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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합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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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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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1세 오토 폰 합스부르크 카를 폰 합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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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합스부르크
Otto von Habsburg
파일:오토 폰 합스부르크 흑백.jpg
<colbgcolor=#333333><colcolor=#ffffff> 이름 프란츠 요제프 오토 로베르트 마리아 안톤 카를 막스 하인리히 식스투스 사비에르 펠릭스 레나투스 루트비히 가에탕 피우스 이그나티우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Franz Joseph Otto Robert Maria Anton Karl Max Heinrich Sixtus Xavier Felix Renatus Ludwig Gaetan Pius Ignatius von Habsburg-Lothringen)[1]
출생 1912년 11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버외스터라이히 라이헤나우안데어락스 바르톨츠 성
사망 2011년 7월 4일 (향년 98세)
독일 바이에른주 푀킹
장례식 2011년 7월 16일
카푸친 교회
재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수장
1922년 4월 1일 ~ 2007년 1월 1일
배우자 작센마이닝겐의 레기나 공녀[2]
(1951년 결혼 / 2010년 사별, 향년 85세)
자녀 안드레아,[3] 모니카, 미하엘라, 가브리엘라, 발부르가, 카를[4], 게오르크
아버지 카를 1세
어머니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공녀
형제 아델하이트, 로베르트, 펠릭스, 카를 루트비히, 루돌프, 샤를로테, 엘리자베트
종교 가톨릭
소속 정당

서명 파일:오토 폰 합스부르크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마지막 황태자2.2. 망명 생활2.3. 나치 독일 시기2.4. 황자에서 시민으로2.5. 냉전 종식과 21세기2.6. 사망
3. 가족
3.1. 조상3.2. 자녀
4. 기타5.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우리는 강력한 이웃나라 러시아라는 큰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현실적이며 국제적인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러시아 정권은 속을 알 수 없는 자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2003년에 한 말.
큰 불명예였습니다. 절대로 서명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정치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엔 그런 말에 한사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했죠. 정치라는 아편을 한번 맛보면 끊기가 어렵거든요.[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장남이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마지막 황태자.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다.

2. 생애

2.1. 마지막 황태자

파일:Kaiser_Franz_Joseph_I._and_Otto_(15.09.1914).jpg
▲ 2살이던 1914년, 당시 황제이자 종증조부인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함께 찍은 사진.[6]

1912년에 태어나, 1916년 아버지 카를 1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황태자/왕태자가 되었다. 그가 즉위했다면 칭할 이름은 오토 1·2세[7]가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프란치스코 요셉)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기 때문에 프란츠 요제프 2세가 될 예정이었다. 만약 제국이 이어졌다면 68년간 재위한 프란츠 요제프 1세에 이어 89년간 재위한 장수라인이 될 뻔했다.[8]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호국 리히텐슈타인프란츠 요제프 2세(재위 1938~1989)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왕명을 쓰고 재위했을 수 있다.

파일:external/bb4cdb1ed8713c6583e90662a6b1a7ef142d9da9b8dba5f4f41f8549ecd7ecc6.jpg
부모의 부다페스트에서의 대관식 때의 기록화. 가운데의 어린 소년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이다.

파일:external/www.almanachdegotha.org/karl_I_zita_otto_1916.jpg
황제 부부와의 사진. 카를 1세가 쓴 왕관은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이다.

하지만 6살 때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고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스위스포르투갈마데이라 제도 등에서 힘든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2.2. 망명 생활

