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48:25

비오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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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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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9대 비오 11세 제260대 가경자 비오 12세 제261대 성 요한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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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0대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
Venerabilis Pius XII
Venerable Pius 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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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
(Eugenio Maria Giuseppe Giovanni Pacelli)
출생 1876년 3월 2일
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망 1958년 10월 9일 (향년 82세)
이탈리아 라치오주 카스텔 간돌포
재위기간 제260대 교황
1939년 3월 2일 ~ 1958년 10월 9일
서명
파일:비오 1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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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부모 아버지 필리포 파첼리
어머니 비르기니아 파첼리
학력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신학 / 학사)
문장 파일:교황 비오 12세 문장.svg }}}}}}}}}
1. 개요2. 주교 및 추기경 시절3. 교황 재위기간
3.1. 파스칼리나 수녀3.2. 정치적 성향3.3. 나치 협조 의혹설3.4. 히틀러에 의한 납치미수 의혹설3.5.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의혹3.6. 건강 문제3.7. 동아시아 관련 행보3.8. 성모몽소승천 교의 반포3.9. 기타 행적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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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대관식 후 첫 강복을 하는 비오 12세
가톨릭의 제260대 교황이다. 사목표어는 'Opus Justitiae Pax(평화는 정의가 이룬 작품)'.

그의 재위기는 제2차 세계 대전,[1] 냉전 초기에 해당한다.

2. 주교 및 추기경 시절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bc2eca70394a80981ef0d126bb5c7d3.jpg

전임 교황 시절부터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한 뛰어난 인재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연간에 각국 군주들과 교황권에 대한 논의를 했던 것이 주요 업적이다. 후술할 신경증 증상도 사실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협상국동맹국 간의 중재를 위해서 갈 때는, 전쟁 중에 배급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라서 기차에 따로 음식을 실어날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비오 12세는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는데, 한 예로 뮌헨에서 머물 때는 쿠르트 아이스너의 혁명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들이 총칼을 들고 주교 관저로 쳐들어와 코앞에서 무기를 들이미는 상황까지 겪었다. 이때 각국의 외교관들도 뮌헨을 빠져나가는 개판난전의 상황이었지만, 비오 12세는 끝까지 뮌헨의 주교 관저를 벗어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훗날 나치의 위협에도 바티칸을 지킨 배짱이 그냥 나온 게 아닌 셈이다. 또한 1904년에는 3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미 몬시뇰 칭호를 받았는데, 이 칭호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하면 그의 능력과 위치를 어느 정도로 인정받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비오 11세와 파첼리 추기경

사실 비오 12세는 성직자가 되기 전부터 비범한 출신 배경을 가졌다. 비오 12세는 전통적으로 교황을 지지한 귀족 가문인 '검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할아버지인 마르칸토니오 파첼리는 교황청 재정부 차관보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인 필리포 파첼리는 바티칸의 항소 법원인 '로마 로타'의 대표였다. 또 비오 12세의 형인 프란체스코 파첼리는 비오 11세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라테라노 조약을 이끌어냈다.

뮌헨에서 머물 때 히틀러와도 만난 적이 있는데, 비오 12세는 히틀러에게 무도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라며 축복을 내렸다. 이때는 1918년으로, 히틀러가 나치당에 가입하기 전에 잠깐 만난 정도로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꿰뚫어 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히틀러의 위험성을 꿰뚫어 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찰리 채플린 등의 인물들도 히틀러가 나치당을 장악하고 슬슬 똘기를 드러내기 시작한 다음에야 눈치를 챘다. 이후 비오 12세 본인도 나중엔 뭔가를 깨달았는지 1935년 루르드에서 나치에 대한 선언문이 나오기도 했다. 아래는 그 선언에 대한 일부다.
반짝이는 새 장신구로 옛 과오를 덮은 불쌍한 사기꾼들이 있다. 그들이 사회 개혁의 기치 아래 모인 것이어도, 세상과 인생의 잘못된 가치관에 따른 것이어도, 혹은 인종이나 혈통에 관한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힌 것이어도, 모두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히틀러와는 관계없이, 독일 공산당의 뮌헨 지부를 가리켜 무질서하고 추잡하며, 유대인 천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나치 독일크로아티아와의 회담 때문에 후일 논란이 되기도 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바티칸 시국간의 권력 분배에 대한 확실한 처리가 파첼리의 주요 업적이었다.

