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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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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II
가문 호엔슈타우펜 가문
생몰년도 1194년~1250년 (55세)
출생지 이탈리아 왕국 제시
사망지 시칠리아 왕국 포자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220년~1250년
독일 국왕 1196년~1197년, 1212년~1220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198년~1250년
이탈리아 왕국 국왕 1212년~1250년
예루살렘 왕국 국왕 1225년~1228년[1]

1. 개요2. 생애
2.1. 오토 4세와의 대립2.2. 즉위2.3. 6차 십자군2.4. 하인리히의 반란2.5. 이탈리아 전쟁 (기벨린 vs 구엘프)
3. 영향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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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Federico_alkamil-1-1.jpg
6차 십자군 원정 중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하는 프리드리히 대왕.

독일어: Friedrich II. (프리드리히 2세)
이탈리아어: Federico II (페데리코 2세)
프랑스어: Frédéric (프레데리크)
라틴어: Fridericus II (프리데리쿠스 2세)
시칠리아어: Fidiricu I (피디리쿠 1세)
왕좌에 앉았던 이들 가운데 최초의 근대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손자이자 하인리히 6세의 아들.

중세 시대 군주, 특히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는 다소 이색적인 인물로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보위에 있으면서 여러 면에서 다사다난하고 임팩트 있는 치세를 보냈으나,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지만, 시칠리아에서 자라며 그곳에 기반을 둔 이색적인 황제였다. 독일 국내 문제는 뒷전으로 하고 이탈리아 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았으나, 이 때문에 당시 절정의 위세에 있던 교황과 마찰을 빚어 세번이나 파문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또 독일에서는 파문을 빌미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결과적으로 독일, 이탈리아 양면에서 모두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그의 치세를 거치면서 제국은 분열되었고 황권은 약화되었으며, 결국 그의 사후 신성 로마 제국은 대공위 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지적 호기심이 매우 풍부하여 여러 방면의 지식과 문물을 습득하고 다방면에서 박식한 면모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단으로 간주되던 비기독교 세계, 특히 이슬람 세계의 (당시로서는)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교류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그를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매우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비단 후세뿐만 아니라 중세 당대에도 '세계의 경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를 앞서나간 개방성은 교황을 비롯해 보수적인 귀족들의 불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교황이 그에게 여러 차례 파문을 내릴 때 주요한 구실이 되었다. 여성 편력에 있어서도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여서 공식적인 왕비만 해도 네 명이었고, 그 밖에도 수많은 사생아들이 있었다.

다만 성격은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다. 가족 관계가 원만치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후계자였던 장남 하인리히와의 불신과 갈등 끝에 결국 그를 폐태자하고 만 사건이 있다.

현대의 중세 사학자들은 대체로 19세기 역사가들이 열광한 '최초의 근대인' '계몽군주'보다는 전형적인 13세기 유럽 군주로서의 프리드리히 2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 역사가 데이비드 아불라피아 David Abulafia(1949~ )는 자신의 저서 <프리드리히 2세: 중세의 황제> (Frederick II: A Medieval Emperor)에서 프리드리히를 전통적인 중세의 방식으로 통치하는 전형적인 기독교 군주로 평가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현대의 숭배자들을 보유한 소수의 중세 통치자들 중 하나다.
그의 폭넓은 문화적 취향,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한 관용, 교황에 대한 반항은 그에게 특별한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세속적인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조하려 한 천재로 묘사된다.
비록 이것들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인물로 해석되어 왔다는 사실 자체로 그는 역사학자들과 역사책 독자들의 세심한 관심을 받을 자격을 충분히 가질 것이다.
실제로 그가 누려온 명성 중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David Abulafia, Frederick II: A Medieval Emperor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가 누려온 명성은 단지 전근대의 결함 많은 폭군에게 19세기 근대인들의 이상을 투영한 것에 불과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정치적 절대주의와 중앙집권에 대한 대중의 숭배가 프리드리히를 '명군'의 전형으로 변모시켰지만, 그가 법을 제멋대로 다루고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는 사실은 대부분 무시되거나 정당화되었다.
봉건주의에 대한 경멸(즉 계몽주의)과 교황권에 대한 증오(즉 종교개혁주의)가 합쳐져 역사가들은 프리드리히의 반대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독일 학자들은 당시 유행하던 '게르만족의 미덕'을 구체화하기 위해 영광스러운 '독일 황제'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6차 십자군원정은, 만약 언급이라도 된다면, 대개 예루살렘의 무혈 반환으로 축약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조약에 내재된 결함들, 즉 짧은 휴전 기간, 기독교측 방어 시설 금지, 기타 법적인 하자들은 무시된다.
Helena P. Schrader, Rebels Against Tyranny: Civil War in the Crusader States

