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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243><colcolor=#fff> 카스티야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7대 국왕 아라곤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5대 국왕 후아나 1세 Juana I | |
이름 | 후아나 데 트라스타마라 이 트라스타마라 (Juana de Trastámara y Trastámara) |
출생 | 1479년 11월 6일 |
카스티야 연합 왕국 톨레도 | |
사망 | 1555년 4월 12일 (향년 75세) |
스페인 토르데시야스 | |
재위 |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 |
1504년 11월 26일 ~ 1555년 4월 12일 | |
아라곤 연합 왕국의 여왕 | |
1516년 1월 23일 ~ 1555년 4월 12일 | |
배우자 | 펠리페 1세 (1496년 결혼 / 1506년 사망) |
자녀 | 레오노르, 카를 5세, 이사벨,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탈리나 |
아버지 | 페란도 2세 |
어머니 | 이사벨 1세 |
형제 | 이사벨, 후안, 마리아, 카탈리나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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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연합왕국 등의 여왕. 별명은 '후아나 라 로카(Juana la loca)', '미친 후아나'라는 의미이다.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란도 2세의 차녀. 카를 5세[1]와 페르디난트 1세의 어머니이며, 카탈리나의 둘째 언니이자 헨리 8세의 처형.
2. 외모
어머니 이사벨 1세는 하얀 피부에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고 하며 초상화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둘째딸 후아나[2]와 막내딸 카탈리나 역시 미인형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3] 그러나 둘 다 남편에게 헌신하다 헌신짝 된(...) 이미지 탓인지 현대에서는 그 점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 듯.3. 생애
3.1. 어린 시절
원래는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의 차녀로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오빠 후안이 일찍 죽고 언니 이사벨이 포르투갈의 왕비로 시집갔다가 출산 후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 여왕이 되었다.후아나는 매우 지적이고 잘 교육받은 여성이었다. 여성에게도 남성 못지 않은 교육을 시키던 르네상스 시대의 풍조로 그리스와 라틴 고전, 법학, 신학, 역사학, 수학, 어학, 음악 등 폭넓은 학문을 익혔으며 그 외에 상류층으로서의 교양과 사교술, 승마술 등도 빠짐없이 배웠다. 그러나 유년기의 후아나는 매우 반항적인 소녀였기에 부모에게서 모진 체벌을 받기 일쑤였으며 어떤 날은 밧줄에 묶여서 하루종일 서 있던 적도 있었다. 또 가톨릭 부부왕 칭호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던 부모와 달리 종교에 큰 관심이 없었고 회의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오빠와 언니가 죽고 후아나가 후계자가 되자 어머니 이사벨 1세는 본인 사후 카스티야의 왕권은 후아나에게 귀속되며 아버지 페란도 2세는 이에 개입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두었다. 그러나 후아나의 통치에 대해 무척이나 걱정한 이사벨은 자신의 유언장에 만약 후아나가 스스로 통치할 의지가 없을 경우 후아나의 아들(훗날의 카를 5세)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 페란도 2세의 섭정을 허가한다는 조항을 남겨두었는데 이 조항이 훗날 후아나가 정신 이상으로 통치할 의지가 없다고 해석되어 비극의 씨앗이 된다.
3.2. 결혼
1495년 16살의 후아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로 '미남왕'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던 부르고뉴 공작 겸 저지대 국가의 군주 필리프와 결혼했다. 식전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홀딱 반했고 일찍부터 바람둥이 기질을 보였던 필리프는 공식적인 결혼식 하루 전날 부인이 될 후아나의 방에 가서 동침부터 저질러 부모를 곤혹스럽게 했다. 이때 후아나의 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은 필리프의 여동생인 마르가레테와 결혼을 한다.카스티야-아라곤 쪽의 두 남매 후안, 후아나는 모두 서로의 배우자인 오스트리아의 남매에게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오빠인 후안은 부인 마르가레테에게 매우 빠져들어서 몸이 약한데도 성관계를 너무 열심히 하다 기력이 소진되어 사망했다고 할 정도. 부모가 양기가 다 빠져나간 아들의 몰골을 보고 놀라서 별거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인 필리프는 후아나의 애정을 부담스러워하며 이리저리 바람을 피우고, 후아나는 그런 남편에게 더 안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후계자 생산에 대해 등한시한 것은 아니라서 부부관계를 가져서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필리프는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2남 4녀를 두었는데 이 중 둘째 아이는 후아나가 연회 중 남편의 눈에 띄려고 과하게 춤을 추다 급하게 욕실에서 낳았다고 한다. 이 아이가 후일의 카를 5세.
