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23:33:09

바오로 3세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ccb400, #ffe100 20%, #ffe100 80%, #ccb400)"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초대-제6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베드로 리노 아나클레토 클레멘스 1세 에바리스토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알렉산데르 1세 식스토 1세 텔레스포로 히지노 비오 1세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아니체토 소테르 엘레우테리오 빅토르 1세 제피리노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갈리스토 1세 우르바노 1세 폰시아노 안테로 파비아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스테파노 1세 식스토 2세 디오니시오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펠릭스 1세 에우티키아노 카이오 마르첼리노 마르첼로 1세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에우세비오 멜키아데 실베스테르 1세 마르코 율리오 1세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베리오 다마소 1세 시리치오 아나스타시오 1세 인노첸시오 1세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조시모 보니파시오 1세 첼레스티노 1세 식스토 3세 레오 1세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힐라리오 심플리치오 펠릭스 3세 젤라시오 1세 아나스타시오 2세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심마코 호르미스다 요한 1세 펠릭스 4세 보니파시오 2세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요한 2세 아가피토 1세 실베리오 비질리오 펠라지오 1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61-12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65대
요한 3세 베네딕토 1세 펠라지오 2세 그레고리오 1세 사비니아노
제66대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보니파시오 3세 보니파시오 4세 아데오다토 1세 보니파시오 5세 호노리오 1세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제75대
세베리노 요한 4세 테오도로 1세 마르티노 1세 에우제니오 1세
제76대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비탈리아노 아데오다토 2세 도노 아가토 레오 2세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제85대
베네딕토 2세 요한 5세 코논 세르지오 1세 요한 6세
제86대 제87대 제88대 제89대 제90대
요한 7세 시신니오 콘스탄티노 그레고리오 2세 그레고리오 3세
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94대 제95대
자카리아 스테파노 2세 바오로 1세 스테파노 3세 하드리아노 1세
제96대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레오 3세 스테파노 4세 파스칼 1세 에우제니오 2세 발렌티노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제105대
그레고리오 4세 세르지오 2세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 니콜라오 1세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제109대 제110대
하드리아노 2세 요한 8세 마리노 1세 하드리아노 3세 스테파노 5세
제111대 제112대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포르모소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로마노 테오도로 2세
제116대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요한 9세 베네딕토 4세 레오 5세 세르지오 3세 아나스타시오 3세
미즉위 선출자
교황 선출자 스테파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121-18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제125대
란도 요한 10세 레오 6세 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
제126대 제127대 제128대 제129대 제130대
레오 7세 스테파노 8세 마리노 2세 아가피토 2세 요한 12세
제131대 제132대 제133대 제134대 제135대
베네딕토 5세 레오 8세 요한 13세 베네딕토 6세 베네딕토 7세
제136대 제137대 제138대 제139대 제140대
요한 14세 요한 15세 그레고리오 5세 실베스테르 2세 요한 17세
제141대 제142대 제143대 제144대 제145대
요한 18세 세르지오 4세 베네딕토 8세 요한 19세 베네딕토 9세
제146대 제147대 제148대 제149대 제150대
실베스테르 3세 베네딕토 9세 그레고리오 6세 클레멘스 2세 베네딕토 9세
제151대 제152대 제153대 제154대 제155대
다마소 2세 레오 9세 빅토르 2세 스테파노 9세 니콜라오 2세
제156대 제157대 제158대 제159대 제160대
알렉산데르 2세 그레고리오 7세 빅토르 3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제161대 제162대 제163대 제164대 제165대
젤라시오 2세 갈리스토 2세 호노리오 2세 인노첸시오 2세 첼레스티노 2세
제166대 제167대 제168대 제169대 제170대
루치오 2세 에우제니오 3세 아나스타시오 4세 하드리아노 4세 알렉산데르 3세
제171대 제172대 제173대 제174대 제175대
루치오 3세 우르바노 3세 그레고리오 8세 클레멘스 3세 첼레스티노 3세
제176대 제177대 제178대 제179대 제180대
인노첸시오 3세 호노리오 3세 그레고리오 9세 첼레스티노 4세 인노첸시오 4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181-24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181대 제182대 제183대 제184대 제185대
알렉산데르 4세 우르바노 4세 클레멘스 4세 그레고리오 10세 인노첸시오 5세
제186대 제187대 제188대 제189대 제190대
하드리아노 5세 요한 21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호노리오 4세
제191대 제192대 제193대 제194대 제195대
니콜라오 4세 첼레스티노 5세 보니파시오 8세 베네딕토 11세 클레멘스 5세
제196대 제197대 제198대 제199대 제200대
요한 2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제201대 제202대 제203대 제204대 제205대
그레고리오 11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2세
제206대 제207대 제208대 제209대 제210대
마르티노 5세 에우제니오 4세 니콜라오 5세 갈리스토 3세 비오 2세
제211대 제212대 제213대 제214대 제215대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제216대 제217대 제218대 제219대 제220대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제221대 제222대 제223대 제224대 제225대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비오 5세
제226대 제227대 제228대 제229대 제230대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제231대 제232대 제233대 제234대 제235대
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 그레고리오 15세 우르바노 8세
제236대 제237대 제238대 제239대 제240대
인노첸시오 10세 알렉산데르 7세 클레멘스 9세 클레멘스 10세 인노첸시오 11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241대 이후]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241대 제242대 제243대 제244대 제245대
알렉산데르 8세 인노첸시오 12세 클레멘스 11세 인노첸시오 13세 베네딕토 13세
제246대 제247대 제248대 제249대 제250대
클레멘스 12세 베네딕토 14세 클레멘스 13세 클레멘스 14세 비오 6세
제251대 제252대 제253대 제254대 제255대
비오 7세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오 16세 비오 9세
제256대 제257대 제258대 제259대 제260대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비오 12세
제261대 제262대 제263대 제264대 제265대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제266대
프란치스코 }}}}}}}}}}}}

