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9:11:38

프란시스코 프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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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 공작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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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국 초대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
파일: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모습.jpg
본명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힐도 테오둘로 프랑코 이 바아몬데 살가도 파르도 데안드라데[1]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Salgado Pardo de Andrade
출생 1892년 12월 4일
스페인 왕국 갈리시아 라코루냐주 페롤
사망 1975년 11월 20일 (향년 82세)
스페인국 마드리드
묘소 스페인 마드리드 밍고루비오 묘지
재임기간 초대 스페인국 카우디요
1936년 10월 1일 ~ 1975년 11월 20일
초대 스페인국 각료평의회 의장
1938년 1월 30일 ~ 1973년 7월 8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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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ffd700><colcolor=#b70707,#b70707> 배우자 카르멘 폴로 프랑코
자녀 장녀 마리아 델 카르멘 프랑코
학력 스페인 육군사관학교 (졸업)
스페인 톨레도 육군보병학교 (졸업)
미주리 군사 아카데미 (졸업)
종교 가톨릭 (세례명: 바오로)
신체 163cm, 62kg[2]
사상 프랑코주의
최종 당적
군사 경력
복무 에스파냐 왕국 육군
1907년 ~ 1931년
에스파냐 공화국 육군
1931년 ~ 1936년
에스파냐국 육군
1936년 ~ 1949년
최종 계급 원수 (에스파냐국 육군)[3][4]
원수 (에스파냐국 해군)
원수 (에스파냐국 공군)
주요 보직 에스파냐국 명예 최고총사령관
참전 멜리야 전쟁
리프 전쟁
스페인 내전
이프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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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코 초상화.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3. 프랑코와 가톨릭4. 프랑코 통치의 유산5. 구 프랑코 묘역6. 평가7. 대중문화8. 가족9. 여담10. 참고 자료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1. 개요

우리는 투표소로 만들어진 정부 따위 믿지 않는다. 스페인 국민의 열망은 투표함 따위로 표출되지 않는다. 스페인은 그런 바보 같은 꿈은 꾸지 않는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1938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보기

과거 스페인국국가원수이자 독재자. 통칭 "카우디요(Caudillo)"는 한국어로 지도자 정도로 번역된다.

1936년 공산당 및 범 좌파가 연합한 인민전선의 집권에 위기감을 품은 스페인 우파와 스페인군 내의 아프리카 군단 파벌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의 주역으로 권좌에 올라 1939년 스페인의 독재자가 되고 1947년에는 스페인을 국민투표로 왕정체제로 되돌린 뒤 스스로 섭정이 되어 종신권력을 획득했고,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다. 프랑코 시절 스페인은 20세기 초 해군중장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섭정 신분으로 독재하던 헝가리처럼 국왕 없는 왕국이었다. 그리고 프랑코는 장장 39년 1개월 19일 동안 집권하며 역사상 가장 오래 집권한 독재자 중 한 명으로도 유명하다.[5]

본명은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힐도 테오둘로 프랑코 이 바아몬데 살가도 파르도 데 안드라데(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Salgado Pardo de Andrade)로, 줄이면 프란시스코 프랑코 이 바아몬데(Francisco Franco y Bahamonde)가 된다. 스페인인들의 정식 이름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부, 모계 성이 몇 대씩 따라붙는다.[6] Teódulo까지가 이름/세례명이고, 그 뒤가 전부 성이며 그중에서도 Franco와 Salgado는 부계, Bahamonde와 Pardo de Andrade는 모계 성이다. 프랑코의 모계 성은 대체로 갈리시아/포르투갈 계통의 가문명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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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랑코와 가톨릭

그 전 적색정권 밑에 유린을 당한 서반아(스페인) 가톨릭은 열심한 신자인 프랑코 장군이 집정한 이래 각 방면으로 갱생의 빛이 새롭다는데 내란중 파괴된 일만 오천여 개소 성당 중 지난 1년동안 다시 건축된 성당이 사천 팔백여 개소이며 공산당의 손에 순교한 오천 오백여명의 성직자를 보충하기 위하여 전국 신학교의 문을 일제히 열고 신학생을 받기 시작한 바 각처에서 천주성소에 응하는 열심한 소년이 답지하여 서반아 가톨릭은 부활 도중에 있다고 한다.
"서반아(스페인)에 가톨릭 부활", 1941년 5월 12일, 경향잡지
파일:external/arthuride.files.wordpress.com/roman-catholic-bishop-endorses-fascist-francos-spain.jpg
스페인 가톨릭의 파시스트 경례를 하는 톨레도 대주교이자 스페인 총대주교 이시드로 데 고마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가톨릭은 프랑코 체제의 정치적 우군이 되어주었고 이후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강압적인 독재를 하여 많은 피해자들이 나올 때도 스페인의 주류 가톨릭 고위층에선 침묵했다. 프랑코 정부 측에서 독재정권의 편에 선 세력이나 그 하수인들이 공화주의 좌파 세력을 말살시키고자 좌파 정치인이나 운동가들의 아이를 몰래 병원에서 빼돌려 살해후 암매장하거나 다른 가정에 돈을 받고 팔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스페인 가톨릭은 아이들 납치를 반대하기는 커녕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조직적으로 도왔다. 나중에는 범죄 대상이 좌파진영을 넘어 빈곤층 또는 동거커플 등 혼외관계에서 태어난 아기들로 확대되었다. 여기에는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종교적으로 신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훨씬 낫다는 그릇된 믿음이 작용한 것으로 지적된다. 그 결과 195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스페인에서는 이런 식으로 수만 명의 신생아가 빼돌려져 강제입양되거나 살해 후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1 #2

가톨릭 교회 당사자들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위의 교회 상류층의 비리와 사회적 무책임함은 주교단 등 고위 사제들 중심으로 존재했지, 대다수 마을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일반 신부들은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저런 착취적인 구체제의 희생양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내전이 터지고 좌파들이 자기네 교회와 성직자, 수녀들을 테러하는 것과 달리 우파에서는 스페인 전통이라며 치켜세워주는데 좌파 편을 드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공화국 정부, 좌익 혁명 단체들과의 합의로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공화파에서 싸웠지만, 사회적으로는 구체제를 유지하며 군종사제 등을 유지했던 바스크 지방의 경우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런면에서 어느 정도는 공화파의 극단적 반교회 성향이 가톨릭교회를 반대 진영으로 몰고간 면도 없다고 할수는 없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 당시의 교회를 보는 시각을 복잡하게 만든다. 근래에 스페인 내전에 대한 최근의 학계 담론을 짤막하게 정리한 사라고사 대학의 훌리안 카사노바 교수의 <스페인 내전 약사> 역시도 당시 교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지만, 동시에 당시 좌파진영 내 강경파들의 성직자와 수도자 및 가톨릭 평신도에 대한 무차별 테러 행위, 특히 성당 묘지까지 파헤쳐서 죽은 수도자들의 시체를 전시하는 극단적 만행 등을 공화파가 제어하지 못했던 것은 아직까지도 스페인 진보진영의 아킬레스건임을 명시하고 있다.

