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5 12:06:47

사코 디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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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황청 주요사건
사건 명칭 아비뇽 유수 사코 디 로마
사건 내역 교황권 분열, 콘클라베 제도 정착 교황권의 몰락
파일:attachment/saccodiroma1527.jpg
▲로마 약탈[1]
1. 개요2. 역사상의 사코 디 로마
2.1. 기원전 390년, 갈리아 세노네스 족2.2. 410년 서고트족에 의한 약탈2.3. 1527년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한 약탈
3. 1527,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한 약탈
3.1. 배경3.2. 진행과정
3.2.1. 교황령 침공3.2.2. 로마의 붕괴3.2.3. 학살과 파괴3.2.4. 여파
3.3. 의미

1. 개요

영어: Sack of Rome
이탈리아어: Sacco di Roma

사코 디 로마란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교황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벌인 로마 시 약탈 사건이다.

2. 역사상의 사코 디 로마

위의 영문 표기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사코 디 로마 자체는 이탈리아어로 그냥 로마 약탈이라는 뜻이다. 로마는 역사상 여러 차례 약탈당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경우가 세 가지 있다.

2.1. 기원전 390년, 갈리아 세노네스 족

첫째는 기원전 390년 갈리아 세노네스족에 의한 것으로, 이 때 세노네스의 왕 브레누스가 했다는 '패자는 비참하도다!(Vae Victis, Woe to the Vanquished)'라는 말이 유명하다.

2.2. 410년 서고트족에 의한 약탈

그리고 두 번째는 서기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에 의한 약탈로, 점차 쇠락해 가던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무너지는 계기가 된 상징적 사건이다.

2.3. 1527년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한 약탈

그리고 세 번째가 이 항목에 소개된 1527년 카를 5세의 로마 약탈로서, 교황권의 붕괴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더불어 놀라운 참혹성 덕에 유명해졌다.

3. 1527,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한 약탈

역사가들의 추산에 의하면 타격이 네로 시절의 로마 대화재마저 능가한다. 대화재 당시엔 어떻게든 불을 끄려 했지만, 이 사건은 로마 일대가 완전히 폐허가 된 후에야 끝을 보았기 때문이다. 14세기 아비뇽 유수가 교황권이 내리막길로 향하는 분기점이었다면 이 사건은 바닥까지 치달은 교황권 실추의 정점이자 몰락기라 할 만하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딱히 통일된 용어는 없어 '사코 디 로마'로 통용되며, '로마 대약탈'·'로마의 약탈'·'로마의 침탈'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3.1. 배경

1520년대의 유럽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오른 이래 가톨릭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동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1526년 동유럽 최후의 보루 헝가리를 멸망시키고 유럽 내륙까지 진출해 있었으며, 교황령이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싸고는 유럽 최대의 두 강대국합스부르크신성 로마 제국과 발루아의 프랑스가 치열하게 격돌 중에 있었다. 이를 이탈리아 전쟁이라 하는데, 황제 카를 5세가 스페인의 왕이기도 했으므로 '프랑스 대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의 구도였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재임하고 있던 40대의 젊은 교황 클레멘스 7세[2]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 프랑스, 영국, 베네치아, 밀라노 공국, 피렌체를 끌어모아 코냑 동맹을 창설했다. 즉 '합스부르크 ' vs. '反 제국 연합' 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미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제국군에게 왕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겪은 프랑스는 이미 자력만으로 제국과 맞설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동맹 제의에 응했으며, 과거 제국과 혼인을 통해 친분 관계를 맺었던 영국의 왕 헨리 8세조차 이를 놓칠 수 없는 대륙 진출의 호기라 여겼기에 몇 차례 퇴짜를 맞아가면서까지 기어이 동맹에 가담했다. 다만 의회의 반대를 끝내 꺾지 못해 군대 파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 이래 교황 중심의 동맹 세력으로서는 가히 최대 규모라 할 만했다. 이로써 결성된 코냑 동맹과 합스부르크 제국간의 전쟁을 코냑 동맹전쟁이라 한다.

