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01:48:55

구기에르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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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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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2106><colcolor=#FFF> 시칠리아 왕국 아우타빌라 왕조 제2대 국왕
구기에르무 1세
Gugghiermu I
파일:굴리에모 1세.jpg
왕호 구기에르무 1세
(Gugghiermu I)
출생 1120년 또는 1121년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사망 1166년 5월 7일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재위 시칠리아 왕국의 왕
1154년 2월 26일 ~ 1166년 5월 7일
배우자 나바라의 마르가리타 (1149년 결혼)
자녀 루제루 4세, 로베르토, 구기에르무 2세, 엔리코
아버지 루제루 2세
어머니 카스티야의 엘비라
형제 루제루 3세, 탕크레디, 알폰소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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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 2대 국왕. 동로마 제국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종교간 갈등을 조정하는 데 실패해 내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 생애

1120년 또는 1121년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왕국 초대 국왕 루지에로 2세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의 딸 엘비라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 루지에로, 탕크레드, 알폰소, 엔리코가 있었는데, 이중 엔리코는 요절했고 루지에로는 아풀리아 공작, 탕크레드는 바리 공작, 알폰소는 카푸아 공작을 맡았다. 형들이 어엿한 공국을 맡아 통치를 행사한 것과는 달리, 그는 아버지로부터 별다른 봉토와 칭호를 받지 못하고 팔레르모 궁정에서 지냈다.

루지에로 2세는 루지에로, 탕크레드, 알폰소 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세우면 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굴리에모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식과 통치술을 익히도록 힘쓰지 않았다. 그러나 세 아들 루지에로, 탕크레드, 알폰소 모두 아버지보다 일찍 죽어버리면서, 굴리에모가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1154년 2월 26일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나라를 잘 다스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그는 곧 문제를 드러냈다.

동시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하렘을 세워 수많은 미녀들을 모집한 뒤 그곳에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고 한다. 또한 정무를 돌보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아버지 치세 말기에 행정을 담당했던 대신들에게 떠넘겼다. 이중에서 바리의 마이오(Maio)가 실권을 행사했다. 마리오는 상인의 아들이자 바리의 순회 판사 출신으로, 왕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왕국의 통치를 전반적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 태생의 마이오는 노르만 귀족들과 그리스인들을 국정에서 배제하고 이탈리아인과 무슬림을 중용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들은 굴리에모의 사촌인 로베르토 데 로리텔로 백작을 중심으로 뭉쳤고, 로베르토는 동로마 제국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난날 루지에로 2세의 침략으로 코르푸를 빼앗기고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당한 것에 복수하기 위해 디라히온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원정을 준비하던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하고 새 왕이 즉위하여 왕국이 어수선한 지금이 원정을 단행할 호기라고 여겼다. 황제는 우선 주변 국가 및 현지 주민들을 포섭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선왕 콘라트 3세와 남부 이탈리아를 함께 협공하자는 협약을 맺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남이탈리아 현지의 귀족 및 시민들과 접촉해 막대한 금을 뿌려 충성을 맹세받았고, 교황청에도 접근해 "야만스러운 노르만인보다는 로마인을 곁에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라며 협조를 잘해준다면 차후에 교황령을 지킬 병력 모집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많은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포섭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지자, 마누일 1세는 1155년 원정을 단행했다. 마누일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두카스는 서방 전선에서 차출한 병력을 이끌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보내준 수송 함대에 탑승해 바리로 이동했다. 그해 8월 바리에 도착한 동로마군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노르만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현지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바리에 순조롭게 입성했다. 이때 주민들은 앞장서서 도시 중앙의 시칠리아 성채를 완전히 파괴했다. 인근 도시인 트라니와 지오비나초, 타란토, 브린디시도 곧 귀순했다. 오직 안드리아의 리카르도 백작 만이 동로마군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끝내 동로마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전사했고 안드리아 역시 함락되었다. 아베르사 백국의 백작 아스클레티노 드렝고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은 캄파니아에 주둔하다가 동로마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해 9월 아풀리아로 진군했지만 적의 기세에 밀려 바를레타에서 봉쇄되었다.