3. 교황 재위기간

비오 12세 교황 즉위식

3.1. 파스칼리나 수녀

몇몇 논자들은 비오 12세를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 비오 12세의 개인 비서 겸 가정부 노릇을 한, 비오 12세 재임 내내 여교황 소리까지 들었던 바티칸 정계의 1인자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를 들고 있다. 파스칼리나 수녀와 당시 교황청 국무차관이었던 도미니크 타르디니 추기경, 티스랑 추기경과의 배틀은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근위병들을 불러 추기경을 내보내라고 명령하자, 근위병도 두 추기경도 모두 당황하고 어이없어 잠시 멍하니 있었고, 근위병들이 추기경들을 강제로 내보내려 하자 티스랑은 파스칼리나를 죽여버리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장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너무 적이 많아서 비오 12세가 사망한 뒤, 배웅해주는 사람도 없이 외로이 바티칸을 떠나야 했다. 더군다나 후임 교황이, 하필 그녀가 평생 경계했던 인물이었으니 더더욱. 하여간, 수녀는 바티칸을 나온 뒤 몇 년 후 바오로 6세의 지원을 받고 거물급 자선 사업가가 되어 죽기 직전까지 정열적인 삶을 살았다.

또한 활동 시기가 2차 세계대전 때인지라 그에 따른 일화도 많다.

3.2. 정치적 성향

파일:external/3.bp.blogspot.com/pacelli2.jpg

비오 12세 본인은 부패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19세기의 교황들 수준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물이었다. 후임이 탈권위적이었던 요한 23세라 더 부각되는 것도 있지만, 사실 비오 12세의 권위주의적 면모는 재임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거의 중세에서나 쓸법한 극존칭이나 예의범절을 요구한다거나…권모술수에 탁월했기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바티칸 정계는 2차대전 시기를 제외하건 항상 정쟁이 벌어졌다고 할 정도다. 친 교황파와 반 교황파의[3] 대립이 거셌는데, 비오 12세는 친 교황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반 교황파를 견제하는 등의 수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권력을 가졌던 교황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 아래에 언급할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권한을 위임한 것도,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추기경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교황으로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비오 12세의 건강이었다. 재임 후반기에 건강이 악화된 비오 12세는, 도저히 교황으로서 종교적 책무와 정치적 책무를 함께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교황 본인은 종교적 책무에만 집중하고 정치적 책무는 대부분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에게 넘겼다.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는 굉장히 유능했고, 교황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으며, 정치·종교적 성향까지 비오 12세와 비슷했다.[4] 당장 비오 12세가 권력을 강화할 때도 파스칼리나 수녀가 참모 겸 행동대장으로 맹활약했다. 능력이나 공로로 보면 비오 12세가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이긴 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수도회장도 아닌 일개 수녀였다는 것이다. 일개 수녀가 바티칸의 추기경 저리가라 하는 권력을 휘두르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바티칸 정계는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 비오 12세가 한껏 강화시킨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파스칼리나 수녀는 이후 수년간 일명 여교황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바티칸 정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이런 상황은 비오 12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임자인 요한 23세는 당시 바티칸 고위 성직자들이 보기엔 너무 탈권위적이라 그걸로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전권을 넘겨받은 파스칼리나는 좋은 말을 해주며 비오 12세의 비위를 맞춰주기는커녕 쓴소리를 아끼지 않던 강직한 성품이라서, 비오 12세와 파스칼리나가 서로 언성을 높여 가며 말다툼을 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비오 12세가 화가 난 나머지 파스칼리나의 뺨을 때렸다는 소문까지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기조는 교황이 된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이를 위해 파시스트와 타협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사제들이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던 프랑스의 노동 사제 운동도 공산주의적 성격이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3.3. 나치 협조 의혹설