3.2. 진행과정

3.2.1. 교황령 침공

이렇듯 교황이 몸소 프랑스와 손잡고 연합 진영을 구성해 로디를 함락하는 등 북이탈리아를 장악해나가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 및 그 식민지 일대를 통치하던 20대의 젊은 황제 카를 5세는 격노하였고, 이탈리아로 군대를 투입하여 실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에 카를은 할아버지이자 선대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합스부르크 황가에 변함없는 충성을 바쳐온 장군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3]부르봉 공작 샤를 3세[4]에게 3만 5천의 용병을 고용할 것을 명하고 전례가 없던 교황령 침공을 명했다.

용병이 대부분인 제국군은 카를의 명령을 받아 곧바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밀라노 공국[5]을 공격, 간단히 무너뜨리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황제가 아무리 분개했기로서니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알려진 황제의 군사들이 설마 교황령, 그것도 성도(聖都) 로마까지 들이닥치리라 싶었으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다만 제국군이 로마로 쳐들어간 것은 루터파로서 교황에게 반감이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유에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경제적인 이유였는데, 애초에 카를 5세가 프룬츠베르크에게 주었던 용병료가 크게 부족한 수준이어서[6] 프룬츠베르크 아내의 보석 장신구와 프룬츠베르크 개인 소유의 은식기까지 모조리 팔아 용병료를 마련했을 정도였던 것. 사실 성도고 뭐고 십자군 전쟁 시절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교묘한 분탕질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털린 적도 있는 판에 이건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데다 이탈리아 깊숙히까지 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밀라노를 함락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전투가 없어 전리품도 없었기에, 부족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부족한 용병료에 불만이 컸던 용병들은 돈을 마련할 기회가 없자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던 것이다. 란츠크네흐트의 창설자이자 지휘관이었던 프룬츠베르크는 친자식들처럼 끔찍히 아꼈던 부하들을 달래기 위해 나섰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사태에 절망한 프룬츠베르크는 갑자기 쓰러져 신성 로마 제국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끝내 뇌진탕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부사령관인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사령관이 되어 이들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그에게는 프룬츠베르크처럼 오랜 기간 병사들과 부대끼면서 쌓아온 정도 없었고, 그런 사적인 관계 없이 부대를 통솔할 만한 재능도 없었다. 공작의 자리에 올랐던 만큼 권위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겠으나, 문제는 용병들에게 그 권위가 도저히 먹힐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 결국 휘하 부대를 장악하는 데 실패한 부르봉 공작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로마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루터는 교황의 사치스러움과 호사스러움을 비난한 바 있는데, 용병들이 보기에 사치와 호사를 누린다는 건 곧 쌓아놓은 재물이 많다는 뜻이었다. 즉 로마는, '타락한 도시'인 동시에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도시'였던 것. 교황의 허울 뿐인 권위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제국군 본대가 교황령에 이르는 동안 현지의 방어군은 말 그대로 손놓고 보고만 있었고, 밀려드는 제국군에 맞서야 할 코냑 동맹의 결속력은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못했다. 가까운 프랑스는 약간의 병력만을 파견했다. 그나마도 미적거리다가 교황령이 함락당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부지런히 군대를 움직였는데, 파비아에서의 패배를 어떻게든 복원하여 군대를 재정비하던 참이라 신속할 대응이 어려웠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안전만 확보하면 그만이라 제국군의 목표가 베네치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사실상 손을 놨다.