쉴 틈 없이 아내와 다투던 필리프는 아내가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가 되자 후아나의 왕권을 탐낸다는 소문이 돌았고, 저지대 국가에서의 결혼 생활 중에서도 후아나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그녀를 감금했다거나 학대했다는 소문이 도는 등 스페인에서도 평판이 극히 좋지 않았다. 필리프도 종교에 미친 것 같다고 스페인 사람들을 싫어했고, 처부모와 정치적 문제로 실랑이 끝에 아내를 스페인에 두고 영지로 가버렸다. 겨우 남편에게 돌아간 후아나는 남편의 새 정부를 보고 광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하여 분노한 남편한테 빰을 얻어맞기도 했다.
25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이사벨 여왕이 사망했고 위의 다른 형제가 모두 사망하여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왕위를 계승한다. 나중에는 남편인 필리프 역시 공동으로 카스티야의 왕이 된다.
3.3. 남편의 죽음
하지만 남편 필리프가 1506년 장티푸스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후아나는 그 슬픔으로 정신줄을 놔 버렸다. 이때 후아나는 막내딸 카탈리나를 임신 중이었는데, 이 막내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시누이 겸 새언니인 마르가레테가 기르고 있었다. 마르가레테는 후안이 죽고 나서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필리베르토 2세와 재혼했는데 필리베르토 2세와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두지 못했고, 1504년 필리베르토 2세가 사망하자 본인은 더 이상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홀로 네덜란드를 통치하며 지냈다.[4]이런 일이 일어난 건 당시 스페인을 구성하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군주들이 부부 사이였던 것일 뿐, 통치권도 각각 갖고 있어 부부 동군연합이었기 때문에 레콩키스타의 완수와 별개로 두 나라는 하나가 아니라서 각각 다른 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카스티야 왕국과 달리 아라곤 왕국은 원칙적으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5] 이사벨 1세가 페란도 2세의 왕비였기 때문에, 이사벨의 후계자인 후아나도 일단은 아라곤의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페란도 2세는 딸인 후아나가 결혼한 이후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명분으로 카스티야의 섭정이 되는 한편, 재혼해서 후계자가 될 아들을 생산해 그로 하여금 아라곤의 왕통을 유지하려 했다. 즉, 아라곤이 카스티야를 흡수하는 형식으로 통일을 이룰 속셈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로, 부르고뉴의 공작 필리프. 후아나 여왕의 남편으로서는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
이에 후아나의 남편인 필리프는 분개하여 반발했고 여왕의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원래 자신이 통치하는 저지대에서 스페인으로 귀국하던 중 배가 표류하여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7세에게 볼모로 잡히는 등 소란을 빚는다. 왕국이 둘로 쪼개질 위기에다 이렇게 국내 상황이 내전 직전으로 돌아가자 카스티야 의회인 코르테스는 논의 끝에 후아나를 합법적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으로, 그 남편 필리프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공동왕 펠리페 1세로 인정하며 카스티야의 실권을 후아나와 펠리페 1세에게 양도했다. 필리프나 페란도 2세나 카스티야에서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필리프는 정당한 여왕의 남편이었고, 카스티야 의회에서는 아라곤이 카스티야를 압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필리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와 별개로 아라곤의 코르테스도 후아나를 적법한 아라곤의 후계자로 선언하면서 자신들의 국왕 페란도 2세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펠리페 1세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지 단 두 달 만에 병으로 급사했다.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이 유력하지만 일설엔 장인인 페란도 2세가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미남공'이라 불릴 정도로 워낙 훤칠하게 생긴 데다[6] 바람기까지 있는 탓에, 후아나가 즉위하고도 부부는 오래 붙어있지 못했지만 후아나는 그런 남편을 끝까지 사랑했다. 남편이 죽자 후아나는 큰 상심에 잠겨 더욱 정신적으로 불안해졌으며, 남은 40년 동안을 홀몸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기행 때문에 그녀는 광녀 후아나(Juana la Loca)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기행으로는 남편이 죽은 후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잠시간 지연시킨 일이 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남편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다는 이유로 죽은 남편의 시체를 담은 관을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다거나, 매장을 지연시켜 놓고 매일 관 뚜껑을 열고 시신에 입을 맞춘다는 등의 루머가 돌았다. 이때 후아나는 막내딸 카탈리나를 임신한 터라, 이를 우려한 신하들과 주변 사람들이 시신에 접근하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다.
