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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2b37><colcolor=#fff> 양시칠리아 왕국 초대 국왕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o I | |
본명 | 페르디난도 안토니오 파스쿠알레 조반니 네포무체노 세라피노 젠나로 베네데토 디 보르보네 (Ferdinando Antonio Pasquale Giovanni Nepomuceno Serafino Gennaro Benedetto di Borbone) |
출생 | 1751년 1월 12일 |
나폴리 왕국 나폴리 | |
사망 | 1825년 1월 4일 (향년 73세) |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 |
장례식 | 산타 키아라 성당 |
재위기간 | 나폴리 왕국 국왕 |
1759년 10월 6일 ~ 1806년 3월 30일 | |
나폴리 왕국 국왕(복위) | |
1815년 5월 22일 ~ 1816년 12월 12일 | |
시칠리아 왕국 국왕 | |
1759년 10월 6일 ~ 1816년 12월 12일 | |
양시칠리아 왕국 국왕 | |
1816년 12월 12일 ~ 1825년 1월 4일 | |
부모 | 아버지 카를로스 3세 어머니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1768년 결혼 / 1814년 사망) |
루시아 밀리아치노 (1814년 결혼) | |
자녀 | 마리아 테레사, 루이사 마리아, 카를로, 마리아 안나, 프란체스코 1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말리에, 젠나로, 주세페,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아 클로틸다, 마리아 엔리에타, 레오폴도, 알베르토, 마리아 이사벨라 |
형제 |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루이사, 펠리페, 카를로스 4세, 가브리엘, 안토니오 파스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
종교 | 로마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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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자[1], 두 나라가 통합되어 성립된 양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2. 생애
1751년 나폴리에서 당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재위 중이던 카를로와 작센의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왕비의 3남으로 태어났다. 3남으로 태어난데다 위에 형이 둘이 있어서 왕위 계승 가능성은 별로 없었고 부모는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다소 느슨하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759년 스페인 국왕이었던 백부 페르난도 6세가 자식 없이 승하하면서 부왕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위를 양위받아 8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원래 큰형 필리포가 후계자였으나 정신장애로 왕위 계승이 불가능해 계승에서 배제되었고[2], 작은형 카를로스는 아버지가 계승한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위는 3남인 페르디난도가 양위받았다.[3] 즉위 당시 9살 꼬꼬마였기 때문에 부왕 카를로스 3세는 자신이 주관하고 총리대신이었던 베르나르도 타누치(Bernardo Tanucci)가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섭정 위원회를 마련하여 페르디난도가 16세가 되는 1767년까지 대리로 통치했다. 그러나 부모와 떨어져 사는 동안 타누치는 자신이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기 위해 페르디난도의 교육을 방치했고 그 결과 페르디난도는 사냥을 좋아하는 잉여인간으로 성장하고 말았다.1768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10녀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혼인하였다. 형과 마찬가지로 정사에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프랑스계 영국인 존 액튼과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에게 대부분의 국정을 위임하고 본인은 사냥이나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인생을 살았다.
프랑스 혁명에는 반감을 가졌다. 1796년 프랑스 제1공화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나, 1798년 프랑스가 로마를 점령하자 이를 경계하여 로마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곧 프랑스군의 전면 공격으로 나폴리 왕국이 점령당하자 시칠리아로 피신하였고, 나폴리에는 파르테노페아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프랑스군이 북이탈리아로 철수하자 루포 추기경이 이끄는 반프랑스 반동 대중운동 산페디스타를 앞세워 파르테노페아 공화국을 공격해 1800년 나폴리를 탈환하였으나, 5년 후 제 3차 대불동맹에 가담하였다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곧 나폴리 원정에 나서자 다시 시칠리아로 피난하였다. 시칠리아 피난 기간 중에는 차남 프란체스코에게 섭정을 맡기고 영국의 권유에 따라 의회를 설립, 입헌군주정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1816년 12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정식으로 통합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을 수립하고 통합 국왕 페르디난도 1세가 되었다.