동맹군은 거의 없다시피하니 남은 건 교황군. 문제는 이 교황군도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일찍이 단련된 정규군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르네상스 시기동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각자 용병을 고용해서 전쟁을 벌이는 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져, 당시의 통념으로서는 국민군을 주장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라 받아들여진다는게 쉽지 않았다. 추가로 로마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기에 교황청은 시민들에게 무기를 쥐어주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결국 교황청은 단련된 정규군은커녕 제국군의 침공이 임박했음에도 여기저기서 급하게 끌어모은 잡졸 이하 수준의 병력만을 가지고 있었고, 최고 결정권자의 우유부단함까지 작렬하여 마키아벨리가 교황군의 상태를 보고 대놓고 비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따위 상태에 놓인 코냑 동맹이 저지선을 편다고 한들 제국군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교황군, 프랑스군, 베네치아군을 어떻게든 긁어모아 제국군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지만, 모래알 결속력답게 베네치아군은 자국의 안전을 확인한 시점에서 그냥 돌아가버렸고 교황군과 약간의 프랑스군만이 남아 추격을 계속했다. 다만, 제국군에 합류한 페라라 공국의[7] 신형 대포가 무서워서 제국군과 약 40km의 간격을 유지한채 추격했다. 페라라 공국의 신형 대포라는 건 지대지 미사일이었던 모양이다[8]

제국군이 한걸음 한걸음 로마로 진군하여 한시가 위급한 와중에 안전거리까지 지키며 추격하던 교황군은 피렌체에서 무려 이틀동안 머무는 놀라운 여유도 부렸다. 교황군 지휘관은 피렌체인이었는데, 자신의 도시가 제국군에게 약탈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이틀은 대형참사를 막을 최후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얼마 뒤, 로마까지 딱 이틀을 남긴 곳에서 로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

교황군이 비난받을 짓을 많이도 저지르긴 했으나,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교황군으로서도 할 말은 있다. 로마 시가 너무 빠르게 함락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는 역사상 최고의 성벽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최소 10만, 최대 30만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군대를 상대로 불과 몇 천의 방어군에 여성과 아이들의 손을 더한 것만으로 약 50일을 버텼다. 그런데 아무리 지형조건이나 방어시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못했다 하더라도 약 9만 명의 시민이 살고 있었던 로마에서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만으로 로마가 그대로 노출된 것. 로마 시민이 얼마나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점이다.

이때보다도 더 절망적이었던 롬바르드족 침입이 있었는데, 해당 사건은 동서 대분열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건으로 안 그래도 성상파괴주의 때문에 균열에 생긴 차에 결정타를 먹인 게 롬바르드족의 침공으로 인한 로마 함락 위기다. 제아무리 로마 교회가 기적적으로 야만인들을 개종해왔어도 서로마는 대규모 침공으로부터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동로마의 가호를 받아야 했으므로 내심이야 어쨌건 라벤나 총독부에 복종했다. 그런데 롬바르드족 침입에서 동로마는 방관해버렸고[9]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을 끌어들여 겨우 롬바르드족을 막아낸 서로마는 더 이상 동로마에게 기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면서 결국 동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되는 참사가 터지고 만다.

하여튼 그때는 어떻게든 민병대를 끌어모아 로마를 지켜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클레멘스 7세와 로마 시민들은 저항조차 안해보고 항복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 때의 상황은 롬바르드족의 침입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일대일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롬바르드족이 얼마나 위협적이었건 간에 최소한 대포는 끌고 오지 않았다. 교황군이 두려워했던 신형 대포 앞에서 성벽은 그다지 의지가 되지 않는 방어수단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점을 감안하더라도 고작 이틀 버틴 것은 문제가 많은 것이다. 대포가 깨뜨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성벽의 일부일 뿐으로 모든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3.2.2. 로마의 붕괴

이때 로마는 이탈리아 최대의 패권 가문인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10], 교황령을 사수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의 군대가 피렌체를 빠져나가 치안유지에 공백에 생기자 불만을 가졌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메디치 가문은 제국군이 아닌 봉기한 시민군에게 몰려 아레초로 피난갔다. 가뜩이나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정치력 부재까지 겹친 것.