1922년에는 아버지 카를 1세가 폐렴으로 마데이라 제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토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지만 9살의 어린아이였던 그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 치타 황후는 오토에게 "아버지는 영원한 잠에 드신 거야. 이제부터 네가 황제이자 왕이란다."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카를 1세의 죽음 이후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의 초청으로 오토의 가족은 스페인바스크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사실 오토는 오스트리아로 이주하기를 희망했으나, 1919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모든 남성 구성원의 오스트리아 입국 금지를 규정한 '합스부르크 법'(Habsburgergesetz)을 제정하여 불가능해졌다. 공화국에 충성을 서약한 황족은 입국시켜 주었고, 오스트리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한 1996년 이후로는 재산권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파일:ukobyynsit851.jpg
청년기
성인이 된 후에는 벨기에 플란데런의 루뱅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해 1937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루뱅 가톨릭대학교는 이후 네덜란드어를 쓰는 뢰번 가톨릭 대학교가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호르티 미클로시와 협상하여 옛 제국의 구성국 중에서 유일하게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헝가리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변의 조언이 많았지만, 오스트리아의 제위를 노린 까닭인지 이를 거부했다. 사실 호르티는 오토의 아버지인 카를 1세의 헝가리 왕위 요구도 무시한 바가 있기 때문에, 과연 오토 대공 측에서 타진했다고 해도 이루어졌을지 의문스럽기는 하다. 1934년 오스트리아 연방국이 수립되고는 복벽설이 비중 있게 다뤄지기도 했다. # 이듬해 오스트리아 연방국은 합스부르크 법을 헌법적 지위에서 일반법으로 격하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왕조가 재건되면 자신들이 위험해질 것을 우려한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가 복벽을 반대했다.

2.3. 나치 독일 시기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때 오스트리아가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병합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군주제를 혐오하는 독재자였으니 당연히 합스부르크 가문에 우호적일 리가 없었다. 애초에 출생부터 히틀러와 오토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의 오스트리아는 전형적인 다문화, 다언어, 다민족 사회였으며 이렇게 다양한 민족들을 함께 아우르는 체제는 그 자체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중요한 정체성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독한 아리안 우월주의자인 히틀러와,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들이 서로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1932년, 오토는 독일 가톨릭 중앙당의 초청으로 농업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을 방문하였다.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했고 유럽 최고 명문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지를 얻는다면 정치적으로 큰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토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프로이센 왕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을 보내 그를 회유하려고 했으나, 이미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을 읽어봤던 오토는 나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독일을 빠져나왔다.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는 오토 앞에서 히틀러를 "총통 각하"라고 불렀고 그 모습이 꼴사납다고 여긴 오토는 꿋꿋하게 "히틀러 씨(Herr Hitler)"라고만 그를 불렀다. 다만 히틀러와 만났다면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되긴 했을 것이며 본인도 일생동안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피한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예방하는 것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으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복으로 갈아입고 프란츠 요제프 1세카를 1세로부터 수여받은 훈장을 달고 그를 맞이하였다. 힌덴부르크는 당시 독일 정치에 대한 주제는 일절 피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얘기만 주구장창 떠들었다고 한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하자 오토는 즉시 게슈타포의 습격을 피해 독일을 떠나버렸다.

오스트리아의 귀족들 중에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즈음에 오히려 중도좌파로 정치 성향이 바뀌어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에서 나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한 이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시 외국으로 망명한 귀족 중 일부도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만나본 적 없는) 장인인 작센마이닝겐의 게오르크는 나치당원이었고 그래서 소련군에 잡혀 굴라크에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동생 로베르트 대공의 장인인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도 게오르크와 비슷하게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총독으로 재임하다가 연합국의 포로가 되어 케냐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망명 후에는 반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에게 오스트리아 제국 복원을 건의하여 처칠의 지지를 얻어냈지만 루스벨트가 반대하여 제정 복고는 무산되었다.

2.4. 황자에서 시민으로

종전 후 1950년 서독 바이에른 남부의 푀킹(Pöcking)에 정착한 뒤로는 사회활동에 전념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이슬람, 유대교 등과의 화해를 주장하며,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유럽 정계에서 "과연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손답다"며 존경받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역사적으로 종교와 관련해서는 보수적이지만, 이외 나머지는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굉장히 진보적인 왕가였다. 종교 문제에서도 레콩키스타로 탄생한 스페인을 통치하던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닐 경우, 상당히 관대했었다.[9] 이는 종교 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던 페르디난트 2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골수 가톨릭 신자였던데다가 여동생의 남편이자 자신의 6촌이던 스페인의 펠리페 3세에게 지원을 받아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만큼 유럽의 다른 왕실에서도 그만한 예우를 해 주었다.

1961년 스페인의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의 왕위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당시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에 포함되어 있긴 했다. 카를로스 4세의 여계후손으로 아버지 카를 1세가 카를로스 4세의 장녀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차남 페드루 4세의 장녀 마리아 2세의 딸 마리아 아나의 외손자에 해당한다. 또한 증조할머니 마리아 안눈치아타 대공비, 외할아버지 로베르토 1세, 외할머니 마리아 안토니아도 카를로스 4세의 여계후손이다.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카를로스 4세의 5녀 마리아 이사벨의 손녀, 로베르토 1세는 카를로스 4세의 4녀 마리아 루이사의 증손자, 마리아 안토니아는 페드루 4세의 동생 미겔 1세의 딸이다.

