주주의를 해체하려는 극단주의적 시도로 볼 것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급진적 개혁 시도로 볼 것인지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정치적 행동을 평가할 때는 단순히 수단이나 강경성만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그 사회가 민주주의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지, 그리고 해당 집단의 행동이 기존 체제의 자유를 무너뜨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개선하려는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정치 극단주의와 급진주의 개혁 운동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구분 기준이 존재하더라도, 상기했듯이 무엇이 진정한 표현의 자유이며 무엇이 그 사회의 권위주의적 악법이나 분위기인지는 정치 집단마다 상이한 해석을 보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논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어떤 운동이 급진주의인지 극단주의인지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워지며, 특히 대안 우파와 정치적 올바름 진영처럼 스펙트럼이 넓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운동을 평가할 때는 학자들조차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더욱이 현재 진행 중인 운동의 경우 그 결과와 영향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해야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5. 부수적 특징
아래에서는 앞서 언급한 세 가지 핵심 특징 외에, 정치 극단주의 진영에게서 비교적 자주 나타나는 부수적인 특징들을 나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보조적 성격에 해당하며, 급진주의 운동이나 심지어 중도 진영에서도 일부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의 요소들은 극단주의로 비화하기 쉬운 징후이긴 하지만, 그 존재만으로 상대를 극단주의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오히려 정치적 갈등과 논쟁을 더욱 격화시킬 수 있으므로, 맥락과 행태 전반을 함께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즉, 사람들이 극단주의를 비판할 때 자주 언급하는 권위주의, 민족주의, 포퓰리즘, 갈등 조장, 유혈 혁명 등은 극단주의와 결합하여 그 성격을 강화하거나 표출하는 부수적인 속성일 뿐이다. 아래의 요소들은 극단주의가 자주 드러나는 표현 방식이나 전략으로는 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곧 극단주의를 정의하거나 구분하는 핵심적 기준은 아니다. 따라서 특정 집단이 권위적이거나 민족주의적, 나아가 혁명적 성향을 띤다고 해서 반드시 극단주의로 단정할 수 없으며,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이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가, 그리고 타협과 공존의 가능성을 인정하는가와 같은 본질적 기준을 먼저 살펴야 한다.
다만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그 정도와 방향에 따라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며 극단주의를 부추길 가능성이 항상 공존한다. 따라서 심각한 독재나 기형적인 반(反)자유 체제에서는 아래의 요인들이 강화되는 상황이 일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온건한 체제에서는 이러한 사상과 운동이 과도하게 팽창하지 않도록 경계하며, 갈등이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꾸준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특정 이념을 억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원주의적 공론장을 유지하며 서로 다른 가치와 의견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5.1. 권위주의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는 정치 권력이 소수 엘리트나 특정 집단에 집중되어, 다수의 국민이 정치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제한된 자유만을 허용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권위주의 체제는 반드시 완전한 독재나 폭압적인 형태만을 뜻하지는 않으며, 일정한 질서와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제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예컨대 간접민주주의, 규제, 공교육, 군대, 관료제 등 근대 이후 국가의 필수 요소들은 불가피하게 일정 수준의 권위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국가 비상사태, 전쟁, 대규모 재난 상황과 같은 극한의 위기에서는, 평소에는 반권위주의적 성격을 지닌 국가라 하더라도 신속한 의사결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정부가 일시적으로 권력을 강하게 집중시키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요소는 그 자체만으로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 즉, 권위주의는 특정 상황에서 국가의 존립과 안정,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의 유지와 수호를 위해 불가피하게 활용될 수 있는 도구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권위주의가 상시적이고 구조적인 특징으로 굳어지면, 정치권력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다원주의의 축소로 이어진다. 이러한 권력 집중은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제한하고,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제도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정치적 긴장과 갈등을 심화시킨다. 특히 권위주의 체제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념적·종교적 정당성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단순한 통치 구조를 넘어 시민의 사고방식까지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단계에서는 권위주의가 단순히 행정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띠게 된다.
문제는 권위주의가 교조주의와 결합할 때 발생한다. 앞서 언급한 교조주의가 특정 이념이나 가치만을 절대적 진리로 규정하고 다원성을 부정하는 성격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교조주의가 권위주의와 만날 경우 '교조주의적 권위주의'가 형성된다. 이는 곧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귀결되기 쉽다. 교조주의적 권위주의는 단순히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국가 권력이 사회 전반의 사상, 문화, 표현의 자유를 철저히 통제하며, 다른 가치와 의견을 존재 자체로 부정한다.
역사적으로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권위주의가 교조주의와 결합해 전체주의로 발전한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는 시민의 자율성과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 체제로 이어졌다. 따라서 권위주의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불가피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교조주의와 결합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의 핵심 과제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유와 민주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여 다른 가치나 체제를 철저히 배제하고, 이를 국가 운영의 유일한 기준으로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와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의 경우, 이를 교조주의적 권위주의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와 극단적 자유지상주의는 그 성격상 항상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1세가 있으며,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앤드루 잭슨과 배리 골드워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권위주의적 체제와 강력한 카리스마, 그리고 뚜렷한 철학적 신념을 바탕으로 반대 세력을 억누르면서도, 동시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대시킨 대표적인 지도자들이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항상 열렬한 추종과 강한 반대가 뒤얽히며,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성격을 띤다. 가령 현대에는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대표적인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자로 거론되며, 그가 진정한 강경 우파 자유지상주의자인지 아니면 권위주의적 초보수주의자인지를 두고 아메리카권에서 끊임없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삼아 이를 강제로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권위주의적 태도는, 때로는 급진적인 자유 확대 운동이나 민주주의 확산 운동의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예컨대 전체주의 체제나 강력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강제력을 동원하고 자유주의적 제도를 강제로 이식하는 방식은 외형적으로는 교조주의와 유사하게 보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반을 넓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와 극단적 자유지상주의를 교조주의적 권위주의로 단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적 맥락과 그 결과를 함께 고려해야 하며, 그 평가는 항상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5.2. 포퓰리즘
포퓰리즘(대중주의, Populism)은 현대 사회에서 종종 극단주의와 동의어처럼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그 자체가 가치판단을 담지 않는 학술적 용어이다. 포퓰리즘은 본래 '엘리트 대 대중'이라는 대립 구도를 중심으로,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해 대중의 감정과 요구를 직접 호소하는 전략을 뜻한다. 따라서 포퓰리즘 자체는 반드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며, 어느 정치 체제나 이념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중립적인 정치적 현상이다.포퓰리즘은 단순히 극단주의 세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개선을 요구하는 급진주의 운동의 범주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확대, 인권 보호, 제도 개혁 등 긍정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정치적 동력으로 전환하며 기존 엘리트 권력을 비판하는 전략이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을 곧바로 극단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부정확하며 주의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가치와 목표를 위해 사용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협과 다원성을 존중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중의 흑백논리적 사고와 결합할 경우, 포퓰리즘은 쉽게 극단주의와 영합하게 된다. 지도자가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정당한 구호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이끌고, 복잡한 정치 문제를 단순한 선악 구도로 해석할 때, 이는 대중에게 즉각적인 설득력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다원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이 과정에서 포퓰리즘은 대중의 직접적인 지지를 동력으로 삼아 반대 세력을 악마화하고, 타협과 절차를 배제한 강압적인 정치 전략으로 변질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포퓰리즘은 이러한 이유로 극우와 극좌 양측 모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왔다. 극우는 전통과 안정,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대중을 결집시키고, 극좌는 평등과 약자 보호를 내세워 사회적 변혁을 촉구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목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진영은 모두 포퓰리즘적 전략을 통해 대중의 분노와 불만을 정치적 힘으로 전환한다. 결국 포퓰리즘은 본래 중립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주의의 선동 도구로 자주 사용되며, 이로 인해 그 본래 의미가 왜곡되고 극단주의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극단주의 진영의 포퓰리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무리한 확장 재정과 높은 세금을 통해 복지를 과도하게 확대하는 방식이다. 이는 주로 좌파 극단주의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으로, 합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정책보다는 다수층의 인기와 약자 보호를 강조하는 감성적 호소에 치중하여 정치적 지지를 강화한다. 둘째는 사회적으로 공감을 얻지 못하는 특정 좌파적 의제들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이 두 번째 형태는 주로 우파 극단주의 세력이 동원하는 전략으로, 대중의 분노와 불안을 자극해 정치적 지지를 강화한다.