역사상 로마가 몇 번 침공당하기는 했어도 기독교 군세에 침공당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령 접경에서 제국군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자 로마 시민들은 그때서야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았고, 로마는 스위스 용병 5백명과 시민군 5천을 모아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다. 1527년 5월 6일,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인솔하는 2만 명의 제국군 본대가 바티칸 언덕을 넘어 들어오면서. 약 5천의 로마 수비군과의 전투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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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전투 중 수비군으로써는 기적이라 하지만 사실은 비극이라고 부를 일이 일어났으니 제국군 지휘관 샤를 3세를 저격하여 전사시킨 것이다. 지휘관이라 전용 흰색 망토를 착용했는데, 이것이 교황군의 이목을 끌어모으는 요인이 되었다. 이 사건은 화약무기로 지휘관을 저격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무기로는 화승총이 쓰였다. 이제 지휘관을 잃은 제국군이 스스로 붕괴되기를 기다릴 차례였고, 실제로 제국군의 지휘체계는 이것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지 지휘체계의 붕괴가 무질서한 후퇴가 아니라 절제되지 않은 폭력으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제국군의 중추는 용병이었으나, 프룬츠베르크가 사망한 이후 그들은 부족한 용병료 때문에 불만이 단단히 쌓여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그나마 샤를 3세가 용병들에게 끌려다니면서도 그나마 군대 비슷한 모양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런 샤를 3세가 전투 중 죽어버린 것이다. 샤를의 뒤를 이어 필리페르트가 사령관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이미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규율 있는 강도 떼가 되어버린 용병들에게는 손도 대지 못했다. 용병들은 지휘관의 죽음에 사기가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분노하여 격렬한 기세로 로마를 공격했다.

그래서 로마 수비군은 단 하루만에 약 1천 명을 잃고 패주하는 것으로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제국군은 적의 시체를 짓밟으며 성난 물결처럼 로마 시내로 밀려들었다. 오직 스위스 용병들만이 교황을 지키기 위해 바티칸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고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이전 파비아 전투 때 그랬듯이 거의 몰살당했다. 모두 전사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189명의 스위스 근위대 중 147명이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사투를 벌여 전원이 제국군에 학살당해 주검이 된 것이다.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자 스위스 근위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교황은 지래 겁을 먹고 147명의 근위대가 사투를 벌여 시간을 버는 동안 남은 42명의 호위 아래 바티칸을 버리고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갔다.

수비군도 없고, 교황도 도망간 로마 시내는 제국군이 들이닥쳤을 때 이미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카톨릭의 본거지다운 엄숙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무질서함만이 팽배하게 들어차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막을 적도, 자신들을 통제할 지휘관도 갖지 못한 용병들은 로마를 현실에 나타난 지옥으로 만들었다.

3.2.3. 학살과 파괴

제국군은 죽은 지휘관의 복수라는 명분 하에 본격적으로 로마를 침탈했다. 우선 포로로 잡힌 1,000여명이 로마가 함락된 직후 공개처형당했다. 그리고 지휘관의 복수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은 이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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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성당 재산들은 남김없이 약탈당했고, 건립된 지 고작 반 세기도 안 되는 유명한 시스티나 소성당 역시 예외는 되지 못했다. 남자들은 군인이건 사제건 따지지 않고 고문을 받다가 참혹하게 살해당했고 여자들은 어리건 아니건 수녀건 뭐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고 성벽에 못박히는 등 그야말로 지옥에 가까운 참극이 벌어졌다. 제국군의 상당수는 루터교 신자들이라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 정도로 여기고 있어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침탈에 몰두했다. 루터교인들은 교세가 확장되기 전까지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판정받아 개종하지 않으면 갖은 수치와 고문을 받다가 화형당하기도 했다. 당장 루터 등장 이전에도 얀 후스 같은 인물이 생명 보장 약속을 어기고 끔찍하게 처형당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보헤미아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을 정도로(이 결과가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다) 구교측은 더러운 짓을 많이 해왔다. 어떻게 보면 사코 디 로마는 참혹하고 막나가던 종교재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고스란히 아무 죄도 없는 민간에게 몇 배로 돌아갔다. 그리고 구교측이 박해를 했다고 구교 신자들을 학살, 강간한 것이 정당화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탈리아 출신 용병들은 루터교인이 아니었지만, 프룬츠베르크가 쓰러져 죽고 샤를 3세도 전사한 마당에 이미 종교가 어쩌니 할 계제가 아니었다.