게다가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시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지만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내전이 휩쓸고 간 이후 프랑코 정권 내부에서의 가톨릭에 기반한 반정권 인사도 많이 배출되었다. 또 피상적으로나마 현대 스페인 가톨릭 사제들 또한 이 시절의 얘기는 피하거나 아니면 소극적으로나마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코 독재 말년에 이르면 결국 스페인 가톨릭 주요 성직자들까지도 프랑코의 독재에 불만을 드러냈다. 프랑코가 반공정책을 펴고 가톨릭을 수호했다고 하지만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 프랑코의 강압적이고 비상식적인 독재 통치에 스페인 가톨릭 교회조차도 결국 엄청난 염증과 답답함을 느꼈다는 얘기다.

스페인 내전과 연관되어 스페인 사회 내에서 가톨릭 교회의 입지가 단단히 꼬인 상황이다. 가톨릭 교회 전반은 2차대전 당시 파시즘에 대체적으로 무기력하게 협조한 과거를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이러한 점(근대 세계와의 대립보다 화해, 공존을 추구하는 방향)이 드러난 게 2차 바티칸 공의회였으나, 프랑코 정권이 필요했던 가톨릭 교회는 바로 전통 가톨릭과 유사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페인 인구의 절대 다수가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반교회주의 또한 대중적으로 강한 나라다.[7] 비록 모든 가톨릭 성직자들이 프랑코와 결탁한 것은 아니나 많은 성직자들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며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니 인식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영화 등의 매체의 경우, 같은 우파 쪽이라도 팔랑헤나 프랑코 휘하의 군인들은 가차없는 인간 말종으로 묘사하는 반면 그나마 성직자들이나 비교적 종교기사 코스프레를 하는 카를로스파는 개념으로 쳐준다. 아직까지도 당시를 해석하는 시각이 단순 선악 이분법이 아니라 복잡하게 꼬여있을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한 예다.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이 사람도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스페인 내에서 존재한다. 빨갱이들로부터 스페인과 가톨릭을 수호했다는 이유에서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부나 그러하고 로마 교황청 및 가톨릭 주류는 씹는다. 가톨릭 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겪으며 자유주의와 어느 정도 관계 회복을 하면서 프랑코 정권과 사이가 급속도로 냉각해졌으며, 정권 말기에는 가톨릭 교회 내의 반체제 인사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아니, 원론적으로 현대 스페인 가톨릭 교회가 현재 처한 딜레마 자체가 프랑코와의 야합에서 비롯 된 바가 많으며, 스페인 가톨릭 교회도 이 문제를 절실하게 자각하고 있는 만큼 저런 프랑코 정권 옹호 여론은 오히려 교회 측에서 먼저 나서서 헛소리 트롤링 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경우가 많다. 프랑코 사후에도 활동을 계속한 마누엘 프라가[8] 같은 프랑코파 정치인들과 피오 모아 같은 학계 내의 수정주의자들은 스페인 가톨릭 교회와도 상당히 냉담한 관계이다.

프랑코 정권을 대놓고 긍정할 정도의 스페인 현지 골수 우익은 전통적 우파적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일환으로 가톨릭 정체성을 강조할 뿐이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바티칸과 교회 자체는 '자유주의와 결탁한 변절자' 비슷한 존재로 보았다.[9]

50년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놓고 나치 경례를 하며 프랑코와 시시덕거리는 톨레도 총대주교의 사진 같은 역사가 지금도 당장 검색하면 좌르륵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스페인 가톨릭 입장에서 프랑코 정권은 가능하면 지우고 싶은 깨끗치 못한 역사이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냉담하다.

스페인 가톨릭교회 주류는 프랑코와 관련된 논란을 되도록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에서 강성보수파에 속하는 전통 가톨릭 세력은 지금도 프랑코를 두둔하거나 미화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독립한 팔마리아 교회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자기네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했을만큼 프랑코와 그의 체제를 미화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전(前) 에콰도르 대통령이거나 안토니우 살라자르 전(前) 포르투갈 총리 등이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존경하는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교회 신자도 적지 않은 편이다.

4. 프랑코 통치의 유산

프랑코의 비호 아래 성장한 기득권 세력의 고착화, 그리고 그들의 전횡, 실정과 뿌리깊은 부정부패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요소들은 현재 스페인 국민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경제적 고통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스페인은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에서 측정한 청렴지수에서 2015년 기준 58점을 받아 조사대상 168개국 중 36등을 기록하였다. 특히 스페인은 지도부 주변층이나 지방 토호, 왕족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 들어 스페인에서 벌어진 큼직큼직한 부정부패 스캔들의 대표적인 사례로, 바로 당시 국왕의 사위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랏돈을 580만 유로[10]나 횡령했다가 걸려서 해외로 반(半) 귀양을 간 일이 있다. 또 다른 예로, 스페인 고속철도 노선을 보면 도저히 수익을 낼 수가 없는 외딴 시골 마을이나 아예 대놓고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역을 세워놓은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것 또한 지역 토호들의 욕심과 표심(票心)에 눈이 먼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기업가들 사이의 정경유착의 고리가 핵심 원인이다. 이런 일들을 한번 두번 겪으면서 잘못이 개선되는 게 않고 새 노선을 깔 때마다 유령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스페인 자국 주요 언론들도 대차게 깔 정도다.

그 밖에도 수많은 고위층의 비리 스캔들이 자고 일어나면 터진다. 무엇보다도 강자 앞에선 한없이 나약하면서 약자 앞에서만 강한 사법부의 태도 또한 스페인의 부패척결을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로 꼽히며, 이것 역시 프랑코식 철권통치의 어두운 유산 중 하나로 지적받는다(관련기사(스페인어)). 프랑코의 장기 집권 기간 내내 중앙의 귀족들과 지방의 토착 유지들, 그리고 금융권과 대기업들이 서로 치밀하게 결탁하여서 국가 시스템 내부에 깊숙히 파고들어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가 이들에 의해 잠식당해버렸기 때문에 이들을 뿌리뽑는 게 쉽지 않다.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정치권과 권력기구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크다.

프랑코는 전형적인 개발독재자였다. 독재자였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국가를 빈곤으로 몰아넣는 정책까지는 펼치지 않았다. 프랑코 사후 결국 그의 정권이 붕괴된 이유[11] 역시 프랑코 정권이 개발독재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이 특별히 지하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당시 스페인은 이미 19세기 말 해외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개발독재로 정권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즉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개발독재를 펼친 것은 그가 무슨 스페인 국민들을 사랑하는 유능한 애국자여서라기보다는 정권 유지 차원에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굳이 개발독재를 하지 않아도 정권 유지가 가능한 나라에서는 프랑코보다 더 머리좋고 유능한 독재자들도 굳이 개발독재를 하지는 않는다.[12][13] 스페인 내전을 시작한 건 물론 군부였지만 그 군부도 쿠데타 계획 당시부터 이런 우익 세력과 공동으로 계획을 추진했고 이런 일반 우익 집단들의 지분은 무시할 수 없었다. 프랑코는 이렇게 특성 때문에 이런 여러 세력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그 결과가 프랑코 정권의 개발독재이다. 프랑코의 경제개발은 정경유착을 통해 이루어졌고, 다른 우파 진영들의 쿠데타를 예방할 겸 경제발전의 이권은 우리가 남이가 마인드로 주변 친인척들과 정권을 지탱해주는 계층에게 뿌려졌다. 다른 한편으로 개발독재 정책이 진행된 결과, 경제상황도 안정되고 외국과의 교류도 늘어나면서 강경하던 스페인 우파 진영에도 온건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과거사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 비리와 부정부패를 지도하는 계층이 주로 왕족, 지방 옛 귀족 가문들과 결탁 된 금융권, 프랑코 정권의 비호 아래 큰 몇몇 재벌 등 어디어디 공작가 하면 많은 국민들이 알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중앙 왕실에서부터 동네 토호들까지 위아래로 고르게 썩은 물이 흐른다. 이 때문에 2010년대 재정 긴축의 그림자 아래 사는 현대 스페인인들은 아예 이런 체제를 고착시켜 버린 프랑코 정권과 이를 승계한 현대 보르본 3차 복고 왕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구 제2공화국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아예 당장의 헌정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여론이 상당하다.