1820년에는 굴리엘모 페페(Guglielmo Pepe) 장군과 카르보나리의 주도로 헌정 실시를 요구하는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계기로 스페인의 카디스 헌법을 모델로 한 헌법의 도입을 승인하였으나, 이내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1825년 승하하였고 나폴리의 산타 키아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왕위는 차남 프란체스코 1세가 계승했다.[4]
3. 가족관계
3.1. 자녀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와의 사이에서 10남 6녀를 두었다. 참고로 마리아 카롤리나는 나폴리에 매장된 남편과 달리, 친정인 오스트리아의 카푸친 교회에 따로 안장되어 있다.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Holy Roman Empress) | 1772년 6월 6일 | 1807년 4월 13일 | 프란츠 1세[5] 슬하 4남 8녀[6] |
2녀 | 토스카나의 대공비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Grand Duchess of Tuscany) | 1773년 7월 27일 | 1802년 9월 19일 | 페르디난도 3세[7] 슬하 3남 3녀[8] |
1남 |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티토 왕자 (Prince Carlo Tito, Duke of Calabria) | 1775년 1월 4일 | 1778년 12월 17일 | |
3녀 | 마리아 안나 공주 (Princess Maria Anna) | 1775년 11월 23일 | 1780년 2월 22일 | |
2남 | 프란체스코 1세 (Francesco I) | 1777년 8월 19일 | 1830년 11월 8일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클레멘티나[9] 슬하 1남 1녀 |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슬하 6남 6녀[10] | ||||
4녀 |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ristina Teresa, Queen of Sardinia) | 1779년 1월 17일 | 1849년 3월 11일 | 카를로 펠리체 |
3남 | 젠나로 카를로 왕자 (Prince Gennaro Carlo) | 1780년 4월 12일 | 1789년 1월 1일 | |
4남 | 주세페 카를로 왕자 (Prince Giuseppe Carlo) | 1781년 6월 18일 | 1783년 2월 19일 | |
5녀 |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아멜리 (Maria Amalia, Queen of the French) | 1782년 4월 26일 | 1866년 3월 24일 | 루이필리프 1세 슬하 6남 4녀[11] |
6녀 | 아스투리아스 공비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Princess of Asturias) | 1784년 12월 14일 | 1806년 5월 21일 | 페르난도 7세[12] |
7녀 | 마리아 클로틸다 공주 (Princess Maria Clotilde) | 1786년 2월 18일 | 1792년 9월 10일 | |
8녀 | 마리아 엔리케타 공주 (Princess Maria Enrichetta) | 1787년 7월 31일 | 1792년 9월 20일 | |
5남 | 살레르노 공 레오폴도 조반니 (Leopoldo Giovanni, Prince of Salerno) | 1790년 7월 2일 | 1851년 3월 10일 | 오스트리아의 클레멘티나 여대공[13] 슬하 1녀 |
6남 | 알베르토 로도비코 왕자 (Prince Alberto Lodovico) | 1792년 5월 2일 | 1798년 12월 25일 | |
9녀 | 마리아 이사벨라 공주 (Princess Maria Isabella) | 1793년 12월 2일 | 1801년 4월 23일 |
4. 기타
- 카를로스 3세의 자녀들 중 마지막 생존자이다.
[1] 나폴리 국왕으로서의 재위명은 페르디난도 4세, 시칠리아 국왕으로서의 재위명은 페르디난도 3세이다.[2] 결국 자손 없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생의 가계로 왕위를 이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3] 페르디난도가 나폴리-시칠리아 왕위를 물려받은 이유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1738년 빈 조약으로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국왕이 되면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을 동군연합으로 통치하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4] 장남 카를로 왕세자는 3세 때 요절했다.[5] 외삼촌 레오폴트 2세와 고모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장남으로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며 후술하는 페르디난도 3세와 마리아 클레멘티나의 형제다.[6] 프랑스의 황후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 브라질의 황후이자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레오폴디네, 프란츠 카를 대공 등[7] 외삼촌 레오폴트 2세와 고모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차남으로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다.[8] 레오폴도 2세,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 등[9] 외삼촌 레오폴트 2세와 고모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3녀로 외사촌겸 고종사촌이며 위에 나온 프란츠 1세와 페르디난도 3세의 여동생이다.[10]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페르디난도 2세, 브라질의 황후 테레사 크리스티나 등[11]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 벨기에의 왕비 루이즈,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비 클레멘티네 등[12] 그녀가 죽고 2년 뒤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로 즉위했다.[13] 큰누나 마리아 테레사와 프란츠 2세의 6녀로 외조카다.[14] 프란츠 2세와 페르디난도 3세는 누나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로 조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