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9:34:37

구기에르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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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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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2106><colcolor=#FFF> 시칠리아 왕국 아우타빌라 왕조 제6대 국왕
구기에르무 3세
Gugghiermu III
왕호 구기에르무 3세
(Gugghiermu III)
출생 1186년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사망 1198년 경 (향년 12세)
신성 로마 제국 슈바벤 공국 호에넴스
재위 시칠리아 왕국의 왕
1194년 2월 ~ 1194년 10월
아버지 탕크레디
어머니 아체라의 시빌라
형제 루제루 3세, 엘비라, 쿠스탄차, 메다니아, 발드라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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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 제6대 국왕. 아버지 탕크레디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하인리히 6세에게 폐위되었다.

2. 생애

1186년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레체 백작 탕크레디와 아케라의 시빌라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루제루 3세가 있었고, 누이로 엘비라, 쿠스탄차, 메다이니아, 발드라다가 있었다. 형 루지에로 3세가 아버지와 함께 공동 왕이 되었다가 1193년 12월 24일에 사망하고, 아버지 탕크레디마저 1194년 2월 20일에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 시빌라가 섭정을 맡았다.

1190년 구기에르무 2세 사후부터 시칠리아 왕위를 주장했다가 탕크레디에게 잇따라 패배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슈바벤 공작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대를 끌어모아 남부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제국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캄파니아를 석권한 뒤 나폴리를 포위했다. 지난날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을 때는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제노바와 피사 연합 함대가 바다를 완전히 봉쇄해버려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낙담한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나폴리가 제국군에 백기를 들자, 탕크레디를 지원했던 시칠리아 왕국의 남부 이탈리아 도시 대부분이 하인리히 6세에게 굴복했다. 살레르노는 지난날 하인리히 6세의 황후 쿠스탄차를 탕크레디에게 넘겨버린 것에 대한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해 저항했지만, 이내 함락되어 철저히 약탈당했다. 2개월간의 공세 끝에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한 하인리히 6세는 1194년 10월에 제노바, 피사 함대가 공략한 메시나에 상륙했다.

제국군이 시칠리아에 발을 들이자, 카타니아시라쿠사는 곧바로 하인리히 6세에게 귀순했다. 시빌라 왕비는 구기에르무 3세와 자매들을 칼타벨로타로 보내고, 자신은 브린디시의 마르게리타 제독과 함께 팔레르모를 지켰다. 그러나 팔레르모 주민들은 제국군과 저항할 엄두를 못 내고 성문을 열었다. 시빌라는 칼타벨로타로 도주했고, 마르가리트는 팔레르모를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귀순했다. 하인리히 6세는 1194년 11월 20일 팔레르모에 입성했다.

이제 승산이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시빌라는 구기에르무 3세를 대신해 하인리히 6세를 찾아가 왕권을 포기할 테니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디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소유했던 레체 지방을 돌려주겠으며, 타란토 공국을 추가로 이끌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194년 12월 25일, 구기에르무 3세는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게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하인리히 6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194년 12월 29일, 하인리히 6세는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고 선포하고 수많은 시칠리아 고위 인사들을 체포해 독일로 끌고 갔다. 시빌라와 그녀의 딸들, 시빌라의 형제 아케라 백작 리샤르,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니콜라 데 아젤로 등도 이때 끌려갔다. 여기에 수많은 구기에르무 3세 지지자들이 실명형에 처해진 뒤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 구기에르무 3세가 어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눈이 멀어 거세된 뒤 곧 죽었다고 한다.[1]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스와비아 알트-엠스의 어느 수도원에 보내진 후 그곳에서 수년간 살다가 1198년경에 죽었다고 한다. 그가 탕크레디 팔라마르라는 이름으로 시칠리아에 숨어 지내다가 메시나에서 체포된 뒤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의 명령으로 1232년에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불분명하다.


[1] 시칠리아의 구기에르무 3세의 거세라는 그림이 있는데 누가 봐도 수염이 있는 성인 남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