3.4. 유폐된 여왕
페란도 2세는 사위 펠리페 1세가 죽자 딸 후아나의 섭정으로서 사실상 스페인 1인 통치에 들어가 더욱 의욕적으로 대외 팽창에 나섰다. 그는 이미 1504년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각축을 벌여 이탈리아 반도의 나폴리 왕국까지 차지했고, 1512년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낀 나바라 왕국의 피레네 산맥 이남을 차지했다. 신대륙 정복에도 한창 가속도가 붙어 쿠바를 비롯한 중아메리카 동부 해안이 스페인 수중에 떨어졌다. 그런 한편으로 통치를 보다 강고히 하기 위해, 1507년 나폴리에서 귀국 직후 딸 후아나를 그녀의 막내딸 카탈리나와[7] 함께 토르데시야스 성에 가두고 카스티야 섭정이 되었다. 이 경위에 대해서는 권력을 분점하지 못하게 유폐했다는 설과 그녀를 노리는 정적으로부터 보호했다는 설이 있다.그 와중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는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후 후아나와의 결혼을 추진하려고 했었다. 비록 후아나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알려지긴 했어도 여전히 유럽에서 제일 가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었던 만큼, 그녀와 결혼하면 카스티야의 영토부터 어마어마한 지참금까지 자신의 수중에 넣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 그러나 이 결혼을 추진하려고 한 지 채 1년도 안 되어 헨리 7세 역시 세상을 떠나버렸다. 무엇보다 죽으나 사나 남편바라기인 후아나가 이 결혼을 받아들였을 확률도 거의 0%였을 듯. 게다가 헨리 7세는 후아나의 아버지인 페란도 2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지참금 문제로 10여 년을 싸워댄 전력이 있는데, 사위와도 카스티야 영토를 차지하려고 서로 안달이 났던 페란도 2세가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페란도 2세는 첫 번째 아내 이사벨 1세가 사망한 거의 직후 자식보다 어린 프랑스 왕실 혈통의 제르멘 드 푸아를 계비로 들였는데[8]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식이 없자, 후아나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아라곤 왕위에 대한 건 카를 5세 항목을 참고). 그는 사위인 펠리페 1세를 정말로 싫어했고 그 싫어하는 사위의 영지인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맏손자 카를 5세보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었지만 이럴 경우 아라곤은 페르디난트에게, 카스티야는 카를에게 분할 상속될 뿐더러 또 다른 내전을 부를 여지가 있었기에 카를 5세 쪽으로 바꿨다고 한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페란도 2세 사후 결국 카를은 어머니 후아나와 공통 통치하는 형태로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후아나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의 여왕이었고, 그 아들인 카를 5세(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에 이르러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스페인 연합 왕국이 출범하게 된다. 다만 카를 5세는 어머니를 유폐당한 상태 그대로 놔둬서 그녀는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후아나는 사망할 때까지 공식 직함 대부분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에 카를 5세는 그녀 생전엔 어머니의 공통 통치자로서 스페인을 통치했다.
