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C9C7><colcolor=black> 오스트리아의 대공 프란츠 카를 Erzherzog Franz Karl von Österreich | |
이름 | 프란츠 카를 요제프 (Franz Karl Josef) |
출생 | 1802년 12월 7일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사망 | 1878년 3월 8일 (향년 75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
배우자 |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1824년 결혼 / 1872년 사망) |
자녀 |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아나, 루트비히 빅토어 |
아버지 | 프란츠 2세 |
어머니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
형제 |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레오폴디네, 클레멘티나, 요제프 프란츠 레오폴트, 마리아 카롤리네, 마리아 아나 |
종교 | 가톨릭 |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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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공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프란츠 2세(1세)의 삼남이다. 페르디난트 1세의 동생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멕시코 제국 막시밀리아노 1세, 중시조 카를 루트비히의 아버지이다.2. 생애
1802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2세와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의 4남 8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5살이던 1807년 4월, 친모 마리아 테레사는 여동생 아말리아 테레지아를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죽고, 그 해 6월에 둘째형 요제프 프란츠 레오폴트 대공도 8살에 사망하였다. 그 이후 아버지 프란츠 2세(1세)는 두 번 재혼했다.
1824년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1]와 결혼하여 순서대로 프란츠 요제프, 막시밀리안, 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아나, 루트비히 빅토어를 비롯한 4남 1녀를 낳았다.
부황 프란츠 2세(1세)의 사후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형 페르디난트 1세는 정신장애가 너무 심각해서 일상생활은 물론, 생식 활동이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녀도 없었던데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거기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해서 정치권에서도 퇴위 요구가 빗발쳤다. 정작 페르디난트 바로 다음으로 계승 서열이 높은 프란츠 카를 대공도 생식능력에만 문제가 없을 뿐 형과 마찬가지로 정신장애가 심각했기 때문에, 아내 조피 대공비는 남편 대신 지능과 판단력이 정상인 장남 프란츠 요제프에게 제위를 넘기라고 해서 결국 오스트리아의 제위는 프란츠 카를을 건너뛰어 그의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차남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가 되었지만 얼마 못가 총살당하면서 참척의 고통을 보았다.
이후 1878년 사망했다. 부인인 조피 대공비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당시 여걸로 활발히 활동했고 며느리 엘리자베트 황후에게 시짜짓을 제대로 하여, 후대에도 미친 존재감을 보여줬지만 프란츠 카를 대공은 정신상태가 너무 심각하다보니니 워낙 조용히 살아서 그렇지 의외로 아내인 조피보다 6년 더 오래 살았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프란츠 카를 (Franz Karl) |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2세 (Francis II) | <colbgcolor=#ffffe4,#323300>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 |
프란츠 1세 (Francis I) |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of Spain) | |||
카를로스 3세 (Charles III)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A] |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 |||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 I) | |||
카를로스 3세 (Charles III)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A] (Maria Amalia of Saxony)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Carolina of Austria) | |||
프란츠 1세 (Francis I) |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 1830년 8월 18일 | 1916년 11월 21일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슬하 1남 3녀[4] |
2남 | 막시밀리아노 1세 (Maximiliano I) | 1832년 7월 6일 | 1867년 6월 19일 | 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 |
3남 | 카를 루트비히 대공 (Archduke Karl Ludwig) | 1833년 7월 30일 | 1896년 5월 19일 | 작센의 마르가레타 공주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 슬하 3남 1녀[5] | ||||
포르투갈의 마리아 테레자 공주 슬하 2녀 | ||||
1녀 | 마리아 아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a Anna) | 1835년 10월 27일 | 1840년 2월 5일 | |
4남 | 루트비히 빅토어 대공 (Archduke Ludwig Viktor) | 1842년 5월 15일 | 1919년 1월 18일 |
4. 여담
- 자신은 황제로 즉위하지 않고 평생을 대공으로 살다 갔지만 아들부터[6] 가족들이 죄다 황제[7]이거나 황후[8]인 인물이다. 프란츠 카를은 황제 프란츠 2세의 삼남으로서 어릴 때부터 성인이 돼서도 별 존재감이 없었다.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자기 대신 황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영향력이나 인지도면에서는 아내 조피 대공비, 장남 프란츠 요제프, 차남 막시밀리안, 맏며느리 엘리자베트 황후, 장손 루돌프 황태자에게까지 밀릴 정도. 이로 인해 말년에 형 페르디난트 1세와 아내 조피가 사망한 이후에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이였지만 별다른 관심이 없을 정도로 삼남 카를 루트비히와 사남 루트비히 빅토어와 더불어 당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존재감이 가장 없는 사람이었다(...).
- 자신의 삼남 카를 루트비히와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삼남이며 방계 황족으로 자유롭게 살았고 형들이 후계자가 없어서 다음 제위 계승자가 되었으나 결국 자기 대신 아들이나 손자가 황제가 되었으며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구성원들이[9] 모두 그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비슷하다. 때문에 프란츠 카를과 카를 루트비히 부자는 현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시조가 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란츠 카를은 살아생전에 두 아들들이 모두 황제로 즉위하는 걸 봤고 한번 결혼해서 사별할 때까지 마누라한테 갈굼받으면서 아내 조피 대공비와 해로했다. 그러나 카를 루트비히는 총 3번 결혼했으며 이중 첫번째 아내 작센의 마르가레타 공주와 두번째 아내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 모두 먼저 떠나보냈고[10] 자신의 손자는 물론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5녀.[A] 아우구스트 3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손녀이다.[A] [4] 바이에른의 왕자비 기젤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잘파토어 대공비 마리 발레리 등.[5]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인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인 차남 막시밀리안(멕시코식으로 막시밀리아노 1세).[7] 매형 페드루 1세(브라질의 황제로 다섯째 누나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남편)와 외조카 나폴레옹 2세(첫째누나 마리아 루도비카의 아들로 프랑스의 추존 황제)도 황제거나 황제로 추존되었다.[8] 프랑스 제1제국의 황후였던 첫째 누나 마리아 루도비카, 브라질의 황후였던 다섯째 누나 마리아 레오폴디네.[9] 방계인 토스카나 대공가와 헝가리 궁정백 가문은 더 윗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이들의 남계 후손이 아니다.[10] 이후 카를 루트비히는 자식뻘이었던 세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테레자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고 그녀보다 먼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