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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

<colbgcolor=#F3A777><colcolor=#000000> 오스트리아 제국의 요제프 대공비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Александра Павловна России
파일:Alexandra_Pavlovna_by_Borovikovsky.jpg
이름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
(Александра Павло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783년 8월 9일
러시아 제국 차르스코예 셀로 예카테리나 궁전
사망 1801년 3월 16일 (향년 17세)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부다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1] (1799년 결혼)
자녀 알렉산드리네 파울리나
아버지 파벨 1세
어머니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형제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니콜라이 1세, 미하일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결혼2.3. 오스트리아의 대공비2.4. 말년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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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파벨 1세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의 셋째이자 장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2세의 7남이자 프란츠 2세의 동생인 헝가리의 팔라틴 요제프 대공과 결혼했다.

2. 생애

2.1. 유년기

1783년에 파벨 1세의 셋째 아이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라의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는 알렉산드라를 보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아기가 사내아이가 아닌 것에 실망하고 아기가 못생겼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알렉산드라는 할머니의 냉대를 받았으며, 어릴 때부터 미녀라고 불리던 동생 옐레나와 비교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는 성실하고 배움이 빠른 알렉산드라를 보고 점점 마음을 열어 손녀를 예뻐했다.

알렉산드라는 여동생들과 함께 당시 황족 여성들이 받았던 일반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예술에 재능이 있었으며 4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

2.2. 결혼

예카테리나 2세는 결혼 적령기의 알렉산드라를 위해 스웨덴구스타브 4세 아돌프를 손녀 사위로 낙점했다.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예카테리나 2세의 친척[2]이었으며, 러시아와 스웨덴이 동맹을 맺을 경우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이 많았기 때문이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결혼 협상은 알렉산드라의 개종 문제로 막히게 되었다. 스웨덴에서는 알렉산드라가 스웨덴 국왕과 결혼해도 루터회로 개종하지 않고 정교회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러시아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종 문제로 계속 합의를 보지 못하자 스웨덴에서 다른 신부 후보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2세는 매우 분개했다. 그러나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녀와 약혼하기 직전,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직접 러시아로 가서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러시아에서 구스타브 4세 아돌프와 알렉산드라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개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떨어지면서 두 사람의 약혼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끝끝내 종교적 문제를 넘어갈 수 없었던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러시아를 떠나버렸다.[3] 알렉산드라와 예카테리나 2세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처참한 첫 혼담으로부터 3년 후, 알렉산드라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공과의 혼담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간의 동맹의 의미가 담긴 혼사였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가톨릭을 믿지만 알렉산드라가 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협상이 끝났다. 1799년 2월 프란츠 2세의 동생 요제프 대공이 미래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러시아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두 사람은 러시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3.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파일:Grand_Duchess_Alexandra_Pavlovna_of_Russia,_Archduchess_of_Austria.jpg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1800년

알렉산드라는 남편을 따라 에서 살게 되었다. 부부 사이는 좋았지만 알렉산드라는 행복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로 알렉산드라는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는데, 비록 협상에서 허용하긴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개종하지 않은 이유가 오스트리아를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알렉산드라를 싫어한 인물은 프란츠 2세의 황후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알렉산드라는 프란츠 2세의 첫 아내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와 매우 닮았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기를 받았다.[4] 또한 알렉산드라가 강대국 러시아에서 많은 혼수와 장신구를 가지고 시집을 오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황후인 자기 입지가 흔들린다고 여기고 동서 알렉산드라를 수시로 견제했다. 그 방식이 상당히 찌질했는데, 일례로 알렉산드라가 호화스러운 보석 장신구를 걸고 무도회에 나온 것을 본 마리아 테레지아는 앞으로 그 장신구들을 달고 다니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열심히 사교 활동을 하며 사람들의 호감을 쌓아갔다.

2.4. 말년

다행히도 요제프 대공은 헝가리로 떠나야 했다. 헝가리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렉산드라는 임신했다. 알렉산드라는 임신 기간 내내 힘들어하다가 1801년 3월 8일, 난산으로 딸 알렉산드리네 파울리나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이를 낳고 8일 후, 알렉산드라는 산욕열로 17세 나이에 사망했다. 알렉산드라의 사후 며칠 만에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파벨 1세가 암살되면서 로마노프 가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라는 정교회 신자였기에 합스부르크 황실의 영묘에 묻히지 못했다. 그녀가 사망한 지 2년 후에 알렉산드라를 위한 정교회 예배당이 세워지고 나서야 유해는 제대로 안장될 수 있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 제국 여대공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Grand Duchess Alexandra Pavlovna
of Russia)
<colbgcolor=#fff3e4,#331c00> 파벨 1세
(Paul I)
<colbgcolor=#ffffe4,#323300> 표트르 3세
(Peter III)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Duke of Holstein Gothorf)
러시아 제국의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5]
(Tsesarevna Anna Petrovna)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Christian August, Prince of Anhalt-Zerbst)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Joanna Elisabeth of Holstein-Gottorp)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Princ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
(Charles Alexander, Duke of Württemberg)
투른운트탁시스의 마리 아우구스테 공녀
(Princess Marie Auguste of Thurn and Taxis)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Margrave of Brandenburg-Schwedt)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 공주[6]
(Princess Sophie Dorothea of Prussia)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오스트리아의 알렉산드리네 파울리나 여대공
(Archduchess Alexandrine Paulina of Austria)
1801년 3월 8일 1801년 3월 8일

[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7남.[2] 예카테리나 2세와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아버지 구스타브 3세가 서로 사촌이었다. 알렉산드라와 구스타브 4세는 7촌이다.[3]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이러한 행동은 스웨덴 국민들에게 그가 신앙심이 강한 군주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를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그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은 스웨덴의 한 귀족 여성이었으며, 그녀의 설득으로 러시아까지 갔으나 감정적인 동요를 잠재우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4] 이는 우연이 아니라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가 알렉산드라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를 프란츠 2세의 신부감으로 추천한 사람이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알렉산드라와 그녀를 시기한 마리아 테레지아 모두 엘리자베트와 마찬가지로 출산 중 사망하는 비극을 맞이했다.[5] 표트르 1세예카테리나 1세의 장녀.[6]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차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