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4 12:20:31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Alojzije Viktor Stepinac
파일:Kardinal_Alojzije_Stepinac.jpg
출생 1888년 12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레자리
사망 1969년 5월 17일 (향년 80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크라시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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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자그레브 대주교
서명
문장
파일:Coat_of_arms_of_Alojzije_Stepinac.svg.png
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기2.2. 주교 시절2.3. 크로아티아 독립국 시절2.4.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

1. 개요

자그레브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우스타샤에 부역해 세르비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를 도왔다는 혐의가 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는 1898년 5월 8일 자그레브 인근 브레자리에 위치한 매우 부유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테피나츠는 출생지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그레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6학년을 마친 후, 그는 사제직에 헌신하겠다는 진지한 의지를 가지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극심한 소모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1916년 그는 징집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피아베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후퇴하지 못하고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1] 그후 스테피나츠는 유고슬라비아 군단에 징집되어 마케도니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군대에서 복무한 공로로 스테피나츠는 카라조르제 별 훈장을 수여받았다.

2.2. 주교 시절

전쟁이 끝난 후 스테피나츠는 아버지로부터 대학 진학을 권유받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1학기가 끝나자 그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돌아왔고, 아버지는 그를 가장 큰 가족 영지 중 하나인 카메나레보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카메나레보로 이주한 그는 가톨릭 청년회 지역 지부에 가입했다. 이후 사제 요시프 론차리치의 도움으로 사제의 길을 택해 1924년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7년간 신학을 공부한 뒤 1930년 사제로 서품되고 1931년 박사학위를 취득해 귀국했다. 귀국 후 고향 본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지만 교구장은 그를 자그레브로 불러 의전담당 사제로 임명하고 카리타스 설립을 맡겼으며 그는 빈민 급식소 개설 등 자선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34년 교구장 바우에르의 후계자를 찾는 과정에서 스테피나츠가 추천되어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자그레브 대주교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36세로 세계 최연소 주교였다. 그는 사목 표어로 “주님,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를 선택하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사회적 약자와 자선활동에 힘쓰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 1937년 바우에르가 사망하자 정식 자그레브 대주교가 되었고 가톨릭-유고슬라비아 관계 악화 속에서도 차분한 입장을 취했으며, 나치의 인종주의를 비판하고 헝가리·유럽 정세 속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는 유대인 난민을 위한 지원조직을 만들고 부유한 신자들에게 기부를 촉구하는 한편, 1939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성립을 환영했고 같은 해 크로아티아 군인들을 위한 군종대리주교로 임명되었다. 1940년에는 소수 민족의 권리 수호를 강조하며, 1739년부터 이행되지 않은 크로아티아 의회의 루드브레크 성지 축성 서원을 실현하려고 국민에게 서원 이행을 촉구했고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1940–1941년 ‘크로아티아 민족 성년’ 선포를 받아냈다.

2.3. 크로아티아 독립국 시절

1941년 3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추축국 가입 의정서에 서명했으나 이틀 뒤 장교들이 영국의 지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페타르 2세가 국가 원수가 되고 시모비치가 총리가 되었다. 독일은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탈퇴하지 않은 유고슬라비아를 4월 6일 침공했고, 스테피나츠는 일기에서 유고슬라비아 군의 약한 저항과 크로아티아 병사들의 싸울 의지 부족을 기록하며 그 책임을 지난 20년간의 세르비아인의 크로아티아 정책에 돌렸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침공 직후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하고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웠으며, 마체크가 지도자직을 거부하자 반유대주의·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우스타사가 권력을 잡았다. 4월 10일 크바테르니크가 크로아티아 독립국 수립을 선언하자 스테피나츠는 일기에 “크로아티아 민족의 역사적 전환점”이라 적었고, 이틀 뒤 크바테르니크, 16일에는 안테 파벨리치를 방문해 축하했는데 이는 아직 유고슬라비아 왕에게 충성서약이 유효한 시점이어서 형식상 서약 위반이었다. 그는 4월 12일 전사한 크바테르니크의 형제의 장례를 직접 집전했고, 4월 13일 부활절 미사에서는 평화를 강조했으며 크바테르니크는 미사 중 무릎을 꿇고 그의 반지를 입맞추었다. 4월 28일 그는 크로아티아 독립국 수립을 기념하는 ‘테 데움’을 모든 본당에서 열라고 지시하며 크로아티아인의 오랜 염원이 실현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스테피나츠는 전쟁 내내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독립국 정권 초기부터 유대인 박해와 세르비아인 제거 정책, 강제 수용소 설치, 반역죄 사형을 규정한 폭압 법령을 시행했고, 스테피나츠는 1941년 10월 설교에서 증오를 경고하며 기독교적 사랑을 강조했다. 파벨리치와 스테피나츠 사이에는 불신이 커졌고, 그는 이후 우스타샤로부터 점차 거리를 두려 했으나 가톨릭 교계는 끝까지 크로아티아 독립국과 공개 결별하지 않았다.