파일:external/www.adorazioneeucaristica.it/260_pioxii13.jpg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대인 학살을 방조하고 나치에 협조했다는 설이 있고 미국의 연극 '신의 대리인'[5]부터 해서 존 콘웰의 『히틀러의 교황』이라는 전기까지 출판될 정도인데 관련 이야기는 끝없는 논쟁에 휩싸여 있다. 적어도 그가 어느 정도 유대인의 참상에 대해 알고 있던 건 분명하지만 왜 공개적으로 그걸 비난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가톨릭계 정권의 잔학성에 대해서 침묵하고 거기 가담한 일부 인사들에 대해 축복했는지,[6] 또한 나치 전범 도피에 바티칸이 개입했다는 이야기 등은 여러모로 논쟁거리이다.[7]

1939년에 폴란드의 랍비 바이스만텔이 교황청에 "무고한 아이들만이라도 제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 편지를 보냈지만 당시 교황청에서는 "무고한 유대인 아이?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다. 유대인의 피는 그 자체로 불결한 것이며 유대인은 사라져 마땅하다"라는 굉장히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외면해 버렸다는 이 있지만 신빙성이 없다.

이 "바이스만텔"의 정확한 이름은 미하엘 도브 바이스만들(Michael Dov Weissmandl)인데, 이 사람은 헝가리 왕국 출신으로 폴란드는 밟아본 적도 없다. 상술한 이야기도 바이스만들의 회고가 와전된 것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1944년 가을 아우슈비츠행 열차에서 탈출한 뒤 만난 어느 교황대사(Papal nuncio)에게 유대인 구출을 호소하던 중 이런 대답을 들었다는 것인데,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실은 바이스만들이 회고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한 말을 교황대사가 한 것이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당장 아우슈비츠행 열차에서 탈출하여 은신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바이스만들이 교황대사와 같은 높으신 분과 만날 수가 없기도 하고.

즉 바이스만들의 착각이 그의 회고록에 기록되고 그게 떠돌다가 어느 순간 "교황대사와 나눈 대화"가 "교황청에 보낸 편지"로 변하고 심지어 비오 12세가 직접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식으로 또다시 변한 것이다. 물론 비오 12세 성격상 이런 반응을 보였을리는 만무하다. 이런 생각을 대놓고 내뱉을 사람이 어떻게 수천여 명의 유대인을 자발적으로 도울 생각을 하겠는가.

반유대주의 의혹과는 달리, 비오 12세는 1937년[8] 나치즘을 비판하는 독일어로 된 회칙을 만든 바 있으며[9], 1939~1941년 사이 3,000명의 유대인 난민이 바티칸의 도움을 받아 남아메리카로 무사히 이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1944년에는 약 5,000명 이상 유대인 난민이 이주할수 있도록 여권, 경비, 비행기표, 외국 정부에 제출할 추천사를 마련했으며, 1940년 시카고의 유대인 연맹은 바티칸에 종교나 인종 문제로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해달라며 12만 5천달러를 기부한바 있다. 이에 나치가 1942년 네덜란드주교들이 '조국에서 압제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자행되고 무자비하고 부당한 대우'를 규탄하는 문서를 발행한 것을 빌미로 사제수도자 등 300명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어 처형한 일을 계기로 공연히 성명을 발표하여 나치를 자극하여 박해대상을 구하거나 돕는데 지장을 주지 않으려 했으나, 1942년 성탄 사목교서를 통해 유대인, 집시, 슬라브족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나치의 박해 행위를 간접적으로 규탄하며 전 인류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또한 비오 12세는 바티칸 성직자들에게 유대인 등 난민들을 성당과 수도원에 숨겨주라고 강력히 촉구했으며 바티칸만 해도 477명, 교황의 여름 휴양지인 카스텔간돌프에는 3,000명 이상 숨겨주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비오 12세는 3,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남미로 피신시켰고, 5,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위해 여권, 경비, 비행기표, 외국 정부에 제출할 추천서, 서류들을 마련해주었다. 전후 이탈리아의 유대인 생존자들이 자신들이 목숨을 구한 이야기를 전하자 전 세계의 랍비장과 유대인 단체들이 바티칸에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그중 이탈리아 유대인 원조위원회 회장이던 라파엘레 칸토니 박사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600만명의 우리 유대교 신자들이 나치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비오 12세의 효율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외에도 로마 게토에 있던 유대인 200여명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을 내주기도 했다.