왕이 되기 위해 스페인에 귀국한 카를 5세와 자매 1명은 먼저 후아나를 만나러 토르데시야스로 갔다. 이는 살아있는 여왕인 후아나에게서 인정 받으려는 요식 행위로, 무뚝뚝한 어머니와 낡은 옷을 입은 여동생 카탈리나를 처음 만난 카를로스는 마음 아파했다고는 하나 이후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자식들 모두 후아나를 찾거나 구해주려 하지 않았고, 후아나도 자식들의 안부를 묻긴 했다지만 그들을 부르거나 꺼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카를 5세는 통치 초기에 스페인 국민들에게 반발을 사는 바람에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1520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를 위해 잠시 스페인을 비운 틈을 타 톨레도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후아나가 유폐되어 있는 장소, 토르데시야스를 점령하고 후아나에게 완전한 통치권을 넘긴다는 문서를 들이밀고 실권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후아나는 국정을 이끌 자신감도 없고 의심도 많아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9] 특히 후아나의 자식들은 막내 카탈리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고, 너무 어릴 때 두고 온 후 다시 보지 못했기에 정이 없어 그녀가 죽을 때까지 찾지도 않아 가정적으로도 매우 불행했다. 그나마 죽었을 때 카를 5세가 장례를 치러주었으니 다행.
3.5. 의문
그녀가 정말 미쳤는지 아니면 단순히 주변 사람들의 권력 싸움에 희생된 불쌍한 여인인지는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는 모두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신으로 오랜 기간 동안 근친혼이 반복되어 정신이 미약한 사람이 많았으니 유전적 요인도 빼놓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광적인 미침보다는 우울증 쪽에 가까운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현역 역사학자 중 후아나에 대해 가장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베타니 아람(Bethany Aram)의 저서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우울증으로 보이는 증상이 있었던 건 맞지만, 원래 '미쳤다' 운운할 만큼 정신병이 심했던 건 아닌데 오히려 정치적으로 기나긴 유폐 생활을 겪으면서 진짜 그만큼 정신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가설로 꼽히고 있다.실제로 후아나는 자신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후계자가 되자 저지대에서 스페인으로 귀국하여 충성 맹세를 받는 정치적 행동을 보여주었고, 1506년 카스티야 여왕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남편에게 전권을 일임하지 않고 함께 통치권을 행사했다. 또 남편인 펠리페가 죽은 후에도 약 1년 간 스스로 국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에 심한 기근과 역병이 돌아 여왕이 민심을 잃었고 이에 재빠르게 아버지가 개입하여 강제로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빼앗은데다, 2년 뒤에는 회담을 갖자며 후아나를 토르데시야스 궁전에 유인한 뒤 아예 유폐한 것인데 그녀가 미쳤다는 언급은 유폐된 지 수 년이 지난 이후부터 나온다. 이를 보면 후아나가 미쳤다는 것은 정황상 지극히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가까워 보인다. 관련 1차 사료를 읽어보면 상술한 코무네로 반란군이 권력을 '돌려드리는' 퍼포먼스를 할 때 이를 거부한 것도 '제대로 하려면' 공식 교회와 관료단을 대표하는 공증인과 주교급 성직자가 증인으로 참석해야 한다, 반란군에게 '그대들의 노고는 치하하지만 짐은 이럴 권한이 없다'고[10] 하는 등, 기본적인 판단력이 떨어지는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정치인'스럽게 대답을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1]
물론 후아나의 성격이 오늘날은 물론 당대의 기준에서 봐도 다소 거칠고 다혈질적이었던 건 사실이었던 것 같다. 부모인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 부부도 이러한 후아나의 문제많은 성격으로 인한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날 이사벨과 페란도는 후아나를 남편인 펠리페 1세와 별거시키려다 그야말로 온갖 욕을 다 봤는데, 혼자 자기 영지로 도망간 남편에게 가려는데 길을 막고 가둬놓자 폭발한 후아나는 밤새 광란을 벌였고 이사벨 1세에게 패드립까지 날렸다. 병중에 있는 상태에서 딸에게 쌍욕까지 먹은 이사벨이 '내가 저것의 상태를 아니까 참는 거지, 아니었으면 진작 끝장을 봤다'고 빡침을 담아 쓴 내용이 있을 정도.
