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5-02 19:31:57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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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
{{{#000,#e5e5e5 프랑크 · 동프랑크 · 라인 동맹 · 독일 연방 · 북독일 연방 · 독일 제국 · 바이마르 · 나치 독일 · 동독 ·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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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lbrecht_Dürer_-_Portrait_of_Maximilian_I_-_Google_Art_Project.jpg
제호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출생 1459년 3월 22일
오스트리아 비너노이슈타트
사망 1519년 1월 12일 (59세)
오스트리아 벨스
재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508년 2월 4일 ~ 1519년 1월 12일
로마왕
1486년 2월 16일 ~ 1519년 1월 12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
1493년 8월 19일 ~ 1519년 1월 12일
배우자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 (1477년 결혼 / 1482년 사망)
브르타뉴 여공작 안 (1490년 결혼 / 1492년 무효화)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1494년 결혼 / 1510년 사망)
자녀 펠리페 1세, 마르가레테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어머니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왕녀
형제 쿠니군데

1. 개요2. 생애3. 가족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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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정략적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세력을 크게 넓혔다. 또한 이탈리아를 놓고 프랑스와 맞서 대를 잇게 되는 지리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했다. 카를 5세페르디난트 1세의 선대 황제이자 조부.

2. 생애

1459년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의 엘레아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외동딸인 마리와 1477년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 백작령과 저지대 지역-베넬룩스 3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분쟁이 계속되어 1493년 상리스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이 기간 중 마리가 1482년에 사망한 후 브르타뉴 여공작 안과 결혼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린 샤를 8세의 섭정이었던 안이 샤를의 약혼녀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를 돌려보내고 샤를과 브르타뉴의 안을 결혼시키는 일도 있었다.[1]

한편 이 기간 동안에는 오스트리아 내의 합스부르크 영지들의 종주권을 그 자신에게 통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는데, 특히 인스브루크와 이 지역의 은광을 획득한 것은 특히 중요한 성과였다. 1493년에 황제로 등극했고 그 다음해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함으로서 밀라노에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1495년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권, 즉 중앙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으나 독일 내의 선제후들과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는 1504년에 반대파의 수장인 베르흐톨트 마인츠 대주교가 사망하고 독일 최대의 금융업자인 푸거 가문과의 신용협정을 통해서 막대한 자금을 융통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2]. 1499년에는 슈바벤 전쟁에서 패전하여 바젤 조약을 통해서 스위스의 합스부르크 영향력에서 사실상 독립을 인정해야 했으나, 1495년 아들 필리프(카스티야 왕으로서 펠리페 1세)가 카스티야의 후아나와 결혼함으로써 훗날 스페인을 합스부르크가에 편입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3]. 필리프와 후아나 사이에 나온 카를 5세는 제국의 차대 황제이자 스페인 왕으로, 페르디난트 1세는 차차대 황제로 즉위한다.

이탈리아에서는 1495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샤를 8세의 나폴리 왕국 정복을 저지했고, 베네치아와도 상당한 기간동안 대립하고 있었다. 교황이 황제대관을 해주기로 했으나 베네치아가 끼어들어 막시밀리안의 이탈리아의 안전한 통과를 방해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와 가까운 트렌트에서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트렌트 대주교가 대관해주었다. 그러나 이미 이시기엔 교황의 황제대관은 황제 즉위와 상관 없었다. 스스로 그 이전부터 황제 칭호를 썼고 아무도 트집잡지 않았다. 훗날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기반을 닦아준 손자 카를 5세는 클레멘서 7세를 사로잡고 볼로냐에서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

1499년 슈바벤 전쟁에서는 스위스 동맹에게 패하고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문 영향권에서 사실상 독립한다. 다만 신성 로마 제국 권역에서 독립한 건 아니다.

막시밀리안의 진정한 시련은 밀라노 지역에서 일어났다. 모계를 통해서 비스콘티 가문을 잇고 합스부르크와 평생에 걸친 항쟁에 들어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이 밀라노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를 추인한 브뤼셀 조약을 통해서 밀라노 공작령을 프랑스에게 넘겨야만 했다. 이 영지는 뒤에 손자 카를 5세가 수복할 때까지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후에는 손자인 카를 5세에게 스페인 왕위와 제국의 제위를 순조롭게 물려주려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구성하는데 전념하다가 1519년 1월에 상 오스트리아의 벨스에서 사망하였다. 그해 말 손자 카를 5세는 로마왕에 추대되었고 그로부터 1년 뒤 선출된 로마 황제로 즉위했고, 10여 년 후에는 교황에 의해 마지막으로 대관식까지 치뤘다.[4] 원정은 실패했지만 이탈리아 원정비용을 제공한 야코프 푸거에게 제국백작을 수여했다. 훗날 야코프 푸거는 장손자 카를 5세의 황제 선거자금 대출을 해줘서 당선에 공헌했고, 면죄부 판매자금을 대출과 로마교황청 송금을 맡아서 종교개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말년에 교황청에서 마르틴 루터를 체포하고 처벌하라는 압력에는 냉담했다.