비오 12세에 대하여 비판적인 전기 "히틀러의 교황"을 쓴 존 콘웰의 논지에 따르면, 교황 개인적으로 히틀러나치즘에 대해 혐오한 것도 사실이고 몇몇의 활동은 분명히 나치에 반대한 건 사실이지만, 교황의 권위를 통해서 충분히 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침묵을 지켰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황뿐 아니라 적어도 전쟁 전에 유럽 전반에 퍼진 반유태주의나 반공주의에 파첼리 자신이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고 교황 선출전 외교 활동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관련 문제도 문제지만 유고슬라비아 내 크로아티아계 친독 가톨릭 정권의 부대 우스타샤 관련자들의 만행[10]에 대해서 상당히 미화한 점은 비판받을 일이고 로마 점령 이후 로마의 유태인 지구 소개 작전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은 점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11] 비오 12세의 생전에도 반발은 있어 해외의 성직자들은 그가 로마가 잿더미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계적 중립을 유지한다는 비판을 가했다.

결국 2013년에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재임중에 비오 12세의 나치 협력 의혹을 밝힐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으며, 2019년 3월 4일 비오 12세 재위 중 작성된 공식 외교 문서에 대한 봉인을 재위 종료 70년이 지나 해제하는 관례를 깨고 약 10년을 앞당긴 2020년 3월 2일부로 해제한다고 교황이 밝혔다. 그리고 2020년 3월 2일부로 재위 기간 작성된 각종 기록물을 보관한 문서고를 학자들에게 개방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워낙 문서량이 많아서 이들을 검토하고, 관련된 평가를 내리는 데 5년 가량은 걸릴 것이라고 한다.

검토된 문서들 중에는 가톨릭 교회의 나치 독일의 직접적인 비판과 교회 내부의 성범죄를 문제 삼는 것을 거래했단 역대급 흑역사가 밝혀졌다.# 해당 기사에서 서적을 낸 저자는 교황 비오 12세가 즉위한 후 히틀러는 가톨릭교회의 협력을 얻기 위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사위인 필립 폰 헤센 공을 통해 그와 연락을 취했으며 이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저자의 오류로서 이미 교황 바오로 6세 시절에 출간되었던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관한 법령과 문서(Actes et Documents du Saint-Siège rélatifs à la Seconde Guerre Mondiale)"를 보면 제1권에서 당시 독일의 왕자가 교황과 만남을 가졌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2권에서도 교황과 독일 대사의 방문을 포함한 교류를 언급한다. 또 해당 책에서 히틀러와 교황이 주고 받은 편지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는데, 정작 그 주고받은 전체 편지의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법령과 문서에 전부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은 교황이 독일의 진로방향을 바꾸고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애초에 이 당시는 나치 정권이 강제수용소와 같은 일을 벌이는 등 어떤식으로 폭주할지 아직 모르는 상황이었으며, 독일 내의 가톨릭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일단 독일 왕자와의 만남을 진행하는 게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또 해당 기사의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 중 일부는 최근에 바티칸이 공개한 문서가 아닌 1966년 사학자의 자료같은 낡은 사료를 인용하기도 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이 꽤 있는 것으로 나온다. #

2023년 9월, 바티칸 기록 보관소에서 1942년 12월에 독일 신부가 비오의 개인 비서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다. # 해당 편지에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베우제츠 절멸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유대인 학살이 언급되어 있다. 마침 10월에 비오 12세가 전시에 취한 태도를 주제로 바티칸에서 개최되는 학술회의를 앞둔 시점에 중요한 증거가 발견되어, 논쟁에 한층 더 불이 붙었다.