살아남은 추기경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신하거나 돈을 구해 바쳐야 했는데 친 합스부르크파 추기경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때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적대하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제국군에 호응하기 위해 휘하 세력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하기도 했는데, 로마에 벌어진 지옥도를 목도한 추기경은 교황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음에도 살아남은 로마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섰을 정도였다.

이런 로마의 상황이 사방에 알려지자 코냑 동맹에 가담했던 이탈리아 각 도시국가들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빠져버렸다. 지금은 제국군이 로마를 집어삼키는 중이었지만, 만약 저들이 로마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자기들이 똑같은 꼴을 당해야 할 테니까. 천만다행으로 이들의 공포는 현실이 되지 않았는데, 코냑 동맹군이 제국군을 모두 물리쳤다거나 제국군이 로마를 집어삼킨 것으로 만족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교황령을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린 카를 5세 본인이 사태수습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더욱 비극인 점은, 이런 제국군의 로마 점거는 장장 반년이나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로마의 피해는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로마 인구의 3분의 2 가량이 살해당하거나 유린당하였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신의 도움만을 기다리며 숨거나 도망쳐야만 했다. 이전까지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의 건축물들도 무참히 파괴될 정도로 로마의 피해는 심각해졌고, 피신해있던 교황은 로마의 소식을 듣고 비통해했다. 사실 클레멘스 7세도 말이 피신이지 사실상 제국군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가 온갖 굴욕을 당하는 사이 교황을 구하고 로마를 수복하고자 이탈리아 전역에서 각지의 의용군이 속속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강대한 제국군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어서 오는 족족 깨져나갈 뿐이었다. 그나마 희망이 남아있던 동맹군 프랑스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또 패배하며 굴욕적인 협상을 맺고 물러나버렸다. 이후로도 두 차례 카를과 전쟁을 벌이지만, 번번이 힘이 미치지 못하여 불리한 강화를 체결한다.

로마는 폐허가 되었고 프랑스는 물러나버렸다. 이제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남은 건 단 하나. 카를 5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결국 교황은 1년 만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울트레흐트 교구의 재산을 합스부르크에게 넘겨주는 등[11]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간신히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그 동안의 침탈 행위를 모조리 감당해야 했던 로마는 완전히 초토화된 이후였다.

배상금을 지불하고 로마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교황은 더 이상 카를 5세와 적대할 의욕마저 상실했다. 제국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제국군이 다시 로마로 처들어올까 불안해했고, 마침내 권위고 뭐고 다 팽개치고 직접 볼로냐까지 나아가 카를 5세와 만나 로마에서 발생된 침탈행위를 용서하고 카를 5세를 제국의 공식적인 황제로 인정하며 제관을 씌워 준다는 서약을 맺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로서 카를 5세는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은 최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관을 씌워준 마지막 교황이 되었다.

3.2.4. 여파

이렇게 교황이 야심차게 결성한 코냑 동맹은 완벽하게 와해되었다. 그나마 피렌체만이 항전을 계속[12]했으나, 외부에서 결성된 원군이 1530년 가비나나 전투에서 일주일 간의 격심한 교전 끝에 제국군에게 패배하여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항복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역시 이 전투에서 55세의 나이로 피렌체에서 무너진 성벽 복구를 감독하는 식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피렌체로써는 다행스럽게도 로마와 같은 참극은 면할 수 있었다. 사실 사코 디 로마는 애초에 부족하게 지급된 용병료+용병을 주축으로 한 군대 결성+급료 체불+용병대장의 죽음+그나마 권위있던 지휘관의 전사가 모두 겹쳐 일어난 예외 중의 예외인 사안이다. 기본적으로 용병은 오늘의 적이 내일의 고용주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생결단을 내면서 약탈하지는 않는 편이다. 어쨌든 피렌체에는 오늘날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고건물들과 예술품들이 즐비하게 남아있어 오늘날까지 피렌체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고 있다.