1155년 9월,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동로마 제국의 편을 들어 캄파니아로 교황군을 파견했다. 일전에 루지에로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패한 뒤 교황령으로 망명했던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가 교황군과 함께 돌아와서 카푸아를 탈환한 뒤 교황을 대군주로 받들었으며, 캄파니아의 다른 지역들도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55년 말, 시칠리아 왕국의 수중에 있던 남부 이탈리아 중 아풀리아는 동로마 제국, 캄파니아는 교황에게 넘어갔다. 오직 칼라브리아만이 시칠리아 왕국을 여전히 지지했다. 굴리에모는 2,000명의 노르만 기사를 포함한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막게 했으나 격퇴되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이 80여 년만에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하는 듯했으나, 상황은 점차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먼저 기대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실 프리드리히 1세는 북이탈리아를 통제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또다른 제국이 남이탈리아에 진출한다면 북이탈리아를 통제하기 힘들어진다고 여기고 병력을 보내주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원정군 총사령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현지 귀족들에게 고압적으로 일관해 반감을 샀다. 이에 로리텔로 백작 로베르트 3세는 그를 경질하지 않는다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경고했고, 마누일 1세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소환했다.

그러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고압적이기는 했지만 군략은 뛰어난 장군이었던 반면, 요안니스 두카스는 범용한 인물일 뿐이었다. 굴리엘모는 이 때를 틈타 12,000명의 보병과 5천 기사대를 소집한 뒤, 아스클레티노 드렝고를 메시나로 소환한 후 적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죄를 물어 지하 감옥에 투옥해 그 곳에서 옥사하게 만들고 전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1156년 4월 말에 칼라브리아로 건너간 후 아풀리아로 진격해 동로마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후 시칠리아군이 육상과 해상에서 압박을 가하면서 동로마군의 급료 마련이 어려워졌다. 동로마 용병들은 급료 지급이 미뤄지자 "당장 금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이탈해버렸다. 이로 인해 동로마군의 전력이 크게 줄어들자, 현지 귀족과 시민들은 실망해 동로마군에 등을 돌렸다.

요안니스 두카스는 브린디시에 군대를 끌어모아 항전했고, 마누일 1세 역시 1158년 알렉시오스 악수흐안코나로 보내 제국군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전세는 바뀌지 않았고, 동로마군은 속절없이 밀린 끝에 브린디시에서 최종적으로 쫓겨났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로 다시는 남부 이탈리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굴리에모는 브린디시를 탈환한 뒤 동로마군을 환대했던 바리로 진격했다. 바리 주민들은 왕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굴리에모는 폐허가 된 시칠리아 성채를 가리키며 거부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이틀을 줄 테니 재산을 챙겨서 나가라고 명했다. 이윽고 사흘째 되던 날이 바리를 초토화하고 남은 재물을 모조리 빼앗았다. 오직 성 베드로 대성당과 니콜라스 수도원 등 몇몇 예배당만 무사했다.

굴리에모는 뒤이어 캄파니아로 진격했다. 로베르토 데 로리텔로는 측근들과 함께 교황령으로 달아났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귀족들은 뱀이 득실거리는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그들의 아내와 딸은 하렘으로 보내지거나 매춘을 강요당했다.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는 생포된 뒤 사슬에 묶여 팔레르모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진 뒤 지하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복역했다.

하드리아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령까지 쳐들어 올까 두려워 평화 협상을 맺자고 간청했고, 굴리에모는 교황을 적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받아들였다. 굴리에모는 교황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남부 이탈리아 본토의 교회 문제에 대한 교황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 대신, 교황은 굴리에모를 시칠리아의 왕, 아풀리아 공작, 카푸아 공작으로 인정하고, 시칠리아 성직자들의 청원을 접수할 권리를 포기했다. 여기에 시칠리아 왕이 시칠리아 주교를 선임하고 시칠리아 성직자가 로마로 순례하는 것을 허락하거나 거부할 권한을 가지는 것도 인정했다. 이후 시칠리아 왕들은 시칠리아 교회에 대한 거의 무제한적인 통제를 행사했다.