2. 생애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 왕국의 왕녀 콩스탕스[2]의 아들로 이탈리아 제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6세는 선대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뒤를 이어 강력한 슈타우펜 제국을 건설하려 했으나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프리드리히 2세의 나이는 불과 세 살이었다. 하인리히 6세는 사망하기 1년 전인 1196년 두 살 짜리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왕에 앉혀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한 시점에서 프리드리히는 불과 세 살의 어린 나이였는데다가 제위를 두고 벨프 가문과 오랜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당시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이 황제 선출에 개입하려 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제위 계승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차기 황제를 뽑기 위한 선제후 회의가 다시 열렸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귀족들은 프리드리히 2세가 황제로 선출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대신 그의 삼촌 필리프를 다음 황제로 내세웠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국왕이 되어 시칠리아에서 자랐다. (1198년)

2.1. 오토 4세와의 대립

그가 시칠리아에서 자라는 동안 제위에 올랐던 삼촌 필리프는 암살되어 사망했고(1208년), 선제후 회의에서 제후들의 지지를 받은 벨프 가문오토 4세가 제위에 올랐다. 오토 4세는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보름스 화의의 무효화와 토스카나 백국 반환 거부 등을 주장하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과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1210년 11월 18일 오토 4세를 파문하곤 대체자로 시칠리아의 어린 국왕 프리드리히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황제를 뽑는 선제후 회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7인의 선제후 중 성직 선제후 3인과 세속 선제후 1인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황제 선거에 영향력을 휘둘렀다. 독일의 제후들 역시 덴마크의 발데머 2세홀슈타인포메라니아 지역을 침공해 오는 때에 이탈리아에만 상주하는 황제를 불신하여 1211년 말엽 뉘른베르크 의회를 열어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의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듬해인 1212년 여름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를 떠나 북상하였고 알프스 고갯길을 지키는 오토의 군대를 우회하여 9월경 슈바벤 남부의 콘스탄츠에 도착하였다.

호엔슈타우펜 황가의 적통 후계자가 나타나자 대부분의 독일 귀족들은 프리드리히 편으로 넘어갔고 오토는 쾰른으로 후퇴하였다. 1212년 12월 9일,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인츠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지지와 함께 재차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궁지에 몰린 오토 4세는 삼촌인 잉글랜드의 존 왕과의 동맹에 매달렸다. 마침 프리드리히의 동맹인 필리프 2세에게 빼앗긴 프랑스 내의 영지를 수복하고자 했던 존은 1213년 프랑스 해군을 괴멸시키곤 이듬해 앙주에 상륙하였다. 존의 협공 요청에 오토 4세는 명성 회복을 위해 응하였고 플랑드르 백작과 함께 프랑스 북부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1214년 7월 2일 로슈 오 무안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은 패배하였다. 그 사실을 모른채 진군하던 오토 4세는 3주간 강행군 끝에 국토를 횡단한 필리프 2세와 만나 부빈 다리에서 겨루었다. 잉글랜드와 연대하지 못한 독일군은 대패하였고 오토 본인도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다. (부빈 전투)

