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유고슬라비아 육군 체트니크 분견대 Četnik / Четник Chetniks | ||||||
<colbgcolor=#000> 국가 |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망명정부 | |||||
창설일 | 1904년 | |||||
해체일 | 1946년 | |||||
지도자 | 드라골류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규모 |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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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트니크(Četnik / Четник)는 세르비아인들이 조직한 민족주의, 왕당파 무장 조직이다. 세르보크로아트어 복수형 표현을 따라서 체트니치(Četnici / Четници)라고도 한다.2. 기원과 형성
체트니크의 전신은 세르비아 혁명 조직(Српска четничка организација)으로 세르비아 왕국 시절에 창설되었다. 그 기원은 세르비아 독립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에 항거한 저항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측 의용군으로 정규군과 함께 참전했다. 1차 대전에서 세르비아가 동맹국에 함락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의 점령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도 했다. 체트니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에 함락된 이후 다시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1908년 보스니아 위기[2] 당시의 체트니크 |
1차 대전 승전 이후 베오그라드 시내를 행진 중인 체트니크 대원[3] |
3. 2차 대전
제노사이드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 | ||
사건 목록 |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 ||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 발생 위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 ||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 |||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동대학살 ,1923, | 발생 위치 일본 제국 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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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1937, | 발생 위치 일본군 점령하 중화민국 난징시 | ||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파슬리 학살 ,1937, | 발생 위치 도미니카 공화국 | ||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홀로코스트 ⚖️ ,1941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 |||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 |||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크로아티아 독립국 | ||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 |||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 |||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 ||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관련 단체 체트니크 | |||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과테말라 | ||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 발생 위치 동파키스탄 | ||
이키자 ,1972, | 발생 위치 부룬디 | ||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 발생 위치 우간다 | ||
관련 인물 이디 아민 | |||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 발생 위치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 ||
킬링필드 ⚖️ ,1975 ~ 1979, | 발생 위치 민주 캄푸치아 | ||
재판 ECCC | |||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 |||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 |||
수용소 뚜올쓸라엥 | |||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 발생 위치 짐바브웨 | ||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 |||
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이라크 쿠르디스탄 | ||
재판 안팔 학살/재판 | |||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 |||
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 ||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 |||
보스니아 전쟁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스릅스카 공화국 | |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 |||
세부 사건 스레브레니차 학살 |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 포차 학살 | |||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 발생 위치 르완다 | ||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르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 목록 |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인물들 목록 | |||
관련 단체 후투족 민병대 (Interahamwe | Impuzamugambi) | |||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 발생 위치 자이르 키부 | ||
밤부티 피그미족 학살 ,2002 ~ 2003, | 발생 위치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 ||
다르푸르 학살 ,2003, | 발생 위치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 ||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 |||
야지디 학살 ,2014 ~ 2019, | 발생 위치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 ||
관련 단체 ISIL | |||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 발생 위치 미얀마 라카인주 | ||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반독 성향의 군부를 등에 업은 국왕 페타르 2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가입한 지 이틀 만에 추축국에서 사실상 탈퇴하였다.[4] 이에 아돌프 히틀러는 격분하였고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4개국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정부는 영국으로 탈출하여 망명 정부를 세웠다. 점령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분할되어 지금의 세르비아 지역에는 독일의 군정인 세르비아 군정청이 들어섰다.
유고슬라비아 전역이 추축국에 점령당하자 유고군의 장교인 드라골류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1893-1946)[5]를 중심으로 체트니크가 결성되어 독일 국방군에게 저항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과 그 실권 단체인 우스타샤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세르비아인과 유고군 잔존병력이 이 조직에 자발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다.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망명 정부에 의해 지원을 받았으며, 연합국에 지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국왕인 페타르 2세도 망명 치하에서 체트니크의 지도자인 미하일로비치와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 초반기에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함께 추축군을 적극 공격하였다.