합스부르크가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로 갈라지고, 스페인계의 부계가 절손되어 모계를 통해 부르봉으로 넘어간 지 2백여 년이 넘어서 50위권 수준이라 사실상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상속 1순위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집안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거절하였다. 7월 왕정 당시 루이필리프 1세처럼 상속서열을 뛰어넘어서 군주가 되는 경우 다른 왕족들이나 귀족들에게 왕따당하기 좋은 구실이다. 루이필리프 1세도 별명이 폭동왕이었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으로 간주되었다. 아니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후 알폰소 13세의 도움으로 스페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것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과거 자신을 도와준 알폰소 13세의 후손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시 스페인은 파시스트 색채를 드러낸 폭압적인 독재정권으로 다른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스페인 정부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 왕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칫 나치에 항거했던 자신의 이력에 큰 오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렇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의 인연으로 인해 프랑코와 개인적인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으로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본인은 프랑코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는 비견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였다.

1955년 오스트리아에서는 소련의 요구로 합스부르크 법이 부활하였고, 오토는 결국 1966년 합스부르크 법을 따라 제위 계승 주장을 포기하고 '공화국의 충성스러운 시민'을 자처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무너진 후 헝가리 정치인들의 초청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지만 왕정복고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헝가리 여론도 방문에 우호적인 정도였지 왕정복고를 바라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정치적 성향은 중도우파였고 기독교사회연합 당원으로 유럽의회의 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했다.

1988년 유럽의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연설을 하는 중 북아일랜드 출신의 골수 반가톨릭 친영파 출신 의원이었던 이언 페이즐리 의원이 중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라는 팻말을 들고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의 반 가톨릭 선언문을 외치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교황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는 걸 보고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분기탱천하여 뒷자리에서 책상을 벌떡 뛰어넘어 팻말을 빼앗아 찢어버리고 "무례한 놈!!" 이라고 크게 호통치며 페이즐리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기도 했다. 이후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망 1년 전인 2004년 선왕인 카를 1세가 복자로 시복되었을 때 다시 교황을 알현했다.

당시 영상. 뒷자리에서 날아와 손에 들고 있는 삐라를 빼앗아 찢어버리는 사람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 공이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분노어린 표정으로 팻말을 찢자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나왔고 의장이 페이즐리의 퇴거를 명하자 다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후 페이즐리 의원은 회의의 보안 담당자에게 "내가 맞을 동안 뭐 했냐"고 항의하여 사과를 받긴 했다.

2.5. 냉전 종식과 21세기

파일:GERMANY-HABSBURG.jpg
말년의 오토 대공(2007년)
공산주의를 싫어해 전후 냉전 시기에는 반공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했고, 1980년대 후반 동유럽민주화 열풍에도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동독을 탈출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헝가리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빼내는 것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리스 옐친, 블라디미르 푸틴과도 만남을 가졌다. 옐친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러시아 사람'이라서 점점 호감이 들었지만, 푸틴에 대해서는 전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무자비한 기술관료라는 평을 내렸다. 아래 내용은 대화 전문이다.
Q. 대공께서는 어느 이웃나라에 대해 고민하고 계십니까?

A. 최고로 걱정되는 나라는 러시아지요. 러시아는 계속 확장해왔어요. 이미 옐친 때부터 이 성향은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거대한, 제국주의적 영토를 가지고 있습니다.[10] 그들은 이미 한쪽으론 쿠릴 열도를, 그리고 나머지 한쪽에서는 발트 국가들을 다시 얻기를 여전히 꿈꾸고 있습니다.

Q. 블라디미르 푸틴이 그렇다면 유럽의 위험이라는 건가요?

A. 푸틴은 옐친이 그랬던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옐친은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때문에 호감있는 느낌을 풍겼죠. (웃음) 그는 100% 전형적인 러시아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에게 갈수록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Q. 그럼 대공께서는 푸틴은 전형적인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보시는 겁니까?