3.4. 히틀러에 의한 납치미수 의혹설

전쟁 말엽 히틀러가 그를 납치하려고 한 적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때부터 나온 이야기이다. 납치뿐만 아니라 아예 바티칸으로 쳐들어가서 바티칸을 불태우고 교황을 성 베드로 광장에 끌어내 총살시키려 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치아노의 일기나 당시 회의록을 보면 이탈리아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말로만 그랬고, 부하들조차도 위험하다고 만류할 정도였다.[12] 만약 히틀러가 진짜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는 빼도박도 못하고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를 적으로 돌렸을것이다.

나치는 바티칸을 포위만 했을 뿐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교황청의 끄나풀이 어디까지 뻗어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교황청과 돌이킬 수 없이 척을 지지 말고 적당히 구슬러 이용하는 쪽이 낫기 때문이었다.[13] 헤르만 괴링도 반대론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교황청은 나치가 교황청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3국으로 교황청을 옮기려 한 적이 했다. 하지만 비오 12세가 자신은 로마 주교이므로[14] 로마에서 죽겠다며 바티칸에 남기를 고집하자 추기경들도 더러는 감동과 충성심으로, 더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바티칸에 남았다. 비오 12세는 "나는 끝까지 로마를 지키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원하면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지만 추기경 누구도 '교황 버리고 도망간 추기경'이라고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역사에 영원한 오명으로 새겨지기는 싫었던 듯 모두 바티칸에 남았다. 이후 비오 12세는 나치 기갑 사단이 교황청을 포위하자 교황은 근위병들과 나치군 사이 교전이 일어나면 근위병들이 전멸하리라 예상, 총포류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한다. 근위대가 아무리 정예부대라고 해도 겨우 수백 명의 병력으로 나치의 대군과 정면으로 교전하면 전멸한다는 건 불보듯 뻔하기 때문. 그래서 포위 당시 근위병들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나치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을 들고 순찰을 돌고 경계를 섰다.[15]

2016년,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가 슈츠슈타펠이 비오 12세를 납치하려 했다고 보도했는데, 여러 차례 기사화되었던 다른 언론들의 보도와 달리 이번 기사에서는 비오 12세가 이 위협으로부터 피하는 과정을 새롭게 보도했다.

3.5.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의혹

교황이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거나 묵인, 방조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에 따르면 교황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나치내의 동향과 히틀러의 바티칸 공격 및 교황 납치계획을 알려준 스파이 요제프 뮬러(Josef Müller, 1898 ~ 1979)로 부터 빌헬름 카나리스 (Wilhelm Franz Canaris, 1887 ~ 1945)[16],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히틀러를 암살하려 계획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히틀러가 암살 연루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교황의 문장이 인쇄된 편지지에 교황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적힌 문서를 발견했고 히틀러는 이를 보고받은 후 교황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문에 요제프 뮬러는 사형될 위기에 몰렸으나 그가 교황의 스파이라 종전후 교황의 협력을 구하는 카드로 그를 살려두기로 해 간신히 살아 남을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요제프 뮬러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한 진술이라 교차검증이 안된다는 문제가 있어 의혹으로 남는 상황이다.

3.6. 건강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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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와 애완용 새

난세를 살았던 교황으로, 그 자신도 말년에는 꽤 심한 신경증 증세를 보였다. 가령 파리를 보면 잡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식이었다. 한 번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였는데, 신경병에 따른 딸꾹질로 하마터면 굴욕을 겪을 뻔했다. 또 치아가 좋지 않아 자기가 신뢰하는 치과의사가 특별히 처방한 치약[17]으로 이를 섬세하게 닦았는데, 이 의사가 돌팔이라 해당 치약이 치아에 좋지 않을 뿐더러, 신경병 증세를 더 심하게 만들었다.