같은 발상으로 반대편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고 네그린과 결탁해 공화진영에서 트롤링을 일삼은 공산당은 우익에게는 당연히 집중적으로, 좌파 내에서도 극딜당하며 현대 스페인 공산당은 의례적으로 '그 시절의 잘못된 선택을 반성한다'라는 식으로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반면 스페인 고유의 민중적 전통에서 시작하여 민중의 영웅관에 딱 부합한다는 문화적 버프를 잔뜩 받은 전국노동연맹(CNT)이나, 양쪽에서 버림 받은 시대의 피해자인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같은 사람들은 비교적 전반적인 칭송을 받는 편이고, 적어도 그 순수성은 이념과 무관하게 인정을 받는 편이다.[14][15] 정작 공화국 정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민주주의 성향 집권여당 사회노동당(PSOE)은 예나 지금이나 낭만적 미화의 대상이 되기 힘든 거대 정당이라서 과거에는 공산당이나 CNT에게 휘둘렸고, 현대에는 그냥 무능하다고 까인다.

하여튼 저렇게 수십만의 정적들을 학살하고, 좌파 성향 시민들을 나치 치하 독일의 소위 '열등민족'처럼 취급하고, 국제사회의 천민이 되도록 70년대까지도 처형에 정치범 탄압하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음에도 프랑코는 스페인의 좌파세력을 박멸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스페인에서 탄압받던 좌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통해 프랑스라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했던 선진 강대국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었고, 배편 하나만 타면 언어도 똑같으며 문화도 동질성이 강하고, 20세기 초중반 시점에서는 페닌술라레스(Peninsulares)라 부르며 스페인 본토 출신인들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중남미 국가로도 얼마든지 튈 수 있었기 때문이다.[16] 공간적인 문제를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 봐도 스페인의 좌파 혁명가들은 나머지 유럽 대륙과 미주의 동지들과 행보와 투쟁을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면서 장시간에 걸쳐 유기적으로 형성한 국제 좌파 네트워크의 일부이기도 했다. 프랑코 체제 아래서 스페인 좌파는 자국 내에서는 뿌리가 뽑히거나 지하로 들어가야했지만, 전 세계에서 수 만명의 반파시스트 투사들이 국제여단으로 참전했던 것부터 시작하여 2차대전 이후 스페인의 반체제 인사들은 의탁할 친구와 동지들이 유럽 각지에 많았으며, 심지어 샤를 드골 같이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프랑코에 더 가까운 우파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전후 여론과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에 공헌했던 빚을 고려하여 스페인 좌파 반체제 인사들이 자국에 정착하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피레네 산맥 넘어 지하 활동을 하는 것도 묵인해줬다.

이런 대외적인 여건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 CNT, 사회주의 노동자당 산하 UGT(Union General de Trabajadores, 노동자 총연맹), 공산당 산하 CCOO(Comisiones Obreras, 노동자 위원회) 같은 거대 노조들은 스페인 내전 이전부터 정치판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도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프랑코 치하에서 가해진 탄압도 이들의 활동을 지하로 몰아 넣을 수는 있어도, 이미 스페인인, 비스페인인 각계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활동을 필두로 20세기 민중 운동사에서 신화의 영역으로 올라서 수 많은 활동가들과 추종자들을 재생산할 역량을 얻은 좌익 세력을 근본적으로 박멸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폴 프레스턴, 휴 토머스 등을 비롯한 현대에 스페인 근현대사의 거장으로 추앙 받는 역사학자들 중 상당수는 프랑코 정권이 아직 현재진행형이었을 때 부터 외국인 신분을 이용하여 반체제인사들을 보호했고, 1964년 스튜어트 크리스티라고 하는 스코틀랜드의 아나키스트 청년이 프랑코를 암살하려고 마드리드 백주 대낮에 폭발물을 대거 소지한 체로 체포당했을 때도 프랑코 정권은 자국민 앞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하지만 진짜배기 강대국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며 3년 동안 카라방첼 감옥 특실에 구금하다가[17] 버트런드 러셀, 장폴 사르트르 같은 전 세계 지식인들의 압력 아래 석방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자체적으로 막강한 조직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지 기반이 뿌리 깊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이기도 했던 스페인 좌익들이 자국 내 활동 터전은 잃었어도 2차대전 이후 유럽과 미주 전역에서 성장한 시민 사회, 대중 매체와 적극 연계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정권은 이미 더 조질 것도 없는 자국 내의 지하 세력 빼고는 아예 반체제 세력을 터치도 못하는 팔다리 묶인 입장에 빠져버린 것이다. 정권의 지상과제이자 존재 이유를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며, 분열을 용납하지 않는 통일 스페인 민족 국가의 반좌익 레콩키스타라고 규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60년대, 70년대 들어서 공산당,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숨겨 왔던 지하 조직과 함께 정권에게 이빨을 들이대기 시작했고, 프랑코 사후에는 몇년 지나지도 않아 다시 당당한 사회의 주류 여론이자 거대 이해 집단으로 재부상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한다.[18] 그리고 이들 좌파 단체, 정당들이 재부상을 넘어 30년 넘은 세월이 흘러 기성 세력으로 정착하기까지 한 2020년대 현재 스페인에서 진보좌파 세력들은 헌정 질서 자체를 제2공화정으로 복고시킨다 vs 만다로 우익 세력과 치열한 줄당기기를 하고 있으며[19] 프랑코가 그렇게 지우려고 했던 제2공화국의 삼색기는 스페인 어디를 가든 시위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프랑코가 엄청난 인권 탄압과 국제적 멸시를 감수하면서도 추구했던 강압적인 국론 통합이란 지상과제는 그가 죽자마자 바로 실패한 셈. 50년 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한 짓을 반대편인 우파에서 선례를 남긴 것이다.