이러한 기록들을 토대로 후아나에게 실제로 성격적 결함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심기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판단력 및 지적 능력과 통치력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12] 다만 그 멀쩡함이 남편에 대한 집착 앞에선 다 소용 없었던 듯. 남편 펠리페 1세와 아버지 페란도 2세는 후아나의 이런 행동을 강조 혹은 과장해 서로 대신 통치하겠다고 개싸움을 벌였고, 후아나는 후아나대로 정당한 자신의 왕위와 권리에서 자신을 빼놓고 남편과 아빠가 치고받는데 더 격노했다. 어쩌면 가족이란 사람들이 거친 성격을 빼면 멀쩡한 사람을 정신 이상으로 몰아가 진짜 정신병자로 만들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후아나 (Joanna of Castile) | <colbgcolor=#fff3e4,#331c00> 페란도 2세 (Ferdinand II of Aragon) | <colbgcolor=#ffffe4,#323300> 추안 2세 (John II of Aragon) | |
페란도 1세 (Ferdinand I of Aragon) | |||
알부르케르케의 엘레오노르 (Eleanor of Alburquerque) | |||
후아나 엔리케스 (Joanna Enriquez) | |||
파드리케 엔리케스 (Fadrique Enríquez) | |||
마리아나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Mariana Fernández de Córdoba) | |||
이사벨 1세 (Isabella I of Castile) | |||
후안 2세 (John II of Castile) | |||
엔리케 3세 (Henry III of Castile) | |||
랭커스터의 캐서린[13] (Catherine of Lancaster) | |||
포르투갈의 이자벨 (Isabella of Portugal) | |||
포르투갈의 장관 주앙[14] (Infante John, Constable of Portugal) | |||
바르셀루스의 이사벨 (Isabella of Barcelos)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왕비 엘레오노르 (Eleanor, Queen of France and Portugal) | 1498년 11월 15일 | 1558년 2월 25일 | 마누엘 1세 슬하 1녀[15] |
프랑수아 1세 | ||||
1남 | 카를 5세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 1500년 2월 24일 | 1558년 9월 21일 | 포르투갈의 이자벨[16] 슬하 1남 2녀[17] |
2녀 |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비 엘리사베트 (Isabella, Queen of Denmark and Norway) | 1501년 7월 18일 | 1526년 1월 19일 | 크리스티안 2세 슬하 1남 2녀 |
2남 |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Holy Roman Emperor) | 1503년 3월 10일 | 1564년 7월 25일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슬하 4남 11녀[18] |
3녀 | 헝가리의 왕비 마리어 (Mary, Queen of Hungary) | 1505년 9월 15일 | 1558년 10월 18일 | 러요시 2세 |
4녀 | 포르투갈의 왕비 카타리나 (Catherine, Queen of Portugal) | 1507년 1월 14일 | 1578년 2월 12일 | 주앙 3세 슬하 4남 1녀[19] |
[1]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2] 후아나는 후안의 여성형 이름으로 오빠인 후안이 있었지만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기라, 부모는 아들을 잃더라도 후안이라는 이름을 어떻게든 후세로 남기려고 다음에 낳은 딸 이름을 후아나로 지었다. 그리고 후아나가 진짜로 후계자가 되었다.[3] 대부분의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흑발과 흑안을 지닌 음울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카탈리나도 금발과 파란 눈을 지닌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4] 당시 유럽에서 여성은 토지에 대한 재산권을 제한받았다. 