1942년 코자라 전투 후 독일-우스타샤군은 주로 여성·노인·아이 등 6만8천 명을 사로잡아 크로아티아 독립국 수용소로 보냈고 많은 부모가 강제노동으로 독일에 끌려가며 아이들은 방치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대량으로 굶주리며 죽어갔고, 디아나 부디사블례비치는 1941~42년 스테피나츠에게 인도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처음엔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942년 7월 독일 측 인사들의 중개로 일부 아이들이 풀려나자, 스테피나츠는 자신의 시설(대주교 저택의 온실 포함)을 제공하고 카리타스를 통해 아이들 입양·보호를 지원해 1942년 말까지 5,124명을 가정에 위탁하도록 도왔다. 야스트레바르스코의 수도자들이 운영한 임시 보육시설에서도 많은 아이들이 사망했지만 상당수의 생존이 가능했다. 스테피나츠는 전쟁 내내 폴란드 망명정부 특수요원들과 접촉하며 그들을 이탈리아 점령구역 등으로 피신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미트라(Mitra)’라는 암호명으로 폴란드 정보망과 협력했다는 기록도 있다. 1943~44년 그는 영국·폴란드 측과 연결된 언론·정치 인사들과 접촉했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연합국 쪽으로 전향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1945년 연합국이 티토 정부를 승인한 뒤에도 스테피나츠는 크로아티아 독립국 축일 미사집전과 공산주의 비판 등으로 우스타샤 정권에 남은 지원을 이어갔고, 전쟁 말기 파벨리치가 그에게 권력 이양을 요청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몰락 직전 우스타샤 외무부 문서와 함께 약탈 금을 보관했으나 조사에서 내용은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945년 5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자그레브를 장악하자 그는 보복 학살 중단을 요구했고, 잠시 체포되었으나 풀려난 뒤 초기에는 새 유고슬라비아 정부와 겉으론 협조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도피 중인 우스타샤 장교들이 그와 접촉하려 했으나 그는 협력하지 않았고, 그의 저택에서 발견된 크로아티아 독립국 문서와 금괴는 결국 당국에 넘겨졌다.

2.4.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

1945년 9월 가톨릭 주교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501명의 성직자가 살해·투옥·실종되었음을 밝히는 목회서한을 발표하며 공산정권의 불법 행위를 비판했고, 이에 대해 티토 정권은 “크로아티아에서 학살된 세르비아인에 대해서는 왜 침묵했는가”라며 반격해 언론·거리에서 스테피나츠와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그들은 우스타샤가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를 대량 살해했을 때 스테피나츠가 공개 항의한 적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한편 공산정권은 스테피나츠를 중심으로 가톨릭·국민주의 세력이 결집한다고 판단해 교회를 로마와 분리하려 했고, 그가 로마로 떠나도록 요구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1946년 9월 체포된 스테피나츠는 점령기 우스타샤 정권과의 협력, 강제 개종 방조, 우스타샤 군종감 제도 운영, 전후 체제 전복 시도, 무장 반란 지원, 국가 모독 등 6개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은 방어권이 억제된 정치재판이었으며 많은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10월 11일 짧은 심리 끝에 징역 16년·추가 자유 박탈 5년이 선고되었다.

그는 크로아티아 독립국 지도자 방문 및 초기 지지 사실은 인정했으나 우스타샤 문서 보관과 전후 반란 조직과의 연계는 부인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재판이 공산당의 통제 아래 진행된 명백한 정치적 판결이었고 법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본다. 스테피나츠는 1946~1951년 레포글라바 감옥에 특별 수감자로 지내며 매일 미사를 집전하고 가족 및 일부 방문객을 만났고, 1951년 조건부 석방 후 고향 크라시치로 보내져 엄격한 경찰 감시 아래 지냈다. 그는 자신이 죄가 없으며 석방도 조건부가 아닌 정권의 판단일 뿐이라 말했고, 크라시치에서 독서·집필·기도·미사로 시간을 보내며 서방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크로아티아 출신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치 대주교는 1953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조국을 떠나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1953년 미국과 독일의 전문가들에 의해 진단받아 적혈구와 혈소판 증가를 특징으로 하는 다혈구증 진단을 받았고, 이후 수차례 혈전 수술을 받았다. 1960년 2월 10일 61세의 나이로 감금지였던 크라시치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사인은 다혈구증에 따른 혈전으로 기록되었다. 일부에서는 장기적 중금속 독살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이에 대한 명확한 의료 기록은 제시되지 않았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언론은 그의 사망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지만, 뉴욕 타임스는 1면에 보도했다. 장례는 1960년 2월 13일 자그레브 대성당에서 약 2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현재 자그레브 대성당에 묻혀있다.
[1] 그의 부모는 그가 전사한 줄 알고 장례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