프랑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프랑코 정권이 자국민 정치범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독소전쟁에서 독일 편으로 파병한 것은 어물쩡 넘어가면서 프랑코의 노련한 외교술로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영국과 독일 상대로 최대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적으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라는 점이 논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프랑코 정권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지원 덕분에 탄생했긴 하지만 그 외에도 영미의 암묵적, 간접적인 지원의 혜택도 상당히 누렸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페인은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하고 식민지를 다 까먹으면서 게임 체인저로 활약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프랑코 정권은 독일, 이탈리아 외에도 영국, 미국과의 외교 라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것이 쌍방으로부터 나름의 신뢰 혹은 무시를 당하게 된 원인이다. 물론, 연합국보다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연합국은 스페인에 경제적인 제제는 일종의 압력 행사수단으로 걸기는 했다.[20]

2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 약 30년의 기간은 서방이든, 공산주의 동구권이든, 이제 막 생긴 제 3세계든 세계 경제 자체가 급성장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마셜 플랜의 원조를 받아가며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전 경제 수준을 대부분 회복한다. 1950년대 후반 쯤 되면 전쟁 전에도 상상치 못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와 스페인 내전의 낙인으로 인하여 왕따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까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군터를 비롯한 동시대 관찰자들에게 '스페인은 지정학적으로만 유럽이지 차라리 아프리카에 속한다고 보는 게 맞다' 따위 소리나 듣고 있었다. 이처럼 냉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제적인 인식 역시 마냥 프랑코에 우호적이지만도 않았다. 애초에 내전 발발 시점이라면 모를까 파시즘이나 우익 성향 독재 하면 이를 가는 유럽에서 대외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정치적 센스를 요구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기회주의적, 보신주의적 면에선 능력자였다고 볼수 있다. 이게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득으로 이어지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그리고 사실 프랑코는 의외로 자기가 모든 걸 다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정치 체제 설계면에서는 세라노 수녜르 같은 자기 동서라던가, 핵개발[21]이나 경제개발 등 내정면에서는 후안 블랑코 같은 믿을 만한 후계라던가 믿을만한 부하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기와 부하 장관들이 나이를 먹어갈 수록 프랑코는 더욱 사냥이나 그림 등 자기 취미나 사생활에 몰두하고 나랏일은 장관 아래 관료들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여줬다.[22] 그런데 의외로 그 부하들이 나름 테크노크라트들이라 경제개발 등 내정 면에서 성과를 보여줬다.

5. 구 프랑코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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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Valle de los Caídos).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 내부에 있었던 프랑코의 무덤.[23]

프랑코 묘역을 포함해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사망한 전몰자 4만 여 명의 무덤이 위치한 전몰자의 계곡은 공화군 포로 1,200명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코 비판자들은 그의 묘역을 역사교육센터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치의 만행을 반성하는 생생한 교육현장으로 변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코 추종자들은 오히려 그의 묘역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완공 후 계산한 총 길이가 교황청에서 '이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음'이라고 못 박은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조금 더 길다. 그래서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미터 짧아지는 지점에 격벽을 짓고 '여기서부터가 성당입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다고 한다.

그의 기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비화가 있다.

36.07.18 - 스페인 내전의 발발일
39.04.01 - 스페인 내전의 종전일

이 두 날짜를 각각 더하면

75.11.19 - 즉, 그가 사망한 날짜가 된다.

2019년 스페인 정부가 프랑코의 유해를 전몰자의 계곡에서 이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공식적으로 스페인 정부의 이런 이장결정 및 추진은 유럽에 재래하는 극우민족주의가 실체감있게 다가오는 가운데 스페인 내부의 극우세력이 역시 마찬가지로 프랑코의 묘지를 매개로 결속을 시도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스페인 주재 교황청 대사가 이를 비판했고[24], 이에 대해 스페인 정부가 내정간섭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문제는 법적으로 번져 2019년 9월 24일. 스페인 대법원이 프랑코의 유해를 이장해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정부는 10월 24일에 발굴을 이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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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관을 지고 떠나는 후손들과 관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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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 묘소 이장 과정 그림 (더 타임스 제공)

2019년 10월 24일 스페인 정부는 비공개에 프랑코의 관을 이장하는 장례식을 군장으로 치렀다. # 프랑코의 관은 군 헬리콥터 편으로 60km 떨어진 마드리드 북부 엘파르도의 주립 추모공원인 민고루비오 묘지에 있는 프랑코 가문의 가족묘 예배당[25]으로 이장되었으며, 사망한지 44년만에 프랑코의 아내와 함께 합장된다. # 파묘 현장과 재안장할 묘지까지는 후손 22명과 법무장관, 법의학자, 과거 군 관계자들 일부, 카톨릭 사제들 등 극소수의 관계자들만 참여하여 조용히 치러졌다.

정부는 선전 남용 방지 차 참관자들의 휴대폰 소지를 금했다. 그 대신 스페인 정부는 언론사들에 이 비공개 행사를 제한적으로 찍도록 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장지인 프랑코 가문 묘역 앞에서 프랑코 찬양 노래를 부르는 일부 극우파들도 있었지만, 마드리드 중심가에서 시민들이 축하 파티를 벌이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6. 평가

프랑코 사후 스페인이 민주화되고 좌파 정당도 여러 번 집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코 시절에 대한 정부 차원의 역사적 재조명은 명확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민주화 이후 역대 스페인 정부는 대체로 과거를 보기보다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대 스페인의 민주정 체제가 프랑코 정권 내 온건파 세력과 제도권 온건 좌파 세력의 타협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좌파 정당들이 합법적으로 집권할 수 있는 민주체제를 열어 스페인에서 한국의 6.29 선언9차 개헌 이상의 비중을 지니는 몽클로아 협약[26]부터가 프랑코 체제에 기대며 성장한 기득권 세력의 유지를 체제 전환의 대가로 보장했다.

한편으론 그 시대가 너무 참혹했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 시절을 파헤치는걸 꺼리는 경향도 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선 민간, 학술 단체와 구 공화파 계열 정치 세력, 외부 국제 기관의 적극적인 활동, 특히 역사적 기억의 회복 위원회(Asociación para la Recuperación de la Memoria Histórica)의 활동을 통해 프랑코 사후 체제를 지배했던 소위 망각의 협약의 그늘은 서서히 물러나고 있고, 포데모스의 부상 뒤에 있는 인디그나도(Indignado) 운동으로 대표되는, 몽클로아 협약과 전혀 상관없는 현대 스페인의 신세대 정치 세력의 미래 행보에 따라서 프랑코 정권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평가도 점차적으로 많이 바뀔 여지는 있다지만, 현 헌정질서의 직계 선대 정부인 프랑코 정권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스페인에선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정치적 논쟁 거리다.

예를 들어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즉위로 스페인에 왕정이 복고되자 후안 카를로스 1세 스페인 전 국왕 주도의 민주화 개혁 정책을 지지, 추진했던 아돌포 수아레스(1932 ~ 2014) 전 스페인 수상 역시 프랑코 독재 정권 시절에 국영 방송사 사장직을 지내는 등 프랑코 정부 아래에서 경제관료로 성장한 인물이었다.[27] 게다가 1980 ~ 1990년대 IOC위원장으로 장기간 군림했고, 한국에서도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위원장으로서 잘 알려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1920 ~ 2010)는 프랑코 치하에서 온갖 특혜를 받고 출세한 인사였으며, 그가 파시스트 군복을 입고 파시스트 경례하는 사진들도 수없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와 국제평화를 위한 사도 정도로 알려지곤 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회고에 의하면 사마란치는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 전두환 대통령이 단임 약속을 깨고 영구독재를 해주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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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정치권에서도 과거 청산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8년에 스페인 의회에서 프랑코의 묘를 전몰자의 계곡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로 의회에서 가결이 났으며, 2019년에 실행되었다. 반면 이런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과 맞물려 부상한 카탈루냐 독립운동 문제도 같이 대두하면서 스페인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로 VOX 같은 극우파가 다시 주류 정계에 뛰어들면서 과거사 + 국체 문제를 포괄하는 프랑코 정권의 유산의 영향력은 여전히 스페인 정국의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 마드리드에 있던 프랑코 기마동상이 철거되었으며, 2021년 2월 23일 멜리야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프랑코의 동상도 철거되었다.#

