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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8852c, #ffcc21 20%, #ffcc21 80%, #c8852c);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cc21> 프란츠 1세 | 페르디난트 1세 | 프란츠 요제프 1세 | 카를 1세 |
1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2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루도비카3 바이에른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공주 | 사보이아의 마리아 안나 공주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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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프란츠 2세의 황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Principessa Maria Teresa di Napoli e di Sicil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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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 이탈리아어 | 마리아 테레사 카롤리나 주세피나 디 보르보네 (Maria Teresa Carolina Giuseppina di Borbone) | |||
독일어 | 마리아 테레지아 카롤리네 요제피네 (Maria Theresia Caroline Josephine) | ||||
출생 | 1772년 6월 6일 | ||||
나폴리 왕국 나폴리 왕궁 | |||||
사망 | 1807년 4월 13일 (향년 34세) | ||||
오스트리아 제국 빈 호프부르크 | |||||
재위 | 신성 로마 제국 황후 | ||||
1792년 7월 5일 ~ 1806년 8월 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 프란츠 2세 (1790년 결혼) | |||
자녀 |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롤리네, 카롤리네 루도비카, 마리아 레오폴디네, 클레멘티나, 요제프 프란츠, 마리아 카롤리네, 프란츠 카를, 마리아 안나, 요한 네포무크, 아말리 테레지아 | ||||
아버지 | 페르디난도 1세 |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 ||||
형제 | 루이사 마리아, 카를로, 마리아 안나, 프란체스코 1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젠나로, 주세페,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아 클로틸다, 마리아 엔리케타, 레오폴도, 알베르토, 마리아 이사벨라 | ||||
종교 | 가톨릭 | }}}}}}}}} |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후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후.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이며 페르디난도 1세 국왕과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 슬하의 7남 11녀 중 맏이 겸 장녀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외손녀.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인 프란츠 2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정후(正后).[1]프랑스 제1제국의 계후 마리 루이즈, 오스트리아 제국 제2대 황제 페르디난트 1세, 브라질 제국의 황후이자 포르투갈 왕국의 왕비 마리아 레오폴디네, 프란츠 카를 대공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2세의 외할머니[2]이자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의 친할머니. 조피 대공비의 시어머니이자 엘리자베트 황후의 시할머니이다. 루돌프 황태자와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토 프란츠 대공의 친증조모이자 오스트리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 카를 1세의 친고조모. 오스트리아 역사상 마지막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현조모.
프란츠 2세와의 사이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부인으로 12명의 자식들(4남 8녀)을 두었다. 16~18명의 자녀들을 낳은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3]와 외할머니이자 시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4], 시어머니 마리아 루도비카 황후[5]에 비하면 수가 적지만 이쪽 역시 만만치 많은 다산 기록을 자랑하는 인물. 첫째 부인 엘리자베트 대공비의 외동딸 루이즈 엘리자베트 여대공은 생후 1년 4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고 세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루도비카와 네 번째 부인 바이에른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공주[6]도 자녀를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반면 마리아 테레사는 12명의 자녀를 낳아 그 중 2남 5녀는 커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위와 직계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프란츠 2세의 황후들 중 가장 입지가 높은 진정한 정실부인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실질적 초대 국모라 할 수 있다. 후임인 마리아 루도비카와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맏며느리 사보이아의 마리아 안나, 손자며느리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과 고손며느리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단 6명뿐인 황후이다.[7]
2. 작위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1872년 6월 6일 ~ 1790년 9월 15일)
-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대공비 전하 Her Imperial Highness Archduchess Francis of Austria (1790년 9월 15일 ~ 1792년 3월 1일)
- 신성로마제국 황후, 독일 왕비,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비 폐하 Her Imperial Majesty The Holy Roman Empress, German Queen, Queen of Hungary and Bohemia (1792년 3월 1일 ~ 1804년 8월 11일)
- 신성로마제국 황후, 오스트리아의 황후, 독일 왕비,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비 폐하 Her Imperial an Royal Apostolic Majesty The Holy Roman Empress, Empress of Austria, German Queen, Queen o Hungary and Bohemia (1804년 8월 11일 ~ 1806년 8월 6일)
- 오스트리아의 황후,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비 폐하 Her Imperial and Royal Apostolic Majesty The Empress of Austria, Queen of Hungary and Bohemia (1806년 8월 6일 ~ 1807년 4월 13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와 마리아 카롤리나의 7남 1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외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이탈리아어 식으로 따서 지어졌다. 그녀는 결혼할 때까지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가 좋아했던 딸이었다고 한다.1790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대공은 첫번째 아내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가 아이를 낳던 중 사망하자 나폴리의 공주와 결혼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신붓감으로는 마리아 테레사와 그녀의 여동생 루이사가 모두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마리아 테레사가 낙점되었다. 루이사 공주는 프란츠의 남동생이기도 한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와 결혼하였다.
3.2. 신성 로마의 마지막 황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후)
1790년 9월 15일 마리아 테레사는 외사촌이자 고종사촌인 프란츠 2세[8]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이름을 이탈리아식에서 독일식인 마리아 테레지아로 더 불리게 되었다. 프란츠 2세는 선황 레오폴트 2세 사후 1792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고, 1804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비록 두 사람은 성격은 많이 달랐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프란츠 2세는 황제라는 자리에 걸맞는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고 조용하며 진중한 성격이었지만 마리아 테레사는 왕비에 머무르지 않고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동 통치자로서 실권도 행사했던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를 닮아 여장부 같이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외가이자 시가인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도 빠르게 적응했고, 사교 활동을 좋아하여 임신 중에도 모든 무도회와 카니발에 참석하여 춤을 췄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사는 정치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남편의 훌륭한 정치적 동반자이자 조언자이기도 했는데, 나폴레옹 1세를 매우 싫어하였다.[9] 덤으로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가 오스트리아의 대공비로 시집을 오자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동서인 그녀를[10] 수시로 견제했다고 한다.