전투 이후 필리프 2세는 전리품으로 획득한 독수리 뱃지 (황제의 상징)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부빈 전투 이후 아헨과 쾰른이 프리드리히에게 항복하였고 오토는 자신의 영지인 브라운슈바이크로 후퇴하였다. 1215년, 잉글랜드에서 마그나 카르타가 체결될 무렵 오토는 재차 파문되었고 결국 황제위를 포기한채 부르고뉴 왕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자 7월 25일 프리드리히 2세는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 왕으로의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와 함께 십자군 종군을 서약하였다. 1217년 5차 십자군이 출정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 1세를 포함한 귀족들을 파견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1218년 5월 오토 4세가 사망했을 때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프리드리히의 황제 대관식을 추진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와 교황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2.2. 즉위

1220년, 제국 내의 서임권을 교황에게 양도하고 보름스 화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마침내 로마로 향할 수 있었다. 그해 11월 22일, 로마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 아들 하인리히는 로마 왕이 되었다. 여담으로 즉위식 당시 칙령을 통해 '이단을 처벌해서 화형을 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이를 두고 중세 말부터 시작한 종교재판의 광풍의 계기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이후 자신은 시칠리아에 머물고 장남인 하인리히를 독일왕으로 공인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성속 영주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영방국가 체제 발전의 길을 열었다. (1222년) 로마에서의 즉위식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1221년 8월에 십자군 종군을 서약했는데 호노리오 3세의 지속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미루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2세의 당도를 믿고 5차 십자군이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의 예루살렘 반환 제안을 거절하고 버티다가 결국 격퇴당하기도 하였다. 1223년 3월, 페렌티노에서 프리드리히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과 교황을 만나 1225년 6월 24일을 출정일로 확정하였다.

2.3. 6차 십자군

그러나 1225년 여름이 되어서도 프리드리히 2세는 출정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에 호노리오 3세가 분노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는 2년의 시간을 더 주면 1천의 기사를 더 모집하겠다고 교황을 설득하였다. 1225년 7월 20일, 몬테카시노에서 산 제르마노 조약이 체결되었고 프리드리히는 1227년[3]에도 출정하지 않는다면 10만닢의 금화를 벌금으로 내거나 파문을 당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이로써 교황령 일부를 장악하던 독일군이 철수하였고 시칠리아 왕국 내 교황 재산도 환수되었다. 호노리오 3세는 프리드리히의 십자군 종군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와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과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둘은 1225년 11월 9일 브린디시 성당에서 결혼하였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동시에 예루살렘 국왕이 되었다.

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에서 법에 의한 절대정치를 시행했다. 그는 콘실리어리 (조언자)인 피에르 드 비녜 (생몰 1190 ~ 1249년)의 도움으로 나폴리 대학교를 설립하였고 1231년에 멜피 헌법을 제정하는 등 시칠리아 왕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편지를 주고 받았고, 알 카밀에게 천체 관측기를 선물로 받을 만큼 이슬람 세계와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 특히 이슬람과의 교류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그레고리오 9세는 이전의 십자군 전쟁이 잇달아 실패하자 교황권을 다시 세우기 위해 다시 대규모 십자군 원정을 기획하고 이번에는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황제가 직접 출정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비종교적인 성향인데다가 이슬람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출병하게 되면 그 틈을 타 교황이 독일에서 세력을 넓힐 것이 뻔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출병을 미루고 있었다. 물불 안가리는 성격의 교황은 출병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협박했고,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227년 마지못해 원정길에 나섰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채 떠나기도 전에 병사들 사이에 장티푸스가 퍼졌고 황제 자신도 장티푸스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회군해야 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파문을 선언해버렸다. 이 당시에 2번 연속, 그러니까 이중으로 파문당했다.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한동안 느긋하게 시칠리아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파문 철회를 받기 위해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탈취할 생각은 없었고 외교를 통해 원만히 예루살렘을 확보하려 했다. 마침내 아이유브 왕조술탄 알 카밀[4]과 협상을 한 끝에 성전산에 대한 이슬람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예루살렘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는데 성공하여 1228년,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 받아 예루살렘 왕에 등극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지만 권위 없는 왕이었다.

황제는 성지 탈환에 성공하여 의기양양하게 귀국했으나, 교황은 이슬람과 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격렬히 분노했다. 그러나 성지를 탈환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었기에 교황은 여론에 떠밀려 아나니에서 그를 만나 파문을 철회했다. (1230년) 교황은 그를 '무함마드의 추종자'라 부른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아들'로 불렀다고.. 어찌 됐든 프리드리히의 6차 십자군은 군사적 우위나 교황의 도움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예시를 남기게 되었다.