란츠크네히트를 창설하는 등 군사적인 업적에서 재능을 발휘했고, 중요한 군사개혁과 행정개혁을 실속있게 시행했으며 중세적 사고가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고에도 관대하였으며, 예술과 문학 및 과학의 발전에도 상당한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군주의 기사도적인 면모를 보이는 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경제문제에는 문외한이었으며 재정적으로도 믿음직하지 못했기에 결국 열세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어 이탈리아에서의 이익 확보에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그 많은 결혼전쟁에도 불구하고 그 당대에 얻은 것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 이것은 후대에 가서 엄청난 효과와 역사적 사건들을 야기하지만.

그러나 그의 유업은 손자인 카를 5세에 의해 계승되어, 제국령에 추가로 스페인,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아메리카, 필리핀을 넣어 합스부르크 사상 최대 판도의 대제국을 이룩하는 위업을 세운다. 자세한 것은 카를 5세 항목 참조.

3. 가족

총 3번의 결혼을 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들은 아래와 같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y_of_burgundy_pocher.jpg* 1. 마리 드 부르고뉴 1457년 ~ 1482년 (25세): 부르고뉴 공 용담공 샤를의 유일한 자식이자 부르고뉴의 여공으로 당시 황금의 신부, 부귀공 마리 뭐야 무서워..별명이 리치야... 등등으로 불렸던 여성. 마리와 막시밀리안은 서로 6촌 사이였다. 아버지 샤를이 1477년 로렌 공작과의 전쟁에서 로렌 공작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에 의해 전사하자 약관의 나이로 공국을 물려받았다. 이 당시 부르고뉴 공국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꿀땅인 곳(특히 플랑드르를 위시로 한 저지대 일대)이라 서로 마리와 결혼해 부르고뉴를 가지고 싶어했다. 특히 부르고뉴와 같은 발루아 가문이자 부르고뉴의 명목상 종주국이던 프랑스가 적극적이어서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부르고뉴를 침공하였고, 이에 모자라 저지대의 백성들을 선동하여 마리를 겐트 성에 가둬버린 후 자신의 7살 난 아들과의 결혼을 강요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5][6] 막시밀리안은 마리의 구원 요청을 받자마자 가문의 사비를 털고 대출까지 받아서 병사들을 모집한 다음 마리가 있는 겐트에 입성해 마리를 구출했다. 이를 계기로 마리는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게 된다.[7] 아름답고 부유하며 잘 배운 여성이였다고 전해지는 마리를 막시밀리안은 매우 사랑했고 둘 사이에는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장남 필리프[8]와 장녀 마르가레테[9]를 남긴 후 마리는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중 즐겨하던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후 막시밀리안은 평생 마리를 그리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결혼은 더 했다 사망 후 마리가 고향인 벨기에에 묻히자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사후 오스트리아에 묻힐 자신의 시신에서 심장을 꺼내 마리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
여담이지만 동화 라푼젤의 모델이다. 그녀가 막시밀리안에게 청혼하며 편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낸 것이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이야기의 모태가 된 것. 고립된 상황의 미녀라는 점에서 동일한 면모를 보인다. 또한 초상화에서 마리가 쓴 고깔모양의 모자는 그녀가 즐겨 쓰던 모자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NF_-_Latin_9474_-_Jean_Bourdichon_-_Grandes_Heures_d%27Anne_de_Bretagne_-_f._3r_-_Anne_de_Bretagne_entre_trois_saintes_%28d%C3%A9tail%29.jpg* 2. 안 드 브르타뉴 1477년 ~ 1514년 (37세): 막시밀리안 1세와 대리혼까지 했는데도 프랑스에서 신부를 가로채갔다. 실제 결혼생활을 한 것은 아니라서 부인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다.자그마한 키에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안 드 부르타뉴는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로 이전에 마리 드 부르고뉴를 빼앗긴 것이 못내 아까웠던지 프랑스의 왕 샤를 8세가 홀랑 데려가 왕비로 삼는다. 그것도 원래 결혼 상대였던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테까지 걷어차고. 즉 자신의 새 부인을 사위가 되어야 할 샤를 8세에게 빼앗기고 딸은 사위에게 쫓겨나게 된 것. 이 불쌍한 여성은 이후 2명의 프랑스 왕과 결혼을 해서 내내 임신과 출산만 반복하다가 변변한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게 사망하게 된다.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가 냠냠 했음은 당연하다[1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mbrogio_de_Predis_-_Bianca_Maria_Sforza_-_Google_Art_Project.jpg* 3.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1472년 ~ 1510년 (38세): 밀라노의 공작인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와 두 번째 부인인 샤보이의 보나[11]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아버지인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는 여자를 밝히는 데다 잔인하고 폭력적이기로 유명했다.[12] 비앙카는 2살도 되기 전에 사촌과 첫 번째 결혼을 했는데 이 남편은 10살의 비앙카를 남겨놓고 일찍 죽어버렸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비앙카는 좋은 교육도 받지 못했고 세련되거나 교양이 있지도 않아 막시밀리안 1세의 첫 번째 부인인 마리와 많은 비교를 당했다. 막시밀리안 1세와의 사이에서 몇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사망했고, 그나마 간간이 이어지던 부부 관계도 멀어져 1500년을 기점으로 별거하게 된다.