1807년 4월 13일,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는 막내이자 8녀 아멜리에 테레지아를 조산한 이후 합병증으로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안타깝게도 아멜리에도 생후 3일 만에 어머니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 <colbgcolor=#fff3e4,#331c00>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 I) | <colbgcolor=#ffffe4,#323300> 카를로스 3세 (Charles III) | |
펠리페 5세 (Philip V) | |||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h Farnese)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 |||
아우구스트 3세 (Augustus II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Austria)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Maria Carolina of Austria) | |||
프란츠 1세 (Francis I) | |||
로렌 공작 레오폴드 (Leopold, Duke of Lorraine) | |||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 |||
카를 6세 (Charles VI) | |||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프랑스인의 황후 마리 루이즈 (Marie Louise, Empress of the French) | 1791년 12월 12일 | 1847년 12월 17일 | 나폴레옹 1세 슬하 1남[11] |
아담 알베르트 폰 나이페르크 슬하 1남 2녀 | ||||
샤를르네 드 봉벨 | ||||
1남 |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 1793년 4월 19일 | 1875년 6월 29일 | 사보이아의 마리아 안나 공주[12] |
2녀 | 마리아 카롤리네 여대공 (Archduchess Marie Caroline) | 1794년 6월 8일 | 1795년 3월 16일 | |
3녀 | 카롤리네 루도비카 여대공 (Archduchess Caroline Ludovika) | 1795년 12월 22일 | 1797년 6월 30일 | |
4녀 | 브라질의 황후이자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레오폴디네 (Maria Leopoldina, Empress of Brazil and Queen of Portugal) | 1797년 1월 22일 | 1826년 12월 11일 | 페드루 4세 슬하 3남 4녀[13] |
5녀 | 살레르노 공비 클레멘티나 (Clementina, Princess of Salerno) | 1798년 3월 1일 | 1881년 9월 3일 | 살레르노 공 레오폴도[14] 슬하 1녀 |
2남 | 요제프 프란츠 레오폴트 대공 (Archduke Joseph Franz Leopold) | 1799년 4월 9일 | 1807년 6월 30일 | |
6녀 | 작센의 왕세자비 마리아 카롤리나 (Marie Caroline, Crown Princess of Saxony) | 1801년 4월 8일 | 1832년 5월 22일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
3남 | 프란츠 카를 대공 (Archduke Franz Karl) | 1802년 12월 17일 | 1878년 3월 8일 |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슬하 4남 1녀[15] |
7녀 | 마리아 안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e Anne) | 1804년 6월 8일 | 1858년 12월 28일 | [16] |
4남 | 요한 네포무크 대공 (Archduke Johann Nepomuk) | 1805년 8월 30일 | 1809년 2월 19일 | |
8녀 | 아멜리에 테레지아 여대공 (Archduchess Amalie Theresa) | 1807년 4월 6일 | 1807년 4월 9일 |
[1] 첫째 부인이자 전임자인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는 남편이 신성 로마 황제가 되기도 전에 대공비 신분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사는 두 번째 부인임에도 프란츠 2세의 정후가 될 수 있었다.[2] 즉, 마리아 테레사 본인은 기필코 부정하고 싶어하겠지만, 장녀 마리 루도비카 여대공이 고대의 납치혼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폴레옹에게 팔려가듯 강제결혼하면서 의도치 않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철천지원수 나폴레옹 1세의 장모가 되어버렸다. 그와 별개로 마리아 테레사 본인은 1807년에 산모사망했기 때문에 1810년 금쪽 같은 맏딸이 원수 같은 남자와 강제결혼하는 꼴을 보는 걸 피할 수 있었고 4년 후(1811년)에 태어날 외손자 나폴레옹 2세를 볼 수 없었다.[3] 7남 11녀.[4] 5남 11녀.[5] 12남 4녀.[6] 하지만 카롤리네도 아이를 못 낳았을 뿐이지 직접 나서서 병원 설립을 주도하는 등 오스트리아 국민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황후였다. 이복 동생 겸 셋째 의붓아들의 아내인 며느리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와 조카 겸 의붓손자며느리 엘리자베트에게도 상냥하고 친절했다.[7] 삼남 프란츠 카를 대공의 부인이자 셋째 며느리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는 스스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길 포기하고 장남에게 황위를 넘겼기 때문에 평생토록 황후와 황태후는 되지 못하고 대공비의 칭호와 작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당시 살아 있던 두 황제들의 어머니라는 막강한 지위를 지녔기에 황실 최고 어른이자 실질적인 오스트리아 황태후로서의 호강과 예우를 누리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황후, 황태후는 아니었지만 살아생전 넷 중 유일무이하게 살아생전에 자기 아들을 황제에 즉위시키고 황태후의 대접을 누린 유일무이한 인물이 되었다.[8] 외삼촌 레오폴트 2세와 고모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장남.[9]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 역시 나폴레옹을 싫어했는데, 프랑스 혁명에 희생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친했던 언니였기 때문.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아 테레사의 장녀 마리 루이즈는 훗날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그토록 증오했던 나폴레옹 1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황후가 되었다.[10] 남편 프란츠 2세의 남동생이자 여섯 번째 남동생인 요제프 대공과 결혼했다.[11] 나폴레옹 2세[12]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3녀이다.[13] 마리아 2세, 페드루 2세 등[14] 페르디난도 1세의 5남이자 어머니 마리아 테레사의 남동생으로 외삼촌이다.[15]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대공 등[16] 지적장애가 있어, 혼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