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4:41:08

키우 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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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
키우 삼판
ខៀវ សំផន | Khieu Samphan
[1][2]
파일:Khieu_Samphan_2014.jpg
출생 1931년 7월 27일 ([age(1931-07-27)]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스바이리엥 성[3]
종교 불교
가족 부친 키에우 롱, 모친 포르 콩, 아내 소 쏘지읏[4]
재임기간 민주 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
1976년 4월 11일 ~ 1979년 1월 7일
학력 몽펠리에 대학교 (경제학 / 석사)
파리 대학 (경제학 / 박사[5])

1. 개요2. 일생3.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키우 삼판.jpg
민주 캄푸치아 시기의 모습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도 정신적 사유재산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혁명세력이 되려면 머릿속을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닌 지식은 식민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에게서 배워온 것이므로 말끔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지식인 여러분은 유럽의 영향력, 우리식으로 말하면 '식민주의의 잔재'를 가지고 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이 공산혁명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고, 캄보디아의 보통 사람들인 농민들과 (똑같아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머릿속을 씻어내야 합니다.
물질적, 정신적 사유재산[6][7]을 모두 없애면 인민이 평등해질 것입니다. 사유재산을 허용하면 반드시 누군가는 조금 더 가지게 되고, 또 누군가는 조금 덜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인민이 평등해질 수 없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다른 사람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고, 여러분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입니다. 사유재산을 아주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여러분은 평등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키우 삼판. 해외에서 캄보디아로 귀국한 지식인들에게 '정신개조'를 명분으로 한 강연을 주재하며.[8][9]

캄보디아의 정치가, 경제학자, 사회주의 혁명가로 민주 캄푸치아의 명목상 국가주석이었다.

공산국가에서는 국가 주석의 자리는 바지사장이고 실권은 공산당 총비서가 쥐는 경우가 많다. 민주 캄푸치아도 당 총비서인 폴 포트가 최고 권력을 쥐고 있긴 했지만 키우 삼판은 말로만 '명목상'이지 사실상 실권은 폴 포트 바로 다음이었고, 실제로 폴 포트 이상으로 강경하고 잔인한 성격이었다고 하며 후술하듯 자급자족 경제 정책(Autarky)을 비롯한 킬링필드의 이론을 입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일생

1931년 7월 27일에 캄보디아 남동부의 스바이리엥 엉에서 가난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크메르인이었으나 외할아버지가 중국인이라 중국계 혈통이 일부 혼재되어 있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과일과 채소를 판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며 공부를 했으며, 그 결실로 국가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가서 1955년 몽펠리에 대학에서 석사, 1959년 파리 대학에서 <Cambodia's Economy And Industrial Development>이라는 논문으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10]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그는 크메르인 학생 연합을 조성해 좌익 혁명 운동을 주도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이에 동조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후에 크메르 루주의 수뇌부가 된다. 그는 파리 유학 시절에 '캄보디아에서 진정한 사회혁명을 이룩하려면 나라 전체를 교육, 산업, 도시, 화폐가 없는 완전한 농업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론[11]을 제시하여 많은 크메르인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놈펜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로 활동하는 동시에 'L'Observateur(롭세르바퇴르)[12]'라는 좌익 성향의 프랑스어 주간지를 발간하여 정부를 비판하다가 1년 뒤에 폐간되었는데 이때 그는 공개적으로 구타당한 후 옷이 벗겨진 채 사진이 찍히는 일을 겪었다. 이후 드는 노로돔 시아누크 공 밑에서 상무대신 등을 지냈는데 당시 '정부 리무진을 타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1966년에는 우익을 통제하기 위해 시아누크가 만든 '반정부'라는 당의 일원이 되었지만 그의 급진주의로 당이 분열되자 그는 체포 영장이 발부된 후 1967년 4월경에 프놈펜을 떠나 정글로 도피하게 된다. 1969년에는 나중에 캄보디아군의 지도자가 되는 따 목(Ta Mok, 1926~2006)의 초청으로 크메르 루주에 입당하게 된다.