A. 예. 푸틴은 냉정한 관료주의자이자 기술 관료(Ein eiskalter Bürokrat und Technokrat)입니다.

2005년 당시 유럽 의회의 의원이었던 오토 대공이 독일 언론사 쥐트도이체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푸틴과 러시아에 대해 내린 평()이다. 그는 1990년에 동유럽 공산권이 무너질 당시 자유화 바람이 몰아치던 동독드레스덴을 잠시 방문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푸틴을 만났다. 대공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푸틴은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던, 그저 KGB의 일개 한 요원일 뿐이었다고 한다. #
공교롭게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쿠릴 열도 분쟁, 북한의 위성 발사 지원 등. 그가 남긴 말들은 정확히 적중되고 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된 지 70주년이 되던 2008년 오스트리아 국회에서 '유럽에서 오스트리아보다 나치의 희생물이 된 나라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좌파 계열인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우파 계열인 오스트리아 국민당에서 급히 실드를 치는 등 떠들썩한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2.6. 사망

영상에서 불리는 노래는 하이든이 작곡한 '황제 찬가'. 들어보면 알겠지만, 현재의 독일 국가에서 가사만 다를 뿐 같은 노래다.

2010년에 아내 레기나 대공비가 사망한 뒤에는 공적 활동을 중단하고 자택에 칩거했고, 2011년 7월 향년 98세로 사망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유해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카푸친 교회(홈페이지)에서 관리하는 황실 묘지에, 심장헝가리의 퍼논헐머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11] 부부, 리히텐슈타인 공 한스아담 2세[12] 부부,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13] 부부, 불가리아 왕국의 전 차르이자 불가리아 공화국 전 총리인 시메온 2세[14], 몰타 기사단장, 요르단 왕자(후세인 1세의 막내 동생이자 왕세제였던 하산 빈 탈랄 왕자) 부부, 오스트리아 전 총리를 비롯한 전세계의 왕족과 명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Wer begehrt Einlass?“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Otto von Österreich, einst Kronprinz von Österreich-Ungarn, königlicher Prinz von Ungarn und Böhmen, von Dalmatien, Kroatien, Slawonien, Galizien, Lodomerien und Illyrien, Großherzog von Toskana und Krakau, Herzog von Lothringen, von Salzburg, Steyr, Kärnten, Krain und der Bukowina, Großfürst von Siebenbürgen, Markgraf von Mähren, Herzog von Ober- und Niederschlesien, von Modena, Parma, Piacenza und Guastalla, von Auschwitz und Zator, von Teschen, Friaul, Ragusa und Zara, gefürsteter Graf von Habsburg und Tirol, von Kyburg, Görz und Gradisca, Fürst von Trient und Brixen, Markgraf von Ober- und Niederlausitz und in Istrien, Graf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etc., Herr von Triest, von Cattaro und auf der Windischen Mark, Großwojwode der Wojwodschaft Serbien etc., etc.“
"오토 폰 외스터라이히(Otto von Österrich),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이시며, 웅가른(헝가리 왕국), 뵈멘(보헤미아 왕국) 달마티엔(달마티아 왕국), 크로아티엔-슬라보니엔(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갈리치엔, 로도메리엔 그리고 일리리엔의 왕세자이시며, 토스카나 그리고 크라카우의 대공이시며,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부코비나의 공작이시며, 지벤뷔르겐의 대후작이시며, 메렌의 변경백이시며, 오버·니더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아우슈비츠, 차토어, 테셴, 프리아울, 라구자, 차라의 공작이시며, 합스부르크, 티롤, 키부르크, 괴르츠 그리고 그라디스카의 후백[15]이시며, 트리엔트, 브릭센의 후작이시며, 오버·니더라우지츠 그리고 이스트리엔의 변경백이시며,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조넨베르크 등의 백작이시며, 트리에스트, 카타로, 빈트 변경주의 영주이시며, 보이보디나, 제르비엔 등등 보호령의 보호자이시다."

„Wir kennen ihn nicht!“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

(지팡이로 문 아래쪽을 세 번 찍어서 소리를 낸다.)