4. 기타

여담으로 헨리 8세처럼 무구에 조예가 깊어 맥시밀리언 아머에 이름이 붙은 그분이시다. 방어구의 역사라는 책에선 갑옷 오타쿠라고 부른다. 그와 원수지간이 된 손자와는 달리 헨리 8세와 관계는 같은 취미를 가진 덕후로(...) 나쁘지 않았는지 악마처럼 기괴한 모양의 철가면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도미네이션즈에서 막시밀리안의 투구가 유물로 등장한다.


[1] 이 결혼으로 브르타뉴가 정식으로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2] 푸거 가문의 막대한 재력은 막시밀리안의 후계가 계속 제위를 차지하게끔 절대적 기여를 한다.[3] 다만 원래 신성 로마 제국 소유였던 네덜란드도 훗날 카를 5세에 의해 스페인 소속으로 넘어가게 된다.[4] 14세기 카를 4세 시기부터 황제 즉위는 로마 교황의 대관이 필요없다. 선제후의 투표만으로도 확정된다.[5] 당시 20대였던 마리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고, 분노한 루이 11세는 마리를 영원히 성에 가두어 굶겨죽이려 하였다. 프랑스의 위협이 목전에 다가왔고 공국 내에서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게되자 마리는 자신을 보호해 줄 보호자가 필요했기에 아버지의 유언대로 생판 모르는 오스트리아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한다.[6] 의외인 점은 샤를의 아버지 선량공 필립 시절만 하더라도 알자스를 두고 부르고뉴와 오스트리아가 대립 중이었다는 사실. 하지만 부르고뉴 공국에게 더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은 프랑스였기에 샤를은 마리에게 자신이 죽으면 오스트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7] 마리를 구출한 다음 날 막시밀리안은 마리의 이니셜 M모양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청혼했다고 한다. 이 반지를 후대의 결혼반지의 유래로 보는 견해도 있다.[8] 훗날의 카스티야 왕 펠리페 1세. 얼마나 잘생겼으면 별명이 미남왕 또는 미남공이였다.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했고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딸인 후아나가 어머니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정신병이 있다는 이유로 카스티야 귀족들은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기 위해 카스티야에 오자마자 필리프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편의 죽음에 정신줄을 놓은 후아나는 말그대로 미쳐버리고 만다. 이 여자가 그 유명한 카스티야의 여왕인 후아나 라 로카(미친 후아나)다. 물론 후아나의 외가 혈통이 정신적으로 취약하긴 했으나 그만큼 후아나가 필리프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유명해서 후대의 창작물에 많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9] 인생 참 기구한 여자로 원래 프랑스 왕세자 샤를(위에서 설명한 루이 11세가 마르가레테의 어머니 마리랑 결혼시키려 했던 샤를 8세)이랑 결혼했으나, 결혼한 후 왕위에 오른 샤를이 브르타뉴 공국의 영지를 얻기 위해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걷어차였다. 두 번째 결혼으로 오빠 필리프의 아내인 후아나의 오빠이자 차기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였던 아스투리아스 대공 후안과 결혼했으나(즉, 막시밀리안의 합스부르크 가문와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트라스타마라 가문은 겹사돈을 맺은 거다) 후안은 얼마 안 가 사망하였고, 이후 세 번째 결혼으로 사보이 공작 필리베르토 2세와 결혼하였으나 사보이 공작 역시 얼마 못 가 사망하였다. 이후 마르가레테는 결혼하지 않고 조카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자 카를의 대리인인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저지대 지역을 통치하며 세월을 보냈다.[10] 다만 불쌍하니 냠냠이니 하는 표현을 쓰기 이전에, 이 여자가 '흔한 양갓집 규수 A' 가 아니라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 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즉 예쁘장하다는 점보다는 이 여자와 결혼한 왕이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었기에 주목을 받았던 것이며, 실제로 샤를 8세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업적이 프랑스 왕국에 브르타뉴 공국을 공식적으로 합병한 것이다.[11] 샤보이의 보나는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기 이전에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의 결혼 대상으로 점찍어 뒀던 여성이다. 영국의 왕비가 될 수도 있었던 보나는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랑 홀랑 결혼해 버리는 바람에 갈레아초와 결혼하게 되었다.[12] 나쁜놈이 가질 모든 조건을 다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