1941년 6월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였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유고의 공산당 지도자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파르티잔이 이에 호응하여 독일 점령군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동년 9월, 10월에 미하일로비치와 티토는 회담을 가지며 대추축국 공동전선에 대해 논의했다. 성사되었다면 유고슬라비아판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겠지만 양측은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협력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협력이 결렬된 원인은 왕정복고를 지향하는 체트니크와 사회주의 연방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티토의 공산당이 양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결했기 때문이다.[6] 당장은 우스타샤와 추축군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지만,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역내 주도권을 두고 대결하게 될 차기 적성세력이나 다름 없었다. 여기에 지도층과는 상관없이 양측 중간 간부들이 상호간에 매우 적대적이어서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잦았기 때문에 양측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2차 대전 당시의 미하일로비치[7][8] | 타임지 표지 인물로 선정된 미하일로비치[9] |
체트니크는 이후 공산주의 반군인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득세하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나치에 대항하는 창설 초기의 이념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권력 투쟁을 벌이는데 더 힘을 쏟았으며[10],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것처럼 체트니크도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다. 정말 웃기게도 그 와중에 체트니크는 파르티잔을 막는답시고 철천지 원수인 나치 독일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비롯한 추축국 세력과 손잡기도 했다.[11] 실제로 1942년 크닌 전투를 비롯해 몇몇 전투들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vs 나치, 우스타샤, 체트니크의 구도를 띄었다. 체트니크의 위키피디아 항목에 들어가 보면 동맹세력과 적대세력에 추축국인 나치 독일,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양쪽 모두에 기재되어 있다.
3.1. 체트니크의 입장과 행보
상술한 바와 같이 얼핏 본다면 체트니크의 행보는 매우 모순적으로 보인다. 이같은 행보는 체트니크라는 조직의 성격과 특성에서 기인한다. 체트니크 자체는 기본적으로 지역 공동체[12]를 기반으로 하는 자경대 또는 조선시대나 구한말의 의병과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었다.[13] 다시 말해 우스타샤나 공산주의 파르티잔들이 사상과 이념에 기반한 정당의 지도를 받아 이상을 실현할 신국가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는 반면, 체트니크는 농촌 주민들이 외부 위협(우스타샤, 나치, 이탈리아 또는 파르티잔 등)에 대항해 자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들고 일어난 조직으로 당연히 체계적이고 통일된 행동 따위는 불가능했다.2차 대전 당시 체트니크의 경우는 대외적으로 미하일로비치가 유고 왕국 망명 정부와 영국 등으로부터 체트니크의 대표로 인정받고 있긴 했지만, 각 지역 체트니크의 지휘관들은 미하일로비치가 임명한 것도 아니었고(자생적 의용군이기도 했고), 하다못해 미하일로비치가 이들에게 물자 지원 같은 거라도 해줄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미하일로비치가 내린 지시를 체트니크 조직들이 쌩깐다 해도 이를 제지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딱히 없었던 것이다.[14][15]