코냑 동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권위는 과거와 같은 권력은 꿈도 꾸지 못할 '이빨 빠진 호랑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교황의 영향력은 정확히 교황령 안으로 축소되었고, 종교적인 탄압은 교황이 아닌 세속 군주들 차원에서 벌어진 데다가[13] 그나마 종교적인 문제 또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부터는 명목상의 권한마저 축소되어 잇몸(...)까지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편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에게도 엉뚱한 불똥이 튀었다. 1527년 국왕 헨리는 앤 불린과 재혼하기 위해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14]로 하기 위하여 교황 클레멘스의 허락을 구했는데, 여기서 문제는 아라곤의 캐서린이 카를 5세의 이모되는 분이라는 것. 클레멘스 교황은 같은해 로마에서 위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며 볼로냐까지 마중 나가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고, 카를 5세가 헛기침만 해도 벌벌 떨어야 하는 처지까지 내몰린 교황은 헨리의 요청을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헨리 8세가 난처해졌는데, 힘으로 카를 5세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영국에서 빙 돌아 교황청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설령 그게 가능했다 해도 영국에서 교황청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베리아 반도 옆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페인은 카를 5세의 땅이었고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최강이었다. 여기서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내가 허락하면 된다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어, 가톨릭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성공회를 탄생시켰다. 물론 성공회의 수장 자격으로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혼인 무효를 승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교황 클레멘스 7세 본인도 로마에서 입은 트라우마를 죽을 때까지 해소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비극을 잊지 않고자 1534년 과거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렸던 당대의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다시 초빙하여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선종했고 다음 대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가서야 완성을 보았다.

15세기 유럽의 문예를 주도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사건으로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고 평가된다. 이 사건과 전후의 이탈리아에서의 격렬한 전쟁은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다른 이탈리아 공화국들과 거리를 두던 베네치아 공화국만이 번영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로마에 르네상스 당시 양식 건물을 찾기 힘든 반면 후대 바로크 양식의 고건물이 즐비한 것도 그 영향이다. 실로 역사적 도시 하나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것이다.

이 사건은 스위스 용병들의 활약상 중 1792년 8월 10일 봉기 당시 튈르리 궁에서 혁명군에게 전멸당한 786명의 스위스 근위대와 더불어 가장 장렬한 사수전을 보여준 일화로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교황을 위해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에 감격한 교황청은 이후 스위스 근위대를 영원히 근위대로 쓸 것을 서약한다.[15] 지금까지도 매년 로마가 제국군에 함락당했던 5월 6일마다 바티칸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용병들이 1527년에 최후를 맞은 수백 명의 선배들을 기리며 충성 서약의 의식을 치른다. 비록 패배했음에도 그 용맹에 그 경의를 바치는 것이니 빈사의 사자상과 비슷한 의미인 셈.