원래부터 건강이 썩 좋지 않았는데다가 의사운이 지독하게도 없었다. 위의 치과의사 에피소드도 그러려니와 주치의도 실력이 썩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오죽하면 '교황 성하의 주치의는 성하의 애완용 새도 고칠 능력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게다가 이 주치의는 인성도 좀 막장이었는데 비오 12세가 임종하기 직전 혼란스런 와중에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를 따라다니며 파파라치 짓을 하다가 걸려서 이탈리아 의료계에서 매장당했다.

3.7. 동아시아 관련 행보

1939년 제일성성훈령(第一聖省訓令)을 발표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전통적 문화인 조상 제사신사 참배가 과거와는 달리 문화적 요소로만 남아가는 추세로서, 그리스도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조상제사에 대한 조건부 허용을 승인하는 훈령을 내렸다.

18~19세기에 이루어진 조선 조정의 가혹한 천주교 박해에는 국내의 정치적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탄압이 민중의 호응을 얻거나 적어도 큰 반감을 자아내지 않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관혼상제, 특히 전통적인 장례문화와 가톨릭 교리와의 충돌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의 조상제사는 중국 선교 시기부터 많은 신학적 논쟁이 있어왔고, 오랜 논쟁끝에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동양의 조상제사는 미신적 요소를 분리하기가 힘든 우상숭배적 요소가 많으므로 금지한다"라고 선언한 뒤로 200여년간 조상제사는 천주교에서 엄격히 금지되어 왔다. 그러나 1939년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의 조상 제사는 과거엔 조상숭배 요소를 분리해내기 힘들었으나, 현대에는 조상숭배적인 요소보다는 민속적 관습 내지는 사회적 문화풍속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인정하여 일부 미신적 요소(이를테면 '신' 자가 들어간 신주 등)를 '제외'한 조상 제사는 더이상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칙서를 발표함으로써 이러한 제사 논쟁을 둘러싼 오랜 충돌은 최종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조상제사에 대한 가톨릭의 달라진 가르침은 제사/종교별 입장의 천주교 항목을 참고하자.

비오 12세는 동아시아 문화의 존중 차원에서 이를 허용하는 칙령을 내렸지만, 이에 대한 일본 제국의 다음 대답은 성당 폐쇄 및 징발성직자의 징집이었다.

중국의 공산화에 우려를 표했으며, 국공내전 이후에도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지속했다.[18] 이는 비오 12세의 동북아시아의 선교에 관심을 나타낸 것과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 경계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편 비오 12세는 8.15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국제 무대에서 승인받기 위해 경쟁할 때 1947년 교황특사 패트릭 번 주교를 한국으로 파견해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힘을 실어줬다. 1948년 제2차 유엔총회 때는 교황 비서 조반니 몬티니 몬시뇰과 주프랑스 교황대사 주세페 론칼리 대주교에게 대한민국 대표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남미 가톨릭 국가의 지지를 이끌어내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통과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19]

그리고 1949년에는 전세계 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고 교황특사로 한국에 체류하던 번 주교를 주한 교황대사로 격상시켰다. 패트릭 번 주교는 한국 전쟁 발발 이후 1950년 7월 납북되어 11월 중강진에서 순교했다. 이러한 행보는 앞서 중국에 대한 입장과 함께, 비오 12세의 공산주의 반대, 비판 노선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1939년에는 춘천교구, 1948년에는 대전교구, 1957년에는 부산교구, 1958년에는 청주교구를 설정했다.

3.8. 성모몽소승천 교의 반포

1950년 11월 1일 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발표하여 교황무류성[20]을 통해 성모몽소승천을 믿을 교리로 정했다. 이것은 1950년에 갑자기 생긴 교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성전(거룩한 전승)의 형태로 믿어오던 교리를 교황의 무류지권으로써 재확인한 것이다.