쿠바 혁명 직후 쿠바를 떠나 조상의 나라인 스페인(프랑코 정권)으로 망명한 반공 성향 쿠바인 및 그 자손들은 여전히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프랑코 정권이 반대파에 대한 잔혹함과 별개로, 반공 정권답게 자국으로 망명해온 반공 성향 외국인들에게는 온화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28]

쿼라에 올라온 글을 보면 알 수 있듯 현 시점에서 프랑코는 스페인 국민들에게 호불호가 아주 심하게 갈리는 상황이다. 한국에서의 박정희에 대한 호불호를 따위로 만드는 수준인데, 프랑코의 지지자들은 프랑코를 '스페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찬양하며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반역죄로 기소되는 것을 원하는 반면[29] 프랑코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이 프랑코 시대에 건설된 수력 발전 댐에서 공급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물을 마시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7. 대중문화

내전기를 다룬 가장 유명한 문학 작품으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있다. 무기여 잘 있거라와 함께, 헤밍웨이가 저술한 장편소설의 대표작이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는 오웰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수기이다. 켄 로치 감독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바탕으로 영화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을 만들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집권기는 멕시코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두 장편영화, '악마의 등뼈'와 '판의 미로'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에리세벌집의 정령남쪽, 카를로스 사우라의 까마귀 기르기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

스페인 내전 시기 미겔 데 우나무노의 행적은 다룬 영화 전쟁의 시간(Mientras dure la guerra)에서 등장하는데 실제 인물과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다는 평가가 많다.

스페인을 비롯한 중남미 등 스페인어권 지역에서는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들이 상당히 많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자국 영화계를 작살낸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어서 어지간한 스페인 영화계 인사들은 프랑코를 매우 싫어한다. 관련 영화가 나오면 95% 이상 비난하는 작품일 정도.

스페인의 르포 만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반평생을 프랑코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에는 시대의 흐름을 못 이기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다 고난 끝에 자살한, 작가의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소련이 나치의 포지션에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대체역사물 게임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역사개변 최고의 수혜자로 추정된다. 히틀러가 사라진 작중 설정 상 프랑코의 스페인은 자연스레 친영미 반공노선을 탔고 영국, 포르투갈과 함께 자유 유럽의 최후의 보루였다. 리마스터 버전에서는 유독 스페인만 국가별 보너스가 풍부[30]한데 미국이 물자와 의용군 지원을 한 것을 보면 스페인 외인부대 인종제한을 풀어서 사실상 미국이 주축이 된 보수우파 버전 국제여단처럼 운용되어 연합국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대체역사소설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는 원 역사와 달리 국민파가 공화파를 선거에서 이겼기에 훨씬 쉽게 정권을 장악했으며, 추축국으로 본격 참전했다가 파시 프랑스 항복 후 제2차 반도 전쟁에서 연합군과 반 프랑코 저항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건 물론 바티칸에서 파문까지 당한 끝에 마드리드에서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다. 이후 아내와 함께 시체가 길거리에 목매달린 채 돌과 몽둥이로 얻어맞으며 원 역사와 달리 그래도 죽어서라도 죗값을 치렀다.

치모 아바디아(Ximo Abadia)는 '독재자 프랑코 잊혀진 독재자의 놀라운 이야기(원제: Frank)'라는 그림책을 만들었다. 여기서는 정사각형만 강요하고 다른 도형들을 묻어버리는 독재자로 나온다. 작가는 국민들이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다며 프랑코 시대를 다시 알리기 위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8. 가족

프랑코의 부인 카르멘 폴로 프랑코는 프랑코가 북아프리카로 파견될 때 즈음에 그와 결혼했다. 프랑코가 카우디요가 되자 그도 정치에 나서 언론 검열 등에서 주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프랑코가 병석에 있을 때 아리아스 나바로를 후임 총리로 인선하는 데 기여했다.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로부터 메이라스 공작위를 받고 스페인 대귀족(그란데 데 에스파냐)의 일원이 되었다. 프랑코 체제의 몰락 이후로는 대외 활동을 극도로 기피하고 정치에 대해서도 일체 발언하지 않다가 1988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프랑코의 외동딸 카르멘은 비야바르데 후작 크리스토발 마르니테스-보르디우[31]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 후안 카를로스 1세로부터 프랑코 공작에 서임되었다. 2008년에 회고록을 쓰면서 아버지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대해 따뜻했던 사람이라 평했고 그가 저지른 만행 등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집에서 그런 얘기를 한 번도 안 해서 몰랐다"라는 식의 입장을 보였다. 카르멘은 프랑코 재평가를 주도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국민 재단(Fundación Nacional Francisco Franco)의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32] 프랑코 추종자들의 우상처럼 되어 있다. 2017년 12월 29일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카르멘 프랑코의 장녀 마리아는 스페인 전왕 알폰소 13세의 손자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폰소 데 보르본과 결혼하여(후에 이혼함), 아들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을 두었다. 작위 절대장자상속법에 의해 카르멘 사후 프랑코 공작 자리를 이어받았다.

마리아의 장자, 즉 프랑코의 외증손자가 되는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은 현재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위 요구자로 루이 20세라 자칭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현재의 카페 왕조의 총 수장이다.[33][34] 마리아의 뒤를 이어 자칭 루이 20세가, 프랑스 왕들이 가졌던 수많은 작위들과 함께 프랑코 공작 자리 이어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2022년 10월, '민주적 기억법'이 통과되면서 프랑코 공작위가 폐지되었다.

9. 여담

  • 해외축구 갤러리에서는 FC 바르셀로나가 불리한 심판판정을 받거나 레알 마드리드 CF가 유리한 심판판정을 받으면 그의 이름을 아예 동사처럼 써서 '프랑코' 했다는 말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상술한 디 스테파노 건과 1943년 코파 델 레이에서의 엘 클라시코 경기에 대한 개입으로 인해 생겨난 통념 탓인데, 프랑코는 어느 특정 팀을 밀어주기하려는 정책이 아니라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위해 이러한 짓을 저지른 것이라 마드리드 또한 프랑코의 피해를 본 바가 있고 반대로 바르셀로나 또한 프랑코로부터 재정적 면에서 큰 수혜를 받은 사례가 다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라는 표현은 레알 마드리드를 지칭하는 부정적 대명사로 이미 널리 쓰이는 실정이다.

    사실 프랑코 독재 이전, 2공화정과 내전 시기 레알이란 수식어가 없던 그냥 Madrid CF는 친공화파, 반프랑코 성향이 강했던 팀이었다. 마드리드 자체가 프랑코군의 폭격을 맞으면서도 전쟁 내내 높은 사기와 문화적 수준을 유지했던, 한때 마드리드는 파시스트들의 무덤이 될것이다(Madrid sera la tumba del fascismo; 내전 당시 마드리드 수비전에 앞서 선전장관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만든 구호이다)라는 구호 아래 묶였던 강력한 집단적 기억이 있는 고장이고, 당시 팀은 마드리드의 공화주의적 정신을 상징하는 스페인 인민의 팀으로 사랑 받았다. 이런 레알 팬덤 내에서 프랑코와 왕실의 유산을 혐오하는 팬들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어서 종종 프랑코가 복귀시켜준 왕가의 상징물은 싸그리 떼버린 레알 저지, 팀 아이템을 자체 제작해서 파는 팬들도 많다. 이런 셔츠이런 이미지만 봐도 그렇다. 오히려 이 시절 노골적으로 군부의 팀을 상징했던건 이름부터 바로 그 마드리드에 폭탄 떨궜던 파시스트 진영 항공사들이 주축으로 만들었다 하며 아비아시온 나쇼날로 불렸던 AT 마드리드였는데, 지금은 남부 마드리드 좌파 동네의 AT 팬들이 레알 팬들더러 왕실의 팀, 권력가의 팀이라 놀리고 있다.