„Wer begehrt Einlass?“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Doktor Otto von Habsburg, Präsident und Ehrenpräsident der Paneuropa-Union, Mitglied und Alterspräsident des Europäischen Parlamentes, Ehrendoktor zahlreicher Universitäten und Ehrenbürger vieler Gemeinden in Mitteleuropa, Mitglied ehrwürdiger Akademien und Institute, Träger hoher und höchster staatlicher und kirchlicher Auszeichnungen, Orden und Ehrungen, die ihm verliehen wurden in Anerkennung seines jahrzehntelangen Kampfes für die Freiheit der Völker, für Recht und Gerechtigkeit.“
"오토 폰 합스부르크 박사(Doktor Otto von Habsburg). 국제 범유럽연맹의 회장이자 유럽의회 의원이자 최고의장이며, 수많은 대학교들의 명예박사이자 중부 유럽의 수많은 자치단체의 명예 시민이며, 유서 깊은 학술원과 협회들의 회원이며, 국민의 자유·질서·정의를 위한 그의 수십 년 동안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수여된 최고로 높은 교회 명예장과 훈장들의 소유자이다."

„Wir kennen ihn nicht!“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

(다시 지팡이 끝으로 문 아래쪽을 세 번 찍어서 소리를 낸다.)

„Wer begehrt Einlass?“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Otto – ein sterblicher, sündiger Mensch.“
"오토, 한낱 죄 많은 인간입니다."

„So komme er herein!“
"그렇다면 들어오라!"
장례식에서는 관이 빈에 있는 카푸친 교회에 들어갈 때 관례에 따라 두 번 입장을 거절당하는 절차를 밟았다. 처음 들어갈 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로서의 공식 작위들을 열거하며 '황태자'가 입장함을 나타내고, 두 번째로 들어갈 때는 각종 학위 및 수여받은 훈장을 통해 '공인'이 입장함을 나타내며[16], 마지막으로 '오토'라는 일개 죄인이 교회에 입장함을 나타낸다.

동영상에서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 부르는 성씨가 다르다. 첫 번째의 '외스터라이히'는 오스트리아독일어 발음이며 귀족들이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의 이름을 차용하여 성씨로 삼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씨에 오스트리아라는 국명을 넣는다는 것은 오스트리아를 영지로 다스리는 군주 가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 번째에는 본성인 합스부르크를 쓰는데, 이건 오스트리아의 군주가 아닌, 대대로 물려받은 혈족의 성씨를 나타낸다. 황족으로서의 성과 개인으로서의 성이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17]

이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족으로서의 직함과 현대 사회에서 명예로 인정받는 공인으로서의 직함을 둘 다 나열하고서도 "그런 사람 모르오."라고 거절당한 후, 그저 '죄인 오토'라고 알린 후에야 비로소 "들어오시오."라고 입장이 허용되어 영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출은 그가 역사 속 과거와 현대의 유럽 사이를 살았던 인물이란 상징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1989년 오토의 모친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후의 황후인 치타 황후의 장례식 때도 이 의식이 있었고 영상으로 남아있다. 당시 의식에 응했던 고트프리트 운데서(Gottfried Undesser) 수사(1933. 3. 12 ~ 2017. 3. 4)는 20여 년이 지나 2011년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장례식 때도 참가했다. #

또한 위 장례식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전통적으로 행하던 의식으로, 아무리 생전에 지위가 높고 권력이 강했다고 해도 죽음과 하느님 앞에서는 한낱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일 뿐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문 안쪽에서 초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황실 묘지가 있는 카푸친 교회를 관리하는 카푸친 프란치스코 수도회수사들이다.

이렇게 오토 대공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카를 1세의 삼남 펠릭스 폰 합스부르크가 유일하게 생존했으나, 이마저도 얼마안가 동년 9월 6일에 사망하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제위에 있던 시기를 경험한 인물이 사라져서 합스부르크 황실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8]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자체는 오토 대공의 아들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을 수장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오토 폰 합스부르크
(Otto von Habsburg)
<colbgcolor=#fff3e4,#331c00> 카를 1세
(Kaiser Karl I)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트리아의 오토 프란츠 대공
(Erzherzog Otto Franz von Österreich)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트비히 대공
(Erzherzog Karl Ludwig von Österreich)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Maria Annunziata delle Due Sicilie)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von Sachsen)
작센 국왕 게오르크
(König Georg von Sachsen)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아나
(Maria Ana, Infanta de Portugal)
오스트리아의 황후, 헝가리의 왕비 치타
(Zita, Kaiserin von Österreich und Königin von Ungarn)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작 로베르토 1세
(Roberto I, duca di Parma e Piacenza)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
(Carlo III, duca di Parma)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
(Louise Marie Thérèse d’Artois)[19]
파르마 공작 부인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ónia de Bragança, duquesa de Parma)
미겔 1세
(Rei Miguel I de Portugal)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아델하이트 공녀
(Prinzessin Adelheid von Löwenstein-Wertheim-Rosenberg)

3.2. 자녀

자녀는 총 2남 5녀. 딸을 다섯 낳고 그 뒤에 아들 둘을 낳았다. 이 중 차녀 모니카와 3녀 미하엘라는 쌍둥이 자매이다.