이 반포는 한동안 에큐메니컬 신학계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3.9. 기타 행적

한편으로 비오 12세는 1943년 그동안 천주교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져 왔던 성서비평학을 일정 기준 아래 수용, 도입하는 것을 승인했다. 아울러 추기경단에서 비이탈리아계 추기경의 수를 늘려 천주교회가 세계 보편교회에 걸맞은 면모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라디오, TV 방송을 통해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미력하게나마 그의 후임인 요한 23세를 비롯한 후대 교황들이 보다 개방적인 현대화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일각에서는 이런 점들을 근거로 비오 12세를 '바티칸의 마지막 전통주의, 보수/권위주의자 교황'이 아닌 '전통주의에서 현대화 시대로의 전환기에서 가교 역할을 해낸 교황'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1946년에 있었던 이탈리아 군주정 유지 투표 당시 사보이아 왕조움베르토 2세를 지지했다. 비오 12세는 군주정을 유지하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교회가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였고, 투표 전날에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움베르토 2세를 지지하는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덕분에 적어도 로마에서는 군주정 유지 득표가 높았지만, 교황의 지지도 이탈리아 북부의 사보이아 왕조에 대한 분노를 사그라들게 만들지는 못했고 결국 군주정이 폐지되어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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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의 시신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비오 12세의 석관

비오 12세는 1958년 10월 7일 가스텔 간돌포 성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실 교황은 오랫동안 심장질환을 앓아 여름이 지났는데도 로마로 이동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심장질환이 어느 정도 나아지려고 할 때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사망하였다. 사망 직후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 추기경단 수석인 티세랑 추기경은 비오 12세의 유품처리 문제를 두고 대판 싸웠다. 비오 12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거든 중요한 메모를 즉각 소각해 달라고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부탁하였는데, 파스칼리나 수녀는 교황의 마지막 부탁을 충실히 들어주었다. 티세랑 추기경은 비오 12세의 메모가 교회의 중대사와 관련된 것인데 자기와 아무런 상의 없이 소각한 것에 열이 뻗혀 파스칼리나 수녀와 마지막 배틀을 벌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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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론칼리 추기경 몬티니 몬시뇰과 교황

재임 기간 내내 비오 12세의 고집과 파스칼리나 수녀와 싸우느라 지쳤던 추기경단은 좀 쉬고 싶다는 뜻에서 나이도 많고 성격도 모난 데 없이 부드럽고 야망이 없는 늙은 이탈리아인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한다. 속세의 이름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교황 요한 23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한 이 교황은 비오 12세와는 달리 좀 쉬어가고 싶다는 기대 속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와는 정 반대로,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 현대 가톨릭 역사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만약 비오 12세가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었다면 요한 23세가 선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비오 12세는 살아 있을 때에나 죽은 뒤에나 끼친 영향이 크다.