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220_paolo_III.png
제219대 클레멘스 7세 제220대 바오로 3세 제221대 율리오 3세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제220대 교황
바오로 3세
Paulus III
파일:Portrait_of_Pope_Paul_III_Farnese_(by_Titian)_-_National_Museum_of_Capodimonte.jpg
교황명 <colbgcolor=#FFFFFF,#1F2023>바오로 3세 (Paulus III)
본명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Alessandro Farnese)
출생 1468년 2월 29일
교황령
사망 1549년 11월 10일 (향년 81세)
교황령 로마
재위기간 1534년 10월 13일 ~ 1549년 11월 10일 (15년 28일)
문장 파일:external/www.finanzaonline.com/1836571d1386685098-domine-dirige-nos-alla-scoperta-della-city-london-corporation-stemma-paolo-iii-farnese-pont.-1523-1534-.jpg

1. 개요2. 재임 전3. 교황 재임기4. 기타 매체의 바오로 3세
4.1. 튜더스에서

[clearfix]

1. 개요

제220대 교황. 본명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신성 로마 제국(독일) 북부를 중심으로 종교 개혁이 불꽃처럼 번지는 가운데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는 등 가톨릭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개혁운동을 착수한 동시에, 르네상스 예술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교황으로도 유명하다. 전임 교황들이 저지른 친족 등용과 직권 남용을 그대로 이어받아 비판받긴 하지만, 종교 개혁의 확산을 막고 전대인 클레멘스 7세가 젊은 혈기로 말미암아 교황령을 둘러싸고 온갖 분란을 벌인 것을 그럭저럭 수습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간으로 대우하라는 칙령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재임 전

이탈리아 카니노 지역의 명문 가문인 파르네세 가문 출신이다. 고대 로마 시대 귀족 후예로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이나, 콜론나 가문만은 못하지만 그럭저걸 뼈대는 있는집안인데 파르네세 가문은 원래 용병대장 출신이었다.

그는 로마피렌체에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과 연관을 맺으며 공부하였고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된 조반니 데 메디치와도 친분을 가졌다.

늙어서 교황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만 소싯적에는 날마다 사교 클럽에 참가하여 수많은 여성들과 교제하는 호색한(!)이었고, 그의 누이 줄리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情婦)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교황의 애첩인 누이 줄리아 파르네세의 덕으로 25세에 추기경이 되었지만, 이전의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특히 한 정부와의 사이에서는 4명의 자녀를 보았을 정도였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낳았다는 쉴드가 있지만 사실무근인 게, 장남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가 1503년생이다. 뱃속에서 20년은 있어야 가능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사제독신 규정이 느슨한 시기에 한 여인에게서만 낳았다는 점이다. 이 중 장남이자 파르마 공작인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의 차남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부친의 뒤를 이어 파르마 공작이 되었고, 훗날 교황의 파트너인 카를 5세의 서녀와 혼인하게 되며[1], 장손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추기경 자리에 오른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서품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마음을 다잡은 후,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자를 거쳐 1493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추기경 시절 라파엘로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런데 이런 벼락 출세 뒤에는 그의 누이 줄리아가 알렉산데르 6세가 가장 아끼는 첩실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하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509년 알렉산데르 6세와는 원수지간이던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도 파르마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등 도합 6명의 교황을 모시면서 추기경단 의장으로도 활약했던 바오로 3세는 1534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자 67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경험과 재치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교황직에 올랐다.