장녀 안드레아는 나이페르크(Neipperg) 백작가의 수장인 카를 오이겐 폰 나이페르크(1951~, [age(1951-01-01)]세)[20]와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다.

막내딸 발부르가(1958~, [age(1958-01-01)]세)는 남편의 나라 스웨덴의 국회의원을 8년간(2006~2014) 지냈다. 당적은 온건당.

그의 손자이자 장남 카를(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의 외아들인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는 1997년생([age(1997-01-01)]세)으로, 현재 카레이서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까지 포뮬러 3 Carlin 팀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Weathertech SportsCar Championship에서는 재키찬 DC 레이싱 Jota 팀 소속으로 참전했으나 2019년 GT 레이스를 거쳐 현재 프로토타입 내구레이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르망 24시에서 팀 WRT 소속으로 LMP2 클래스 우승 및 2021 WEC LMP2 클래스 챔피언에 올랐으며, 2022년 유로피언 르망 시리즈에서 프레마 레이싱 팀으로 참전해서 우승했다. 손녀 엘레오노르 합스부르크는 1994년생([age(1994-01-01)]세)으로 패션모델 겸 보석 디자이너로 일하며, 마찬가지로 본문의 인물의 장남 카를의 딸이라 앞의 페르디난트의 친누나다. 카를의 사위이자 엘레오노르의 남편은 과거 F1 드라이버 및 FE 드라이버로 활동했으며, 벤추리 포뮬러 E 팀의 부대표를 역임했던 제롬 담브로시오.

차남 게오르크는 2004~2012년 헝가리 적십자사 총재를 거쳐 2020년 12월, 프랑스 주재 헝가리 대사로 임명되었다.# 헝가리어 이름 Habsburg György. 1993년 이후 헝가리에 살고 있고, 세 자녀(1남 2녀)도 헝가리에서 낳았다. 부인은 옛 올덴부르크 대공국 가문 출신(현재 수장과 친 사촌이고, 독일 AfD의 부 대표인 베아트릭스 폰 스토르흐와도 사촌이다.)

룩셈부르크장 대공과는 외사촌간[21], 불가리아 왕국차르 보리스 3세와는[22] 이종사촌간이다.

4. 기타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걱턱이 유전되지 않아서 주걱턱은 거의 흔적만 남은 정도였으며 게오르크 등 그의 자손들도 마찬가지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는 흔히 유전병으로 알려진 에스파냐계 합스부르크 왕조에 비해 근친혼이 덜했던 편이다. 단 목뼈가 튀어나왔던 건지 피부가 늘어진 건지는 몰라도 노인이 돼서는 목이 앞으로 흘러나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파일:오토와 루이스.jpg
독일 제국 호엔촐레른 가문의 당주였던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과도 만난 적이 있다.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오토, 오른쪽이 루이 페르디난트다.

그의 활동을 요약해보면 유럽 연합 운동의 선구자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오토는 보수적인 인물이어서 가톨릭의 기치 아래 뭉친 단일 유럽을 꿈꾸었던 사람이다. 때문에 그가 추구하던 단일 유럽은 당연히 다른 기독교 종파에서부터 이슬람교도, 심지어 불교도도 유럽에 극소수나마 살아가는 현실에선 이뤄질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선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일본과 친분이 있기도 하다.[23]오토 대공은 종전 후 일본 방문 때 종교·종파에 구속되지 않고 사찰을 참배했고,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이 중에서 오토 대공이 참배한 신사는 야스쿠니 신사도 포함되어 있다.#