[1] 그가 즉위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2차대전이 발발했다.[2] 유태인 관련 언급은 둘째치고, 종교인으로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것은 당연하다.[3] 물론 반 교황파는 교황의 지나친 권력 집중을 반대했다는 것이지 무슨 쿠테타를 획책했다는 건 아니다. 공화제의 야당 수준.[4]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비오 12세가 하자는 대로 따른 건 아니었다. 사실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비오 12세로부터 정치적 권력을 이양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바로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강직한 성격이었던 파스칼리나 수녀는 가끔씩 비오 12세가 지시한 내용을 쌩까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비오 12세가 파스칼리나의 뺨까지 때린 적도 있었다.[5] 사실 이 작품 자체는 블랙 코미디로서 홀로코스트보다는 주식매매와 이권에 눈이 어두운 가상의 교황을 풍자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몇몇 설정은 홀로코스트 방조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암시한다.[6] 우스타샤에 적극 협력해 세르비아인 학살에 앞장섰던 알로지제 스테피나츠 자그레브 대주교가 전범재판에서 16년형이라는 죄에 비해 대단히 관대한 형을 받았음에도 이에 반발하며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해버렸다. 분노한 티토는 스테피나츠를 석방하고 단교해버렸다. 더군다나 이 인물은 1998년 시복까지 받았다.[7] 그렇다고 교황의 침묵에 대해서 항의하는 학자들조차도, 교황 자신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나 인신공격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점은 전쟁 당시 교황의 침묵에 대해서 비판적인 영국의 학자 콘웰조차도 당시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진 반유태운동이나 반유태적인 시각, 그리고 반공주의에 교황 자신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히틀러가 벌인 일이 워낙 일이니.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지은 '교황의 역사'에도 나오는데 그도 유대인 차별 및 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이 없던 것에 대해 비판한다.[8] 사실 그는 전쟁 전부터 유대인들을 돕기는 했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유대인 차별 정책을 펼쳐 대학 교수들이 쫓겨나게 되었는데 유명한 지리학자였던 로베르토 알마지아 교수를 위시해 전 로마 대학 법학과장이던 조르조 델 베키오 교수, 이슬람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인 조르조 레비 델라 비다 교수, 이탈리아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툴리오 레비치비타 박사등을 바티칸 도서관 분과로 데려왔고, 수학자 비토 볼테라, 폐 전문의인 구이도 멘데스 교수 등이 다른 국가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9] 이 회칙은 비오 11세가 교황이고 비오 12세가 교황청 국무장관이던 시절 만든 회칙이다. 이때 이 회칙을 모든 교구에서 낭독하게 했다.[10] 라이프 2차 대전에 나와 있는 잔학행위를 보면 춤을 추면서 정교회 수사의 살을 저민다던가 고문당하며 죽는 아들의 피를 어머니에게 받게 한다던가하는 인륜을 저버린 온갖 고문과 학살의 선봉이었다.[11] 대체역사 떡밥을 모은 책 What if 2권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여 교황이 만약 공식 교서를 통해 나치의 학살을 비판하고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나치에게 저항하고 유대인을 도울 것을 부탁했다면… 하는 가정을 했는데, 분노한 히틀러가 교황을 바로 아래 단락에 나온 것처럼 체포해 처형하자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들고 일어나 나치 정권이 붕괴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12] 물론 케셀링이 신속하게 로마를 비롯한 중, 북부의 이태리군을 장악하고 연합군에 대해 방어전을 펼친 것도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로마를 포기하고 이태리의 북부의 산맥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생각하기도 했다.[13] 히틀러의 입장에서도, 지나친 나치의 괴뢰로서 가톨릭 신도들조차도 등을 돌리는 교황보다는, 이런저런 저항을 하더라도 자기 할 말을 하는 교황이 있는 편이, 독일 국내의 가톨릭 정치 세력을 다독이기에는 더 나았다.[14] 교황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교황은 전 주교단의 수장인 동시에 로마 교구의 주교이다.[15] 그런데 플래툰의 기사에 의하면 스위스 근위병들이 회색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기관총박격포를 꺼내 들고 독일군과 대치했다고도 한다. 정말 창만 들고 다닌 것은 일부 근무자들뿐일 수도 있고, 저 대치 이후에 교황이 무장해제령을 내린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인을 요함.[16]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에 암살 미수가 들통나면서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으로 마감하게 된다.[17] 그 치약의 재료가 크롬성분이어서 딸꾹질 증상을 악화시켰다고 한다.[18] 이에 따라 바티칸은 현재 유럽에서 대만의 유일한 공식 수교국으로 남아있다.[19] 1948년 유엔총회 당시 대한민국 승인에 찬성한 40여개국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20개국 이상은 가톨릭 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들이었는데, 이는 바티칸의 지원이 큰 영향을 준 결과였다.[20]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해 ‘장엄 교도권을 행사하여’ 발표한 것에는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가톨릭의 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