파르티잔 같은 경우는, 특정 지역의 토벌이 심각해진다면 기존의 거점지를 버리고 산으로 숨어들거나 새로운 거점지역으로 탈출, 이동하여 항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각 마을과 지역의 체트니크들의 결성 사유와 목적은 자기 가족, 농지, 마을과 고향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걸 버리고 파르티잔처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항전을 이어가는 선택지는 체트니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반해 티토의 파르티잔은 독소전 개전 당시 이에 호응하여 일으킨 초기 봉기가 실패하자 파르티잔 주력인 프롤레타리아 제1여단을 이끌고 세르비아 남부의 거점에서 보스니아의 산악지대로 탈출하여 반추축국 투쟁을 이어갔다. 우스타샤 같은 경우, 전쟁 말기 소련군과 티토의 파르티잔이 발칸 반도 전체를 장악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내로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여 종전 시점까지 항전을 계속했다.[16] 각 지역의 체트니크의 경우는 상황이 악화되면 고향을 버리고 떠나 항전할 바에는 차라리 추축진영 주둔군과 타협을 택한 경우가 많았고, 상술했듯이 미하일로비치는 이를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한편, 미하일로비치 본인의 현실인식도 체트니크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상술했듯이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영토가 추축국에 갈기갈기 찢겨지고 여러 괴뢰정권이 세워진 상태였다. 전쟁 초기에는 유고 망명 정부가 위치한 영국조차 런던이 불타오르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되네 마네 하던 시기라 유고슬라비아의 저항세력을 지원할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 유고 국내로 보면, 추축국이 합병한 지역에서는 세르비아인들이 추방당하고 우스타샤가 세르비아계 주민 수십만 명을 학살함에 따라 미하일로비치를 비롯한 체트니크 수뇌부는 세르비아 민족 절멸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17]
티토의 파르티잔이 독일의 후방을 어지럽혀 서방 연합군과 함께 소련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다면, 미하일로비치는 민족 절멸을 막기 위해, 생존 그 자체와 연합군이 승기를 잡아 개입할 때까지 역량의 보존을 중시했다. 이는 체트니크가 막강한 화력의 추축군(특히 독일군)보다 상대적으로 무장이 빈약한 우스타샤나 파르티잔과의 투쟁에 집중한 이유가 되었다.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니크는 독소전 초반 이후부터는 독일과의 교전을 회피하였다.[18] 동부전선 때문에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독일은 유고 전역에서 저항세력이 봉기하자 본보기식으로 철저한 징벌과 보복을 통한 공포정책으로 대응했다. 빌헬름 카이텔은 독일군 사상자 하나에 100명, 부상자 한 명에 50명을 처형하겠다고 공표했다. 1941년 10월 중순 크랄례보에서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의 공동작전으로 독일군 10명이 죽고 1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자 독일군은 자기들이 공표한대로 그 즉시 근방의 민간인 1,700명을 학살하였다. 비슷한 시기 크라구예바츠에서 독일군 사상자 수십 명이 발생하자 또 2,800명 가량을 학살했다.
1941년 10월 21일 크라구예바츠 학살사건[19] |
이러한 일련의 학살사건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독일군의 잔혹한 보복정책은 체트니크의 반독활동을 억제하는데 큰 성과를 보였다. 체트니크의 입장에서는 가족과 친척, 고향마을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20]로 무장을 했는데 독일군에 대항했다가는 그 가족과 마을이 몰살당할 판이었다. 이에 독일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거나 아예 추축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중에는 아예 나치 독일의 괴뢰정권인 세르비아 구국정부 측으로 전향하는 체트니크 조직도 있었다.
미하일로비치 역시 연합국의 지원도 전무한 상태에서 독일군과 당장 정면으로 승부하면 박살나니 교전을 회피하며 '내부의 적'인 우스타샤와 파르티잔을 우선적으로 때려잡아 유고슬라비아 내 주도 세력으로 거듭나고 차후 연합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 추축국을 몰아내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조는 당연히 미하일로비치 직속 이외의 각 마을과 지역 체트니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어차피 제지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미하일로비치 스스로부터가 분명히 연합군의 일원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체트니크들이 고향마을의 파괴와 몰살을 면하려고 추축군과 협력을 하는 것에 대해 민족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미하일로비치가 강경하게 압박할 입장이 못 되었다.