3. 교황 재임기

원래 하드리아노 6세의 사망 후에도 교황 선출이 유력했으나, 누나 줄리아 파르네세가 알렉산데르 6세의 첩실인 인연으로 치맛바람으로 추기경이 된 흑역사에다가, 성직에 있으면서도 사생아를 넷이나 두었기 때문에 에지디오 추기경에게 집중 공격을 받아 무산되었다.

15년 후라 그런 흠에 대한 비판은 약해졌고, 무엇보다 67세에다가 맡은 직책마다 유능했기에 쉽게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들의 오점인 친족 등용과 가문 퍼주기라는 잘못을 바오로 3세도 저질렀다. 자신의 가문인 파르네제 가문의 퍼주기의 일환으로 나이가 고작 16살, 14살에 불과한 두 손자를 추기경단에 입회시켰고, 알렉산데르 6세가 체사레에게 퍼주었듯이 차남 피에르 루이지를 교황령 군대의 최고 지휘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파르마와 피에첸차를 퍼주려고 전쟁을 벌인 것은 큰 오점으로 꼽힌다. 피에르 루이지의 아들 오타비오를 카메리노 군주에 심어주고 메디치 가문의 마르게리타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어쨌든 파르마와 피아첸차는 파르마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200년간 파르네제 가문이 다스리게 되었다.[2]

기존에 폐지된 사육제(謝肉祭)[3]를 1536년 부활시켜서 로마에서 투우 경기를 열고 무도회와 연회를 벌였고, 건축 분야에선 로마 줄리아 거리에 팔라초 파르네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캄피돌리오 광장의 설계를 맡겼고 안토니오 상갈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맡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상을 캄피돌리오 광장 한가운데 옮긴 것도 이 시기의 일.

1537년 6월 2일 "숭고하신 하느님(Sublime Deus)"이라는 라틴어 칙령을 공표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간으로 여길 것을 선포했다.[4] 칙령은 신대륙에서 벌어지던 노예제도를 모두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 약탈까지 당한 교황청이 신대륙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눈물나게 작았으므로 노예제도는 칙령 공표 후에도 300여년이나 지속되었다.[5]

재임 초기의 그는 개신교에 대해 강경책 대신 유화책을 사용하여 관대하게 처우하는 한편, 수십년 간 지켜봐 온 교황청 내부의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내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추기경단을 물갈이하고 수도회를 일신시켰다. 또한 전임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세속 군주인 카를 5세와 맞서다 처참하게 개발살난 꼴도 목격했기 때문인지, 가급적 원만한 관계를 지키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교황령에서 종교로 말미암은 폭동이 일어나는 사태는 미연에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고 교황청에서 독립하여 국가교회화 시킨 헨리 8세에게는 매우 단호하게 대처했다.[6] 사건의 발단이 된 앤 불린헨리 8세의 결혼은 이미 전대 클레멘스 7세 시절에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은 잉글랜드 왕국교황청의 불화는 바오로 3세 재임기에 극대화되었다.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자 불같이 화를 낸 바오로 3세는, 1538년 즉각 파문 조치를 취하여 잉글랜드 국왕을 이단자로 단죄하였다.

이 시기 이후 바오로 3세는 처음의 관대한 모습에서 강경파로 돌변했다. 1542년에 로마에 이단심문소를 창설하여 교황청 차원의 개신교 교인 색출 및 처벌이 진행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루터교회 신자들과 대치 중인 카를 5세에게도 적극적인 활약을 주문했고 종교 개혁을 지지했던 쾰른 선제후 헤르만 5세 폰 비트를 파문하여 결국 물러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스페인에서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주도로 창설된 예수회를 공인하여 가톨릭의 강경화 및 국외 포교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개신교에 맞서 가톨릭을 결속하기 위해 1545년 반(反)종교개혁 차원에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내부의 혼란과 분열을 수습하고 각종 규범을 확립하여 그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가톨릭을 쇄신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가톨릭은 더욱 결연한 태도로 개신교와 맞서게 되었고 교황청의 입지는 탄탄해진다.