    나중에 이 떡밥은 국내 방송들이 무분별하게 물어서 2017년 카탈루냐 독립 투표 사태 때 '독재 추종 마드리드 vs 독재 항거' 같은 구도를 짰고, 결국 국내 학계에서 이를 직접 비판하는 논문까지 나왔다.[35]
  • 월간 항공에선 그를 유태인이라고 한 바 있다. 프랑코 유대인설은 스페인 내전 시기까지 궤를 올라가는데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프랑코라는 성을 쓰는 유대인이 많았기 때문에 프랑코도 유대인이 아니겠냐'는 인민전선의 황색선전이 시초다.[36] 1540년 이후로 스페인에서는 콘베르소(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및 후손)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어(Helen Rawlings, The Spanish Inquisition, 15), 유대교 신자가 아니라 '혈통적 의미에서의' 유대인 후손들이 스페인에 잔존해있기는 했다. 하지만 무슨 하플로그룹 같은걸 연구한다면 모를까, 스페인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동화되었기에 이런 식의 '이방인' 논란은 무의미하다.
  • 아돌프 히틀러가 그랬듯이 나름대로 숙련된 화가이기도 했다. 시간이 생기면 즐기는 취미가 골프, 사냥, 낚시와 그림 그리기였기 때문에 취미삼아 하던 것이 내공이 쌓인 케이스다.[37] 참고로 프랑코는 17세기 스페인 그림과 고야의 태피스트리 만화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로 풍경과 정물화를 주로 그렸다고 한다. 그 부하인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제독은 그런 프랑코보다도 그림 실력이 좋았다고 하며, 특히 데셍이나 소묘를 잘했다고 한다. 기사 프랑코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히틀러가 손도 대지 못하던 인물화도 수준급으로 그려냈고,[38] 용맹한 이미지의 동물을 그린 것이 많다. 다만 생전 악행의 업보에서인지 프랑코의 그림은 1978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한다.
  • 영국인 아나키스트 스튜어트 크리스티1964년 만 18세라는 어린 나이로 프랑코에게 플라스틱 폭발물을 던져 폭사시키려고 했으나 동년 8월 11일 마드리드에서 발각되어 실패하고는 2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39] 이후 크리스티는 버트런드 러셀장폴 사르트르 등의 명사들의 지원과 도움, 어머니의 탄원으로 3년 뒤인 1967년 9월 21일 석방되었고, 이후에는 영국에서 아나키즘 활동을 지속하다가 2020년 8월 15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칠레의 극우 군사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롤모델로 삼은 인물이기도 한데, 실제로 피노체트는 프랑코의 장례식에 참석한 몇 안 되는 국가원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스페인이 식민지로 지배해오다 1968년에 독립한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도 그를 존경했다. 응게마는 식민부역자였던 자신의 경력에 콤플렉스가 있었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관계가 나빠져서, 응게마가 적도 기니에 있는 스페인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중국 및 쿠바와 관계를 맺었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코에 대한 존경심은 유지했으며, 프랑코 역시 응게마 정권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1971~1976년 적도 기니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국가 기밀로 선포하며 스페인 언론이 적도 기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언급하는 것을 범죄라 규정,[40] 적도 기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였다.[41][42] 응게마 집권기는 물론 지금도 당시 적도 기니의 지옥보다도 더 끔찍했던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 영향이 크니[43] 프랑코는 은폐자로서 사실상 응게마의 만행의 공범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 후안 페론도 프랑코와 관계가 있던 인물로 1기 집권 시에는 프랑코 정권을 인정해주었으며, 1958년부터 귀국 이전까지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그렇지만 프랑코는 에비타는 높게 평가한 데 반해서 후안 페론은 프리메이슨에게 돌려쌓인 그냥 흔한 정치인으로 여겨서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망명을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어디까지나 1기 집권 시에 프랑코를 인정했던 보은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사무적인 관계로, 직접 만난 적은 몇번 없었다. 이는 페론이 정치시작 당시에는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좌파적, 자유주의적 의제를 적극 포용한 데다가, 결과적으로 극우파 군부정권에 의해 실각되어서 극우파 정권을 무너트리려 하는 등 민주화진영에 서게 된 반면에 프랑코는 죽을 때까지 반공노선을 내걸으면서 철권통치를 한 차이점 때문이었다.
  • 김종필의 회고에 의하면 프랑코는 반공주의자를 자처햇던 인물이었음에도 베트남의 호치민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었다고 한다.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빈곤하지만, 국력이 훨씬 우위인 프랑스와 싸워서 이겨 독립하고, 미국과도 동동하게 맞선것에 대해서 깊이 감명을 받은것이었다.
  • 그가 사망한 후 가족들에게 물려준 재산은 150개 이상의 회사 네트워크와 현재 가치로 3억 5,000만 ~ 6억 유로(약 4,780억 ~ 8,19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프랑코의 사후 그의 미망인인 카르멘 폴로는 남편이 보유했던 보석, 골동품, 예술품, 서류 상자를 스페인에 있는 프랑코 일가의 영지와 외국으로 옮기는 일을 감독해 왔으며, 그녀의 아파트의 방에 있는 서랍에는 온갖 귀중한 장신구와 금은보화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 프랑코는 집권할 동안 자신에 대한 우상화도 실시하여 자신을 공식적으로는 국가 원수 각하라고 부르며 비공식적으로도 마지막 십자군의 지도자, 공산주의 및 공범에 대한 해방 전쟁의 지도자로도 부르게 했고, 그가 집권할 동안 스페인의 어린 학생들은 '신의 섭리가 스페인을 혼돈, 무신론, 빈곤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프랑코를 보냈다'고 배워야 했다. 그리고 프랑코는 전통적으로 왕의 직위였던 대장의 제복을 입고는 엘 파르도 궁전(Palacio Real de El Pardo)을 자신의 거주지로 삼았다.
  • 생전 그가 남긴 사진들을 보면 군복이 꽉 끼거나 뱃살이 튀어나온 것을 볼 수 있는데, 비만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과체중이었던 듯하다. 심지어 얼굴에도 살집이 꽤 있는 편이라 더 부각된다.[44] 히틀러는 그를 "음흉한 돼지"라고 표현하기도 했을 정도.
  • 영어 발음이 매우 서툴렀다.#