좌익 포퓰리즘을 과도하게 활용하여 국가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을 초래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베네수엘라, 브라질을 비롯한 여러 남미 국가들, 그리고 복지 확장과 재정 부담의 균형을 잃고 아프리카 시장을 상실하자 급격히 몰락하고 있는 프랑스가 있다. 반면, 우익 포퓰리즘을 지나치게 활용하여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이 심화된 사례로는, 대안 우파의 극우적 발언과 선동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며 혼란을 키운 현대 미국과 영국 등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포퓰리즘이 어느 진영에서든 균형 없이 남용될 경우, 국가의 안정성과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포퓰리즘 자체가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은 우파 진영이 간과하기 쉬운 사회적 불평등이나 경기 순환의 문제를 드러내거나, 좌파 진영의 이상론과 선민의식을 비판하고 견제함으로써 대중의 의지를 신속하게 정치에 반영하는 데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비교적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현실 선진국들의 정치에서는 이러한 순기능보다, 대중의 감정을 과도하게 자극하거나 왜곡하여 극단주의 세력의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포퓰리즘의 영향력을 평가하고 수용할 때에는 특별한 주의와 경계심이 요구된다.
5.3. 지역/세대/성별 갈등 조장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 집단이나 정당, 정치인을 지지하지 않으면 전부 비난의 대상이다. 특히 선거별 특정 세대, 성별의 지지율이 높고 낮음에 따라서 특정 연령대의 세대나 특정 성별을 증오하거나 비하, 혐오한다. 이는 전술한 반지성적 배타주의와 관련있다. 이들은 정책을 보거나 상대의 투표권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뽑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뽑지 않았다는 것은 비방의 대상될 뿐이다.6. 지지자들의 특징
정치 극단주의 지지자들은 여러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먼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세력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어 비판을 전혀 수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비판 자체를 배신으로 간주한다. 또한 세상을 흑백논리로만 해석해 자신들의 진영은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 진영은 악이라고 규정하며, 중도나 타협을 주장하는 이들마저도 비겁자나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나아가 정치 집단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며 그 집단의 승패를 자신의 가치와 존재와 동일하게 여기고, 현실의 다양성을 보지 못한 채 편향된 정보만을 소비하며 음모론과 마녀사냥을 신봉하기 쉽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정치 참여는 논리와 정책 이해가 아닌 감정과 분노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더욱 격화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또한 단순히 특정 정치권을 강하게 대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상이나 집단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이들 역시 주의가 필요하다. 이들은 스스로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자신도 모르게 반(反)자유적인 극단주의 정치관을 내면화하고 있다. 겉으로는 이성적인 비판처럼 보이더라도, 그 속에는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편향된 사고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정치적 극단주의를 더욱 은밀하고 교묘하게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파시즘과 마르크스주의 모두에 대한 반감이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더욱 쉽게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우익 자유주의 사상을 전부 약육강식으로 싸잡아 비판하는 자들은 십중팔구 극좌적 정치적 올바름을 내면화한 경우가 많으며, 반대로 좌익 자유주의 사상을 모두 공산주의로 몰아붙이는 자들 역시 대체로 극우적 대안우파의 정치관을 내면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6.1. 정치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무지
또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치 극단주의 지지자들의 다수는 실제로 정치학이나 정치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난다. 겉으로는 강한 신념과 확신을 드러내지만, 정작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학문적 지식이나 논리적 근거가 매우 빈약한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히 특정 이슈에 대한 무지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 제도나 정책의 작동 원리, 역사적 맥락 등 기본적인 정치 지식조차 부족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입장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 결과, 이들은 복잡한 정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흑백논리로만 바라보며,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경향을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 극단주의가 단순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빈곤과 비판적 사고 능력의 결여에서 비롯된 심리적·사회적 현상임을 보여준다.이러한 행태를 설명할 수 있는 심리학적 개념 중 하나로 더닝 크루거 효과가 있다. 이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도, 그 부족함 때문에 자신의 오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현상을 말한다. 이를 정치 상황에 적용해 보면, 정치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이 잘못된 결론을 내린 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한 확신에 사로잡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메릴랜드 대학교의 연구자 이언 앤슨(I. G. Anson)이 2018년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정치 지식이 평균 이하인 응답자일수록 자신의 정치 이해 수준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2] 연구팀은 미국 성인 남녀 2,60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해 정치 지식을 테스트했는데, 그 결과 성적이 낮을수록 자신의 정치 지식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 특정 정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정치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할수록 모순을 인지하거나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오히려 광신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반대로 정치적 지식이 깊을수록 다양한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 극단주의적 행동으로 치닫기 어렵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마이클 호그(M. A. Hogg) 교수의 저작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사회심리학에서 정체성과 범주화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정치 극단주의와 관련된 다수의 성과를 내며, 극단주의자들의 심리 상태를 연구하는 권위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저서 Extremism and the Psychology of Uncertainty는 정치적 극단주의가 불확실성과 인간의 심리적 욕구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연구로 꼽힌다.
6.2. 개인적 경험이나 도덕관을 일반화
개인적 경험이나 도덕관을 일반화하는 것은 주로 극단주의 지지자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성향으로,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경험이나 개인적으로 형성한 도덕적 판단을 사회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들은 정치학이나 정치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복잡한 사회 구조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체험한 좁은 범위의 사건들과 도덕관념을 정치적 진리로 확정짓는다. 그 결과, 다양한 계층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 현실을 하나의 단순화된 도식으로 바라보게 된다.극단주의 지지자들은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타협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논리는 체계적이거나 정제되지 않고, 종종 비약적이며 감정에 치우친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 결과 대화는 상호 이해와 합의가 아니라 일방적인 주장과 반복적인 선동으로 변질되며, 이는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고 건설적인 정치적 토론의 가능성을 더욱 약화시킨다.
극단주의 운동에서 이러한 성향은 특히 위험하다. 개인적 경험과 도덕관의 일반화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흑백논리적인 선악 구도로 재단하게 만든다. 그 결과,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극단적 사고가 강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인 다원성을 파괴하며, 정치적 폭력과 권위주의적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
6.3. 자아와 현실의 동일시
이러한 태도는 종종 폐쇄적인 자아와 결합하여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이 곧 세상의 본질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에게 납득되지 않는 정치적 입장이나 타인의 가치관을 왜곡되거나 악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주장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내세우며 강요하게 된다. 이는 갈등 상황에서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정치적 논쟁을 합리적 토론이 아닌 감정적 대립으로 격화시키는 원인이 된다.즉, 이들은 자신의 자아와 진실을 동일시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 자신의 생각과 도덕관념이 곧 객관적 사실이며 보편적 진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나 가치관을 전부 거짓이자 악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의 주관적 인식을 절대화함으로써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극단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강화한다.