3.2. 나치 독일의 입장과 접근
한편 유고슬라비아에 주둔한 추축군의 경우, 특히 독일은 부차적이고 2차대전 승리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유고 지역에 사단이 두 자릿수 이상 투입되자 환장할 지경이었고[21] 우스타샤의 폭주지금 당장에 서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점에서 추축국과 체트니크는 서로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다. 독일 또한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시적이나마) 적을 하나라도 줄이고 싶어했는데, 티토의 파르티잔은 이념적으로 명백히 적인데다가 서방 연합군의 전쟁수행과 독소전 승리 기여를 목적으로 활동 중이니 타협을 볼 여지가 없었다.[23] 이에 따라 현지 추축군과 체트니크 간에 도시지역은 추축군이, 교외 시골지역은 체트니크가 점령하는 식으로 암묵적인 휴전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아예 빨치산에 공동 대응하는 사실상의 협력관계로 나아가는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편지에서 체트니크를 두려운 적이라 표현하는 등 일단 공공의 적인 파르티잔이 강하니 추축국 세력 편에 붙은 것일 뿐, 완전히 손잡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실제로 이후 전황을 보면 양자가 손잡고 파르티잔에게 대항한 경우가 많았지만 주도권을 두고 자기들끼리 싸운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위에 말한 대로 당시 체트니크는 명목상 미하일로비치가 지도자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부별로 정책과 동맹 대상이 좀 달랐다. 대부분의 체트니크는 파르티잔 때문에 이탈리아, 독일, 우스타샤 등 추축국 세력과 임시 동맹을 맺었으나 미하일로비치 본인과 그 직속 부대는 우스타샤만큼은 끝까지 적대, 증오했다. 그리고 독일 등 여타 추축국들 역시 다른 체트니크는 그렇다 쳐도 지도자였던 미하일로비치만큼은 적대했다. 특히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보스니아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체 세르비아계 인구는 약 190만으로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 독립국 내 세르비아계의 1/3은 추방, 1/3은 개종, 1/3은 학살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고 실제로 수십만에 달하는 세르비아계를 학살하고 나치를 모방한 세르비아계 절멸수용소를 운영했다. 체트니크는 보복으로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 수십만을 학살하며 이에 맞불을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조직인 우스타샤와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인 체트니크는 상황에 따른 일시적 제휴나 협력이라면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서로 앙숙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3.3. 전쟁 중후반 그리고 최후
한편 북아프리카 전역을 승리로 마무리지은 연합군은 유럽대륙에 본격적인 제2전선 개전을 준비했다. 연합국이 유럽대륙에 개입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니크는 연합국이 유고슬라비아에 개입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파르티잔을 때려잡고 향후 정국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이에 따라 점차 독일과의 투쟁 대신 파르티잔과의 투쟁에 더욱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자충수가 되었다.1943년이 되며 2차 대전이 중반에 접어들고 전황이 점차 연합군에 유리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고 유고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영국이 보기에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은 티토의 파르티잔이었다. 반면 체트니크는 영미의 전쟁수행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파르티잔이나 우스타샤와의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고, 심지어 추축국과 협력하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미하일로비치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던 간에 연합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체트니크의 행태는 기회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 내에서는 체트니크 대신 차라리 대독전선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파르티잔에 힘을 실어주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영국이 관심 있던 것은 '누가 독일군을 더 많이 죽였는가'였지[24][25] 유고 내부의 복잡한 사정 같은 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여기에 유고 내부적으로는 우스타샤와 체트니크가 상호간에 벌이는 인종청소가 체트니크에게 뼈아픈 부메랑으로 되돌아 왔다.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은 피에 피를 부르는 잔혹한 보복전에 질려버렸고, 대안으로 공산당에 대거 가담하여 파르티잔의 세가 급격히 불기 시작했다. 공산당과 파르티잔은 유고 내 특정 민족의 배제가 아니라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의 해방, 그리고 궁극적, 최소한 이론적으론 각 민족의 권리를 보장하여 자결주의에 입각한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연방' 건설을 목적으로 했다. 이에 따라 우스타샤나 체트니크와는 달리 특정 민족을 목표로 한 인종 청소나 보복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다.
1944년 무렵에는 영국은 파르티잔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하며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동년 8월에는 영국의 압박을 받은 망명정부가 추축국 부역 혐의로 체트니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파르티잔에 적대하는 집단은 모두 반역자라고 선언하였다. 물론 아쉬울 게 없던 티토는 왕실의 선언에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일로비치는 총사령관직을 박탈당하고 체트니크는 연합국의 후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렇게 대세가 기울자 체트니크 조직원들까지 대규모로 이탈하여 파르티잔으로 투항, 전향하기 시작했고 체트니크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다.