2.4. 하인리히의 반란

그러나 파문의 여파는 적지 않았는데, 그의 반대 세력들이 파문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도전해왔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장남 하인리히 (7세)와 사이가 벌어져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장남 하인리히 (7세)는 시칠리아에 사는 아버지와 떨어져 독일에서 양육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가 9살 때 독일왕위에 앉힘으로서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인리히 (7세)는 장성하면서 이탈리아에 머무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독일 내정을 담당했다. 하인리히 (7세)는 독일에서 마녀사냥을 하며 전횡을 일삼던 마인츠 주교를 견제하며 그와 충돌했으나, 이것이 파문을 철회받기 위해 노력하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고 말았다. 부자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고 결국 1234년에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켜 도전해왔다. 황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인리히 (7세)를 독일왕에서 폐위하고 두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차남 콘라트 4세독일왕에 앉혔다. (1235년) 프리드리히 2세는 장남 하인리히 (7세)를 이탈리아에 유폐했는데 끝내 그를 풀어주지 않았고 하인리히 (7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유폐된 상황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자비심 없는 냉혈한 아버지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최근 연구 결과 하인리히 (7세)가 나병에 걸린 것이 밝혀졌고 이 때문에 유폐가 지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2.5. 이탈리아 전쟁 (기벨린 vs 구엘프)

한편 교황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어 1235년에는 마인츠에서 치안 법령 (평화 헌법)을 공포했고 롬바르디아 동맹[5]을 쳐부술 결의를 하였다. 1237년에 크레모나 군과 함께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밀라노 군을 격파한 프리드리히는 자치도시(코뮌)의 상징인 카로치오를 파괴하였다. 1241년 8월에 그레고리오 9세가 선종하자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추기경 2명을 포로로 잡아 새 교황을 뽑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1241년 몽골군동유럽을 휩쓸고 헝가리까지 쳐들어오자 급히 기독교 제후들 및 사이가 좋지 않던 교회와 협력하여 십자군을 편성해 막을 준비를 하였다. 다행히 1242년 오고타이의 죽음을 안 몽골군이 회군했기 때문에 한숨을 돌렸다.

1243년 2년간의 공백 끝에 새로 뽑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다시 황제와 항쟁을 할 조짐을 보이자 롬바르디아의 겔프당과 치열한 전쟁을 펼친 끝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프랑스로 망명시켜버렸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4세는 1245년 리옹에서 공의회를 열어 프리드리히 2세를 다시 파문했고, 주종관계를 말소한다고 선포하여 독일 제후들의 반란을 선동했다. 이후 몇몇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양치기 소년도 아니고 계속된 파문과 복권에 질린 독일 제후들은 교황권의 신장도 바라지 않았고[6] 프랑스 왕 루이 9세도 프리드리히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생각 외로 황권에 위협은 되지 못했다.

1248년엔 파르마에서 일어난 반란[7]과 1249년에 서자 엔초가 볼로냐에서 포로로 붙잡히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장기간의 반란과 전쟁으로 교황도 황제도 자금이 부족하고 북이탈리아의 제후들도 격파되기 시작하여 (1250년 마르케 전투) 결국 양측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중재로 다시 화해를 하였다. 이후 1250년 12월 12일, 사냥을 마친 후 고열에 시달리던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의 카스텔 피오렌티노에서 사망하였다.

3. 영향

그의 죽음에 교황과 겔프파는 크게 안도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기벨린파(황제파)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위와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그의 적자와 서자들이 모두 남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함으로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단절되었다.

중세 시대를 산 사람으로선 보기 드물게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 무슬림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의 고급문화를 습득하여 시칠리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8], "최초의 계몽군주"라 부르기도 한다.

4. 여담

신곡을 집필한 단테 알리기에리는 겔프파에 속했기에 프리드리히 2세를 적대시했다. 그래서 그는 지옥편을 쓰면서 프리드리히 2세를 이단 지옥에 처박아 놓았다.(...)