특히 대부분의 나라에서 극우는 안정과 전통 도덕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며 이에 집착하고, 극좌는 평등과 약자 보호를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며 집착한다. 이러한 태도는 언뜻 보기에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다른 사상을 지닌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게 만든다. 그 결과, 복잡하고 다층적인 정치철학으로 이해해야 할 세상을 단순한 흑백논리로 축소시켜, 정치적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고 사회적 대립을 심화시킨다.
만약 이 세상에 정치적 윤리란 게 있다면(...) 그것은 이십 세기의 세상사를 무자비한 이중의 판단으로서 처리한다는 것이다. 즉 보수와 진보, 온실과 거리, 보수는 과거의 온실 속에만 갇혀서 살고 일할 수 있는 반면, 진보는 거리에서 대중들의 폭력을 이용해 그들의 사업을 추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미래에의 환상만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러면 진정한 현재, 즉 정치에 참여하지 않던 사람들과 한때 존경받던 중용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이런 양극단만 존재하는 서구 세계에서는 오래지 않아 고도로 '정신 이상적인' 대중이 나타나리라고 추측된다.
토머스 핀천의 소설 『V.』(1963)
결론적으로, 정치 극단주의 지지자들은 본질적으로 흑백논리적 자아를 바탕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중립적 입장'이나 '중도적 견해'를 이해하는 능력이 인지적 차원에서부터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세상을 오직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중립적 태도나 다양한 시각을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합리적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적의 편에 서는 행위로 간주한다. 좌파 극단주의자에게 중도는 기득권을 옹호하거나 약자를 탄압하는 세력으로 인식되고, 우파 극단주의자에게 중도는 비겁하거나 배신적인 세력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정치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도를 악마화하게 되며, 그 결과 정치적 타협과 조정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차단되고 갈등은 점점 격화되어, 사회는 극단적인 대립 구도로 빠르게 치닫게 된다.그러면 진정한 현재, 즉 정치에 참여하지 않던 사람들과 한때 존경받던 중용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이런 양극단만 존재하는 서구 세계에서는 오래지 않아 고도로 '정신 이상적인' 대중이 나타나리라고 추측된다.
토머스 핀천의 소설 『V.』(1963)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고 맹목적으로 도덕적이지 않다며 비난을 퍼붓는 태도 역시 이러한 현상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들이 정도를 모르고 폐쇄적인 사고에 갇혀 스스로 확신에 찬 비약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논리를 만들어내며, 이를 끊임없이 온라인 공간에 퍼뜨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행위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온라인 여론을 왜곡시키며, 나아가 사회 전체의 건전한 공론장을 무너뜨리는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또한 틀린 점을 지적받더라도 이를 겉으로만 수용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자신의 폐쇄적인 자아에 근거한 왜곡된 주장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앞서 언급한 개인적 경험의 일반화와 비대한 자아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끝없이 다른 방향으로 왜곡을 이어가며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형성한다.
6.4. 흑백논리와 악마화
정치 극단주의 지지자들은 세상을 철저히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로 인식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은 절대적으로 옳고 도덕적이며, 그 반대 진영은 악하고 타락했다고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현실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나 사회 구조적 요인은 무시되고, 모든 현상이 '우리 편 vs 적'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상대 진영의 정책이나 논리를 분석하고 토론하기보다, 도덕적 비난과 정체성 공격을 중심으로 한 감정적 대응으로 이어진다.앞서 언급했듯 이들은 중도적 입장이나 타협을 시도하는 사람들조차 비겁자나 배신자로 낙인찍으며, 정치적 스펙트럼 전체를 극단적으로 양분한다. 그 결과, 사회적 갈등은 점차 심화되고, 정치 담론은 건전한 토론의 장이 아니라 진영 간 증오의 전장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극단주의 정치인과 선동가는 더욱 힘을 얻게 되며, 대중의 분노와 불안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다.
이러한 흑백논리의 필연적 결과는 곧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마화로 이어진다. 흑백논리의 본질은 선과 악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이며, 이것이 강화될수록 상대를 악으로, 나아가 악마적 존재로 규정하는 악마화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들은 상대 진영의 구성원을 단순한 의견 차이를 가진 시민으로 보지 않고, 사회를 해치는 비도덕적 존재 혹은 국가와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한다. 그 결과, 타인을 설득하거나 토론하려는 노력이 사라지고, 혐오·비난·배척의 언어가 일상화된다. 이러한 악마화는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신뢰와 연대의 기반을 무너뜨려 결국 사회 전체의 민주적 소통 구조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된다.
한국처럼 유교적 정서가 강한 도덕 중심 사회에서는 이러한 흑백논리가 더욱 격렬하게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 문제를 합리와 이성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판단의 틀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결과, 보수 진영에서는 '한국의 전통과 질서 유지'를 절대선으로 인식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사회적 조화와 약자 보호'를 절대선으로 인식하는 세력이 등장해, 사회 전체가 도덕적 가치 기준의 충돌로 양분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봉건 질서가 해체된 현대의 근대적 이데올로기 사회에서는 이러한 도덕적 흑백논리가 더 이상 현실 정치와 조응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수도 있지만, 선악의 체제는 근본적으로 봉건적 질서에 뿌리를 둔 종교적 사고방식이다.
전통적인 유교적 봉건 질서는 이미 현대 사회의 가치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 또한 유교에서 강조하는 약자 보호와 도덕적 조화의 원리 역시, 개인의 자유·경쟁·효율성을 중시하는 현대 자본주의 질서와 완벽히 조응하기는 어렵다. 결국 유교적 윤리는 인간관계 중심의 도덕 체계로서 일정한 문화적 의의는 지니지만, 그것이 현대 사회의 제도적 원리나 경제 구조에 직접 적용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아시아 사회에 깊이 내재된 이러한 유교적 무의식은,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좌우 진영 모두에서 혁신 산업의 성장과 국민의 자율적 문화 활동을 억압하고, 국가의 통제와 사회적 서열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이는 도덕적 질서와 사회적 조화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근대적 자유 개념과 충돌하면서, 결과적으로 창의성과 다양성을 제한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모순된 형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서구 근대의 여러 이데올로기들이 본질적으로 동아시아의 선악 중심 세계관과는 달리, 누군가의 희생이나 배제를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현상이다.[3] 이러한 사상들이 동아시아로 수입되는 과정에서, 좌우 진영 모두가 이를 유교적 가치와 결합시키려 시도하며 각각의 방식으로 도덕적 정당화를 시도했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왜곡과 모순이었다. 결국 역사적 맥락에서 동아시아가 서구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를 현지화하고 왜곡하게 된 배경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합리성과 유교적 도덕 질서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인식론적 토대 위에 존재하며, 두 체계는 본질적으로 조화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즉, 서구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혁명성과 폭력성을 지우려는 시도는 오히려 유교적 가치를 강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통제로 귀결되며, 이는 서구 이데올로기가 추구한 근대적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보다 훨씬 퇴행적인 변종적 독재 질서로 회귀하는 모순을 낳는 것이다.[4]
더 구체적으로, 특히 보수 진영이 근대적 '자유'의 개념을 자신들의 유교적 위계 질서와 집단주의 가치관의 맥락으로 왜곡하거나, 반대로 진보 진영이 근대적 '평등'의 이념을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적 도덕주의 가치관과 결합해 왜곡하는 태도는 심각한 문제다. 이러한 왜곡은 근대 정치철학의 핵심인 보편적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훼손하며,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의 정치 담론을 이념이 아닌 유교적 도덕 감정의 대립으로 전락시킨다. 많은 아시아인들은 서구의 기독교적 선악 구도와 흑백논리를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 역시 유교적 도덕 체계에 기반한 선악의 흑백논리에 깊이 종속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5] 이러한 모순은 서구의 종교적 도덕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의 종교문화적 도덕주의를 절대시하는 이중적 사고를 낳으며, 결과적으로 도덕의 이름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배제하는 비이성적 정치문화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동아시아 특유의 봉건적 사고방식과 강한 민족주의 정서가 완전히 극복되지 못한 채, 근대의 이념과 결합해 왜곡·변질된 대표적 사례가 바로 중국의 마오주의와 북한의 주체사상이다. 마오주의는 표면적으로는 평등과 혁명을 내세운 공산주의 이념이었으나, 실제로는 문화유산만을 파괴하고 황제 중심의 봉건적 권위주의와 집단주의 문화가 그대로 잔존한 채, 절대적 지도자 숭배와 인민의 도덕적 순종을 강요하는 체제로 귀결되었다. 북한의 주체사상 역시 서구의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민족 중심적 폐쇄성과 유교적 충성 개념이 결합된 가부장적 전체주의로 변질되었다. 이 두 사상은 모두 근대적 이념이 아시아적 전통의 권위와 융합될 때 발생하는 왜곡된 결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리고 이 두 체제는 모두 '사회주의적 도덕'과 '민족'을 비판하는 모든 인간을 악마화하고, 결국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졌다.