3.3. 의미

  • 16세기 근세로 이행하는 격변기 속에서 황제권이 교황권을 역전한 이래 가장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으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교황이 세속 군주로부터 이렇게까지 굴욕을 겪은 바는 없었다. 이에 비하면 카노사의 굴욕은 사실 굴욕 축에도 끼기 어려울 정도.[16] 또한 기독교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여 궤멸적 타격을 초래했던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인 동시에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
  • 또한 사코 디 로마는 성공회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톨릭이 사회 윤리의 틀을 제공하던 당시, 원칙적으로 이혼은 금지되었지만, 왕의 경우 교황의 권면을 받아 '혼인무효' 등으로 혼인관계를 정리하고 재혼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헨리 8세도 이걸 원했던 것.[17] 그러나 사코 디 로마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력 앞에 벌벌 떨던 교황은, 에스파냐 국왕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로스 1세의 고모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의 이혼을 승인해줄 리가 없었다. 성공회의 탄생도 거칠게 보면, 사코 디 로마에 대한 트라우마 시달리던 교황이 영국 대신 신성로마제국을 선택한 것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1] 그림 속의 인물들은 독일 용병인 란츠크네히트들이 피난을 간 클레멘스 7세를 조롱하기 위해 가마에 가짜 교황(...)대립교황을 태운 채 행진하는 모습을 그린 판화다.[2] 위대한 로렌초라 불리는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동생 줄리아노 디 피에로 메디치가 파치 가의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기 전에 관계하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나마도 줄리아노 사후에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로렌초는 그를 조카로 인정하여 아들들과 함께 키웠다.[3] 유명한 란츠크네흐트 용병대의 창설자로, 이탈리아 전쟁 시대 신성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장군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인 카를의 명에 따라 프랑스와 대결한 장군들은 거의 대부분 스페인이나 저지대 국가, 이탈리아 출신들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프룬츠베르크는 눈에 띄는 존재였다.[4] 원래 프랑스인으로, 몽팡시에 백작의 아들이었지만 아내가 부르봉 공작의 딸이었기에 부르봉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군자금에 쪼들리던 프랑스 왕이 살리카 법을 적용하여 샤를의 영토를 몰수, 정확히는 자신의 모후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해 이에 반발하여 카를의 신하가 되었다. 이전 항목에서는 '신임하는'이라 되어있었지만, 규율이 잡힌 군사들을 통솔하는 데에는 뛰어났던 무장이기는 해도 딱히 신임받았던 듯하지는 않다.[5] 파비아 전투로 끝난 1521~1526년의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당시 밀라노 공국의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2세는 황제 덕분에 공작이 된 것은 고맙지만 내정간섭은 극구 사양하겠다고 선언하여 사실상 독자 노선을 걸었다.[6] 사실 전근대의 왕과 귀족들은 그렇게 부유한 편이 아니었기에 용병들에게 용병료를 많이 주지 못했다. 특히 카를 5세는 국가 재정이 부유하지도 않은데 전쟁을 자주 벌여 재정을 거덜냈기에 용병들한테 충분한 보수를 주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 당시 용병들은 약탈을 안할 수가 없었다.[7] 페라라 공국은 전통적으로 친프랑스 정책을 내새웠으나 페라라 공국 공작 알폰소 에스테가 이를 파기했다.[8] 이 시대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화포 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도 30km 정도면 전술적으로 적 포격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본다.[9] 물론 동로마가 교황더러 야만인들 먹잇감 신세나 되라고 일부러 방기한 것이 아니다. 교황을 보호해야 할 라벤나 총독부가 로마보다 먼저 공격당해 망해버렸기 때문. 그리고 이 당시 동로마는 이슬람의 공세에서 겨우 벗어났더니 곧 벌어진 성상파괴운동으로 정신없는 상태였다.[10] 클레멘스 7세 본인이 메디치 가문이었다.[11] 그 외에도 많은 영지를 넘겨주기로 서약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모데나만이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12]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의결기관인 10인 위원회에서 '교황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항복하자'라 결의하기도 했다. 즉, 제국군에게 항복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13] 물론 명목 상으로는 교황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주체는 엄연히 세속 군주들이었다.[14] 여기서 혼인 무효는 사실상의 이혼으로 가톨릭은 교회법으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혼인을 무효로 돌리는 것만이 가능하다.[15] 다만 이 서약을 맺은 것은 사코 디 로마로부터 10년 후인 1537년으로 사코 디 로마에 휘말린 클레멘스 7세 본인이 선종하고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의 이야기이다. 사코 디 로마 직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요구로 스위스 근위대를 독일인 용병으로 갈아치워야 했다.[16] 카노사의 굴욕은 황제의 권위에 교황이 공격을 가한 첫 사건으로 보는 편이 가깝다. 오히려 교황권의 본격적인 상승이 시작되었던 사건인 셈.[17] 헨리 8세의 아내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은 형의 아내였기도 했기에 근친상간이라는 문제도 겹쳐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