프랑크 왕국의 살리카법에서는 토지를 매개로 군역을 부과했는데, 여성은 군역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년전쟁의 발발 원인도 프랑스에서 필리프 5세가 형 루이 10세의 딸 잔이 어머니(루이 10세의 부인)가 간통죄로 처벌받았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 계승을 막고 자신이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살리카법을 확대 해석하여 승계를 막은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살리카법은 외손의 권리는 인정하고 있었고, 여성은 어머니된 입장에서 후견인이 되어 토지를 관리할 수 있었으며 그 프랑스의 카페 왕조 역시 외손의 권리를 이용해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결혼을 하더라도 지참금으로 가져 온 토지는 여성이 관리할 수 있었고 살리카법은 프랑크 왕국의 법이어서 유럽의 나머지 지역은 살리카법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중세를 통틀어 여성 영주들은 수두룩하게 많았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 후견인 없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말은 잘못된 견해이다. 다만, 자손이 없는 마르가레테가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겠다고 선언한 것은 요즘 시기의 "나 결혼 안 해"와는 다른 의미이다. 한마디로 친척 가문 중 어딘가에 왕위 계승권을 넘기겠다는 말.[5] 다만 이는 나중에 페란도 2세가 자신의 사후 후아나가 아라곤의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다.[6] 현대 기준으로는 '어디가.....?'라는 반응이 압도적인데, 아마 여자 후리기에 뛰어난 데다 아내가 너무 남편을 사랑해서인 것 같다고 이해해야 할 듯.[7] 남편 펠리페 1세가 죽은 지 5개월 뒤에 태어난 유복자였다.[8]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외조카로, 페란도 2세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았지만 이 아들은 1509년 5월 3일에 태어난 지 단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 이후 자녀는 없었다. 그런데 이 아들의 이름도 후안이었다.[9] 유폐당했다기보다는 후아나 본인이 탑에서 나가는 걸 거부했다는 말도 있다. 유폐 과정 자체는 그녀의 의사와 무관했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탑에서 나가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후아나에게 거부당한 코무네로 반란군은 결국 자신들 마음대로 그냥 후아나에게 실질 통치권을 '반환'했으며, 이를 집행하는 건 본인들이 만든 아빌라 임시 혁명정부라고 선언했다.[10] Archivo General de Simancas, Patronato Real, leg.3, 90[11] 오랫동안 명목상 권력만 가지고 실질적 권력은 주변의 남자들 때문에 박탈당했던 여왕이 왜 돌려드리겠다는 권력을 사양하냐 하면 당시 상황에서 코무네로 반란군들이 바치는 왕관은 그냥 독이 든 성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당장은 코무네로 반란군이 주도적인 상황이었지만 이런 유리한 전황이 계속 된다는 보장도 없고, 실제로 해당 에피소드 겨우 한 달 뒤에 토르데시야스 시도 뺏기고 동맹 도시 중 거의 반이 이탈하며 전세가 뒤집혔고, 반년 뒤 비야라르 회전에서 전투로 그대로 몰락했다. 만약에 코무네로 반란이 성공을 해서 목적대로 카를로스 1세의 권력을 대폭 제한하거나 심지어 극단적으론 박탈한다 하더라도 공동 군주인 후아나 입장에선 아버지, 남편, 아들 같은 왕실의 남자들이 아니라 그냥 혈연도 아닌 남이며 신분도 더 낮은 카스티야 거대 도시 자치 정부들에게 휘둘리는 다운그레이드 밖에 안되는거니 코뮤네로들의 복위 추대는 당연히 전혀 본인에게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었다.[12] 이러한 추측을 반영한 듯 후아나 1세의 장남 카를 5세를 다룬 드라마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에서 후아나는 남편 펠리페 1세의 죽음 이후 정신을 놔버려 토르데시야스에 유폐된 건 똑같지만 장남 카를과 차남 페르난도가 초반에 왕위계승 관련으로 분란을 일으킬 것 같자, 직접 편지를 보내 카를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라고 페르난도를 설득하는가 하면 코무네로 반란자들이 카를을 왕위에서 내쫓고 자신을 왕위에 내세운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라고 할 때도 일부러 미친 척(?)을 해서 그들의 의도에 휘말리지 않고 결정적일 때 여왕으로서 주권을 행사한다.[13]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그의 두번째 부인 카스티야의 콘스탄사의 외동딸.[14] 주앙 1세의 아들이다.[15] 비제우 여공작 마리아[16] 마누엘 1세의 장녀이자 페란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외손녀이다.[17] 펠리페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등[18] 막시밀리안 2세, 토스카나 대공비 조반나 등[19] 아스투리아스 공비 마리아 마누엘라, 포르투갈 공 주앙 마누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