또한 아시아의 좌파 진영뿐만 아니라 보수 진영 역시 표면적으로는 친미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미국 독립 혁명의 핵심을 이루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강력한 이념적 정신은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미국을 단순히 반공·군사적 동맹으로만 인식하며, 그 근본에 깔린 자유주의와 리버테리언적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권위주의적 통제와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미국식 자유를 왜곡한다. 심지어 일부 세력은 정치적 안정과 도덕적 필요성을 이유로 독재를 옹호하거나,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주의적 가치관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와 마찬가지로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는 공동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모든 사람이 '퇴폐적 존재'로 악마화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민족주의적 혹은 종북적 반미 정서는 분명 비이성적이지만, 한국에서 반미 진영이 확산된 배경에는 보수 진영의 왜곡된 친미 태도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도 크다.
근대 이데올로기, 현대 철학, 현대 과학의 확산은 인간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현실은 절대적인 선과 악으로 구분될 수 있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이해관계와 가치, 인식의 차이가 복잡하게 얽힌 다층적 세계로 인식된다. 프리드리히 니체[6]나 지그문트 프로이트[7],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이 지적했듯[8], 선과 악은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시대와 문화, 권력 구조 속에서 정의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완전한 선과 악의 존재를 전제할 수 없으며, 선악의 모호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윤리와 이성을 통해 판단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즉, 현대의 정치 담론에서 유교적 가치를 비롯한 전통적 도덕들이 일정 부분 존중될 수는 있더라도, 그것이 현실의 정치나 경제 체제의 근본적 기반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철저히 근대적 합리성과 현대적 인식 구조의 논리 위에서 설계되고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따라서 종교적 도덕 혹은 민족주의(에스닉 내셔널리즘)의 개념을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신념들을 정치의 영역까지 확장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정당화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가치와 세계관이 공존하는 다원적 구조 위에 서 있으며, 특정 종교나 도덕 체계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순간 사회의 합리성과 자유가 훼손되어 정치 극단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크다.
6.5. 특정 인물 및 집단에 대한 맹목적 지지 혹은 부정
정치 극단주의의 대표적인 폐해 중 하나는 특정 정치 집단이나 그 소속 인물, 그리고 연계된 세력에 대해 맹목적으로 지지하거나 부정하는 태도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나 정치인에게 자신의 자아를 의탁하여, 그들을 위해 꼭두각시처럼 행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과 세력은 비판의 대상이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 변질되며, 이러한 관계는 정치적 건강성을 해치고 건설적인 토론과 정책 경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인물과 집단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복잡한 정치 현실을 그들의 유불리로만 해석하게 된다.그러나 맹목적인 태도는 지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부정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무조건적으로 악으로 규정하고, 그와 연계된 모든 사람과 정책을 이유 없이 배척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아무리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나 제안일지라도, 그 출처가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 집단이라면 처음부터 거부하게 만든다. 그 결과, 건설적인 비판과 견제 대신 무조건적인 적대와 혐오가 반복되며, 정치적 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특히 이러한 맹목적 지지나 부정은 앞서 언급한 비대한 자아와 결합할 때 더욱 심각해진다. 극단주의자들은 상대 세력을 지지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비약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오류투성이 논리를 만들어내며, 이 과정에서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근거 없는 주장을 반복한다. 나아가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고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기 위해, 심지어 거짓된 주장을 의도적으로 퍼뜨리기도 하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유지하고 도덕적 우월감을 강화한다. 이러한 행위는 정치적 토론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고, 사회 전반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주요 원인이 된다.
이처럼 맹목적 지지와 맹목적 부정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두 태도 모두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절대화하여, 세상의 모든 사건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해석하며, 현실이 자신의 믿음과 어긋날 경우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된다. 특히 선거와 같은 정치적 사건에서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극명하게 드러나며, 그 결과 극단주의자들은 음모론과 거짓 선동에 의지하거나, 상대 진영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면서 스스로의 신념을 유지하려 한다. 이는 결국 정치적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끊임없는 대립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6.6. 반지성적 배타주의
자세한 내용은 극단주의 문서 참고. 특히 소수의 믿음과 관점이 다수의 사람들에게로 확산되는 사회적 폭포현상(Social Cascades)은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주요 원인이 된다.민주주의는 시민이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체제다. 즉, 이 과정에서는 회의와 계산, 그리고 재고가 필연적이다. 시민과 정치인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등하며, 이 사회 구성원들끼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더라도 대화와 타협이 필수적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격언이 드러내듯이 정상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은 정치적 다원주의 하에서 다른 성향과 공존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체제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에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세력은 제거해야 할 반동일 뿐이며, 그들과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는 사람은 배신자 혹은 천인공노할 매국노이다. 따라서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소통 없는 일사불란함을 요구한다. 자신들의 행동을 선으로 포장하고, 타 정당을 무조건 적인 악, 독재 세력으로 매도하며, 타협과 이해, 대화로 해결하기보단 자신들만의 윤리, 막말 등에 준하여 발언을 한다. 민주주의를 수호한다, 한쪽 날개가 너무 썩어서 온 몸이 썩기 전에 잘라낼 수밖에 없다고 외치며 가장 반민주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신이 실제로 아는 정보를 근거로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근거해 판단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유리하며, 정치적 파급력이 있을 법한 자극적인 담론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담론 중에 합리적 근거 없는 의심, 즉 음모론이 상당 부분 개입된다는 것이다. 정치극단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맹신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상대 진영의 악의적인 공격으로 해석하는 맹목적인 이분법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점점 냉철한 도덕적 기준, 지성에 근거한 합리적 의견은 사라지고[9] 수준 낮은 음모론과 감정적 선동만이 반복하게 된다. 집단사고에 찌들어서 모두 망가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상식적인 기준을 가지고 잘못된 점을 이야기 했을 뿐인데, 변절자로 몰려서 충격을 받고 오히려 반대 성향의 극단주의자가 되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극단주의가 세력을 확대하는 것은 적대적 공생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적대적인 두 세력이 서로를 말살하자면서 저주와 증오를 내뿜으면서 사람들에게 아군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진영논리로 선택을 강요하고, 이 와중에 다양성과 공존을 추구하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합리적인 인사들은 설 땅을 잃어가는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정확히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망했다. 세계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붕괴하자 소비에트 혁명을 외치는 독일 공산당과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영광과 파시즘을 외치는 나치당이 급부상했고, 결국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자 했던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모두가 몰락했다. 이러한 정치극단주의자들의 반지성적이고 배타적인 행태는 중우정치를 부르게 되고, 후술할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6.7. 이중잣대
이러한 전체주의적 입장에 기반하여 반대 진영에는 완전무결한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고 강조하며, 사소한 문제라도 대서특필하지만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실수나 부패에 대해선 "어쩔 수 없다."란 식으로 넘어가려 한다. 인정하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대부분은 증거고 판결이고 다 무시한다. 특히 극단주의를 생산하는 미디어에 중독돼 있다면 현실 부정은 물론 음모론까지 가버리니 심각하다.문제는 이게 단순히 국민 일부의 생각이 아니라 현실정치에도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 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주장이 나오면 용납 못 한다고 한다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다른 이중잣대로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실수로 인해 자신에게 피해가 발생해도 앞서 말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려는 반면, 반대 진영의 행동으로 자신에게 이득이 발생하면 속으론 이득을 취하면서도 겉으로는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6.8. 진영논리