결국 전후에는 티토와 파르티잔들이 영국, 소련 등 유고를 둘러싼 승전국들의 지원과 승인을 받은 공산주의 정권,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설립하면서 체트니크는 완전히 몰락했다. 1946년 7월, 미하일로비치를 비롯한 체트니크의 지도부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하지만 일부는 공산정권 치하의 유고슬라비아를 탈출하여 다른 국가들로 달아나 그곳에서 병이나 노환으로 자연사한 무리들도 있었는데 도브로슬라브 예브제비치(Dobroslav Jevđević,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와 몸칠로 주이치(Momčilo Đujić, 세르비아인)[26], 카를 노바크(Karl Novak, 슬로베니아인) 등 일부 체트니크 인사들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미국 등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27]
4. 유고슬라비아 전쟁
2차 대전 이후 체트니크는 한동안 잊혔으나 1980년대 티토 사후에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재조명이 시작되었고, 때마침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도 대세르비아를 내세우며 세르비아인들의 지지를 얻어가며 타 공화국과 충돌했던 시기였는지라 더욱 주목받았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한 뒤로는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은 자랑스럽게 체트니크 깃발을 들고 활동했다. 물론 크로아티아계 민병대 역시 자랑스럽게 우스타샤 깃발을 들고 활동했다. 유고 내 극우 민족주의 세력과 모두 대립했던, 티토를 비롯해 사회주의 유고 연방을 세운 사람들이 보면 아주 기가 막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도 그 잔재는 남아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의 스릅스카 공화국 교과서에서는 체트니크의 전쟁 범죄와 나중에는 추축국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숨긴 채 그 미화된 내용을 교과서에 싣고 있다. 아예 파르티잔과 함께 반 파시스트 운동을 벌였다는 식의 왜곡된 내용들도 적혀져 있다. 세르비아에서는 심지어 2015년에 정부에서 미하일로비치를 복권시키기도 했다.[28]5. 기타
- 만화작가 굽시니스트가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18화 부록으로 관련 내용을 다루었다.
6. 같이 보기
[1] 상단 이미지의 백골기에 삽입된 문장, 체트니크의 실질적인 표어였다.[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공식적으로 합병하자 세르비아 측이 이에 반발하며 양측 간에 긴장사태가 발생했다.[3] 해골기를 들고 있다.[4] 왜 사실상의 탈퇴였냐면, 페타르 2세도 딱히 반독 성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페타르 2세 역시 독일을 자극하고 싶어하지 않았다.[5] 개전 당시 대령계급으로 제2 군단 참모장을 맡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함락 이후 독일군에게 항복을 거부한 채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이끌고 부대를 이탈해 체트니크를 조직하고 점령군에 대항해 봉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망명 정부와 영국은 그를 국방부 장관 겸 유고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6]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의 협력이 무산된 데에는 티토의 초기 노선도 영향을 주었다. 티토는 항쟁초기에 반파쇼 투쟁과 더불어 강경한 계급투쟁 또한 병행하였다. 하지만 계급투쟁이 중산층과 농민층에게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하자 유연하게 노선을 수정하여 반파쇼, 반독 투쟁에 집중했다. 달리 말하자면 봉기 초기의 파르티잔은 강경노선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것이 체트니크와의 협상 결렬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7] 사진에서 보듯이 미하일로비치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세르비아 농촌 가부장의 이미지이다. 이는 체트니크의 주요 구성원인 세르비아 농촌 주민들에게 친근한 접근을 염두에 둔 것으로 체트니크의 지향점을 대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중요한 동맹인 영국에서는 산적 두목 같다는 평을 들었다. 라이벌인 티토의 경우에는 해당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외국어에도 능숙한데다가 깔끔하게 면도하고 말끔한 옷을 빼입고 다녀 대외적 이미지가 좋았다.[8] 1937년 당시 미하일로비치, 어깨에 대령 견장을 달고 있다.