5. 매체에서

  • 2차세계대전 배경 전략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다양한 대체역사 루트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파일:오토 폰 합스부르크(Hearts of Iron IV).jpg
    • 확장팩 Death or Dishonor: 헝가리 왕국으로 합스부르크 대공 초청 중점을 완료하면 지도자로 나오며,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형성할 수 있다.
      AI는 잘 선택하지 않지만 한다면 헝가리 왕국 상태에서 이미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독일 혹은 오스트리아에 독립 보장을 걸고 이를 침략하려는 독일에게 무의미하게 저항하다 헝가리도 합병당하는 결말을 맞곤 한다. 설령 운좋게 오헝제국을 설립하더라도 전쟁 중 추축국 편에 가담하게 될 확률이 높다. 합스부르크 옹립 시 세 진영 모두 불편한 반응을 보이는데, 헝가리의 NF는 주로 연합 소속 국가와 싸우게 되고 코민테른은 관계가 호전되지 않으며 그나마 연합국과의 전쟁에 쓸모 있다고 판단한 추축국이 오헝제국을 받아준다.
    • 확장팩 Waking the Tiger: 독일을 잡아서 히틀러를 몰아내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킨 후, 영불과 맞서는 루트로 진행하면서 중점을 찍다 보면 오헝제국 재건 중점이 풀린다. 이 중점을 완료하면 오, 헝, 체코의 비동맹주의 지지도가 과반수일 때 오헝제국으로 합쳐지는데 이 때 만들어지는 오헝제국은 오스트리아의 코드와 일반 중점을 쓰며 오토가 집권한다. 그냥 오스트리아나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오헝제국 루트를 타지 않았을 때)로 땅을 얻어서 디시전으로 만드는 오헝제국에선 오토가 집권하지 않는다. 오헝제국 루트일 때 헝가리로 디시전을 누르면 딱히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 1.5.4 버전까지는 이 상태에서 오헝제국이 AI일 때 플레이어인 독일 제국에게 통합을 제의할 수도 있었는데 독일이 통합을 받아들이면 오헝제국의 영토와 병력이 모두 독일에게 귀속되었다. 독일이 OP가 되는 지름길이라 1.6 패치 이후로 사라졌다.
    • 확장팩 No step Back: 폴란드 왕정 루트 중 카를 알브레히트 폰 합스부르크를 옹립할 수 있는 루트가 추가되었는데 이 루트에서 폴란드는 헝가리에게 오토 옹립을 강요할 수 있다.
    • 유저모드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독일이 세계대전에서 승리했고 오스트리아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중제국은 위성국들이 맹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뭉친 상태라서 이벤트를 잘 타야 이중제국을 제대로 통합할 수 있다. 설정이 바뀐 후엔 그의 아버지 카를이 계속 재위를 유지하고 있어서 오토는 선거 이벤트에서만 등장한다. 애초에 전쟁에서 이겼고 현실의 사인도 망명 중 병에 걸렸는데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아 그런 것이니 카를 1세가 제위에서 물러날 일이 없는 셈.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카를이 죽고 오토가 뒤를 잇는데, 유일한 옥의 티는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의 명칭이 '오토'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의 세례명은 "프란츠 요제프"이다. 정상적으로 즉위를 못한 인물이고 기나긴 미들네임 중 하나인 오토를 오랫동안 써왔기에 착각했을 수도 있고 일부러 그리 설정한 것일 수도 있다.
    • 유저 모드 Equestria at War: 그리포니아 제국의 그로버 6세의 모티브로 보인다. 플레이어가 어느세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온건한 황제부터 폭압적인 황제, 주체사상의 수령, 역사학자, 평범한 시민, 학생, 꼭두각시, 몰락한 귀족, 차가운 시체, 유모의 아들, 미래의 대통령 후보 까지 다양한 삶을 살수 있게 된다. 상편, 하편