정치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묶어서 한편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잦다. 이는 "자신과 다르면 거기서 거기다"라는 심리에서 나온 생각으로, 매카시즘의 주 원인이기도 하다. 극우 세력들은 좌익 진영 전체를 좌익 빨갱이[10]이라고 몰았으며, 극좌 세력도 우익 진영을 전체를 수구꼴통[11]이라는 멸칭을 사용하여 몰아갔다. 심하면 자신보다 더 온건한 사람들마저 상대 진영으로 몰아간다. 극좌 세력들은 사회자유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등의 온건 좌파 세력을 '개량반동'이라 몰았고, 극우 세력은 온건 우파 세력을 용공세력으로 몰았다. 심지어 어떤 때는 반대 세력보다 자기들의 온건 세력을 더 증오한다. 반대파들 말은 어차피 몰라도 온건한 이들의 말은 적어도 비슷한 이념을 공유하고 같은 정당을 지지할 테니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서 더 상종하기 싫은 것이다.6.9.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함
국가 권력을 장악한 정부/정권을 국가 전체와 동일시하고, 자신들의 성향을 기준으로 정권에 대한 평가와 국가에 대한 평가를 동일시해 버린다. 자기들의 성향에 맞는 정권이 들어서면 흔히 '국뽕'이라고 불리는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자국을 옹호하며, 그것을 당연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대로 자기들의 성향에 맞지 않는 정권이 들어서면 태세를 전환해서 '국까', 즉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자국 혐오로 돌변한다. 해당 문서들에서도 서술되어 있듯이, 국뽕/국까 성향의 사례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정치 극단주의자들의 유형이다.7. 해결책
7.1. 성찰과 대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정치학과 정치철학을 꾸준히 공부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중도'라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입장을 깊이 성찰해 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많은 극단주의자들조차 자신을 중도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도는 단순히 양쪽 진영의 입장을 절반씩 섞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해법을 찾으려는 지적 노력의 결과다. 따라서 완벽한 중도적 입장을 유지하려면 높은 수준의 이해력과 지식이 필수적이며, 이는 꾸준한 학습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 완벽한 중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회색 안전지대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많은 사고와 성찰을 요구하는 "똑똑하지 않으면 서기 어려운 진영"인 것이다.스스로 깊이 있는 성찰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좌우 스펙트럼 중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이는 머리의 좋고 나쁨이나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와는 전혀 관계없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모든 인간은, 심지어 아마존의 원주민일지라도 반드시 좌우 스펙트럼 중 어느 한쪽에 위치하게 된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중도적이고 완전무결했다면, 정치학과 정치철학이라는 학문은 애초에 태동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단순히 상대의 입장을 들어주는 듯한 겉모습만의 균형을 취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실용주의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자신의 편향을 인식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만 양쪽을 다루는 형식적 중립에 불과하며, 결국 특정 진영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진정한 실용주의는 상대의 입장을 단순히 '들어주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향을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깊은 이해와 비판적 사고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데서 출발한다.
스스로를 중도, 공리주의자, 실용주의자 등으로 자처하는 극단주의자들은 정작 자신이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류를 지적받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방어한다. 이 때문에 아무리 명확한 논리와 증거를 제시해도 설득이 거의 불가능하며, 그들의 확신은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교조주의적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자기 확신은 자신이 중도라는 착각 속에서 더욱 강화되며, 결국 현실을 왜곡하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또한 기계적 중립, 양시론, 양비론을 자처하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진정한 의미의 중도가 아니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도 모르게 한쪽 정치 스펙트럼에 강하게 치우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중도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실제로는 특정 진영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대변하면서도 이를 객관적 사실이나 균형 잡힌 입장이라고 믿게 되며, 오히려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논술을 배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양시론과 양비론은 논리적 완결성을 해치는 대표적인 오류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는 무조건 감점의 대상이 된다.
정치학과 정치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해야만 현대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현재의 정치 상황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무엇이 급진주의의 범주에 속하고, 무엇이 극단주의의 범주에 속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으며, 설령 상대의 주장이 극단적으로 들리더라도 그 안에 어떤 부분까지가 합리적이고 타당한 주장인지를 객관적으로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식과 통찰이 뒷받침되어야만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건전한 정치적 대화와 사회적 합의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기계적 중립, 양시론, 양비론은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개선의 가능성마저 가로막는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스스로를 중립적이라고 착각한 채, 실제로는 특정 진영의 논리에 휘둘리면서 오히려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고 극단적인 비판만을 쏟아내게 된다. 이는 정치적 균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중립을 가장하며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말로 중도적 입장을 대변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사고와 가치관이 좌우 스펙트럼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 후에는 상대 진영뿐만 아니라, 같은 진영 안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도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해와 합의를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공간이 바로 진정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의 공론장이며, 이는 건강한 정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7.2. 매체로부터 멀어지기
이러한 성찰이 어렵다면, 최소한 정치 극단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폭동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오프라인에서의 정치 극단주의자는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발견하더라도 관심을 끄고 거리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특히 대부분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정치와 관련된 주제가 나오면 필연적으로 언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또한, 가급적이면 위키질도 자제하는 것이 권장된다.특히 이러한 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위키, SNS, 그리고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를 멀리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이러한 매체들은 구조적으로 견해가 편향되기 쉽고, 그 안에서 특정 극단적인 주장이 마치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의견인 것처럼 왜곡되어 확산된다. 이 과정에서 현실과 온라인의 경계가 흐려지며, 이용자는 실제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특정 집단의 목소리나 주장이 과도하게 확대되어 받아들여지고, 개인은 자신이 세상의 '진실'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점점 더 편향된 사고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온라인 공간의 목소리가 곧 현실 사회의 다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은 아님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 뉴스를 이용할 때도 자신이 정치학에 무지하다면 댓글은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커뮤니티와 마찬가지로 뉴스 댓글란 역시 정치와 무관한 주제에도 억지로 정치를 끌어들이며 논란을 조장하고, 특정 집단이 좌표를 찍어 여론을 왜곡하는 사례가 매우 많다. 예를 들어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염병이 갑자기 발견되어 심각한 상황인데도, 이를 두고 정치인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등 정치적 논쟁으로 몰아가는 식이다. 뉴스를 볼 때는 진영논리에 따라 편향된 시선으로 해석하지 말고, 중립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거나 최소한 양쪽의 입장을 모두 헤아리며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7.3. 건전한 취미생활
정치 외의 다른 관심사에 주의를 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운동과 같은 활동적인 신체 활동이나, 미술·음악 등과 같은 보편적인 취미 활동에 몰입하는 것이다. 공부 혹은 근로 중이라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을 정도로 일에 집중해 보는 것도 권장된다.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스스로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위키질이나 SNS 활동은 결코 건전한 취미생활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활동은 정치적 갈등과 진영논리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와 피로를 누적시키며, 심할 경우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거나 기존의 정신 건강 문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서의 논쟁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갈등을 키우고 편향을 강화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사고마저 왜곡시킬 위험이 크다.