4년 동안 40년은 폭삭 늙어버린 것 같다.[9] 1942년 5월 25일자 아직 추축국 부역 혐의가 있기 전. 안 닮았다?[10] 미하일로비치는 옵저버로 유고에 파견 나온 한 영국 장교에게 자신들의 공격 대상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우스타샤, 크로아티아인, 무슬림, 독일 순이라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이 와중에 이탈리아는 아예 언급도 안 한다.[11] 한국으로 치면 극렬 혐일이던 이승만이 좌익들을 막아야 한다며 친일 고문경찰들을 총애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12] 주로 시골의 농촌[13] 두 사례는 지역공동체의 수호와 근왕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다만 임란기 의병은 어찌됐든 조정이 보존되어 조선 국내에서 전쟁을 지도함으로서 초기 봉기 이후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의병 조직의 체계가 관과 연계되어 통제됐다. 하지만 2차 대전기의 유고슬라비아는 전국토가 순식간에 추축군에게 함락되면서 그럴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14] 자신이 임명한 것도 아닌 자생적인 의용군 조직들이니 지휘관을 해임하거나 교체하는 방법도 없고, 물주인 것도 아니니 그것을 빌미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당초 각 조직간에 연락을 취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아서 미하일로비치가 지역 체트니크 조직에 현지시찰하러 방문했더니 그곳 주둔 추축군과 협력 중이던 경우도 많았다.[15] 물론 그렇다고 지역 체트니크들이 미하일로비치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미하일로비치는 체트니크가 충성하고 있는 유고 왕국 망명정부와 영국에 공인받은 인물이고 체트니크의 주요 구성원인 농민들로부터 자신들의 수호자로써 '드라자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지지를 많이 받았다. 따라서 지역 체트니크들도 미하일로비치의 권위를 존중해야 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미하일로비치 역시 각 지역 체트니크들의 입장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 지시를 강조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16] 전쟁범죄 혐의로 인해 공산진영 측에 투항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로 후퇴한 우스타샤 잔당은 영국에 투항하려 했으나, 영국은 이들을 죄다 유고슬라비아로 송환시켜 버렸다.[17] 2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계에 대한 학살이 있었지만, 이것이 실제적으로 절멸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 미하일로비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18] 독일과의 협력이라는 의미와는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19] 독일군 장교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희생자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20] 우스타샤나 빨치산처럼 이상국가 건설이 아니라.[21] 물론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배치된 독일군은 정상적인 3각 편제도 아닌 2각 편제의 감축 제대인데다가 2선급도 아닌 3선급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인적자원으로도 열악하여 전향한 카자크 등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 껄끄러운 소련군 포로 출신 병력들이나 독일 국방군에 편입된 크로아티아인들이 다수 배치되었다. 실질 전투 능력은 7개 사단 수준에 지나지 않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독일이 수세에 몰린 마당에 유고에 이만한 병력을 배치하는 것마저도 엄청난 손해였다. 동부전선만하더라도 전쟁이 진행되고 전황이 악화되면서 전술적 예비대를 확보하는 것 조차 버거운 것이 실정이었다.[22] 심지어는 독일이나 이탈리아군이 도움 안 되는 트롤링말썽만 부리는 꼴을 보다 못해 일부 지역에서 우스타샤 세력을 무장해제시키는 사태도 벌어졌다.[23] 파르티잔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독소전 개전 이후의 일로 이전까지 티토는 활동을 자제했었다.[24] "simply to find out who was killing the most Germans and suggest means by which we could help them to kill more."[25] 윈스턴 처칠이 유고 파견 영국군 사절단장 맥클린(Fritzroy McLean)준장에게 지시하며 했던 말. #[26] 이 사람은 심지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하는 90년대까지도 생존해 있었는데, 이 시기 벌어진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27] 티토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스타샤에 대해서는 안테 파벨리치와 같이 해외로 도주한 우스타샤 지도부 인사들을 겨냥해 망명한 국가들에 암살자를 보내어 암살을 시도하거나, 유고슬라비아로의 범죄인 인도 송환을 요구했을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나, 체트니크의 경우 미하일로비치를 비롯해 유고슬라비아 국내에 남아 있던 지도부 인사들만 처벌하고, 국외로 도주, 망명한 체트니크 인사들은 암살자를 파견해 암살을 하거나 망명을 받아준 국가들에게 인도 송환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대로 두었다.[28] 다만 미하일로비치 본인이 추축국과 적극 협력했다는 증거는 없다. 문제는 체트니크 하부 조직들은 분명히 추축국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과 이들은 미하일로비치를 지도자로 취급했다는 점, 미하일로비치도 이들 하부 조직들과 어느 정도 교류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