10. 참고 자료

  • Wayne H. Bowen. (2006). 《Spain During World War II》#
  • Ismael Saz. (2003). 《España contra España: los nacionalismos franquistas》#
  • (PDF) <Exploring the History of Leisure and Tourism in Spain> M. barke
  • Capnuano & Carli, 2012, "Antonio Vallejo Nagera (1889-1960) and Eugenics in Franco's Spain. When science was the argument for offspring's ownership"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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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후안 카를로스 1세 미겔 데 세르반테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아돌포 수아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펠리페 6세 파블로 피카소 예수의 테레사 펠리페 곤살레스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이사벨 1세 세베로 오초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호세 사파테로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살바도르 달리 안토니오 가우디 엘 시드 알폰소 10세 페르난도 알론소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프란시스코 데 고야 프란시스코 프랑코 안토니오 마차도 미겔 인두리안 미카엘 세르베투스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로라 플로레스 펠리페 2세 카를로스 1세 로시오 주라도 그레고리오 마라뇬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디에고 벨라스케스 이사벨 판토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미겔 데 우나무노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비센테 페레르 카밀로 호세 셀라 페드로 두케 다니 페드로사 파우 가솔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다비드 비스발 라파엘 나달 카마롱 데 라 이슬라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산티아고 카리요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페드로 알모도바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미겔 에르난데스 후안 마누엘 세라 로페 데 베가 엘 그레코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호아킨 사비나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앙헬 니에토 마누엘 아사냐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조르디 푸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알레한드로 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르난 코르테스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카를로스 사인츠 파퀴리 텔모 사라 몽세라 카바예 마누엘 데 파야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이삭 페랄 플라시도 도밍고 미겔 길라 루이스 부뉴엘 엘 코르도베스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프란시스코 피사로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라울 곤살레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아만시오 오르테가 마놀레테 에두아르도 칠리다 페란 아드리아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호아킨 로드리고 에밀리오 보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프란시스코 헨토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세바 바예스테레스 이삭 알베니스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카르멘 아마야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마누엘 산타나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자코네로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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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이(e, y)'는 띄어 쓰도록 하고 있다.[2] 출처[3] 정확히는 Capitan General[4] 해당 계급은 전통적으로 스페인 국왕이 겸했고 지금은 서방권의 원수와 동격 대접을 받는다. 물론, 이전에도 국왕이 아닌 원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프랑코 시절에도 프랑코는 공신들에게 이런 원수 자리를 대체로 사후 추서나 명예직 형식으로 뿌렸다. 특이한 것은 스페인군은 의외로 계급디플레가 심했던 군대라 제2공화국 시기에는 소장이나 그냥 장군(공화진영 한정)이 최선임이었고 내전이 끝나고 겨우 중장직이 원수 빼고 최선임이었다.[5] 물론 사망 당시 시점에서는 같은 해에 사망한 장제스에 이어 세계 2위였으며, 2007년 1월 22일에 오마르 봉고가 프랑코의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는 피델 카스트로, 장제스, 김일성, 엔베르 호자에 이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장기집권한 독재자였다. 참고로 프랑코는 48년 동안 항상 장기집권 독재자 Top 10 안에 들었으나, 2023년 5월 22일에 콩고 공화국드니 사수 응게소가 프랑코의 기록을 추월하여 프랑코는 최장기 집권 독재자 11위로 밀려났다.[6] 중남미 사람들은 부, 모계의 직계 성만 붙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7] 참고로 스페인 내전 직전 스페인 인구의 대략 3분의 1은 매우 독실한 가톨릭, 1/3은 별로 독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가톨릭, 나머지 1/3은 격렬한 반교회주의자 정도로 나눌수 있다. 사실 이 비율은 지금도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8] 이 사람도 따지고 보면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좌익 세력에 대한 온건파였다.[9] 정치적으로 극우 성향의 서구권 전통 가톨릭 신자들이 취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를 현대주의의 오류라든지 사탄의 작품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10] 한국 돈으로 약 76억 원 정도다.[11] 내전 종결 후 스페인에서는 23-F를 빼면 유의미한 쿠데타가 없었다.[12] 비교하자면 로버트 무가베는 독재자가 되기 이전에는 짐바브웨 가난한 농촌 출신인데 어퍼머티브 액션 따위 없이 남아공의 명문대에 합격한 수재였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에리트레아 독립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덕망 높은 명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장악한 짐바브웨나 에리트레아의 경우 개발독재를 하지 않아도 외부에서 돈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개발독재조차 할 수 없는 지나치게 열악한 상황이었다. 프랑코의 스페인이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영국이나 네덜란드, 스웨덴 등의 관광객을 상당수 유치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짐바브웨나 에리트레아는 주변국들도 상황이 엉망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13] 프랑코에게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었던 바스크,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이었던 반면 프랑코에 우호적이었던 (가톨릭 사제들과 기존 지주층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지방들은 상당수가 매우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프랑코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방들을 반드시 개발시켜서 바스크나 카탈루냐 지방과 비슷한 수준으로 경제 격차를 줄여야만 했다. 반면 이웃 포르투갈의 개발 독재자 살라자르의 경우 아직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포르투갈 본토에서 바스크 지방이나 카탈루냐 지방처럼 분리주의 운동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이런 문제가 없었다.[14] 프랑코 정권의 공식 사관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극우 성향의 역사학자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그의 저작, Nueva y definitiva historia de la guerra civil (1986)에서 마드리드 방어전 당시 두루티 휘하 아나키스트 CNT가 참 열정적으로 싸운다고 호평한 뒤, "그러나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분투는 아나키즘 자체가 현대 사회의 정신병적 현상이란 점을 고려하면 설명하기 힘든 미스테리한 일이다"라는 논평을 남겼다.[15] 아나키스트들은 자기들이 사는 도시를 지키는데는 분명 유능했지만 이들의 군사적 행적은 한계 역시 뚜렷했다. 우선 잘 모르는 평지에서의 싸움에 약했고, 정부와 규율을 싫어하는 특성상 의용군 체제에 집착했다. 