SNS와 위키가 특히 위험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안에서 생성된 '글'이 지속적으로 남아있는 구조에 있다. 이러한 구조는 폐쇄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글에 대해 강한 집착을 형성하게 만들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글을 되풀이해 읽고 수정하면서 편향된 사고와 논리적 오류를 점점 더 강화하게 된다.
결국 그들의 사고는 하나의 고정된 글을 중심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기 확증의 순환을 형성하고, 이는 외부의 비판이나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더욱 극단적이고 왜곡된 신념으로 굳어지게 한다. 이 현상이 심해지면 결국 논리가 완전히 와해되어, 글의 내용에서 단순히 무언가를 강하게 표방하거나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만 느껴질 뿐, 정작 그 의미나 주장 자체는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상태가 된다. 이는 독자의 이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이러한 사람 중 하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작성했기 때문이다.
정신질환 위험군인 사람들은 특정 현상이나 정보에 강한 압박감을 느낄 때, 그 현상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인지가 좁아지는 증상을 보이기 쉽다. 이러한 상태에서 편향된 정보가 넘쳐나는 온라인 공간에 노출되면, 그 압박감은 현실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증폭되어 나타난다. 이로 인해 극단주의적인 주장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의견이나 학술적 내용마저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나아가 세상의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을 공격하는 듯한 압박감으로 다가오며, 이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처럼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은 SNS에서는 극단적인 포스팅의 반복이나 선동을 통한 좌표찍기로 나타난다. 또 위키에서는 주로 이유 없는 전체 반달 행위로 나타나며, 특히 관심도가 낮아 편집 참여자가 적은 문서의 경우에는 무의미하게 과도한 편집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표현하려는 시도로 표출되기도 한다.
만약 위험군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이미 확고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이때 그는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라인 커뮤니티가 만들어낸 편향된 세계관에 완전히 동화되거나, 자신과 다른 견해를 지닌 불특정 다수 혹은 특정 대상을 악마화하게 된다. 그 결과 극단주의적 행동과 사고가 더욱 강화되며, 이는 결국 정신적 불안정성을 악화시키고, 나아가 사회적 갈등을 계속해서 재생산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사회 전체에도 악영향을 미치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정신질환 위험군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폐쇄적인 사고와 불안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이 강한 정치적 신념까지 지니고 있다면, 상기했듯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끝없이 이어져 결국 스스로를 점점 더 옥죄고 무너뜨리는 길로 빠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본인은 자신의 생각이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어려우므로, 주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그들을 보호하고 회복으로 이끄는 데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는 자신만의 사고에 갇혀, 앞서 '자아와 현실의 동일시' 단락에서 서술한 것처럼 자신의 자아에 맞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증상은 점점 더 악화되게 된다.
특히 ADHD나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치적 논쟁은 사실상 독과 같다.[12] 이들은 외부 대상에 자신을 의탁하기 쉽고, 또한 자아와 신념을 분리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한 반대나 급진주의 운동에서 등장하는 과격한 구호를 곧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 결과, 정당한 비판조차도 심각한 상처로 받아들이게 되고, 반대 의견을 마치 자신을 향한 적대 행위로 인식하여 극단적인 사고로 치닫기 쉽다. 나아가 이러한 과정은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성향을 가진 이들은 정치 관련 논쟁이나 갈등이 심화된 온라인 공간을 피하고, 정치적 대화 자체를 최소화하는 것이 정신적 안정을 위해 더욱 중요하다.
게임이나 유튜브 시청은 물론 건전한 취미생활이 될 수 있지만, 온라인이라는 특성상 자연스럽게 나무위키를 포함한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정치적 논쟁과 극단주의적 선동에 노출되기 쉽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말로 게임과 영상 시청 자체를 즐기고 싶다면, 커뮤니티 활동과 댓글 읽기·참여를 철저히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사회에서 정치 극단주의가 이렇게까지 온라인 공간에 만연하게 된 이유 역시, 많은 사람들이 게임과 영상 시청을 하면서도 무심코 커뮤니티와 SNS를 병행한 결과이므로, 이를 가볍게 보기는 힘들다.
특히 SNS와 유튜브 알고리즘은 한 번 정치나 사회 문제와 관련된 콘텐츠를 시청하기 시작하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그와 유사한 주제의 영상이나 게시물을 무더기로 추천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이용자가 다양한 시각을 접하기보다, 점점 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방향으로만 정보가 몰리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개인의 편향과 극단화를 더욱 가속시키는 요인이 된다. 나무위키 역시 한 문서에 관련된 연관 문서들이 무더기로 나열되어 있으며, 물론 이는 백과사전 형식으로 볼 때 타당한 구조다. 그러나 건전한 자아와 비판적 사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구조가 오히려 특정 주제만을 끝없이 탐색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SNS나 유튜브 알고리즘과 유사한 편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때문에 의학계와 심리학계에서도 정치적 논쟁이 과열된 온라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꾸준히 강조한다. 대신 예술 활동이나 음악, 미술과 같은 창의적인 취미를 즐기거나, 운동과 같은 신체 활동을 통해 감정을 해소하고 신체적·정신적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권장된다. 이러한 외부 활동은 단순히 기분 전환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극단적인 정치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8. 관련 행태
8.1. 편자 이론
좌우 양극단으로 갈수록 마치 편자처럼 지향하는 바가 비슷해진다는 이론으로, 말하자면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이다. 그 의도는 명백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고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편을 악마화하는 경우: 적폐몰이, 보수 진영을 향한 수꼴[13], 토착왜구, 친일몰이, 일베몰이, 극우몰이, 진보 진영을 향한 토착짱깨, 종북몰이, 그 외 남혐몰이, 여혐몰이, 서로를 향해 몰아세우기 등.
- 꼴마초와 래디컬 페미니즘: 비이성적인 여성혐오 및 남성혐오
- 분청과 넷 우익
- 특정 정치인을 향한 성역화: 특히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자기 진영에 속한 대통령에 대한 우상화. 보수 진영에서는 이승만[14],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이, 민주 진영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이 그 대상이 된다.[15]
- 백신 반대 운동: 보통 좌우 할 거 없이 극단주의자 내지 대중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8.2. 서로에 대한 편견
당장 나무위키의 정치적 문서만 봐도 서로에 대한 편견이 사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알아서 걸러 읽는 것은 본인 능력이다. 편견이라고 써 놓았지만 사실 인터넷에서 보이는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행태를 보면 과연 편견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을 때가 많다. 극단주의자들의 행태는 양 진영에 대한 편견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행동은 서로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좌익은 약자를 무조건 옹호한다. vs 우익은 약육강식에 사로잡혀 약자에게 공격적이다.
- 좌익은 주류 권력을 공격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 vs 우익은 주류 권력을 옹호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
- 좌익은 극단적인 문화상대주의를 가지고 있다. vs 우익은 극단적인 문화절대주의를 가지고 있다.