[1] 오스트리아 법률에 의거해 법적 이름에는 'von'을 제외한다.[2] 1925~2010[3] 1953년[4]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수장.[5] 생제르맹 조약으로 과거 제위 계승자로서의 권한 행사를 완전히 포기하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충성맹세를 하든가, 아니면 국외추방을 택하라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강압에 굴복했을 때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정치를 계속하고 싶어서 황태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매우 굴욕적인 처사에도 굴종했다는 회한이 담긴 말. 즉, 제정 복고 요구를 포기하고 공화국 시민으로 살았어도 말년까지도 황태자로서의 자부심과 제정 복고를 못한 것에 대한 깊은 아쉬움이 있었다.[6] 둘 사이의 나이차는 자그마치 82살로 둘 사이의 촌수는 5촌이다. 한 사람이 사진도 없었던 절대왕정 시절에 태어났다면 다른 한 사람은 스마트폰 시대까지 보고 죽은 셈이다.[7] 헝가리에서는 오토 왕(1305~1307)이 있어서 다음 헝가리 왕 오토는 오토 2세가 된다.[8] 물론 이건 카를 1세가 폐위당하고 열악한 환경과 추방당한 실의로 인해 폐렴을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요절했던 나이 기준이다. 만약 카를 1세가 제위를 잃지 않고 폐렴을 조기에 치료해 원래 역사보다 더 장수했다면, 실제로 저만큼 오래 재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당대의 폐렴은 정말 치료하기 힘든 난치병인지라 폐위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제위에 있었다고 해도 완치해서 오래 살았을지는 확신할 수는 없다.[9] 심지어 압스부르고도 종교 쪽으론 유별나게 보수적이었지, 그 외 다른 분야에서는 부르봉 왕조 등 다른 왕실과는 달리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10] 공교롭게도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이런 면을 일찍이 보고 동유럽에서 적대해왔다.[11]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기준으로 하면 12촌 손자뻘이다.[12] 한스 아담 2세의 할머니 엘리자베트 아말리가 오토의 할아버지인 오토 대공(카를 1세의 아버지)의 여동생이므로 6촌 동생이다.[13] 앙리 대공의 할아버지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자와 오토 대공의 어머니 치타 황후가 친남매이고, 앙리의 할머니 샤를로트 여대공이 어머니 치타의 이종사촌이니 앙리 대공은 오토의 5촌 겸 7촌 조카이다.[14] 시메온 2세의 할머니 마리아 루이사가 오토의 모친 치타 황후의 이복언니이므로 5촌 조카이다.[15] 후백(gefürsteter Graf) 또는 제후백은 황제로부터 일반적인 백작 이상의 권위를 인정받은 작위다.[16] 합스부르크 왕가가 제위에 있던 시절에는 이 두 번째 보고에서 그냥 고인의 제정 지위(예: 황제, 황후, 황태자) 하나만 읊었는데, 오토 대공은 제정 폐지 후에도 정치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한 인물이라서 다른 직함, 경력들을 읊는 분량이 많아졌다.[17] 루이 16세가 본성인 카페라는 성씨를 쓴 루이 카페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것처럼, 군주 가문인 표현을 빼는 경우, 군주가 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본성을 쓴다. 한 왕조가 수백 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설령 정치적인 난국으로 인하여 왕이 폐위되더라도 왕호를 박탈할지언정 본명이 아닌 '군'의 호칭은 남겼던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 다만 폐위당했다고 이씨도 아니라고 한 적은 없으니, 외스터라이히를 xx군에-합스부르크를 이씨에 대응시키면 얼추 맞는 셈이다. 이처럼 동양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었는데, 고대에는 성과 씨가 다른 개념(성은 혈족이고 씨는 지역)이었다. 예를 들어 강태공강족 출신인데 여(呂) 땅의 제후가 되어서 성은 강, 씨가 여가 되었다. 이 개념은 한국일본에도 전해졌다. 중국 한나라 시기쯤 되면 성과 씨가 합쳐졌지만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시기 우지라는 이름으로 역사 깊은 무사 가문에 남아 있었다.[18] 제정 폐지 후 무려 93년 후까지 살았다.[19] 샤를 10세의 차남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장녀[20] 마리 루이즈의 2번째 남편 아담 알베르트 폰 나이페르크의 전처 소생 아들인 에르빈 폰 나이페르크의 고손자이다.[21] 오토의 어머니 치타와 장 대공의 아버지 펠릭스 공자가 친남매 지간이다.[22] 보리스 3세의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가 오토의 어머니 치타의 이복언니다.[23] 근대화 시기 이후 현재도 오스트리아와 일본은 외교적으로 친분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뮤지컬 자벳의 다카라즈카판 체결 이후 더 외교적으로 강화되었다. 2019년 토호판 엘리자벳 공연땐 오스트리아 정부가 토호판 엘리자벳 관련 자들에게 공로상을 수여했을 정도. 여기에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도 오스트리아와 일본의 외교적 친분관계에 포함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