이 점 때문에 통일된 규율을 강조한 공산당과 중도공화주의자들에게 논쟁에서 밀리고 군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해서 정치적으로도 밀렸다. 조직력 떨어지는 의용군이 좋다면 하다못해 게릴라전을 했으면 나았을텐데 정작 그러지도 못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16] 현대 같은 경우 예를 들자면 중남미 상류층은 자녀들을 대부분 영미권 대학에 보내는게 일반적이지만, 프랑코 정권 치하 학계의 단절 이전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스페인 자체의 학문적 경쟁력도 있고, 다른 언어권간 제도 통합도 현격하게 부족했던 시절엔 중남미 엘리트들은 여전히 살라망카, 마드리드, 코임브라 같은 옛 식민 모국 유수의 대학에서 교육 받는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스페인/포르투갈과 구 식민지 국가들간의 유대감은 오히려 21세기 현대 와선 영미권 헤게모니의 부상으로 오히려 이 시대보다 약해진 경향이 있다.[17] 이 사람은 카라방첼 감옥 수감 중에서 한국로 치면 수능 비슷한 A-Level를 취득하기도 하며, 본인 인터뷰에서 자신은 영국인이라 감옥에서도 다른 스페인인 수감자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부끄럽다고 할 만큼 당국자들이 자신을 터치하지 못했다고 했다. 석방 이후 이 사람은 영국으로 귀환, CNT 계열 스페인 반체제 인사들 비호 활동에 주력하다가 현대에도 명망 있는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살다 2020년 가을 자연사했다.[18] 유튜브에도 동영상이 올라와 있는 프랑코가 죽은지 고작 2년 뒤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열린 CNT 총 대회만 해도 300,000명의 군중이 집결하며 이들이 40년 동안 활동가 수 만명을 잃으며 철저하게 탄압 받았던 지하 조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동원력과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정권 말기로 가면 갈수록 체제 유지와 반대파 탄압 능력 자체가 서슬퍼렀던 40년대와 달리 녹이 슬어버렸던 프랑코 정권의 말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좌익도 현대 들어서는 예전 20세기 초중반 국제 좌파의 전성기 CNT의 경우 정규 노조원 백만, 방계조직 이백만 운운하던 시절만큼의 대중 장악력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이건 서방 사회 전반의 트렌드에 가깝지 프랑코 정권의 억압성과 한계 같은 '스페인의 특수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19] 사실 스페인의 민주화를 촉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위상 덕분에 진보/공화파 세력들조차 2000년대까진 입헌군주제를 공화정으로 복고시키자는 말은 섣불리 내뱉지 못했으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2010년대 들어 노망이 났는지 각종 스캔들로 구설수에 오르며 꾸준한 삽질을 하는 바람에 2014년엔 아예 왕위에서 퇴위까지 했기에 스페인에선 공화정으로 돌아가자는 여론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20] 대표적으로 스페인은 남미쪽과 교역을 트고 있었는데 영국은 남미쪽의 물자가 독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해상봉쇄를 했지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미국은 석유 수출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스페인에서 돈 되는 대표적인 광물자원이 텅스텐인데 독일은 이 텅스텐의 최대 고객이었고 영미는 이를 불편해하여 스페인에 독일로의 텅스텐 수출을 막도록 압력을 가했다. 물론,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대신 텅스텐을 사주는 당근도 뿌리기는 했다. 다만, 당시 스페인의 국경 통제가 엉망이라 스페인이 막상 텅스텐 수출을 줄이려고 했어도 독일은 밀수를 통해 텅스텐을 수입하기도 했다.[21] 의외로 핵실험 직전까지 갔다.[22] 그렇다고 아예 손을 땐 건 아니고 부하들이 대체할 수 없는 국가원수 겸 독재자로서 정치적인 역할은 여전히 수행했다.[23] 우리가 생각하는 땅을 파고 흙을 덮는 무덤과는 살짝 다른데, 건물 바닥을 파긴 하지만 그 구덩이(광중) 자체에 아예 단단한 석벽들을 세워 석곽으로 만든 다음 관을 안장한 후에 관 길이만한 석판으로 잠궈 봉안하는 방식이다.[24] 프랑코 영묘는 일단 '명목상으로는 성당'이고 실제로 성당기능도 병행하고 있다.[25] SBS 보도에 따르면 프랑코 가문의 가족묘지라고 한다. 실제로는 작은 예배당 안에 관을 안장하는 가족묘가 있으며 이 안에서 하관예식을 치르고 안장한다.[26] 스페인 현지에서는 2017년 카탈루냐 분리 독립 사태를 포함한 중대한 정치적 위기 때마다 언론에서는 몽클로아 협약이 체결된 '78년 체제' (sistema de '78)의 위기'라는 식으로 말한다.[27] 다만 수아레스 전 수상은 유년 시절이던 프랑코 정권 초반기에 가족이 공화파였다는 이유로 프랑코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28] 다만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로 카스트로와 프랑코 개인간의 관계는 친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미묘한 적에 대한 존경심, 기사도적 라이벌 의식이 섞여있는 관계였다. 당장 프랑코는 갈리시아 현지, 카스트로는 갈리시아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문화적, 지역적 연고가 있고, 둘 다 무력으로 국가권력을 정복한 쿠데타/혁명가였고, 따라서 어리석은 지식인들에 대한 혐오'란 대목에서 일정부분 공감을 했던 모양이다.[29] 이 글에는 안 나왔지만 스페인 시골집에는 프랑코의 사진을 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30] 하지만 멀티에서는 더미 데이터로만 존재했으며 리마스터 컬렉션에서 플레이어블 국가가 되었는데 영국의 장갑, 독일의 화력에 보병 이동속도 보너스가 있다. 이렇게 3종의 버프가 있는 연합국은 스페인이 유일하다.[31] 직업은 흉부외과 전문의로, 스페인 최초로 심장 이식 수술을 집도하였다.[32] 정부에서 설립한 '국가'재단이 아니라 유족들 멋대로 갖다붙인 '국민'재단이다. 그러나 재단 성립 당시 정권의 주요 공문서를 프랑코 가족의 개인 소유물이랍시고 싸들고 가거나, 스페인 정부 내 프랑코 추종자들이 연루되는 등 정치권과도 종종 나쁜 방향으로 엮인다.[33] 항렬로 볼때 후안 카를로스가 알폰소 13세의 3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아들이고, 루이스 알폰소의 아버지인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폰소 데 보르본이 차남인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의 아들이어서 항렬이 알폰소가 더 높지만, 이미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1975년 후안 카를로스가 왕위에 올라서 결국 왕이 되지 못했다. 또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알폰소 13세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인데, 반면에 후안의 형인 하이메는 본인의 청각장애 때문에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귀천상혼을 해서(알폰소 13세의 허락이 있었다) 하이메의 아들인 알폰소에게는 스페인 왕위계승권이 아예 없었다. 또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 국왕이 프랑스 국왕을 겸하는 것도, 그 반대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이던 하이메는 스페인 국왕에 오를 수 없었다.[34] 다만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왕정 폐지 이후에는 보통 파리 백작이라 칭함 :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방계. 루이 필리프 1세의 후손이다. 부르봉 가문 직계가 샹보르 백작 앙리를 끝으로 끊겼기에 오를레앙 가문에게 수장이 가야 하는게 맞지만,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봉 본가가 척을 져서 완전히 인정 받고 있지는 못하다.)에선 당연히 루이스 알폰소를 카페 왕조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35] 임호준 (2018), 카탈루냐 분리독립 운동에 대한 한국 미디어의 편향된 인식, 이베로아메리카硏究, 29:2, 55-82[36] 실제로 이 소문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도 자기 말 잘 안 듣는 프랑코가 유대인이 아닌지 의심한 바가 있다고 한다.[37] 참고로 프랑코는 1920년대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940년대부터 다시 그림 그리기를 재개했다.[38] 밑의 프랑코 얼굴이 담긴 그림도 프랑코 본인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다.[39] 처음에는 가로테에 의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국제적인 항의로 감형된 것이다.[40] 다만 이와 관련한 법을 따로 제정했다는 말은 없다.[41] 이와 관련하여 2013년 논문이 작성된 바가 있다. # 여기서는 적도 기니를 '스페인의 사유지'로 바라본 (방임주의 비스무리한 것으로 보이는) 식민주의 전략 유지와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의 역사적 무관심, 국가로부터 검열받을 것을 우려한 스페인 언론인, 편집자들의 자기 검열이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또 응게마가 1973년 이후로 지독한 쇄국 정책을 벌여 적도 기니의 새 소식을 입수하는 것이 극히 어려웠던 것도 적도 기니에 대한 보도 감소에 한몫했다.[42] 로버트 무가베의 악행이 유명해진 게 과거 짐바브웨를 식민지배하던 영국 언론들의 적극적인 보도의 역할이 컸던 것과 대조적이다.[43] 실제로 응게마 축출 이전 한국 언론에서 당시 적도 기니의 참상에 대해 다룬 기사는 단 두 개밖에 없을 정도다. 물론 인구 1/3~1/2가 망명을 갔기에 적도 기니의 참상은 이전에도 알음알음 알려지고 있었다.[44] 다만 노령에 접어들고 나서는 살이 쪽 빠졌다.[45] 프랑코 : 13,382일, 후안 카를로스 : 13,383일