- 좌익은 인간의 본능을 부정한다. vs 우익은 인간의 본능을 고평가한다.
- 좌익은 도덕을 필요 이상으로 중요시한다 vs 우익은 도덕의 가치를 지나치게 폄훼한다.
- 좌익은 친북이다(혹은 친중이다) vs 우익은 친일이다(혹은 독재 옹호자들이다)[16]
9. 한국에서의 역사
9.1. 2020년 이전
2000년대 이전의 한국 정치에서 극단주의는 현재처럼 복잡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특정 시기마다 매우 강하게 표출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해방을 둘러싼 좌우 극단주의가 동시에 성장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체제 속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과 강경 반공주의 우익 세력이 정면으로 대립했다.이는 한국 전쟁으로 폭발하며, 양측 모두 상대 진영을 절멸의 대상으로 규정해 극단적 폭력을 행사했다.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좌익 세력이 철저히 소멸되고, 국가 권력과 결합한 극우 세력이 반공을 명분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며 강력한 국가주의와 권위주의가 유지되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면서 대학가와 노동 현장을 중심으로 NLPDR 노선 등 극좌 성향을 포함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성장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이들을 일괄적으로 '종북 세력'으로 규정하며 강경하게 탄압했다. 그 결과 1990년대까지 한국의 극단주의는 극좌를 포함한 좌익의 급진 운동과 극우 성향의 국가 권력이 대립하는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후 냉전의 해체와 민주화의 진전으로 인해 이러한 극단주의 세력은 점차 힘을 잃고, 일부는 지하화되거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군사정권이 몰락한 이후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정치에서 정치 극단주의가 현재처럼 강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며, 비교적 중도 성향으로 평가되는 지도자들이 집권했다. 대표적으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이 있는데, 이들은 우파적 성격의 신자유주의와 좌파적 성격의 노조 정책을 일정 부분 절충하며,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보수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개혁을 병행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201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스트롱맨형 정치인이나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지도자들이 집권하는 사례가 늘어나며, 정치 극단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이는 글로벌 불경기, 다극 체제의 형성, 지속적인 취업난과 저출산 등으로 인해 다수 국가에서 반(反)다문화주의와 반(反)세계화 정서가 좌우 진영 모두에서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안 우파와 좌익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다양한 급진주의 포퓰리즘 운동이 강력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급진주의 운동 내부의 극단주의 세력 또한 자연스럽게 세력을 확장하며 정치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오늘날에는 많은 국가에서 좌우를 불문하고 포퓰리즘 급진주의 정치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하여 정당 정치에 편입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반(反)포퓰리즘을 표방하는 세력이 연합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세계 정치 전반이 재편되면서, 기존의 중도 정치 세력은 입지가 약화되고 정치적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원래 중도나 온건 성향을 지니던 별개의 정치 집단이 극단주의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21세기는 팬덤형 정치인과 이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스스로를 스트롱맨으로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화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실업 문제와 빈부격차 심화가 기존의 중도·온건 정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대중주의가 다시 부상하게 된 결과다. 대중은 현실의 답답함과 불만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구세주'와 같은 정치인을 갈망하게 되었고, 이러한 정치인들은 강렬한 언어와 선동을 통해 지지층을 결집시킴으로써 극단주의적 정치 문화를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세계 곳곳에서 급진주의 정치가 확산되고, 정치적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9.2. 2020년 이후
202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인해 오프라인 모임과 집회가 크게 줄어들면서, 사회 전반에 개인주의가 확산되는 동시에 정치 극단주의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오프라인 정치운동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인터넷과 SNS, 온라인 커뮤니티로 집중되면서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정치운동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되는 독특한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 갈등과 극단주의적 언행은 물리적 공간보다는 온라인 공간에서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게 되었으며, 인터넷이 현대 정치의 주요 전장이 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동시에 가짜 뉴스가 급속히 퍼지면서 여러 정치적 이슈가 겹쳐지자, 온라인 공간에서 정치 극단주의의 폐해가 극심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특히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문화 전쟁(Culture War)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코로나19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갈등이 경제·외교 정책을 넘어 젠더, 인종, 성적 지향, 표현의 자유와 같은 문화적·사회적 의제로 확산되었으며, 그 논쟁의 상당 부분이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트위터, 유튜브, 틱톡 등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는 이러한 갈등의 주 무대가 되어, 서로 다른 진영이 정치적 올바름(PC) 문제나 소수자 권리, 총기 규제, 검열 문제 등을 두고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온라인 여론이 실제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미국의 문화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온라인 급진주의와 정치 극단주의의 대표적인 무대로 평가된다.
또한 미국의 문화 전쟁 양상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서구권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미국에서 시작된 정치적 올바름(PC) 논쟁,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 등은 SNS와 유튜브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산되며, 국경을 넘어 각국의 정치·사회 담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미국 문화 전쟁의 영향을 빠르게 받아들인 국가 중 하나로, 그 양상이 독특하다. 초기에는 페미니즘 담론과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주로 좌파 진영에서 먼저 수용되면서, 이로 인해 좌파 내부에서 급진화가 촉진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수 정치계, 종교계, 그리고 청년 세대가 강하게 반발하며 우파 진영에서는 자연스럽게 대안 우파적 논조가 확산되었다. 다만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맞게 변형되어 나타나는데, 좌파 진영에서는 반일, 반미, 복지 확대 주장과 결합되는 형태로, 우파 진영에서는 반중, 친미, 보수주의 경제정책 주장과 결합되는 방식으로 각각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정치권은 미국 문화 전쟁의 의제가 현지화되어 좌우 양 진영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전개되는 독특한 진영 갈등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그 결과 200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문제로 지적되던 정치적 무관심 현상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다수의 시민들이 뚜렷하고 강경한 정치 성향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정치에 관심은 있지만 편향성을 드러내지 않는 중도주의자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며, 정치 지형이 양극단으로 더욱 치우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급진주의를 곧바로 정치학적 극단주의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 이러한 변화가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여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급진화가 지나치게 진행될 경우 사회 갈등이 필연적으로 심화되기 때문에, 이를 완화하고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 역시ㅡ 점점 커지고 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코로나19의 장기화는 전 세계적으로 개인주의와 타인에 대한 무관심 정서를 확산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온라인에서는 극단적인 주장과 갈등이 오히려 더욱 늘어났으나, 이에 반해 오프라인에서의 극단주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오프라인에서 극단주의 집회나 행동이 나타나더라도 장기적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금방 소진되거나 사그라드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온라인에서의 극단주의 확산과 오프라인에서의 위축이라는 독특한 양극화 현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2024년 12월 3일 이후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극단적으로 변하면서 제2차 6.25 전쟁보다 대한민국내 정파간 내전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도 나오고있다.
10. 관련 인물 및 단체
※ 대한민국 국내의 특정 단체, 인물을 극우, 극좌로 묘사하는 서술은 경멸적 표시로 간주하여 금지하므로, 각 이용자는 명백히 해당하는 대상이 있더라도 서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극좌
- 극우
-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몽테뉴파 지도부
- 파시즘 및 나치즘 단체
-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극좌적 아나키즘 단체
- 각국의 테러리즘
- 러시아의 주류 정치 세력과 주요 정당들
- 이슬람 계열 극단주의 세력
- 이스라엘의 극단적 시오니즘 세력 - 시오니즘 전체가 극단주의는 아니며 민주당(이스라엘), 예쉬 아티드 등 평화주의 야권 세력도 있다.