이 과정에서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훗날 바오로 4세가 되는 카라파 추기경도 있었다. 카라파 추기경의 보고서는 성직매매와 면벌부, 주교관할구에서 축재등 기존 관행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교황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친족 등용과 가문 퍼주기를 대놓고 비판했다.

그 외에 끝물로 접어든 르네상스를 후원하였으며 이를 통해 '르네상스를 후원한 마지막 교황'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또한 클레멘스 7세에 이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최후의 심판을 완성할 수 있게끔 지원했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충하였으며 교황의 긴급 피난처인 산탄젤로성을 프레스코화로 세련되게 꾸몄다.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기면서 그에게 설계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는 재임 15년만인 1549년에 82살의 고령으로 사망했다. 말년은 평온하지 못했다. 1547년 아들 피에르 루이지의 영지 피아첸차에서 폭동이 일어나 아들이 살해당했고, 게다가 파르마도 바오로 3세에 항거하여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난데다가, 교황령의 보복을 염려하여 도시를 통째로 카를 5세에게 들어바치려고 했다. 이에 관계된 추기경로마로 소환하여 추궁하고 그의 모자를 뺏어 집어던지고 격분한지 몇 시간 후 사망했다고 한다.

이같은 바오로 3세의 업적은 교회 개혁, 학문과 예술의 진흥,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 등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재임기에 크게 결속한 가톨릭은 후대로 가면서 더더욱 강경해져 개신교와 격렬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4. 기타 매체의 바오로 3세

교황청 비밀 도서관에 있는 마법서를 읽다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채 마법서를 비밀 도서관 가장 깊은 곳에 숨기라고 다시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교황이 이 바오르 3세이다.

4.1. 튜더스에서

배우는 아일랜드의 대배우 피터 오툴.

시즌 1에서는 언급만 되다가 시즌 2에 특별 게스트로 간간히 등장. "우리에게는 헨리 8세나 카를 5세와 같은 군대는 없지만, 그 대신 다른 힘이 있다"며 노회하고 경륜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람 앞에서는 로마를 순례중인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 에게 교황이 "이교도 때려잡을 거지?" 하면서 등떠미니 어버버하며 프랑스 왕이 분위기상 어쩌지 못한다. 근데 프랑스로 돌아가자 가톨릭 군주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려고 이교도인 오스만투르크와 손을 잡아서 교황청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벽화를 그리게 하는 장면에 미켈란젤로가 아주 짤막하게 지나간다. 회의 와중에 장손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방문하자 무척 반가워하면서 다른 추기경들에게 손자가 좋은 추기경이 될 것이라 말한다. 또한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서 예수회를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는 장면도 나온다.

여기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1] 그 아들이 스페인 제국군의 명장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2] 파르네제 가문이 대가 끊긴 후 파르네제 가문의 상속녀였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계비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맏아들 카를로스 왕자가 물려받았다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나폴리-시칠리아 왕국과 교환하였고, 최종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카를로스 왕자의 동생 펠리페 왕자에게 넘어가 보르본 왕조의 파르마계가 창설되었다.[3] 가톨릭 국가에서 사순 시기 직전의 3일 동안 술과 고기를 먹으며 가면을 쓰고 행렬하거나 연극과 놀이로 즐거이 노는 날.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까지의 약 40일간으로,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며 회개와 보속과 절제로 경건하게 보내는 시기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이때 판공성사도 본다.) 때문에 사순 시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실컷 놀자는 것.[4]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할 때 유럽인들은 그들을 인간 이하의 짐승 또는 잘 쳐줘도 미개인 정도로 생각했다.[5] 제일 늦게 노예제를 폐지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는 브라질로 무려 1888년이 되어서야 노예제를 폐지했다.[6] 당시 영국 국교회는 현재의 성공회와 같다고 보긴 어렵다. 거의 모든 교리가 가톨릭과 일치했고, 분열이 영구적이리라고 본 견해도 많지 않았다. 영국 국교회에서 성공회로 이름이 바뀐 것도 19세기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