그는 1970년 3월에 론 놀의 쿠데타로 축출된 시아누크가 반론 놀 투쟁을 제창하자 동료 2명과 함께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3] 동년 4월부터 1976년까지는 시아누크가 망명지 베이징에서 결성한 '캄보디아 민족연합정부(GRUNK)'에서 일하며 국방대신, 부수상, GRUNK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하고 3일 뒤에 폴 포트와 함께 프놈펜에 입성했으며, 같은 해에 통일전선문제 및 경제·상업·산업·관세담당의 특별고문에 임명되었다. 1976년 4월 11일에는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이듬해 초반에는 당중앙위원회 비서국의 책임자가 되며 민주 캄푸치아의 서열 5위에 오른다.

1979년 1월 7일에 친(親)베트남군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당하자 그는 폴 포트 일행과 같이 도주한 후 반군(叛軍)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로서 1982년 6월 노로돔 시아누크, 손 산 등과 함께 반(反)베트남연립정부의 구성에 합의하고 부주석에 지명되었다. 1985년부터 1998년 12월에 훈 센의 캄보디아 정부에 투항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크메르 루주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80년대 후반에 캄보디아에 평화가 찾아올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각종 국제적 협상에도 참여하게 된다.

1991년 11월 27일에는 캄보디아 내전 종식을 위한 파리 협정을 통해 세워진 캄보디아민족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방콕에서 캄보디아로 귀국했지만 분노한 군중들이 킬링필드를 기억하자는 구호 아래 그의 숙소를 급습해 분노의 짱돌 세례를 퍼붓는 바람에 겨우 8시간만에 국외로 도주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돌에 맞아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그의 모습이 외신을 타기도 했다.

2003년 12월에 공개된 문서에서 그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 하에서의 잔학행위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이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200만명 가까운 인민에 대한 범죄행위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킬링필드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2.1. 전범 재판

2007년 11월 13일에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던 이엥 사리와 사회부장 이엥 티릿 부부가 체포되자 그는 그 충격 때문인지 뇌졸중이 일어나 다음날에 프놈펜의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그의 저서에서는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 정책은 없었다. 대량 학살을 수행하기 위한 어떤 방향도 설정되지 않았다.", "인민의 복지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항상 있었다."는 주장을 펼치며 크메르 루주 치하의 모든 인명피해를 폴 포트의 탓으로만 돌렸다.

2007년 11월 19일에 뇌졸중과 이전부터 앓던 고혈압 치료를 받고 병원을 나오자마자 경찰에 체포되어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2008년 4월에 처음으로 캄보디아 전범재판에 출두하게 되었다. 첫 재판에서 변호를 맡은 프랑스인 변호사 자크 베르제[14]에 따르면 삼판은 캄보디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한 적이 없지만, 국가원수로서 어떠한 범죄에도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취지로 변명했다고 한다.

2013년 10월 21일에 검찰에 의해 종신형이 구형되었으며 2014년 8월 7일에 1심에서 공산당 부서기이던 누온 찌어와 함께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6년 11월 23일에 있던 2심에서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8년 11월 16일에 베트남인에 대한 대량학살 혐의에 유죄를 인정받고 종신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 재판의 판결에서 그는 "'대규모로' 민간인의 죽음을 초래한 범죄 정책을 '장려하고 선동하고 정당화'했다"고 강조되었다.[15]

2021년 8월 16일 프놈펜의 법원에 출두해서 '1심으로 법원이 자의적으로 증거를 택했다'는 취지로 유죄 판결을 뒤집기 위해 항소했지만 당연히 이는 기각되어 결국 2022년 9월 22일 대량 학살, 반인도적 범죄, 제네바 협약의 중대한 위반 등의 혐의로 종신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렇게 캄보디아 전범재판은 종결되었다. 기사

2023년 2월 8일 캄보디아 남부의 칸달(Kandal)주의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기사

2023년 8월 15일 밝혀진 근황에 따르면 전부터 구술로 편찬하던 책을 완성하기 위해 캄보디아 내무부에게 컴퓨터 사용 허가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변호사 콩 삼 온(Kong Sam Onn)의 말로는 칸달 교도소로 이송 전에는 컴퓨터 사용이 허용되었으나 칸달 교도소로 이송되는 동안 컴퓨터가 고장났고, 컴퓨터를 수리한 후에도 컴퓨터 사용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콩 삼 온의 말에 따르면 삼판의 글은 최초의 크메르 루주 운동으로 인한 투쟁, 현 정부 측이 승리하면서 이전 역사가들이 '한쪽 면만 쓴 것'과는 다른 '독특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자신의 일생을 변명, 미화하는 자서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6] #1 #2