비록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긴 했지만, 굴리에모는 동로마 제국이 작심하고 대군을 동원해 또다시 쳐들어오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시칠리아는 아드리아 해 건너편 일리리아 해안을 공격하지 않으며 안코나가 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 성과는 원정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1]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격퇴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지만, 그 사이에 루지에로 2세가 공략했던 북아프리카의 해안 도시들이 시칠리아로부터 독립했다. 1156년 스팍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가베스가 뒤를 이었으며, 1159년에는 트리폴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그곳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마흐디아 요새로 달아났다. 무와히드 왕조는 이 때를 틈타 튀니지로 진격해 시칠리아령이었던 해안 도시들을 모조리 석권한 뒤 1159년 6월 20일부터 마흐디야 요새를 포위했다. 시칠리아 함대가 출격해 해상에서 봉쇄를 풀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이후 지원이 없자 마흐디야 수비대는 1160년 1월 11일 항복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은 북아프리카 내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1160년 11월 10일, 무슬림과 이탈리아 토착민들을 우대하면서 노르만 귀족들을 억압하는 마이오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마테오 보넬루스를 주축으로 삼아 팔레르모에서 반기를 들어 마이오를 살해했다. 살인자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팔레르모에서 카카모(Caccamo) 성으로 도주했다. 굴리에모는 노르만 귀족과 팔레르모 시민들이 보넬루스를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걸 보고, 그를 처벌했다간 자신마저 무사치 못할 거라 우려해 화해하기로 했다. 본넬루스는 팔레르모로 돌아간 뒤 왕의 영접을 받고 궁정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음모자들은 굴리에모의 잔인한 성격상 언제라도 자신들을 해칠 거라 여기고 그 전에 왕을 제거하기로 했다. 1161년 3월 9일, 그들은 궁전 바로 옆에 있는 감옥 경비원에게 뇌물을 주고 1155년 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이때까지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석방했다. 루지에로 2세의 사생아 시모네, 굴리에모의 조카 레체의 탕크레드를 포함한 죄수들은 석방되자마자 궁전을 장악하고 추종자들을 들여보냈다. 굴리에모와 아내, 아이들은 구금되었고, 궁전 경비원 및 왕과 가까운 환관들은 살해되었다. 이때 팔레르모 궁전은 약탈되었고, 알 이드리시의 은색 평면구를 포함한 귀중한 예술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여기에 정변 소식을 접한 팔레르모 시민들이 마이오에게 중용받았던 무슬림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음모자들은 굴리에모를 퇴위시키고 그의 9살된 아들 루지에로를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살레르노의 로무알드 대주교와 시라쿠사의 리카르도 주교를 포함한 고위 성직자들이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고, 팔레르모 주민들은 성직자들의 선동에 따라 궁전으로 진격했다. 이어진 시가전에서 어린 루지에로가 눈 먼 화살에 맞아 죽자, 공모자들은 굴리에모를 석방하고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굴리에모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발코니로 나가서 주민들에게 반란군이 도망칠 때 해를 입히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후 공모자들은 카카모 요새로 도주했고, 굴리에모는 자유를 되찾았다.

굴리에모는 처음에는 공모자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아들 루지에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피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했다. 메시나에서 파견된 육군과 해군이 카카모 요새를 포위하자, 반란군은 항복하고 대부분 추방되었다. 보넬루스는 팔레르모 궁전으로 가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곧 체포되었고, 지지자들이 봉기를 시도했으나 곧바로 진압되었다. 굴리에모는 보넬루스를 포함한 주모자들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고 지하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다. 여기에 보넬루스의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피아짜와 부테라가 왕실군에 의해 함락되어 파괴되었다. 1162년 모든 반역자가 체포되어 교수형이나 익사형 또는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고, 반항적인 도시와 지역에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반역을 저지른 자들의 편에 섰던 아풀리아의 수도 살레르노 역시 굴리에모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1162년, 굴리에모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세례받은 아랍인 내시 마틴을 시칠리아 총독으로 남겨뒀다. 마틴은 지난날 무슬림을 학살한 시민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무슬림인 친구들과 함께 시칠리아에 사는 아랍인들을 집결시킨 뒤 팔레르모의 기독교도 중 아랍인 살해에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1162년 여름 굴리에모가 팔레르모로 돌아온 후 더 이상 기독교도들을 학살하지 못하게 막았지만, 이후에도 마틴에게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하렘에서 향락에 빠져 지냈다.

굴리에모는 말년에 팔레르모 인근에 키사 궁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166년 5월 7일 이질에 걸려 팔레르모 궁전으로 이송된 후 사망했다. 사후 팔레르모의 팔라티노 예배당에 안장되었다가 몬레알레 대성당이 완공된 후 그곳으로 옮겨져 호화로운 반암 석관에 안치되었다. 이후 아들 굴리에모 2세가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1]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216만 전의 금화를 이 원정에서 소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