아기의 언어에 대한 실험으로도 유명하다. 각국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상황에서 인간이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으면 어떤 언어를 쓰는지 알고 싶어한 것. 갓난아기들을 모은 후 유모들에게 "젖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되, 절대로 말을 걸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 본인은 아기들이 가장 오래된 언어라는 히브리어를 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초능력을 각성한 아기들에게 살해당했다 아기들은 다들 오래 가지 못하고 숨졌다고 한다. 이는 아기를 키우는 데 사랑과 스킨십이 필수라면서 인용되는 이야기.

다만 이실험은 헤르도토스의 역사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당시에는 아기들이 이집트 단어들을 해서 이집트가 최초의 언어 취급을 받았다고 되어있다. 판본에 따라 이 실험을 명한 것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란 말도 있고, 아기들이 사용할 것이라고 예상한 언어가 라틴어라는 말도 있다.[9]

의약법을 제정하여 의약분업을 최초로 시킨 황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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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코에이징기스칸 4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 어쩐 일인지 지모가 100이다! (정치 62, 전투 74) 전 무장 중 지모 최고치를 자랑하는데 예루살렘 무혈 입성이나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이란 평가 때문에 이런 고평가를 받은 듯. 혹은 언어의 천재여서일수도.. 고급 아랍어를 구사하여 술탄이나 다른 아랍권 인사들과 대화할 때 통역없이 아랍어로 대화 하고 서신도 나누었다. 파워업키트에 추가된 시나리오 3 '늑대 무리들의 포효'에서는 가히 유럽 최강 세력이자 몽골제국의 대항마. 오프닝 이벤트에서 교황과의 대립이 묘사되고 있다. 플스판에서는 지모가 96으로 떨어졌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의 DLC '서쪽의 군주들'의 오트빌 캠페인의 청자로 등장. 그의 스승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세운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자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1] 이사벨 2세와 결혼해 공동왕으로 즉위했으나 이사벨 2세가 사망한 후 외아들 콘라트 4세에게 왕위가 넘어갔다.[2] 오트빌 왕조의 국왕 기욤 2세(이탈리아어로 읽으면 굴리에모 2세)의 고모다.[3] 정확히는 1228년 이전[4] 그 유명한 살라딘의 조카다.[5] 북이탈리아 밀라노와 볼로냐, 모데나 등 주변 지역의 대도시들과 제후들이 연합해 교황을 지지하며 황제로부터 독립을 요구했다.나중에 베네치아와 제노바도 참가했으며 겔프파(교황파)의 본거지였다.[6]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황제권과 제후(영주)권, 교황권의 균형 위에 서 있는 나라였고 천하삼분지계 제후들은 많은 경우 자신들의 봉권적 권력을 억압하는 황제에 맞서기 위해 교황과 협력하였으나, 그렇다고 제후들이 덮어놓고 교황 편을 든 것은 아니다. 제후들의 입장에서는 교황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 역시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파문이 지나치게 남발된 것 자체가 교황과 교회가 지나치게 세속 군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 요소가 되었다. 그렇게 하고도 황제를 제압하지 못하고 번번히 교황이 역으로 털린 상황이었기에, 당시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등 돌리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7] 제국군이 패배하여 왕관과 왕홀, 애첩들과 사냥매 등의 애완동물, 서적들꺼지 빼앗겼다.[8] 스위스의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남긴 말[9] 프리드리히 2세에 관한 기록을 남겼던 13세기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살림베네(Salimbene di Adam)의 기록 중에 이 실험에 관한 서술이 있다. 유의할 점은 살림베네는 수도자로서 역사상 최악의 반교황파였던 프리드리히 2세를 굉장히 혐오했기에 악의적으로 왜곡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이 기록 자체가 '프리드리히의 몇 번째 광기'라는 식으로 황제가 이런이런 잔인한 짓을 했다고 까는 내용이다. 그 중 상당수는 동화적 모티프가 강하게 드러나며, 왕 이름만 다른 민담이 그 전부터 존재함이 기록으로 입증되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