2023년 12월 기준으로 92세라는 고령이란 것을 감안하면 건강한 상태라고 한다. #

3. 여담

  • 크메르 루주 시절에는 그나마 의식은 있었는지 과격한 수준의 농업 집단화에 놀라워했고 뚜올쓸라엥에서 목숨을 잃은 과거의 동료 후 님(Hu Nim, 1932~1977)[17]에 대해 동정을 표했다고 한다.
  • 미국의 소리와 인터뷰를 했을 때 '항상 국가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기 때문에 침착했으며, 자신의 일에 전념했기 때문에 정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몰랐다'는 망언을 남겼다.
  • 폴 포트의 아내였던 키우 폰나리, 민주 캄푸치아의 사회사업부장 이엥 티릿[18]과 먼 친척 관계라고 한다. '키우'라는 성씨가 캄보디아에서는 그리 흔하지는 않은 성씨이기도 하고.
  • 캄보디아 수상 훈 센의 발언에 따르면 항복 협상 당일 훈 센을 20번이나 모욕하였다고 한다. #

[1] 실제 발음은 "끼우 썸펀"에 가깝다.[2] 중국어 표기: 喬森潘[3]캄보디아 스바이리엥 성[4] So Socheat. 1972년 12월에 결혼했는데, 이때 중매를 맡은 사람이 폴 포트였다.[5] 박사 학위 논문: Cambodia's Economy And Industrial Development (1959)[6] 그 '정신적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부모, 가족, 아내였다. 뒤이어 삼판은 "우리는 모두 엉까의 보호를 받는 커다란 가족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는 사회주의 대가정론에 따라 '우리는 '위대한 수령'을 아버지로, 을 어머니로 모신 하나의 대가정'이라고 주장하며 주민들을 세뇌시킨 북한과 너무나 유사하다.[7] 참고로 크메르 루주는 실제로 이엥 티릿 사회부장의 주도로 문자 그대로의 '가족 파괴 정책'을 실시했다. 자세한 것은 킬링필드 문서의 "'가족'이라는 개념의 파괴" 항목 참조.[8] 삼판은 이 강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일반 대중이 우리가 여기서 나눈 이야기에 알게 되면 실망할 것'이라며 학습 내용을 비밀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9] 이하 필립 쇼트, 폴 포트 평전 602쪽 중 참고자료[10] 참고로 파리 대학은 1970년 68 운동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대학교 중 하나였다. 즉슨, 키우 삼판은 전 세계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엘리트였다.[11] 이는 킬링필드의 이론의 바탕이 된다.[12] 한국어로는 '관찰자'를 의미한다.[13] 여담으로 당시에는 삼판이 시아누크의 보안관에게 죽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프놈펜에서 이들은 '3인의 망령'으로 불렸다고 한다.[14] Jacques Vergès, 1925~2013. 원래 샤를 드골자유 프랑스군에서 활동한 인물이었지만 이후에는 '리옹의 도살자'라 불리던 나치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였던 카를로스 더 자칼 등을 변호하며 '악마의 대변자'라고 지탄을 받았다. 이에 대해 베르제는 "고발이 더 무거울수록, 의사가 모든 사람을 치료해야 하는 것처럼, 변호의 의무는 더 커진다."며 나름의 해명을 했다.[15] 그가 킬링필드 정책의 입안자란 것을 감안한 구절이다.[16] 우스타샤 전범 딘코 사키치도 말년의 수감 생활 중에 자서전을 쓰기 위해 컴퓨터 사용을 요구해 허가를 받아내고 자서전을 썼다고 한다.[17] 민주 캄푸치아의 정보선전부장을 역임했으며 온건파였다. 참고로 후 님이 뚜올쓸라엥에 끌려온 이유는 황당하게도 겨우 라디오 방송에서 피아노곡을 전국에 내보내서였다고 한다. 과장이 아닌 것이 실제로 크메르 루주는 겨우 책을 똑바로 들 줄 알거나 시계를 읽을 줄 아는 사람까지 지식인으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런 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은 태반이 부농 집안 출신에 프랑스에 유학을 갔다 온 뒤 교사로 일했던 엘리트들이었다.[18] 이엥 사리 부수상&외교부장의 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