- 일본의 우경화에 따른 일본 내 극우파, 일본회의 세력
- 아소 다로
- 이시하라 신타로
- 구로다 가쓰히로
- 구 세이와 정책연구회 -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의 정치 파벌이었으며, 2024년 자민당 정치자금 논란으로 인해 파벌을 해산하였다.
- 가미야 소헤이
- 햐쿠타 나오키
- 넷 우익,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 - 현대 일본의 극단주의 사례 중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 해외의 일본 극우사관 지지자
- 미국의 극단주의자들
11. 관련 사건 및 담론
- 대선생활백서
- 도쿄 찌르기 사건
- 배후중상설
- 스페인 내전
- 수지 김 사건
- 인종 차별
- 박근혜 커터칼 피습 사건
-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
- 이명박 쥐약 테러 미수사건
- 천안함 피격 사건/왜곡
- 5.18 민주화운동/왜곡
- 2014년 광화문 폭식농성
- 태극기 집회
- 2020년 대진연의 미래통합당 선거 운동 방해 사건
-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 차이나 게이트
-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 최순실 태블릿PC 조작설
- 박근혜 편지 사태
- 더 플랜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부정선거 음모론
- 2019년 국회 난입 사태
-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부정선거 음모론
-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 2021년 미얀마 쿠데타
- 송영길 피습 사건
- 일베저장소의 MBC 기자 살해협박 사건
- 파타-하마스 분쟁
- 2023년 1월 브라질리아 폭동
- 이재명 피습 사건
- 도널드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 관련 음모론
- 12.3 비상계엄
- 서울서부지방법원 점거 폭동
- 찰리 커크 피살 사건
[1] #[2] "정치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정치 잘 안다' 착각"[3] 미국의 우파 자유지상주의와 유럽의 자본주의적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권장하고 산업 발전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비롯된 사회주의와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는 구질서의 해체를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사상들은 공통적으로 사회의 반(反)자유적 존재들, 즉 '반동적이고 봉건적인 존재들'을 제거하기 위한 폭력적 혁명을 일정 부분 정당화한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은 공동체의 조화와 관료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 물론 근대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이러한 폭력적 합리성은 현대의 개인주의, 민주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국제주의와 평화주의, 그리고 매킨타이어식 공동체주의 등의 현대 사상들을 통해 권력을 견제하고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완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를 동아시아의 유교적 정서나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4] 중국과 북한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일본은 비록 미국이 의회민주주의를 이식해 주었으나 결국 자민당의 장기 집권 아래 사실상 일당 독재에 가까운 체제로 변질되었다. 한국은 그나마 정권 교체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좌우 진영 모두에서 국가주의와 통제주의 성향이 강한 세력의 영향력이 뚜렷해, 국민의 자유가 언제든 침해될 수 있는 위태로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5] 사실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 그 심층적 가치체계는 여전히 유교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유교적 무의식이 기독교적 표현으로 번역되어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6] 니체가 말한 '강자의 도덕'은 기존의 종교적·도덕적 질서가 만든 '선악의 흑백논리', 즉 '약자의 도덕'을 비판했다. 약자의 도덕은 스스로의 무력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강자의 힘과 창조성을 '악'으로 규정하고, 복종과 희생을 '선'으로 미화하는 가치 체계다. 이에 반해 니체의 '강자의 도덕'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선과 악을 초월해 행동하는 실존적 윤리, 즉 '자기 초월의 윤리'를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모든 가치 체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인 초인, 즉 '위버멘쉬(Übermensch)'의 존재 방식을 지향하는 사상이다.[7] 프로이트의 이론은 오늘날 기준으로 완전히 과학적이라 보긴 어렵지만, 인간의 선악 판단이 이성적 진리가 아니라 무의식적 감정 반응에 깊이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의식적 판단이 사실상 무의식의 욕망, 억압, 죄책감 등 심층 심리 구조에 의해 조종된다고 보았으며, 우리가 '도덕적'이라 여기는 판단조차 내면화된 사회적 금기와 부모적 권위(초자아)에 의해 형성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선악 개념이 절대적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억압과 심리적 충동의 균형 속에서 형성된 상대적 산물임을 보여준 점에서 철학과 심리학 모두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8] 포스트모더니즘은 흔히 종교나 근대성을 부정하는 사상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를 단순한 반종교 혹은 반근대로 오해하는 것은 큰 오해다. 오히려 이는 통제지향적 보수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두가 전제해 온 '합리성'과 '보편적 진리'라는 개념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사상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사회의 모든 지식과 이념, 도덕, 심지어 과학적 진리조차도 객관적 실재라기보다는 권력 구조와 인간의 의지, 그리고 담론이 만들어낸 산물로 본다. 따라서 그 의의는 기존의 절대적 가치 체계를 해체하고, 진리를 권력과 인간 정신의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고와 자유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회복하려 한 데 있다.[9] 물론 극단주의자들 딴에는 냉철한 도덕이자 합리적 의견일 것이다. 내 편만이 절대 도덕적이며 절대 합리적이고 그 외엔 죄다 도덕적으로 타락한데다 나라 망치는 비합리적 정책만 추구한다는 생각이더라도 말이다.[10] 줄여서 좌빨[11] 줄여서 수꼴[12] #[13] 일종의 멸칭으로, 수구꼴통의 약자다. 여기서 수구란 본디 옛 것을 수호한다는 뜻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극보수주의를 지칭하는 의미로 바뀌었다.[14] 원래 박정희가 이승만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기에 보수 진영에서도 이승만과의 연관성을 긍정하지 않았었으나, 2000년대 들어 뉴라이트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의 친미 반공주의 정책을 호평하는 한편 강경 반일 정책은 외면하면서 그를 우상화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민주당에서도 지지층 사이에서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나쁜 것과는 별개로, 보수층의 지지를 폭넓게 얻기 위해 현충원에 있는 이승만-박정희 묘소를 참배하기도 한다.[15]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하에서 상징적 국가원수에 불과했고, 최규하는 10.26 사건 수습을 위해 대통령이 된 것일 뿐이라 둘 다 이렇다 할 족적이 없어 논외다. 전두환은 호남 지역에 대한 혐오 감정을 드러내는 극우 성향을 가진 이들이나 우상화하지, 대중적 인식은 가장 나쁜 대통령이라 정치권에서는 보수 진영에서도 외면하는 존재다. 노태우는 비록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하나회 핵심 인물 출신이긴 하나 어찌됐든 13대 대선에서 국민이 직접 선거로 선출한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 대통령이었으며, 집권 기간에도 비교적 온건한 성향에 의외로 진보적인 면이 많았고 퇴임 후에는 추징금 완납 등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 인물이라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자들을 좋아하는 강경 보수층에서는 관심이 별로 없고 민주 진영에서도 전두환만큼 비판하지는 않는다. 김영삼은 군사 정권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한 민주 진영의 거목이었으나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로 전향하여 대통령까지 된 인물이라 양면성이 뚜렷하고, 결정적으로 1997년 외환 위기 때문에 지지층을 대부분 상실하여 현재로서는 맹목적인 옹호 세력도, 그에 반발하는 비판 세력도 눈에 띄지 않는다.[16] 2025년 기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편견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보수진영 지지자들은 진보, 민주당계 정당을 '자유대한민국을 주적 북괴와 중공에 팔아먹으려는 종북 좌파, 화짱조, 빨갱이, 공산주의자들', 진보·민주당계 지지자들은 보수 정당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토왜, 리박견, 친일반민족행위자, 독재정권 찬양자들' 라는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음모세력으로 매도하고 있다. 진짜 무식하고 편협한 반지성주의자들의 도래가 만든 행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